한글을 창제하자마자 외래어 표기법을 정리하고자 했던 세종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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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 대왕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국의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음운서를 편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1448년 반포된 한국 최초의 음운서가 바로 《동국정운(東國正韻)》이다. 동국, 즉 한국의 바른 운을 제시한다는 뜻에서 이름이 지어졌다.

어떤 이는 이 《동국정운》의 편찬을 두고 결국 훈민정음은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창제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한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의 음운학에 조예가 깊던 세종 대왕은 당시 조선에서 쓰이던 한자음에 많은 혼란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연구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신숙주가 쓴 《동국정운》 서문의 일부를 보자(원문: http://cc.kangwon.ac.kr/~sulb/kl-data/dongguk.htm).

대저 음 자체에 異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같음과 다름이 있는 것이며, 사람 그 자체에 異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異同이 있는 것이니 대개 지세가 다르면 기후가 다르며, 기후가 다르면 사람들이 숨쉬는 것(발음)이 다르니, 동쪽과 남쪽 사람은 齒音과 脣音을 많이 쓰며, 서쪽과 북쪽 사람은 목소리(喉音)를 많이 쓰는 것이 곧 이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온 세상의 문물 제도를 (중국의 제도처럼) 통일시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성음은 같지 않은 것이다.
하물며 우리 나라는 안팎으로 산하가 저절로 한 구획을 이루어 지리와 기후 조선이 이미 중국과 다르니, 어음의 발음이 어찌 중국어의 어음과 서로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즉, 어음이 중국과 다른 까닭은 당연한 이치이거니와 한자음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중국의 본토 字音과 부합되어야 하는데, 발음하고 발음하는 사이에 성모와 운모의 기틀이 또한 반드시 저절로 어음에 끌리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한자음이 역시 따라서 변한 까닭인 것이다. 비록 그 음은 변하더라도 청탁이나 사성은 옛과 같을 수 있을 것이나, 일찍이 책을 지어 그 바른 것을 전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리석은 스승이나 일반 선비들이 반절법도 모르고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몰라서, 혹은 글자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음으로 하고, 혹은 앞 시대에 임금의 휘자 같은 것을 피하던 것으로 해서 다른 음을 빌며, 혹은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로 하고,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며, 혹은 다른 글자를 빌고 혹은 점이나 획을 더하거나 덜며, 혹은 중국 본토음을 따르고 혹은 우리 나라 음을 따라서 자모와 발음, 청탁,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까지 한국에서 쓰이던 한자음에 대해서는 이두나 향찰 같은 차자 표기나 지명, 인명 등의 한자 표기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국정운》 서문을 보면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표음 문자가 없고 그렇다할 한국식 운서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국정운》을 편찬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외래어 표기법을 마련한 것이다. 세종 대왕이 한자음 표준화에 대해 세운 기본 방침을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 속습을 채집하고 널리 전적을 상고하여 널리 쓰는 음을 근본으로 삼고, 古韻의 반절에도 맞도록 하며, 자모 칠음 청탁 사 성등에 걸쳐 그 본말을 밝히지 않음이 없도록 해서 그 올바른 것을 회복하라고 명령하시었다.

즉 당시 민간에서 널리 쓰이던 발음도 고려하되 중국의 음운학에 따른 음운 체계도 규칙적으로 반영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정해진 한자음을 동국정운식 한자음이라고 하는데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초기 한글 문헌의 주음에 사용되었지만 너무 중국의 음운학 체계에 맞추려 한 나머지 당시 쓰이던 현실 한자음과는 동떨어진 표기가 되었다. 그래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쓰이지 않게 되고 16세기부터는 현실 한자음에 따른 표기가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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