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마다 다른 음운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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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를 논하려면 음운 체계가 무엇인지, 음소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전에 표기위키: 외국어의 한글 표기에 “언어마다 다른 음운 체계“라는 제목으로 썼던 것을 원문 그대로 옮겨왔다.


외국어의 한글 표기가 통일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한국어 화자 세 명에게 낯선 언어로 된 이름을 들려주고 원 발음에 가까이 한글로 적으라고 하면 세 명 모두 다르게 적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언어마다 음운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는 매우 다양하다. 성대의 진동을 조절하고, 목젖, 혀, 입술 등을 움직여 다양한 발음이 나온다. 이 사실을 의사 전달을 위해 활용한 것이 바로 음성 언어이다. 우리가 쓰는 말은 문장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더 분석하면 단어라는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를 더 분석하면 자음이나 모음과 같은 분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미 구별에 사용되는 분절음을 음소라고 하는데, 인간의 음성 언어를 분석하면 보통 수십 개의 음소가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어의 음운 체계

예를 들어 한국어의 단어 ‘하늘’은 우리가 ‘ㅎ’으로 적는 자음 음소, ‘ㅏ’로 적는 모음 음소, ‘ㄴ’으로 적는 자음 음소, ‘ㅡ’로 적는 모음 음소, ‘ㄹ’로 적는 자음 음소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어의 한글은 비교적 기호 하나와 음소 하나와의 대응이 잘 되어 있어서 이처럼 ‘하늘’이라는 단어가 ‘ㅎ+ㅏ+ㄴ+ㅡ+ㄹ’로 분석된다는 것을 알아보기 쉽게 나타내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어의 자음 음소는 한글 낱소리 자모인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ㅆ, ㅉ’ 이렇게 19개라고 이해하면 된다. 모음 음소는 사정이 조금 더 복잡한데 표준 발음법에 따르면 ‘ㅏ, ㅐ, ㅓ, ㅔ, ㅗ, ㅚ, ㅜ, ㅟ, ㅡ, ㅣ’를 모두 구별하여 단순모음으로 발음할 수도 있고, ‘ㅚ’와 ‘ㅟ’는 이중모음으로 발음할 수도 있으니 단순모음 음소가 최대 10개 혹은 최소 8개가 될 수 있고, 나머지 이중모음들은 ‘ㅗ/ㅜ’ 반모음([w]) 계열인 ‘ㅘ, ㅙ, ㅝ, ㅞ/(ㅚ), (ㅟ)’, ‘ㅣ’ 반모음([j]) 계열인 ‘ㅑ, ㅒ, ㅕ, ㅖ, ㅛ, ㅠ’, ‘ㅡ’ 반모음 계열인 ‘ㅢ’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표준 발음법에 따르면 한국어의 음소는 자음 음소 19개, 단순모음 음소 10개 또는 8개(‘ㅚ’, ‘ㅟ’를 단순모음으로 발음하냐에 따라서), 반모음 3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ㅐ’와 ‘ㅔ’를 구별해서 발음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방언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한국어가 대략 30여 개의 음소만을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은 수긍이 갈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발음할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는 소리 30여 개를 일종의 기호 체계로 사용해서 ‘ㅎ+ㅏ+ㄴ+ㅡ+ㄹ’이 ‘하늘’이라는 단어가 되는 식으로 조합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한국어이다. 이와 같이 개별 언어에서 쓰이는 음소들 상호간의 관계를 그 언어의 음운 체계라고 한다.

한국어에서 쓰이는 음소 30여 개는 아무렇게나 나열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해서 쓰인다. ‘ㅎ+ㅏ+ㄴ+ㅡ+ㄹ’은 한국어에서 쓰이는 배열이지만 ‘ㅎ+ㄹ+ㄴ+ㅡ+ㅏ’는 한국어 음운 체계에서 허용되지 않는 배열이다. 그에 반해 ‘ㅎ+ㅡ+ㄴ+ㅏ+ㄹ’ 즉 ‘흐날’은 당장 의미가 있는 말로 보이지는 않지만 한국어에서 충분히 단어로 쓰일 수 있고, 한국어 원어민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발음할 수 있는 조합이다. 이와 같이 음소가 어떻게 배열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규칙의 연구를 음소 배열론이라고 한다. 이런 규칙도 그 언어의 음운 체계의 일부이다.

한국어의 원어민들은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완전히 내재화했기 때문에 언어의 음성에 관련된 모든 것은 보통 인식도 하지 못한채 이 음운 체계를 통해서 풀이한다. 이것은 물론 한국어의 원어민들만이 아니라 모든 언어의 원어민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말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발음만을 하고 익숙하지 않은 발음을 들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틀에 집어넣어 해석한다.

홍길동, 로빈후드와 만나다

한국어 원어민 홍길동씨가 영어 원어민 로빈후드씨를 만났다고 하자. 이들은 서로의 언어를 전혀 모른다. 그래도 손짓 발짓 써가며 의사 소통을 하려 하는데, 서로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하기로 한다. 홍길동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로빈후드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댄다. “홍길동.”

만약 한국어 원어민이 이를 들었다면 한국어의 음운 체계에 맞는 이름이므로 곧바로 /홍길똥/이라는 발음을 인식하고 한국인의 이름에 사용되는 글자에 대한 사전 지식을 통해 이 사람의 이름이 ‘홍길동’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빈후드의 모국어인 영어는 한국어와 음운 체계가 전혀 다르다. 학자에 따라 영어의 음소는 40여 개로 잡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한국어에는 없는 음이 많고 비슷한 것이 있더라도 조금씩 다르게 발음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배열 규칙도 한국어와 다르다. 따라서 로빈후드는 자신이 들은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어에서 허용되는 음소 조합으로 열심히 풀이한다. 영어의 음소는 기호로 나타내기가 까다롭지만 마치 영어로 ‘hong gill tong’이라고 적은 단어인 것처럼 받아들였다고 치자. 로빈후드가 한번 자신도 ‘홍길동’을 발음해본다. 그러면서 나오는 소리는 “hong gill tong”이다.

순간 당황하는 홍길동. 이 친구가 전혀 한국어같지 않은 발음으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가 듣기로는 ‘홍 기을 통’ 내지는 ‘헝 끼을 텅’ 가깝게 들린다.

여기서 잠깐 국제 음성 기호로 각 발음을 어떻게 적는지 비교해보자. 국제 음성 기호는 한 언어에 쓰이는 음소만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쓸 수 있는 모든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있기 때문에 여러 언어의 음을 비교하는데 유용하다. 홍길동의 원어민 발음은 [hoŋ gil t͈oŋ]으로 적을 수 있고, 로빈후드가 흉내낸 발음은 [hɔŋ gɪɫ tʰɔŋ]으로 적을 수 있다. 로빈후드는 한국어의 ‘ㅗ([o])’ 음소와 완전히 똑같은 영어 음소가 없어 [ɔ]으로 받아들였고, 영어의 음운 체계에 따라 연구개음화된 l 소리([ɫ])를 사용하였으며 [t]와 [tʰ]를 특별히 구별해서 쓰지 않는 영어의 음운 체계의 특징에 따라 원음의 [t]를 영어에서 그 위치에서 더 흔한 [tʰ]로 대체한 것이다. 쉽게 말해 ‘홍길동’을 영어화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홍길동에게는 전혀 다른 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홍길동의 로빈후드의 영어 이름인 Robin Hood를 들으면 한국어 음운 체계에 억지로 꿰어맞추고 발음하여 로빈후드가 듣기에는 완전히 다른 발음으로 될 것이 뻔하다. 만약 홍길동이 영어를 배운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벗어나서 영어의 음운 체계에 대한 훈련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Robin Hood의 원 발음을 꽤 가깝게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길동이 같은 한국어 화자인 임꺽정에게 로빈후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어제 Robin Hood라는 친구를 만났소.” 그러면서 Robin Hood를 원 영어 발음에 가깝게 하면 한국어 문장에 쓰기 꽤 어색할 것이다. 영어를 모르는 임꺽정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설령 홍길동이 Robin Hood의 정확한 영어 발음 흉내를 낼 수 있더라도 한국어 문장을 쓸 때에는 한국어의 음운 체계에 맞게 한국어화한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외래어 표기법은 이렇게 Robin Hood와 같은 외국어를 한국어화해서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한국어의 음소가 한글에 규칙적으로 대응되기 때문에 외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규칙은 곧 외국어를 한국어의 음운 체계에 받아들이기 위한 규칙이라 할 수 있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

일반인들이 한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가 한글이 세계 언어에서 사용되는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외국어를 매우 잘 구사하는 이들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언어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이 있는 것과 언어학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영어의 f, v 음이나 think의 th음, then의 th음 같은 음만 보더라도 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확연하다. 그런데도 f 음은 ‘ㅍ’로 적지 말고 ‘후’로 적으면 원 발음을 제대로 적을 수 있다며 외래어 표기법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외국어의 발음을 인식할 때 자신도 모르게 한국어의 음운 체계에 맞추어 인식하면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음소 대응, 즉 기점(起點) 언어인 외국어와 대상(對象) 언어인 한국어의 음소 대응 규칙과는 조금 다른 음소 대응이 더 가깝다고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의 귀를 믿지 말라. 음운 체계는 우리가 듣는 소리까지 결정한다.

우리의 귀는 모국어의 음운 체계에 맞추어 훈련된다. 한국어에서 ‘ㄱ’, ‘ㅋ’, ‘ㄲ’ 계열, ‘ㄷ’, ‘ㅌ’, ‘ㄸ’ 계열, ‘ㅂ’, ‘ㅍ’, ‘ㅃ’ 계열은 입김이 터져 나오는 기식(aspiration)의 정도와 성대에 힘을 주는 정도에 따라 예사소리, 거센소리, 된소리로 구별된다. 그러니 이런 구별을 하는데 귀가 훈련되어 있고 이런 구별에 의미가 없는 음성 구분은 무시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영어에서 g, k 계열, d, t 계열, b, p 계열은 성대가 진동하는 정도에 따라 유성음과 무성음으로 구별된다. 그러니 영어 원어민들의 귀는 이런 계열의 자음을 들을 때 유성음이냐 무성음이냐를 구별하는데만 훈련되어 있고, 한국어에서 필수인 기식의 정도나 성대에 힘을 주는 정도의 구분은 무시하게 된다. 이들은 한국어 단어 ‘고구마’의 첫째 ‘ㄱ’은 무성음 k 음으로, 둘째 ‘ㄱ’은 유성음 g 음으로 인식한다. ‘고구마’가 한국어의 매큔·라이샤워 표기 방식에서 koguma로 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어에서는 하나의 음소인 ‘ㄱ’이 영어에서는 여러 음소에 해당하는 것이다. 반면 영어의 k 음은 단어 첫머리에서 기식의 양이 많은 [kʰ] 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한국어 원어민에게는 ‘ㅋ’으로 인식된다. 그런가 하면 영어 단어 cocoa에서 첫째 k 음과 둘째 k 음(여기서는 k 음이 c로 적힌다)은 영어에서는 같은 음소이지만 발음에 따라 한국어 원어민에게는 각각 ‘ㅋ’, ‘ㄲ’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니 누구나 외국어를 새로 배울 때 자신의 틀린 발음과 올바른 발음의 차이점을 구별 못해 애를 먹는 것이다. 차이가 난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한국어의 음운 체계에만 익숙해 있어 외국어의 올바른 발음에 필요한 소리 구별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고구마’의 첫째 ‘ㄱ’과 둘째 ‘ㄱ’의 발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우리 귀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국제 음성 기호에 따른 발음 표시를 중요시하고 낯선 언어의 표기를 위해 그 언어의 음운 체계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외국어 발음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우리 귀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표기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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