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 누리집에서는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될 때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한글 표기도 같이 발표하고 있는데 수요일에 발표된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 두 명 가운데 한 명인 프랑스인 화학자 Henri Boris Kagan의 한글 표기는 ‘카간, 앙리 보리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표기는 Kagan의 발음을 잘못 파악한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날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발표 때처럼 화학상 수상자도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의 총서기인 물리학자 엘렌 몬스(Ellen Moons)가 발표했다. 그는 스웨덴어로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Henri Kagan은 프랑스어식으로 [ɑ̃ʁi kaɡɑ̃] ‘앙리 카강’으로 발음했다. 몬스는 벨기에 출신으로 네덜란드어 모어 화자이지만 프랑스어도 구사한다(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둘 다 벨기에의 공용어이다).
이 소식을 전한 프랑스 보도 전문 채널 프랑스앵포(France Info)의 보도에서도 [ɑ̃ʁi kaɡɑ̃] ‘앙리 카강’이라는 발음을 썼다.
본인의 발음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외에도 프랑스어로 그의 이름을 발음한 동영상을 찾아보면 하나같이 Kagan을 [kaɡɑ̃] ‘카강’으로 발음한다. 프랑스의 건축가 Nathalie Régnier-Kagan도 자신의 이름을 [natali ʁeɲje-kaɡɑ̃] ‘나탈리 레니에카강’으로 발음한다.
Kagan은 유대인 성씨이다. 히브리어로 ‘제사장’을 뜻하는 כוהן kohen ‘코헨’에서 유래했고 러시아어 등 동슬라브어의 영향을 받은 형태이다. 러시아어로는 Каган(Kagan) ‘카간’이다. 러시아어에서는 차용어에서 전통적으로 h를 г(g)로 옮겼는데 교회 슬라브어에서 г(g)를 마찰음 [ɣ]로 발음했기 때문이다(러시아 남부 방언에서도 이 자음을 마찰음으로 발음한다).
이 성씨는 다른 언어에 전해지면서 보통 각 언어에 현지화된 발음을 쓴다. 유대계 미국인인 미국 연방 대법관 엘레나 케이건(Elena Kagan [ə⟮ɛ⟯ˈleɪ̯nə ˈkeɪ̯ɡən])의 이름에서는 영어 성씨 Fagan [ˈfeɪ̯ɡən] ‘페이건’과 첫 자음만 다른 발음을 쓴다. 비슷한 예로 폴란드 지명 자간(Żagań)의 독일어 형태인 자간(Sagan [ˈzaːɡan])에서 유래한 성씨 Sagan도 미국의 유대계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ˈkɑːɹl ˈseɪ̯ɡən], 1934~1996)의 이름에서는 영어식으로 발음된다.
폴란드 귀족 성씨로서 Sagan은 프랑스어에도 전해졌는데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 [fʁɑ̃swaz saɡɑ̃], 1935~2004)은 이를 필명으로 골랐다. 프랑스어 고유 어휘에서는 어말 -an이 보통 비음화된 모음 [ɑ̃] ‘앙’으로 발음된다. Morgan [mɔʁɡɑ̃] ‘모르강’, Vigan [viɡɑ̃] ‘비강’ 등의 이름에서 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어에서도 차용어에서는 원어 발음을 의식하여 어말 -an을 [an] ‘안’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축구 선수 킬리안 음바페(Kylian Mbappé [kiljan (ə)mbape])의 이름이나 프랑스 농구 선수 에반 푸르니에(Evan Fournier [evan fuʁnje])의 이름, 프랑스 가수 장자크 골드만(Jean-Jacque Goldman [ʒɑ̃-ʒak ɡɔldman])의 성씨 등에서 이를 볼 수 있다.
기존 표기 용례를 보면 차용어의 프랑스어 발음을 잘못 파악하고 정한 것들이 간혹 있다.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의 총리를 역임한 정치가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 [ʁɔbɛʁ ʃuman], 1886~1963)은 적어도 오늘날에는 성씨가 독일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고려하여 프랑스어로 [ʃuman] ‘슈만’으로 발음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쉬망’으로 실려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어 고유 어휘에서 어말의 -on은 보통 비음화된 모음 [ɔ̃] ‘옹’으로 발음되지만 차용어에서는 [ɔn] ‘온’으로 발음될 수 있는데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크손(Henri Bergson [ɑ̃ʁi bɛʁksɔn], 1859~1941)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베르그송’으로 실려 있다.
여담으로 프랑스어 고유 어휘에서는 -ien, -ouen 같이 모음을 따르는 조합을 제외하면 어말에 -en이 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Le Pen [lə-pɛn] ‘르펜’, Suffren [syfʁεn] ‘쉬프렌’ 등 en으로 끝나는 이름에서는 거의 언제나 [ɛn] ‘엔’으로 발음한다. Butten [bytə⟮ɛ⟯n] ‘뷔텐’, Diesen [dizə⟮ɛ⟯n] ‘디젠’ 같은 게르만어식 이름에서는 [ən]으로 발음하기도 하지만 [ɛn]도 가능하므로 한글 표기는 ‘엔’으로 통일하는 것이 무난하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 어말 -n을 [n]으로 발음하는 이름을 살펴보면 Kylian, Evan처럼 영어식 이름으로 인식되는 것이나 -man, -son 등으로 끝나서 게르만어식 이름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Kagan은 영어나 기타 게르만어식 이름으로 취급되지 않고 비음화된 모음을 써서 발음되는 듯하다. 프랑스어 고유 어휘에서 잘 쓰지 않는 자모 k가 들어갔는데도 말이다.
이번에 Kagan의 한글 표기를 ‘카간’으로 정한 것은 기존 표기 용례에서 어말 -an이 무조건 [ɑ̃]으로 발음된다고 생각하고 실제 [an]으로 발음되는데도 ‘앙’으로 적었던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이름에서는 [ɑ̃]이 올바른 발음으로 보인다. Kagan의 프랑스어 발음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려우니 국립국어원을 탓할 수는 없지만 본인 발음이 확인되는 대로 표준 한글 표기를 ‘카간’에서 ‘카강’으로 수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