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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발레라고 하면 여성 무용수인 발레리나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무도회에서 유래하여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 궁중에서 전문 무용수를 앞세운 공연 예술로 자리잡은 초창기 발레는 남성 무용수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에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유럽을 휩쓴 낭만주의 사조 아래 요정을 비롯한 초자연적인 존재를 연기하는 여성 무용수가 전면에 등장하였고 이들은 바람에 떠다니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으로 관객을 매혹시켰다. 인기 높은 몇몇 발레리나는 흥행을 보장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시기의 낭만주의 발레는 흔히 1845년 7월 12일 런던에서 4인무 발레 《파드카트르(Pas de quatre [pa-də-katʁ])》가 초연되면서 정점을 찍었다고 말한다.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 네 명이 런던 웨스트엔드에 있는 여왕 폐하의 극장(Her Majesty’s Theatre)에서 한 무대에 오른 것이다.
여왕 폐하의 극장 기획자 벤저민 럼리(Benjamin Lumley [ˈbɛnʤəmᵻn ˈlʌmli], 1811~1875)의 원래 구상은 발끝으로 서는 푸앵트(pointe [pwɛ̃t]) 기술을 선보이면서 낭만주의 발레의 시대를 연 주인공인 이탈리아의 마리 탈리오니(Marie Taglioni, 1804~1884)와 역시 이탈리아 출신인 판니 체리토(Fanny Cerrito, 1817~1909)와 카를로타 그리시(Carlotta Grisi, 1819~1899)를 비롯하여 오스트리아의 파니 엘슬러(Fanny Elßler [ˈfani ˈɛlslɐ], 1810~1884) 등 당대 최고의 스타 4인방을 모두 초청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엘슬러는 출연 제안을 거절하였고 나름 인기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덴마크의 뤼실 그란(Lucile Grahn, 1819~1907)이 그 대신 나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단순히 탈리오니와 체리토, 그리시, 그란은 이미 런던에 있었고 엘슬러는 이미 다른 곳에 일정이 잡혔기 때문에 라인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7월 12일 저녁, 숨막힐 정도로 꽉 찬 여왕 폐하의 극장에서 이들 발레리나 네 명이 손에 손잡고 무대에 등장해 인사하자 관객의 박수와 함성이 극장이 떠나가라 울려퍼졌다. 이탈리아의 체사레 푸니(Cesare Pugni, 1802~1870)의 음악, 프랑스의 쥘 페로(Jules Perrot [ʒyl pɛʁo], 1810~1892)의 안무에 맞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개막 4인무 이후 각 발레리나에 맞추어 준비한 솔로 변주가 뒤를 이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그란이 먼저 나섰고 나이 순으로 그리시와 체리토, 탈리오니가 각각의 독무를 선보였으며 중간중간에는 탈리오니와 그란의 쌍무, 체리토와 그리시의 쌍무가 무대를 장식했다. 이윽고 발레리나 네 명이 다시 다 함께 추는 4인무로 피날레를 맺었다. 마침내 동작을 멈추고 마지막 포즈를 취한 발레리나들은 꽃다발 세례와 관중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더 타임스(The Times)》지는 ‘예전에 그런 무용은 있은 적이 없으니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르프시코레(무용의 뮤즈)의 상연이었다(Never was such a pas before, it was the greatest Terpsichorean exhibition that ever was known in Europe)’라고 극찬했다.
《파 드 카트르》는 모두 네 차례 공연되었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도 7월 17일의 세번째 공연을 관람하였다. 그 후 발레리나 네 명은 다시 같은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자존심 강하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스타 네 명이 함께 춤을 추도록 설득한 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준비 과정에서 안무와 의상 하나하나를 가지고도 수많은 다툼이 있었으며 초연 당일까지도 독무 순서를 가지고 체리토와 그리시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나 공연이 무산될 뻔한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결국 나이 순으로 정해서 공연이 겨우 성사되었다.
앞에서 탈리오니의 이름인 Marie를 ‘마리’로, 그란의 이름인 Lucile을 ‘뤼실’로 적은 것은 외래어 표기법의 이탈리아어 표기 규정이나 덴마크어 표기 규정을 적용한 결과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따른다면 각각 ‘마리에’, ‘루실레’ 정도로 적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Marie는 이탈리아어식 이름이 아니고 Lucile도 덴마크어식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표기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Marie Taglioni는 외래어 표기법의 이탈리아어 표기 규정을 따르면 ‘마리에 탈리오니’로 적어야 하지만 이탈리아어로는 [maˈri taʎˈʎoni]로 발음된다. ‘마리 탈리오니’로 적는 것이 이에 더 가깝다. Marie는 이탈리아어의 Maria [maˈria] ‘마리아’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식 이름으로 이탈리아어에서도 프랑스어 [maʁi] ‘마리’를 흉내낸 발음을 쓰기 때문이다. 사실 이탈리아어로는 이탈리아식 이름을 써서 Maria Taglioni ‘마리아 탈리오니’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탈리오니는 스웨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탈리아인 안무가, 어머니는 스웨덴인 무용가였다. Marie에 외래어 표기법의 스웨덴어 표기 규정을 적용하면 ‘마리에’이지만 스웨덴어에서도 Marie는 프랑스어 발음을 흉내내어 [maˈriː] ‘마리’로 발음한다.
반면 노르웨이어에서는 Marie를 보통 [mɑˈriːə] ‘마리에’로 발음한다(제2성조를 쓰므로 [mɑˈrîːə]로 나타낼 수 있지만 편의상 이 글에서는 성조 표기를 생략한다). 덴마크어에서도 Marie의 전통 발음은 [mɑˈʁiːˀə] ‘마리에’이다. 공교롭게도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스웨덴어와 달리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의 ie를 ‘이’로 적도록 하기 때문에 규정을 문자 그대로 따르면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 Marie는 ‘마리’로 적어야 한다.
프랑스어 여자 이름 Caroline [kaʁɔlin] ‘카롤린’, Hélène [elɛn] ‘엘렌’, Sophie [sɔfi] ‘소피’ 등에 해당하는 스웨덴어 이름 Caroline, Helene, Sophie에 스웨덴어 표기 규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카롤리네’, ‘헬레네’, ‘솝히에’이지만(융통성을 좀 발휘하면 Sophie는 ‘소피에’로 쓸 수 있다) 스웨덴어에서 쓰이는 실제 발음은 보통 Caroline [karɔˈliːn] ‘카롤린’, Helene [heˈleːn] ‘헬렌’, Sophie [sɔˈfiː] ‘소피’이다. 즉 스웨덴어에서 이런 이름의 발음은 프랑스어를 흉내낸다.
한편 독일어에서는 Caroline [kaʁoˈliːnə] ‘카롤리네’, Helene [heˈleːnə] ‘헬레네’, Sophie [zoˈfiː] ‘조피’로 보통 발음한다. 어말의 e는 대체로 [ə]로 발음하지만 -ie는 그냥 [iː]로 발음하는 것이 보통이다. Marie도 독일어에서는 [maˈʁiː] ‘마리’로 발음한다. 중세 고지 독일어의 이중 모음 ie [iə̯]는 현대 표준 독일어에서는 [iː]로 변했는데 마찬가지의 철자 ie가 이중 모음이 아니라 원래의 [iː] 뒤에 [ə]가 따르는 것을 나타냈던 경우에도 [ə]가 탈락하여 결과적으로 똑같은 [iː]가 된 셈이다.
라틴어의 energia ‘에네르기아’, hysteria ‘히스테리아’, ideologia ‘이데올로기아’에 해당하는 독일어가 Energie [enɛʁˈɡiː] ‘에네르기’, Hysterie [hʏsteˈʁiː] ‘히스테리’, Ideologie [ideoloˈɡiː] ‘이데올로기’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라틴어의 어말 ia는 보통 독일어의 ie [iː]에 대응된다(현행 표기 규정에 따르면 독일어의 [ʏ]는 ‘위’로 적어야 하지만 철자 y가 [ʏ] 또는 [y(ː)]로 발음되는 것은 기존 표기 용례에서 ‘이’로 적는다).
하지만 라틴어 Sophia ‘소피아’에 해당하는 Sophie는 [zoˈfiːə] ‘조피에’로 발음되는 경우도 있으며 라틴어 Stephania ‘스테파니아’에 해당하는 Stephanie는 [ˈʃtɛfani] ‘슈테파니’ 외에 [ʃteˈfaːni̯ə] ‘슈테파니에’와 [ʃtefaˈniː] ‘슈테파니’가 혼용되는 등 독일어 어말 ie에서 e가 발음되기도 한다. 또 Amalie [aˈmaːli̯ə] ‘아말리에’, Cecilie [ʦeˈʦiːli̯ə] ‘체칠리에’, Julie [ˈjuːli̯ə] ‘율리에’에서는 ie의 전 음절에 강세가 주어지면서 [i̯ə]로 발음된다.
오늘날의 프랑스어에서는 Sophie [sɔfi] ‘소피’, Stéphanie [stefani] ‘스테파니’, Amélie [ameli] ‘아멜리’, Julie [ʒyli] ‘쥘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어말의 ie에서 e가 언제나 묵음이다(라틴어 Caecilia ‘카이킬리아/체칠리아’ 및 독일어 Cecilie ‘체칠리에’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이름은 Cécile [sesil] ‘세실’이다). 하지만 오래된 노래를 부를 때 쓰는 예스러운 발음에서는 모음 뒤에서도 e [ə]를 쓴다. 라틴어 patria ‘파트리아’에서 유래하여 ‘조국’을 뜻하는 프랑스어 patrie는 [patʁi] ‘파트리’로 발음되지만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la maʁsɛjɛz])》의 첫마디인 Allons enfants de la Patrie에서는 가락에 맞게 보통 [patʁiə] ‘파트리으’로 발음한다(정말 예스러운 발음에서는 [ʁ] 대신 [r]를 써서 [patriə]가 된다).
노르웨이어와 전통 덴마크어 발음에서는 독일어처럼 Caroline ‘카롤리네’와 Helene ‘헬레네’의 어말 e를 [ə]로 발음하는 것은 물론 독일어와 달리 Marie ‘마리에’와 Sophie ‘소피에’에서조차 어말 e를 [ə]로 발음한다(노르웨이어 발음: [kɑrʊˈliːnə], [heˈleːnə], [mɑˈriːə], [sʊˈfiːə], 덴마크어 발음: [kɑ(ʁ)oˈliːnə], [heˈleːnə], [mɑˈʁiːˀə], [soˈfiːˀə]). 이것만 보면 외래어 표기법에서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의 ie는 ‘이’로 적고 스웨덴어의 ie는 ‘이에’로 적도록 한 것은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Nielsen ‘닐센’, 노르웨이어 Grieg ‘그리그’, 덴마크어 Friedrich ‘프리드리크’에서 볼 수 있듯이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에서 ie가 [iː]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로 적도록 한 것인데 Marie ‘마리에’, Sophie ‘소피에’ 외에 Daniel ‘다니엘’ 같은 예외도 있기 때문에 단순히 철자만 가지고 발음을 예측할 수는 없다.
라틴어의 어말 a가 무강세 [ə]로 변하고 탈락하기까지 하여 철자상 e로 적게 된 변화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에서 일어났는데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도 여기에 포함된다.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의 부정사 즉 동사 원형을 보면 ‘마시다’를 뜻하는 drikke ‘드리케’, ‘듣다’를 뜻하는 høre ‘회레’, ‘자다’를 뜻하는 sove ‘소베’에서 볼 수 있듯이 e로 끝나는 것이 많은데 각각 고대 노르드어 drekka ‘드레카’ 또는 drikka ‘드리카’, heyra ‘헤위라’, sofa ‘소바’에서 유래했다. 스웨덴어에서는 고대 노르드어의 어말 a가 유지되어 dricka ‘드리카’, höra ‘회라’, sova ‘소바’로 쓴다.
대신 원래의 어말 a가 전반적으로 e가 된 덴마크어와 달리 노르웨이어에서는 원래의 어말 a가 보존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노르웨이어의 두 표준 문어 가운데 하나인 보크몰(bokmål)에서는 덴마크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사 원형 어말의 철자를 e로 통일하지만 다른 하나인 뉘노르스크(nynorsk)에서는 e 대신 a로 쓰는 것도 허용한다. 즉 뉘노르스크에서는 drikke ‘드리케’, høyre ‘회이레’, sove ‘소베’ 외에 drikka ‘드리카’, høyra ‘회이라’, sova ‘소바’도 쓰인다. 참고로 보크몰의 ø ‘외’에 대응되는 뉘노르스크의 이중 모음 øy [œy̯]는 현행 표기 규정을 따르면 ‘외위’로 적으므로 høyre ‘회위레’, høyra ‘회위라’로 각각 적어야 하지만 [œy̯]는 이철자 øi로도 쓰이며 독일어의 [ɔʏ̯]를 ‘오위’ 대신 ‘오이’로 적는 것처럼 원순 모음인 핵심부를 따르는 활음부의 원순성은 굳이 한글 표기에 반영할 필요가 없다고 봐서 여기서는 øy를 ‘외이’로 적었다.
뉘노르스크에서는 동사 원형 어말을 모두 e로 통일하거나 모두 a로 통일하기도 하지만 이른바 분리된 부정사(kløyvd infinitiv)라고 해서 일부 방언에서 쓰는 발음에 따라 어느 동사에서는 e로 쓰고 어느 동사에서는 a로 쓰는 방식도 있다. 특히 노르웨이 동부의 방언에서 원래의 고대 노르드어 형태에 따라 어말 발음이 달라지는 것을 반영한 철자법으로 이에 따르면 drikke와 høyre에서는 e를 쓰지만 sova에서는 a를 쓰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보크몰에서도 1938년부터 2005년까지 분리된 동사 원형에 따라 일부 동사의 어말을 a로 적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거의 쓰이지 않아 2005년에 다시 e로 통일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어쨌든 동사 원형뿐만이 아니라 명사, 형용사 등 여러 단어에서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에서는 예전의 어말 a가 e로 변한 것이 많은 반면 스웨덴어에서는 보통 어말 a를 그대로 쓰며 노르웨이어에서도 방언에 따라 어말 a가 혼용되는 경우가 있다. 스웨덴어 고유 어휘 가운데도 무강세 e로 끝나는 말이 있지만 보통 고대 노르드어의 어말 i에서 유래한 것이다. 북유럽 신화의 신 Loki ‘로키’가 스웨덴어에서는 Loke ‘로케’가 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에서도 고대 노르드어의 어말 i가 e로 변했기 때문에 이들 또한 Loke ‘로케’를 쓴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한 고유 어휘뿐만이 아니라 차용어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쓰는 화폐 단위는 krona ‘크로나’,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쓰이는 화폐 단위는 krone ‘크로네’인데 ‘왕관’을 뜻하기도 하는 이 말은 궁극적으로 라틴어 corona ‘코로나’에서 차용한 말이다. 다만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 형태는 저지 독일어 krone ‘크로네’를 거친 것으로 본다. 또 노르웨이어에서 krone의 한정 단수형은 krona ‘크로나’이며 뉘노르스크에서는 예전에 명사 원형(부정 단수형)도 krone 대신 krona를 쓰는 것을 허용했으나 2012년 개정 때 krone로 통일했다.
이처럼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에서 어말 a가 e로 변한 것은 적어도 전통 발음에서는 모음 뒤에서도 [ə]로 발음된다. 고대 노르드어 þegja ‘세기아’에서 유래하여 ‘침묵하다’를 뜻하는 tie는 노르웨이어로 [ˈtîːə] ‘티에’이고 덴마크어 전통 발음에서도 [ˈtiːə] ‘티에’이다. 참고로 스웨덴어로는 tiga [ˈtîːɡa] ‘티가’에 대응되는 말이다. Marie, Sophie에서도 어말 e가 발음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런데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현대 덴마크어 발음에서 어말 /ə/는 앞의 음에 동화되거나 흡수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tie는 이제 [ˈtiːi] ‘티이’ 정도로 발음된다(오늘날 덴마크어의 t가 [ʦʰ] 정도로 파찰음화하는 것은 논외로 한다).
따라서 라틴어 Maria ‘마리아’에서 유래한 덴마크어 Marie의 전통 발음은 [mɑˈʁiːˀə] ‘마리에’였지만 오늘날에는 [mɑˈʁiːˀi] ‘마리이’로 주로 발음된다. 라틴어 Sophia ‘소피아’에서 유래한 Sophie도 전통 발음 [soˈfiːˀə] ‘소피에’ 대신 [soˈfiːˀi] ‘소피이’ 정도의 발음이 일반적이다. 강세 없이 앞 음절과 동일한 모음이 반복되므로 각각 ‘마리’, ‘소피’ 정도로 들린다. 따라서 덴마크어에서는 Marie, Sophie 등의 어말 ie도 현행 규정에 따라 ‘이’로 처리하여 ‘마리’, ‘소피’와 같이 적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대신 노르웨이어의 Marie, Sophie는 현행 규정에 어긋나더라도 발음에 따라 ‘마리에’, ‘소피에’로 적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오늘날의 덴마크어 발음에서는 Caroline, Helene에서도 어말 /ə/가 탈락하여 [kʰɑoˈliːn] ‘카롤린’, [heˈleːn] ‘헬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통 발음은 각각 [kʰɑ(ʁ)oˈliːnə], [heˈleːnə]이므로 현행 규정에 따라 ‘카롤리네’, ‘헬레네’로 계속 적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대신 독일어에서와 마찬가지로 Amalie [aˈmæːˀljə] ‘아말리에’, Cecilie [seˈsiːˀljə] ‘세실리에’, Julie [ˈjuːˀljə] ‘율리에’에서는 강세 위치의 영향으로 어말 ie가 [jə] 또는 [ɪə]로 발음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이에’로 적는 것이 낫겠다. 참고로 노르웨이어에서도 이들은 Amalie [ɑˈmɑːliə] ‘아말리에’, Cecilie [seˈsiːliə] ‘세실리에’ Julie [ˈjʉːliə] ‘율리에’로 발음된다.
Lucile은 덴마크어에서 어떻게 발음할까? 철자대로 규칙적으로 발음된다면 덴마크어 전통 발음은 [luˈsiːlə] ‘루실레’, 어말 /ə/가 탈락한 신형 발음은 [luˈsiːl] ‘루실’ 정도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Lucile는 덴마크어에서 매우 드문 이름이다. 덴마크 통계청 웹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2026년 기준으로 덴마크에서 여성 열 네 명만이 Lucile를 이름(fornavn)으로 쓴다. 노르웨이 통계청 웹사이트에 의하면 현재 노르웨이에서 여성 여덟 명만이 Lucile를 이름으로 쓰며 그 가운데 네 명은 유일한 이름(eneste fornavn)으로 쓴다.
참고로 그란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노르웨이인, 어머니는 덴마크인이었다.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일부로서 덴마크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고 덴마크어를 공용어로 쓰다가 그란이 태어나기 5년 전인 1814년에 스웨덴으로 넘어갔다. 그란이 발레리나로 활동한 시기는 노르웨이어를 독자적인 문자 언어로 정립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아버지가 노르웨이인이었으니 Lucile의 원어를 노르웨이어로 보는 것도 고려할 수 있겠다.
그런데 출생 당시 그의 본명은 Lucina Alexia Grahn ‘루시나 알렉시아 그란’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Lucile은 후에 붙인 예명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덴마크의 유명한 안무가 아우구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 1805~1879)의 지도를 받다가 1836년에 덴마크를 영원히 떠났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같이 공연하였으며 런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밀라노 등 유럽 각지를 순회하였다.
부르농빌은 프랑스어로 [buʁnɔ̃vil]로 발음되는 성에서 볼 수 있듯이 발레 무용수, 후에 안무가로서 북유럽에서 활동한 프랑스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Bournonville은 덴마크어로 마치 burnångville로 적은 것처럼 [b̥uɐ̯nʌŋˈvilə] ‘부르농빌레’ 내지 [ə]가 흡수된 [b̥uɐ̯nʌŋˈvill̩] ‘부르농빌’로 발음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확인하기 어렵고 덴마크어의 철자와 발음 대응을 따르지 않으니 그냥 프랑스어 표기 규정을 적용하여 ‘부르농빌’로 적는 것이 무난하다.
당시 유럽 각지에 발레를 전파한 이들 가운데는 프랑스 출신이 많았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이자 안무가 마리우스 페티파(Мариус Петипа/Marius Petipa, 1818~1910)도 원래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으로 프랑스어 본명은 마리위스 프티파(Marius Petipa [maʁjys pətipa])였다.
발레 용어를 봐도 발레리나(ballerina), 발레리노(ballerino), 프리마는 발레의 발상지를 반영하여 이탈리아어에서 왔지만 pointe [pwɛ̃t] ‘푸앵트’, plié [plie] ‘플리에’, assemblé [asɑ̃ble] ‘아상블레’, entrechat [ɑ̃tʁəʃa] ‘앙트르샤’ 등 기술과 관련된 말은 거의 전부 프랑스어에서 왔다. 프랑스어로 ‘걸음’을 뜻하는 말에서 온 pas [pa] ‘파’는 발레의 스텝을 이르는 말로 쓰이며 빗대어서 발레 전체를 이르기도 하여 쌍무를 뜻하는 pas de deux [pa-də-dø] ‘파드되’, 3인무를 뜻하는 pas de trois [pa-də-tʁwa] ‘파드트루아’, 4인무를 뜻하는 pas de quatre [pa-də-katʁ] ‘파드카트르’에도 들어간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파드되’와 ‘파드트루아’를 각각 한 어절로 붙여 쓰므로 이 글에서 발레 제목으로 쓰인 Pas de quatre도 ‘파 드 카트르’ 대신 ‘파드카트르’도 붙여 썼다.
이탈리아의 탈리오니도 이탈리아어식 Maria 대신 프랑스어식 Marie라는 이름으로 국제 무대에 알려진 것을 보면 Lucile도 프랑스어식 예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Lucile은 프랑스어로 [lysil] ‘뤼실’로 발음되는 이름이다. 프랑스어에서 전해진 이름은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에서도 원어를 흉내내어 일반 철자와 발음 대응 규칙을 무시한 발음을 쓰는 경우가 많다. Bournonville 같은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프랑스어 여자 이름 Michelle [miʃɛl] ‘미셸’은 덴마크어로도 [miˈɕɛl] ‘미셸’, 노르웨이어로도 [mɪˈʂɛlː] ‘미셸’로 발음한다. 그런데 앞서 본 것처럼 Lucile은 오늘날 덴마크어나 노르웨이어에서 매우 드문 이름이기 때문에 발음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Lucile의 덴마크어나 노르웨이어 발음을 굳이 따지지 않고 프랑스어 발음에 따라 ‘뤼실’로 적기로 했다.
Fanny는 원래 영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영어에서는 [ˈfæni] ‘패니’로 발음된다. 영국의 작가 헨리 필딩(Henry Fielding [ˈhɛnɹi ˈfiːldɪŋ], 1707~1754)이 1742년에 발표한 소설 《조지프 앤드루스(Joseph Andrews [ˈʤoʊ̯z⟮s⟯ᵻf ˈændɹuːz])》의 영향으로 여자 등장 인물의 이름인 Fanny는 특히 독일과 북유럽에서 인기 있는 이름이 되었다. 정작 영어권에서는 19세기부터 fanny가 비속어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Fanny가 이름으로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는데 다른 언어에서는 여전히 흔한 이름이다. 스웨덴 감독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1918~2007)의 1982년작 영화 《판니와 알렉산데르(Fanny och Alexander)》가 유명하다(한국에서는 《화니와 알렉산더》로 알려져 있다). 스웨덴어 Fanny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판뉘’이지만 철자식으로 발음한 [ˈfanːʏ] ‘판뉘’ 외에 영어에서 온 이름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마치 Fanni로 적은 것처럼 발음한 [ˈfanːɪ] ‘판니’도 쓰인다.
독일어로는 [ˈfani], 프랑스어로는 [fani]로 발음되므로 문제 없이 ‘파니’로 적을 수 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발레리나 Fanny Elßler [ˈfani ˈɛlslɐ]는 ‘파니 엘슬러’이다. 그런데 스웨덴어처럼 이탈리아어에서도 철자상의 겹자음을 살려 [ˈfanni] ‘판니’로 발음한다. 설령 프랑스어를 흉내내어 마지막 음절에 강세를 주더라도 [fanˈni] ‘판니’가 된다. 그러니 이탈리아의 발레리나 Fanny Cerrito는 ‘판니 체리토’로 쓰는 것이 낫겠다. 이탈리아어에서는 자모 y가 차용어에서만 쓰이는데 여기서는 자모 i처럼 발음되므로 ‘이’로 적을 수 있다.
독일어나 프랑스어 이름으로서는 Fanny를 흔히 볼 수 있지만 이탈리아어에서는 별로 보기 힘들다. 체리토의 본명은 Francesca Cerrito ‘프란체스카 체리토’였으니 Fanny 역시 국제적인 예명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 이름 Fanny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흔히 여자 이름 Frances [ˈfɹæˑnsᵻs] ‘프랜시스’의 약칭으로 취급되었다. 이탈리아어 Francesca는 영어의 Frances에 대응하는 이름이니 자연스럽게 Fanny로 부르게 된 것이다. 엘슬러의 본명도 Franziska Elßler [fʁanˈʦɪska ˈɛlslɐ] ‘프란치스카 엘슬러’였고 Franziska는 Frances에 대응하는 독일어 이름이다.
이처럼 Fanny는 원래 이탈리아어식 이름이 아니라 국제 활동을 위해 쓴 예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독일어나 프랑스어식 이름도 아니니 ‘파니’로 적을 필요는 없으며 영어식 ‘패니’로 적을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Marie는 이탈리아어 발음에 따른 표기가 ‘마리에’가 아니라 ‘마리’이지만 Fanny는 이탈리아어 발음에 따른 표기가 ‘판니’이니 굳이 손댈 필요는 없다.
단순히 덴마크인은 덴마크어식 이름,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어식 이름만 쓴다면 한글 표기를 정할 때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적인 예명을 쓴 낭만주의 발레 시대 발레리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 하나만 봐도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여러 언어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