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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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민주주의의 토대로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거쳐 합의를 이끌어내는 공적 담론의 공간인 공론장의 개념을 주창한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 평론가인 위르겐 하버마스가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지성으로서 철학과 사회학, 정치학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1996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 대구, 광주 등을 순회하며 강연회와 토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방한 직후인 1996년 5월 16일에 열린 제11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그의 이름은 ‘위르겐 하버마스’로 표준 표기를 정했다. 이미 1970년대부터 국내 언론 보도에서는 그는 ‘하버마스’라고 불러왔는데 1986년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도입된 후인 1990년대에 드물게 ‘하베르마스’라는 표기가 쓰이기도 했지만 ‘하버마스’가 표준 표기로 심의된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독일어의 표기 규정을 보면 어말의 [r]와 -er [ər]는 ‘어’로 적는다는 것이 있어서 Vater [faːtər] ‘파터’, Schiller [ʃilər] ‘실러’를 예로 든다. 또 복합어 및 파생어의 선행 요소가 [r]로 끝나는 경우에도 이 규정을 준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auβerhalb [ausərhalp] ‘아우서할프’, Vaterland [faːtərlant] ‘파터란트’의 예를 든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쓰는 구식 발음 표기를 오늘날 《두덴 발음 사전》 등에서 쓰는 방식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Vater [ˈfaːtɐ] ‘파터’
Schiller [ˈʃɪlɐ] ‘실러’
auβerhalb [ˈaʊ̯sɐhalp] ‘아우서할프’
Vaterland [ˈfaːtɐlant] ‘파터란트’

오늘날의 표기 방식에서는 독일어의 R 모음화를 반영해 자음 앞이나 어말의 /ər/ 조합은 모음 [ɐ]로 나타낸다. 실제 발음 양상은 방언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스위스 발음에서는 [əɾ] 정도로 흔히 실현되지만 많은 방언에서는 /r/를 따로 발음하지 않고 /ər/를 합쳐서 [ɐ]나 [ʌ] 정도의 모음으로 흔히 발음한다.

Jürgen Habermas는 독일어로 [ˈjʏʁɡn̩ ˈhaːbɐmaːs]로 발음된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쓰는 구식 발음 표기대로 적으면 [jyrɡən haːbərmaːs]이다. [haːbərmaːs]를 그대로 옮기면 ‘하베르마스’이지만 여기서 -er [ər]를 복합어 및 파생어의 선행 요소의 마지막 음으로 친다면 ‘하버마스’로 적을 수 있다.

현대 독일어를 기준으로는 Habermas를 복합어나 파생어로 보는 것이 무리이다. 하지만 어원상 Habermas는 복합어가 맞다. 게르만어권의 이름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 복합어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Habermas도 예외가 아니다. 앞부분은 ‘귀리’를 뜻하는 현대 독일어 Hafer [ˈhaːfɐ] ‘하퍼’에 해당되는 중세 고지 독일어 haber이고 뒷부분은 ‘치수’, ‘용량’ 등을 뜻하는 현대 독일어 Maß [ˈmaːs] ‘마스’에 해당되는 중세 고지 독일어 māȥ로 생각된다.

하지만 Habermas는 앞뒤 요소 모두 현대 독일어에서 쓰는 철자와는 형태가 다르니 현대 독일어 기준으로도 복합어라고 치기는 어렵다. 언제나 이름의 어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어원을 따져서 복합어의 선행 요소로 볼 수 있는 부분이 [ɐ]로 끝나는 경우 ‘어’로 적도록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스위스에서 활동한 Bonifacius Amerbach [boniˈfaːʦi̯ʊs ˈamɐbax]라는 인문주의 학자(1495~1562)가 있다. 그의 이름은 ‘보니파치우스 아머바흐’로 적어야 할까, ‘보니파치우스 아메르바흐’로 적어야 할까? Amerbach의 뒷부분은 명백히 ‘시내’를 뜻하는 Bach [ˈbax] ‘바흐’이니 복합어에서 나온 성씨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Amer는 적어도 현대 독일어에서 쓰는 보통 명사가 아니다. 네덜란드에 Amer ‘아머'(현행 표기 규정에 따르면 ‘아머르’)라는 강이 있지만 이 성씨와는 상관이 없다.

그의 아버지인 Johann Amerbach [ˈjoːhan ˈamɐbax] ‘요한 아머바흐/아메르바흐’는 독일 남부에 있는 Amorbach [ˈaːmoːɐ̯bax] ‘아모어바흐/아모르바흐’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곧 Amerbach는 Amorbach의 변형이다. Amorbach는 8세기 초에 이곳에 수도원을 세운 아키텐(오늘날의 프랑스 서남부) 출신 수도원장 아모르(라틴어: Amor, 현대 프랑스어: Amour [amuʁ] ‘아무르’)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그러나 한글 표기 하나를 정하려고 일일이 이런 어원을 따져야 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에 속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로이센주 최북단에서 태어난 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1857~1928)인 Hermann Sudermann [ˈhɛʁman ˈzuːdɐman] ‘헤르만 주더만’의 성씨는 뒷부분이 ‘사람’, ‘남자’를 뜻하는 Mann [ˈman] ‘만’인 전형적인 복합어 형태이다. 하지만 *Suder 역시 현대 독일어에서 쓰는 형태는 아니고 ‘남쪽의’를 뜻하는 중세 저지 독일어 sūder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폴란드 북부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를 중심으로 한 발트해 연안에 있었던 프로이센의 독일계 주민들은 예전에 저지 독일어를 썼다.

저지 독일어가 아니라 고지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 독일어에서는 ‘남쪽’을 Süden [ˈzyːdn̩] ‘쥐덴’이라고 하고 일부 복합어에서 ‘남쪽의’를 Süd- [ˈzyːt] ‘쥐트’로 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Sudermann을 ‘주더만’으로 표기한다. 즉 현대 독일어에서는 쓰이지 않는 Suder를 복합어의 선행 요소로 본 것이다. ‘불평하다’를 뜻하는 오스트리아식 독일어 sudern [ˈzuːdɐn] ‘주데른’의 명령형 suder [ˈzuːdɐ] ‘주더’도 있지만 이 이름과는 관련이 없다.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있는 알프스산맥의 봉우리인 Matterhorn [ˈmatɐhɔʁn]도 민간에서는 ‘마테르호른’으로 흔히 쓰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마터호른’이 표준 표기이다. Horn [ˈhɔʁn]은 ‘뿔’을 뜻하는데 Matter는 스위스에서 ‘목장’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 Matte [ˈmatə] ‘마테’에서 나왔지만 현대 독일어에서 쓰는 형태는 아니고 접미사 -er를 붙인 형태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복잡하게 어원을 따질 필요 없이 단순히 발음을 기준으로 하여 자음 앞이나 어말의 er [ɐ]는 ‘어’로 적는 것으로 통일하도록 하면 어떨까? 이 경우 Habermas, Amerbach, Sudermann, Matterhorn 등은 모두 ‘하버마스’, ‘아머바흐’, ‘주더만’, ‘마터호른’으로 적게 된다. 대신 er [ɐ]에 한정한다면 Amorbach의 표기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Selters [ˈzɛltɐs] ‘젤터스’, Eckersdorf [ˈɛkɐsdɔʁf] ‘에커스도르프’, Gaimersheim [ˈɡaɪ̯mɐshaɪ̯m] ‘가이머스하임’처럼 er [ɐ]에 -s가 붙은 형태에서도 ‘어’로 표기를 통일할 수 있다. 또 저지 독일어에서 온 Pumpernickel [ˈpʊmpɐnɪkl̩] ‘품퍼니켈’, 네덜란드어에서 온 Sloterdijk [ˈsloːtɐdaɪ̯k] ‘슬로터다이크’처럼 현대 독일어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복합어인 것처럼 처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형태도 표기하는 데 문제가 없다.

대신 그러면 어말 -ern [ɐn], -ert [ɐt] 등의 표기가 문제가 된다. Bayern [ˈbaɪ̯ɐn] ‘바이에른’, Schubert [ˈʃuːbɐt] ‘슈베르트’는 앞으로 ‘바이언’, ‘슈버트’로 고쳐 써야 할까? 그 외에도 Pommern [ˈpɔmɐn] ‘포메른’, Hohenzollern [hoːənˈʦɔlɐn] ‘호엔촐레른’, Borchert [ˈbɔʁçɐt] ‘보르헤르트’, Rickert [ˈʁɪkɐt] ‘리케르트’ 등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표제어는 각각 ‘포먼’, ‘호엔촐런’, ‘보르허트’, ‘리커트’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Schubert를 ‘슈버트’로 고쳐 쓰자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Albert [ˈalbɛʁt] ‘알베르트’, Herbert [ˈhɛʁbɛʁt] ‘헤르베르트’, Hubert [ˈhuːbɛʁt] ‘후베르트’, Lambert [ˈlambɛʁt] ‘람베르트’, Robert [ˈʁoːbɛʁt] ‘로베르트’ 등에서는 -bert가 모음 약화 없이 [bɛʁt] ‘베르트’로 발음된다. ‘빛나는’을 뜻하는 고대 고지 독일어 beraht에 해당하는, 독일어 이름에 흔히 들어가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반면 Schubert는 중세 고지 독일어로 ‘신발’을 뜻하는 schuoch와 ‘장인’을 뜻하는 würchte가 합쳐서 ‘화공’, ‘구두장이’를 뜻하는 이름으로 독일어 이름에 흔한 요소인 -bert와는 관련이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Ebert 및 Eberth [ˈeːbɐt]도 ‘에베르트’로 쓰는데 이들도 -bert와는 관련이 없다. 이들은 남자 이름 Eberhard [ˈeːbɐhaʁt] ‘에버하르트’를 줄인 데서 유래했다. Eberhard는 ‘멧돼지’를 뜻하는 Eber [ˈeːbɐ] ‘에버’와 ‘단단한’을 뜻하는 hard [ˈhaʁt] ‘하르트’가 합친 이름으로 복합어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표기 용례에서도 ‘에버하르트’로 쓴다. 만약 Ebert와 Eberth를 발음에 따라 ‘에버트’로 쓴다면 ‘에버하르트’와의 관계가 드러난다는 장점이 있다.

Eckert [ˈɛkɐt]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에케르트’로 쓰고 있는데 이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이지만 Eckehart [ˈɛkəhaʁt] ‘에케하르트’ 따위의 이름을 줄인 것 또는 Ecker [ˈɛkɐ] ‘에커’에 -t를 붙인 형태이다. 그러니 ‘에커트’로 적으면 ‘에커’와의 관계가 드러난다는 장점이 있다. Becker [ˈbɛkɐ] ‘베커’에서 유래한 성씨 Beckert [ˈbɛkɐt] 역시 ‘베케르트’ 대신 ‘베커트’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힐베르트’로 쓰는 Hilbert [ˈhɪlbɐt]는 어원을 따지면 고대 고지 독일어 Hiltiberht에서 왔으니 뒷부분은 독일어 이름에 흔한 요소인 -bert가 맞는데도 발음은 모음이 약화된 ‘힐버트’이다. 이 이름은 독일어권에서는 성씨로 주로 관찰되는데 남자 이름으로서는 중세 이후 명맥이 거의 끊긴 듯하며 이 이름을 가진 중세 인물을 현대 독일어로는 Hildebrecht [ˈhɪldəbʁɛçt] ‘힐데브레히트’ 정도로 부른다. 대신 영어나 네덜란드어에서는 Hilbert를 남자 이름으로 쓰는데 영어 [ˈhɪlbəɹt] ‘힐버트’, 네덜란드어 [ˈhɪlbərt] ‘힐버트'(현행 표기 규정에 따르면 ‘힐버르트’)에서는 모음 약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독일어에서도 [ˈhɪlbɐt] ‘힐버트’로 발음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일일이 발음을 따지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ert에서는 ‘어’로 적지 않는 것으로 통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음 앞과 어말의 er [ɐ]는 ‘어’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지만 이런 이유로 당분간 어말 -t 앞에서는 계속 ‘에르’로 적고 있는데, 어떤 방식이 좋을지 아직 고민 중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의 수립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1773~1859)인 Metternich [ˈmɛtɐnɪç]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메테르니히’로 쓰고 있는데 이 성씨는 독일에 있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궁극적인 어원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지만 Maternus ‘마테르누스’라는 중세 성인 이름에 지명을 만드는 접미사 -ich를 붙인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다. 자음 앞의 er [ɐ]를 ‘어’로 통일한다면 ‘메터니히’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Mettern-ich로 분석하고 어말 -ern [ɐn]은 여전히 ‘에른’으로 적는다면 ‘메테르니히’도 일리가 있을 수 있으니 이런 문제도 고민이 필요하다.

한편 독일어 Jürgen [ˈjʏʁɡn̩]은 기존 표기 용례에서 ‘위르겐’으로 적으며 Jörg [ˈjœʁk]는 ‘외르크’로 적는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규정으로 명시하지는 않지만 ‘위’, ‘외’로 적는 전설 원순 모음 앞에 반모음 [j]가 올 때도 계속 ‘위’, ‘외’로 적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유틀란트반도’를 표제어로 삼고 있어서 독일어 Jütland [ˈjyːtlant]를 ‘위틀란트’ 대신 ‘유틀란트’로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영어 철자 Jutland 때문에 원어를 잘못 파악한 것일 수 있다. 참고로 영어 발음에 따르면 Jutland [ˈʤʌtlənd] ‘저틀랜드’이므로 ‘유틀란트’는 독일어 발음을 의도한 표기이다.

그런데 전에 스웨덴 축구 선수 Viktor Gyökeres에 관해서 쓴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어에서도 ‘위’, ‘외’를 단순모음으로 발음하는 화자가 거의 없는 요즘에는 언어를 막론하고 [j] 뒤에 ‘위’, 외’로 적는 모음이 오면 ‘유’, ‘요’로 표기를 통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면 독일어 Jürgen, Jörg의 표기도 각각 ‘유르겐’, ‘요르크’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르겐’은 꽤 친숙한 표기이니 과연 그렇게 바꿀 필요가 있을지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을 언급하기에는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크게 벗어난 사항일지도 모르지만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될 수 있는 외래어 표기법의 개선 문제도 우리 모두의 언어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활발한 토론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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