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원래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날짜는 페이스북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미국 시카고 출신으로 페루에서 오랫동안 사목하다가 이번에 새 교황 레오 14세으로 즉위한 로버트 프리보스트(Robert Prevost [ˈɹɒbəɹt ˈpɹiːvoʊ̯st])의 독특한 배경이 계속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글에서 Prevost는 프랑스어식 성이라고 했는데 실상은 좀 더 복잡하니 추가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우선 미국 언론에서는 루이지애나주와 카리브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어머니쪽 집안을 주목한다. 그의 외할아버지 조지프 마티네즈(Joseph Martinez [ˈʤoʊ̯z⟮s⟯ᵻf mɑːɹˈtiːnɛz])는 오늘날의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아이티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든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섬 출신이며 원래의 성은 에스파냐어 Martínez ‘마르티네스’이다. 외할머니 루이즈 바키에(Louise Baquié [luˈiːz ˈbɑːkieɪ̯])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크리올인이었다.
포르투갈어 crioulo ‘크리올루’에서 유래한 에스파냐어 criollo ‘크리오요’, 프랑스어 créole [kʁeɔl] ‘크레올’, 영어 creole [ˈkɹiːoʊ̯l] ‘크리올’은 원래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 정착민의 후손, 특히 혼혈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 가운데서 발달한 혼합된 언어도 크리올/크레올/크리오요 등으로 불린다. 루이지애나 크리올인이라고 부르는 집단은 원래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을 뿌리로 하고 이들과 혼인한 촉토족 등 원주민,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에서 에스파냐로 넘어간 뒤 들어온 에스파냐계 정착민, 프랑스령 생도맹그(Saint-Domingue [sɛ̃-dɔmɛ̃ɡ], 오늘날의 아이티)의 혼란기에 넘어온 주로 아프리카계 난민, 아일랜드·독일·이탈리아 출신 가톨릭교도 이민 등 다양한 배경이 합쳐 이루어졌다.
교황의 외조부모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결혼했으며 그곳에 거주할 당시 인구 조사에서는 흑인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시카고로 이주한 다음에는 마티네즈 집안이 백인으로 기록된 것이 흥미롭다. 루이지애나주에서는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으면 흑인으로 간주하던 관행에 따랐지만 북부로 이주한 후 외관상 잘 드러나지 않으니 차별을 피하려 백인 행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교황의 친형 존 프리보스트(John Prevost [ˈʤɒn ˈpɹiːvoʊ̯st])는 언론의 질문에 가족이 스스로 흑인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편 교황의 이탈리아 혈통에 주목한 이탈리아 언론에서는 그의 친할아버지로 추정되는 이의 출생 기록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1878년 6월 24일, 이탈리아 피에몬테주에 있는 세티모로타로(Settimo Rottaro)에서 조반니 피에트로 펠리체 프레보스토(Giovanni Pietro Felice Prevosto)가 태어났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교황의 친할아버지는 1960년 부고와 묘비에서 John R. Prevost [ˈʤɒn— ˈpɹiːvoʊ̯st] ‘존 R. 프리보스트’라는 이름으로 쓰고 있으며 John 대신 프랑스어식 Jean [ʒɑ̃] ‘장’으로 쓰기도 한다. Jean Lanti Prevost라는 형태로도 알려져 있다. 1876년 6월 24일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출생 기록과는 연도 차이가 있지만 일단 Giovanni ‘조반니’는 영어 John ‘존’, 프랑스어 Jean ‘장’에 대응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출생 기록의 인물이 교황의 친할아버지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교황의 친형 존은 그들의 친조부모가 프랑스 출신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적어도 그의 친할머니 수잰 프리보스트(Suzanne Prevost [suˈzæn ˈpɹiːvoʊ̯st])는 1979년 부고에 따르면 1896년 2월 2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언론에서는 이에 주목하여 교황의 친할머니는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항구 도시 르아브르(le Havre [lə-avʁ])에서 1894년 2윌 2일에 태어난 쉬잔 퐁텐(Suzanne Fontaine [syzan fɔ̃tɛn])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 위키 족보 사이트 위키트리(WikiTree)에서는 그냥 생일이 같고 출생 연도가 비슷한 동명 이인과 혼동하여 성이 퐁텐이라고 잘못 안 것이라며 교황의 친할머니의 실제 이름은 쉬잔 루이즈 마리 프레보(Suzanne Louise Marie Prevost [syzan lwiz maʁi pʁevo])이고 혼인 전 성은 퐁텐이 아니라 파브르(Fabre [fabʁ])라고 쓰고 있다(여기서는 일단 Prevost가 프랑스어 Prévost와 동일하게 발음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프레보’로 표기했다).
족보 연구는 외국에서 활발한 분야인데 많은 이들이 새로 선출된 교황의 배경에 대해 궁금해하는 가운데 고의는 아니겠지만 확인이 충분히 되지 않은 정보를 사실로 전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하겠다. 이탈리아에서 찾았다는 그래도 일단 교황의 친할아버지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인 듯하고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성을 이탈리아어식으로 Prevosto ‘프레보스토’라고 기록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가 프랑스계였다는 말도 있지만 근거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프랑스인과 결혼했고 성이 프랑스어식으로 보여서 나온 얘기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피에몬테는 역사적으로 프랑스어권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며 19세기 초까지는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이가 많았고 행정의 언어로도 널리 쓰였다.
또 교황의 친할아버지가 태어난 세티모로타로를 비롯해서 피에몬테 대부분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는 말씨인 피에몬테어는 이탈리아어에 비해 프랑스어와 유사한 점이 많다(피에몬테어는 이탈리아어의 방언이 아니라 자매 언어이다).
피에몬테어는 프랑스어처럼 어말 무강세 모음을 탈락시킨다(대신 -a는 [ɐ]로 약화될 뿐 탈락하지 않는다). 피에몬테의 중심 도시는 이탈리아어로 Torino [toˈriːno] ‘토리노’이지만 피에몬테어로는 Turin [tyˈriŋ] ‘튀링’이다. 프랑스어로는 Turin [tyʁɛ̃] ‘튀랭’이다. 영어에서도 프랑스어식 이름 Turin [tjʊə̯ˈɹɪn, ˈtjʊəɹᵻn] ‘튜린’으로 불린다.
지난 글에서 프랑스어 prévost는 라틴어 praepositus ‘프라이포시투스’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했는데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탈리아어 형태는 preposto ‘프레포스토’이다. 그런데 ‘주임 신부’를 뜻하는 말로는 고대 프랑스어 prévost에서 전해진 형태인 prevosto ‘프레보스토’가 쓰인다. 이에 해당하는 피에몬테어는 사전에 나오지 않지만 아마 prevost ‘프레보스트’ 정도가 아닐까 한다.
교황의 친할아버지는 이탈리아 통일 얼마 후에 태어나서 출생 기록에 이탈리아어로 이름이 기록되었겠지만 한두 세대 전만해도 공문서에서는 프랑스어식 이름을 썼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서유럽 언어에서 이름의 형태를 하나로 고정시켜서 Giovanni ‘조반니’라는 이름을 쓰는 이탈리아인은 프랑스어, 영어 등 다른 언어로도 Giovanni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쓰는 언어에 따라 이름을 현지화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 출생·혼인·사망 기록 등에도 쓰는 언어에 따라 이름의 형태가 달라졌다. Giovanni라고 불리던 이가 프랑스어로 된 기록에서는 Jean ‘장’, 영어로 된 기록에서는 John ‘존’으로 나타나는 식이었다. 한편 피에몬테어로는 이 이름이 Gioann ‘조안’이 되지만 피에몬테어가 공식 기록에서 쓰이는 일은 없었다.
예를 들어 1736년에 토리노에서 태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주세페 루이지 라그란자(Giuseppe Luigi Lagrangia)는 1802년에 프랑스에 귀화하여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 [ʒozɛf lwi laɡʁɑ̃ʒ])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계였다고 하니 어쩌면 원래의 성도 Lagrange였다가 Lagrangia로 이탈리아어화된 것일 수 있겠다.
교황의 친할아버지도 이탈리아어로는 성이 Prevosto로 기록되었지만 전부터 공문서에는 프랑스어식으로 Prevost로 기록되었고 입말로도 피에몬테어식 Prevost를 썼기 때문에 미국으로 넘어간 후에도 이 철자를 쓴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영어에서 쓰는 성의 발음에 대한 의문이 하나 해결된다. 지난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프랑스어 Prévost의 발음은 [pʁevo] ‘프레보’이고 이를 흉내낸 영어 발음에서도 어말 -st를 묵음으로 처리하지만 교황의 성에서는 -st가 발음된다. 이는 단순히 영어 철자식으로 발음한 것이 아니라 Prevost의 피에몬테어식 발음(아마도 [*preˈvɔst] 정도)을 따른 것일 수 있겠다. 피에몬테어에서는 ‘슬픈’을 뜻하는 trist [ˈtrist] ‘트리스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어말 자음군이 철자대로 발음된다.
대신 피에몬테어 Prevost는 둘째 음절에 강세가 올 텐데 영어에서는 첫째 음절에 강세를 주는 것은 영어식으로 발음을 바꾼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겠다. 접두사 prae-로 시작하는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한 두 음절 명사 precept [ˈpɹiːsɛpt] ‘프리셉트’, precinct [ˈpɹiːsɪŋkt] ‘프리싱크트’, pretext [ˈpɹiːtɛkst] ‘프리텍스트’ 등은 pre-에 강세를 주는데 이를 본보기로 삼았을 것이다.
물론 족보에 대한 연구도 그렇고 이를 토대로 성의 기원을 따지는 것도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니 확실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 그래도 다양한 언어를 넘나들며 성의 기원을 추적하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위 글을 쓴 후에 추가로 드러난 사실을 소개한다. 먼저 레오 14세의 친할아버지는 피에몬테주가 아니라 시칠리아섬 출신으로 본명은 살바토레 조반니 가에타노 리지타노(Salvatore Giovanni Gaetano Riggitano)로 밝혀졌다. 즉 이탈리아 언론에서 보도했던 기록은 우연히 이름이 비슷한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대신 친할머니는 보도된 바와 같이 노르망디 지방 출신 쉬잔 퐁텐(Suzanne Fontaine)이 맞고 혼인 전 성은 프레보(Prevost)였다고 한다. 리지타노와 퐁텐은 미국으로 이민한 후에 Prevost로 개명했다. 그러니 프리보스트(Prevost)는 원래 프랑스인 친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어식 성을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