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빠른 인간 우사인 혹은 유세인 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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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가장 빠른 인간이라고 하면 지금은 은퇴했지만 여전히 100미터와 200미터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자메이카의 육상 선수 우사인 볼트(Usain Bolt)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영어권에서는 이 이름을 익숙한 한글 표기와는 사뭇 다르게 발음한다. 본인의 실제 발음은 [ˈjuːseɪ̯n ˈboʊ̯lt] ‘유세인 볼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2008년 6월 1일 100미터를 9초72로 주파하여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때 연합뉴스에서 내보낸 그래픽 〈육상 100m 세계기록 변천사〉에 딸린 본문에서는 원어 발음에 따라 ‘유세인 볼트’라는 표기를 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래픽에서는 ‘우사인 볼트’라는 표기를 썼다.

당시 다른 언론 보도에서도 ‘우사인 볼트’라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어 열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그는 남자 100미터와 200미터, 4×100미터 계주에서 금메달을 휩쓸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대신 4×100미터 계주 주자로 뛴 자메이카 팀 동료 혈액 샘플에서 훗날 금지 약물이 검출되면서 2017년에 계주 금메달은 뒤늦게 박탈당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 국립국어원이 배포한 입상 선수명 한글 표기 자료에는 ‘우사인 볼트’로 나와있다. 이 자료는 동아일보 어문연구팀에서 초안을 작성한 것인데 아마도 당시 한국 언론에서 이미 쓰고 있던 표기를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실제 발음을 확인하고 작성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입상 선수명 한글 표기 자료가 배포된 후 국립국어원에 연락해서 ‘우사인 볼트’는 실제 발음과 다르다고 지적을 한 기억이 난다.

이 이름은 2009년 7월 29일 제8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었는데 결국 이미 쓰고 있던 ‘우사인 볼트’로 표기가 정해졌다. 아마 다른 이들도 지적했을 테니 심의 위원들이 실제 발음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표기를 존중하자는 결정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규칙에 어긋나는 관용 표기에 통상적으로 붙이는 별표(*)가 없이 심의된 표기가 발표되었으니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우사인’은 Usain에 이른바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을 적용한 규칙 표기로 간주했을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카리브해의 섬나라 자메이카는 영어가 유일한 공용어이고 영어권에서 두루 쓰이는 영어식 이름을 많이 쓰지만 육상 선수 멀린 오티(Merlene Ottey [ˈmɜːɹliːn ˈɒti]), 셰리카 잭슨(Shericka Jackson [ˈʃɛɹɪkə ˈʤæksən]), 키셰인 톰슨(Kishane Thompson [kɪˈʃeɪ̯n ˈtɒmpsən])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이름을 변형시키거나 몇몇 이름을 조합하여 독특한 이름을 짓는 경우도 볼 수 있다(단 Thompson의 규범 표기는 ‘톰프슨’이다). 또 주민 대부분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이들의 후손인만큼 아프리카 여러 언어에서 따온 이름도 흔하다(이런 경향은 자메이카뿐만이 아니라 북중미와 카리브해 흑인 사회에서 널리 관찰된다). 예전 글에서 다룬 자메이카 육상 선수 이름 보아지 응크루미(Bouwahjgie Nkrumie)는 가나의 아칸어 이름 Boakye ‘보아체’ 또는 Aboagye ‘아보아제’를 변형시킨 것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예이다.

Usain이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의 조카사위가 급우 이름에서 따서 제안했다고 한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아랍어 이름 حسين Ḥusayn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이름이 아랍어의 ح ḥ [ħ] 음은 물론 [h] 음도 없는 다른 언어에 전해지면서 첫 자음이 탈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크림반도를 무단 합병한 러시아 정부에 의해 2016년부터 구금 중인 크림 타타르 인권 운동가 에미르위세인 쿠쿠(크림 타타르어: Emir-Üsein Kuku, 우크라이나어: Емір-Усеїн Куку/Emir-Usein Kuku ‘에미르우세인 쿠쿠’)의 이름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서아프리카에서는 아랍어 Ḥusayn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프랑스어식 Ousseynou [usɛjnu] ‘우세이누’, Ousseni [useni] ‘우세니’, 영어식 Ousainou [uˈseɪ̯nu] ‘우세이누’ 등이 쓰인다. Usain도 아마도 유래가 비슷할 것이다.

다른 비로마자 언어에서는 Usain Bolt를 어떻게 적을까? 적어도 위키백과 표제어를 기준으로 보면 일본어 ウサイン・ボルト[Usain Boruto] ‘우사인 보루토’, 힌디어 उसैन बोल्ट Usain Bolt ‘우세인 볼트’, 아르메니아어 Ուսեյն Բոլտ Useyn Bolt ‘우세인 볼트’, 러시아어 Усэйн Болт(Usein Bolt) ‘우세인 볼트’ 등은 첫 음절을 ‘우’로 적었고 불가리아어 Юсейн Болт(Yuseyn Bolt) ‘유세인 볼트’, 그리스어 Γιουσέιν Μπολτ(Giouséin Mpolt) ‘유세인 볼트’, 타이어 ยูเซน โบลต์ Yusen Bon ‘유센 본’, 아랍어 يوسين بولت Yūsayn Bōlt ‘유세인 볼트’ 등은 영어의 독특한 발음을 반영하여 첫 음절을 ‘유’로 적었다.

일반 어휘를 기준으로 영어의 철자 u는 어두 개음절에서 보통 [juː]로 발음된다. 약화된 음절에서는 [jʊ]로도 발음될 수 있는데 약화된 음절에서 [uː] 또는 [ʊ]로 발음되는 모음은 약식 기호인 [u]로 적으므로 [ju]로 나타낼 수 있다. 또 [ɹ] 앞에서 [juː]는 [jʊə̯]가 된다. 자모 이름 U [ˈjuː] ‘유’부터 시작해서 user [ˈjuːzəɹ] ‘유저’, universe [ˈjuːnᵻvɜːɹs] ‘유니버스’, utopia [juˈtoʊ̯piə] ‘유토피아’ 등 프랑스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등에서 받아들인 어휘에 규칙적으로 적용된다. 여기서 utopia는 사실 잉글랜드의 철학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 [ˈtɒməs ˈmɔːɹ], 1478~1535)가 고안한 신라틴어 어휘이다. ‘우라늄’을 뜻하는 uranium [juˈɹeɪ̯niəm] ‘유레이니엄’처럼 현대에 지은 신라틴어 어휘에도 같은 발음 규칙이 적용된다.

영어에서 어두뿐만이 아니라 모든 개음절의 u를 보통 ‘유’로 발음한다. 이는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어휘에 등장하는 중세 영어의 전설 원설 고모음 [yː] ‘위’가 철자 ew로 적는 [ew] ‘에우’와 [iw] ‘이우’, 후에 [ɛw] ‘에우’와 합쳐져서 [ɪw] ‘이우’ 정도의 음가가 된 후 서서히 발음이 변해서 오늘날의 [juː] ‘유’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방언에서 due와 dew의 발음이 동일하고(보수적인 발음은 [ˈdjuː] ‘듀’, 개신적인 미국 발음은 [ˈduː] ‘두’, 개신적인 영국 발음은 [ˈʤuː] ‘주’) 접두사 uro-와 euro의 발음이 [ˈʊə̯ɹoʊ̯] ‘유로’로 동일하다.

즉 원래는 프랑스어에서 들여온 모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음가가 변해서 오늘날의 ‘유’가 된 것이지만 그 훗날 받아들인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식 어휘는 물론 이와 상관이 없는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어휘에서도 어두 개음절의 u는 ‘유’로 발음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나라 이름만 봐도 우간다와 우크라이나, 우루과이는 영어로 각각 Uganda [juˈɡændə] ‘유갠다’, Ukraine [juˈkɹeɪ̯n] ‘유크레인’, Uruguay [ˈjʊə̯ɹᵿɡwaɪ̯] ‘유루과이’로 발음한다. 다만 Uruguay는 [ˈʊə̯ɹᵿɡwaɪ̯] ‘우루과이’로 발음하는 화자도 있다. 또 하와이어 ʻukulele ‘우쿨렐레’에서 나온 악기 이름은 영어로 ukulele [ˌjuːkəˈleɪ̯li] ‘유컬레일리’가 된다. Usain을 ‘유세인’으로 발음하는 것도 같은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이르는 Ulaanbaatar [ˌuːlɑːnˈbɑːtɔːɹ] ‘울란바토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울루루를 이르는 Uluru [ˌuːləˈɹuː] ‘울러루’처럼 더 최근에 들어온 고유 명사에서는 원어 발음을 존중해서 어두 개음절의 u도 ‘우’로 발음한다. 오늘날 새로 접하는 외국어식 어휘에서는 거의 언제나 ‘우’ 발음이 쓰인다. 예를 들어 ‘민물장어’를 뜻하는 일본어 ウナギ[unagi] ‘우나기’에서 차용한 unagi는 [uˈnɑːɡi] ‘우나기’라고 발음한다. 오늘날 영어 화자들은 웬만하면 다른 언어에서는 u를 ‘유’로 발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에서 온 말이라고 판단하면 보통 ‘우’로 발음한다.

그래서 Usain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는 일반 영어 화자들은 첫 음절을 ‘우’로 발음하기 쉽다. 2003년에 캐나다 셔브룩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육상 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그의 이름을 당시 캐나다 중계 방송에서는 [uˈseɪ̯n] ‘우세인’으로 발음했다.

나중에 그가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르면서 영어권에서는 방송을 통해 본인 발음에 따른 ‘유세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앞서 살펴본 비로마자 언어에서 쓰는 표기를 보면 ‘유세인’이라는 발음이 널리 알려진 후에도 이 발음이 철자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인지 그냥 예전부터 쓰던 ‘우세인’ 등을 굳이 고치지 않은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러니 Usain을 ‘우사인’으로 적은 당시 한국 언론을 너무 탓하기는 힘들다.

자메이카 출신으로 1930년대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BBC 방송국에서 일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된 Una Marson(1905~1965)이라는 시인이자 극작가가 있다. 여성과 흑인에 대한 차별에 맞서 싸운 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원래 텔레비전 방송에서 일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이게 어려워지자 영국령 서인도 제도 출신으로 영국에 온 이들이 고향에 소식을 전해주게 한 라디오 방송인 《콜링 더 웨스트인디스(Calling the West Indies)》를 제작·진행했다.

또 매주 《캐리비언 보이시스(Caribbean Voices)》라는 코너를 만들어 카리브해 문학을 널리 소개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그가 자메이카로 돌아간 후에도 이 방송은 계속되어서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작가 VS 나이폴(V. S. Naipaul [—ˈnaɪ̯pɔːl], 1932~2018)도 무명 시절에 이 방송에 소개된 것은 물론 얼마 후 한동안 방송 제작진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동영상을 찾아보면 Una를 [ˈʊnə, ˈuːnə] ‘우나’로 발음하는 것을 흔히 관찰할 수 있다.
https://youtu.be/bq6hgYIJPE0?t=63
https://youtu.be/kKuYtUDEcDo?t=45
https://youtu.be/kU_KWPKfdNc?t=35
https://youtu.be/U9NLrca6VWY?t=2
https://youtu.be/Iwmiy6XMixM?t=4

하지만 기록 영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본인이 쓴 발음은 [ˈjuːnə ˈmɑːɹs(ə)n] ‘유나 마슨’이다.
https://youtu.be/XZiXq0gNOA8?t=5

물론 ‘유나’로 제대로 발음한 동영상도 보인다(대신 마지막 동영상에서는 Marson을 [ˈmɑːɹz(ə)n] ‘마즌’으로 발음한다).
https://youtu.be/4gVnKJrFu6g?t=12
https://youtu.be/qFAI2gb3dic?t=16
https://youtu.be/K9VhjH5mlyo?t=44

보통 영어 이름으로서 Una의 기원은 16세기에 이미 잉글랜드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ˈɛdmənd ˈspɛnsəɹ], 1552?~1599)가 대표작 《요정 여왕(The Faerie Queene)》에서 Una를 등장인물 이름으로 쓴 것에서 찾는다. 《롱맨 발음 사전》에는 발음이 [ˈjuːnə] ‘유나’로 나온다. 그런데 《케임브리지 영어 발음 사전》에는 [ˈjuːnə] ‘유나’ 외에 [ˈuːnə] ‘우나’도 가능한 발음으로 추가한다.

스펜서가 쓴 Una는 라틴어로 ‘하나’를 뜻하는 말에서 따왔겠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아일랜드 민속 설화에 나오는 요정 왕비의 이름에서 나온 아일랜드어 이름 Úna ‘우나’도 영어에 전해졌다. 영어에서는 보통 부호를 생략하고 Una로 쓴다. 아일랜드어 발음은 [ˈuːnˠə] ‘우나’이므로 적어도 아일랜드에서는 영어로도 [ˈuːnə] ‘우나’로 발음한다. 잘못 발음되지 않도록 아예 철자를 Oona로 쓰는 경우도 흔하다. 《케임브리지 영어 발음 사전》에 나오는 가능 발음 ‘우나’는 아일랜드어에서 나온 이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Una는 두 가지 발음이 혼용되며 그다지 흔한 이름이 아니므로 이를 처음 접한 영어 화자는 영어식 이름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발음을 ‘우나’로 짐작하기 쉽다.

유나 마슨이 직접 방송을 진행하던 시절에는 본인이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는 이가 많았겠지만 오늘날에는 앞서 본 것처럼 ‘우나’로 발음하는 일이 많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 볼트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그의 이름도 ‘우세인’으로 발음하는 일이 늘어날 수 있겠다. 영어에서는 철자만으로 발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러면 반대로 한국어에서는 앞으로 ‘우사인’이라는 표기에 익숙했던 이들이 줄어들면서 올바른 발음에 따른 ‘유세인’으로 고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배우 매릴린 먼로(Marilyn Monroe [ˈmæɹə⟮ᵻ⟯lᵻn mə⟮ʌ⟯nˈɹoʊ̯], 1926~1962)는 생전에 한국 언론에서 ‘마리린 몬로’라고 불렀고 이에 익숙해진 이들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은 ‘매릴린 먼로’가 상당히 어색했겠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예전 표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드물다. ‘마릴린 먼로’로 쓰는 일은 있어도 예전처럼 ‘마리린 몬로’라고 쓰는 일은 없다.

2009년에 Usain Bolt의 표기가 결국 ‘우사인 볼트’로 심의되었을 때 실망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앞으로 얼마든지 표기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 그러니 이미 심의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영원불변의 표기라고 여길 필요는 없고 가장 바람직한 한글 표기가 무엇인지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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