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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오푸스-포스투무스(opus postumus)’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명사」 『음악』 음악가가 남긴 작품을 이르는 말. 생략하여 ‘op. post.’라고 쓴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어에서 실제 쓰이는 표현은 아닌 듯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이 사전 정의를 되풀이한 내용만 보인다.
이것은 라틴어에서 나온 표현인데 사실 라틴어 문법에 맞게 쓰려면 opus postumus가 아니라 opus postumum ‘오푸스 포스투뭄’으로 써야 한다. opus ‘오푸스’는 라틴어로 ‘일, 작품’을 뜻하는 중성 명사이니 ‘마지막’을 뜻하는 형용사는 남성형 postumus가 아니라 중성형 postumum이어야 한다. 라틴어의 명사나 대명사는 남성, 여성, 중성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는데 이를 수식하는 형용사의 문법적 성도 이와 일치시키는 것이 원칙이다. 1938년에야 완간된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ɪˈmaːnu̯eː⟮ɛ⟯l ˈkant], 1724~1804)의 유작은 《오푸스 포스투뭄(Opus Postumum)》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아들’을 뜻하는 filius ‘필리우스’에서 볼 수 있듯이 흔히 단수 주격형에서 -us로 끝나는 라틴어 명사는 남성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중성인 경우도 많고 ‘손’을 뜻하는 manus ‘마누스’처럼 여성인 경우도 있다.
그러니 opus postumus는 opus를 남성 명사로 착각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렇게 쓴 예가 흔히 발견된다.
라틴어에서 단수 주격형이 -us로 끝나는 제2변화 명사는 단수 속격형과 복수 주격형이 -i로 끝나지만 제3변화 명사로 분류되는 opus는 격변화가 꽤 독특해서 단수 속격형은 operis ‘오페리스’, 복수 주격형은 opera ‘오페라’이다. ‘가극’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opera ‘오페라’가 여기서 나왔다. 원래의 라틴어 opus는 ‘필요’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uopo ‘우오포’, 복수형 uopi ‘우오피’로 이어졌지만 옛말이 되었고 이와는 별개로 원래의 라틴어 복수형에서 따온 opera가 이탈리아어에서는 ‘일’, ‘작품’ 등을 뜻하는 여성 단수 명사로 쓰인다(복수형은 opere ‘오페레’). 이게 16세기 무렵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공연 예술 형태인 ‘가극’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면서 영어 opera [ˈɒp(ə)ɹə] ‘오퍼라’, 독일어 Oper [ˈoːpɐ] ‘오퍼’, 프랑스어 opéra [ɔpeʁa] ‘오페라’ 등으로 차용되었다.
프랑스어로 ‘작품’을 뜻하는 œuvre [œvʁ] ‘외브르’도 라틴어 복수형 opera에서 나온 단수 명사이다(복수형은 단수형과 발음이 동일한 œuvres [œvʁ] ‘외브르’). 보통 여성 명사로 쓰이지만 한 미술가, 음악가, 작가의 전 작품을 총체적으로 이를 때는 남성 명사로 취급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의 로망어는 보통 라틴어의 남성, 여성, 중성 가운데 남성과 여성만 보존했다. ‘바다’를 뜻하는 라틴어 중성 명사 mare ‘마레’가 이탈리아어에서는 남성 명사 mare ‘마레’, 프랑스어에서는 여성 명사 mer [mɛʁ] ‘메르’가 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각 언어, 단어에 따라 원래의 중성 명사는 남성 명사가 된 경우도 있고 여성 명사가 된 경우도 있다.
영어에서 ‘작품’의 뜻으로 라틴어에서 차용한 opus [ˈoʊ̯pəs] ‘오퍼스’는 원래의 라틴어처럼 복수형으로 opera [ˈɒp(ə)ɹə] ‘오퍼라’를 쓰기도 하지만 규칙적 복수형 opuses [ˈoʊ̯pəsᵻz] ‘오퍼시스’로 쓰는 것이 흔하다. 그런데 음악계에서는 마치 라틴어 제2변화 명사인 것처럼 복수형을 opi로 쓰는 경우도 있나보다(발음은 [ˈoʊ̯paɪ̯] ‘오파이’로 추측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또 ‘오피(op)’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명사」 『음악』 음악 작품의 번호를 이르는 말. 생략하여 ‘op.’로 쓰며 작품의 제작 연대순으로 붙이는 작품 번호이다. =오푸스.
영어에서 op.는 본말인 opus처럼 [ˈoʊ̯pəs] ‘오퍼스’로 발음하거나 [ˈɒp] ‘옵’으로 발음하므로 이를 ‘오피’로 읽는 것은 적어도 영어에서 따온 것은 아닌 듯한데 혹시 음악계에서 드물게 opus의 복수형으로 opi를 쓰기도 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리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라틴어 형용사 postumus ‘포스투무스’는 원래 ‘뒤에 오는’을 뜻하는 posterus ‘포스테루스’의 최상급형이다(이상 남성형이고 여성형은 각각 postuma ‘포스투마’, postera ‘포스테라’, 중성형은 각각 postumum ‘포스투뭄’, posterum ‘포스테룸’). 라틴어에서는 ‘마지막’을 뜻하며 특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태어난 마지막 아이를 이를 때 쓰였다. 그래서 오늘날 여기서 유래한 여러 단어는 보통 ‘죽은 이후’를 뜻한다. opus postumum도 ‘유작’의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라틴어 postumus에서 나온 영어 posthumous [ˈpɒstjʊməs] ‘포스튜머스’나 프랑스어 posthume [pɔstym] ‘포스튐’에는 철자에 h가 들어간다. 아마도 매장과 관련해서 ‘흙’을 뜻하는 humus ‘후무스’의 간섭을 받은 이철자 posthumus에서 나온 것이다.
라틴어에서는 후기에 h가 묵음이 되었고 특히 고대 그리스어에서 차용한 말에서 나타나는 th는 라틴어에서 t와 발음 구별이 잘 안 되었기 때문에 철자에 혼란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에서는 원어에 없던 h가 추가된 경우가 종종 있다. ‘작가, 저자’를 뜻하는 영어 author [ˈɔːθəɹ] ‘오서’는 라틴어 auctor ‘아우크토르/아욱토르’에서 나왔는데 중세 프랑스어 철자 autheur에는 h가 들어가 있다(현대 프랑스어 철자는 auteur [otœʁ] ‘오퇴르’). 라틴어로 ‘원래의, 진정한’을 뜻하는 authenticus ‘아우텐티쿠스’의 간섭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면 한국어로 op. post.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유가 어찌되었든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단어이니 ‘오푸스포스투무스’로 써도 무난하겠지만 이를 풀어서 읽을 필요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런 약자를 쓰는 작품 번호는 글로 쓸 때는 로마자 그대로 쓰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음악계에서는 어떻게 쓰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