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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는 수십 년째 서점의 인문교양 코너에서 볼 수 있는 이름이다. 그의 《서양미술사》와 《곰브리치 세계사》는 각각 1970년대와 1990년대에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이래 끊임없는 인기를 누려왔다. 그런데 영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Gombrich의 발음은 [ˈɡɒmbɹɪk] ‘곰브릭’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써왔던 ‘곰브리치’는 잘못된 표기일까?
1909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이던 빈에서 에른스트 한스 요제프 곰브리히(Ernst Hans Josef Gombrich [ˈɛʁnst ˈhans ˈjoːzɛf ˈɡɔmbʁɪç])라는 이름의 아이가 루터교로 개종한 유대계 상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26세이던 1935년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독일어로 쓴 《어린 독자들을 위한 짧은 세계사(Eine kurze Weltgeschichte für junge Leser)》를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곧 나치 정권은 평화주의 시각을 문제삼아 금서로 지정하였고 곰브리히는 탄압을 피해 1936년에 영국으로 도피했다.
그 후 그는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며 이후 모든 작품을 영어로 썼다. 1947년에는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의 대표작이 된 미술사 입문서 《미술 이야기(The Story of Art)》는 1950년에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미술 평론가이자 시인인 최민(崔旻, 1944~2018)이 번역하여 1977년에 《서양미술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서양미술사》가 일반 대중을 위한 미술사 입문서라면 1960년작 《예술과 환영(Art and Illusion)》은 예술에 지각 심리학을 끌여들여 미술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학자로서의 대표작이다. 한국에는 백기수의 번역으로 1985년에 소개되었다.
독일어로 쓴 그의 첫 저서 《어린 독자들을 위한 짧은 세계사》는 1997년에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곰브리치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영어로는 번역판이 나오지 않았다. 말년에야 그는 스스로 이 저서를 개정하고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2001년에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05년에 그의 비서와 손녀가 번역을 마무리하여 영어판 《작은 세계사(A Little History of the World)》가 출판되었다. 그러니 영어보다 한국어 번역본이 먼저 출판된 경우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를 보면 초판 기준으로 《서양미술사》에서는 작가의 이름이 ‘E.H. 곰브리치’로, 《예술과 환영》에서는 ‘에른스트 곰브리치’로 나온다. 영어로 나온 저서에서는 작가의 이름을 줄곧 E. H. Gombrich로 썼지만 독일어로 된 첫 저서에서는 Ernst H. Gombrich로 썼다. 영어로 된 저서가 먼저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니 Gombrich를 영어 이름으로 보고 ‘곰브리치’로 표기했을 것이다.
독일어에서 [x] ‘흐’나 [ç] ‘히’로 발음되는 철자 ch는 영어에서 [k]로 흉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위스 도시 취리히(Zürich [ˈʦyː⟮ʏ⟯ʁɪç])는 영어로 Zurich [ˈz(j)ʊə̯ɹɪk] ‘주릭’으로 발음한다. 독일 유대계 부모에게 태어난 미국 팝아트 거장 로이 릭턴스타인(Roy Lichtenstein [ˈɹɔɪ̯ ˈlɪktənstaɪ̯n], 1923~1997)의 성씨에서도 독일어 Lichtenstein [ˈlɪçtn̩ʃtaɪ̯n] ‘리히텐슈타인’의 ch [ç]를 영어에서 [k]로 흉내낸다. 그래서 Gombrich를 독일어 성씨로 보는 경우 보통 영어판 위키백과의 설명대로 [ˈɡɒmbɹɪk] ‘곰브릭’으로 발음하게 된다. 그를 인터뷰한 동영상에서 미국인 방송 진행자가 Ernst Gombrich을 [ˈɜːɹnst ˈɡɒmbɹɪk] ‘언스트 곰브릭’으로 발음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973년에 그와 《자연과 예술에 나타나는 환영(Illusion in Nature and Art)》을 공동 집필한 영국 심리학자 리처드 그레고리(Richard Gregory [ˈɹɪʧəɹd ˈɡɹɛɡəɹi], 1923~2010)는 그를 회고하면서 독일어 발음을 더 흉내내어 [ˈɛə̯ɹnst ˈɡɒmbɹɪk] ‘에언스트 곰브릭’으로 발음한다. 그의 강연을 소개하는 영국인 사회자는 한층 더 떠 아예 마지막 자음을 마찰음 [x]로 흉내낸 [ˈɡɒmbɹɪx] ‘곰브리흐’를 쓰는 듯하다. 영어 화자에 따라 독일어를 흉내낼 때 영어 고유 단어에는 나타나지 않는 음인 [x]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독일어에서 유래한 영어권 성씨에서도 원어 발음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지면서 철자식 발음을 쓰는 경우가 있다. 미국 정치가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 [ˈnjuːt ˈɡɪŋɡɹɪʧ], 1943~), 미국 배우 스키트 얼리치(Skeet Ulrich [ˈskiːt ˈʌlɹɪʧ], 1970~) 등의 성씨는 독일어에서 유래했지만 ch를 영어 철자식으로 [ʧ]로 발음한다. 스위스 독일어 성씨 Güngerich의 이형이라고도 하는 Gingrich는 독일어권 성씨로도 검색되며 독일어 발음은 [ˈɡɪŋʁɪç] ‘깅리히’로 짐작할 수 있고 Ulrich는 독일어로 [ˈʊlʁɪç] ‘울리히’로 발음되는 이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국에서 태어나 인도학자이자 불교학자로 나름 명성을 얻은 리처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ˈɹɪʧəɹd ˈɡɒmbɹɪʧ], 1937~)는 ch를 [ʧ]로 발음한다(동영상). 전 오페라 가수이자 교육자인 손자 칼 곰브리치(Carl Gombrich [ˈkɑːɹl ˈɡɒmbɹɪʧ], 1965~)도 마찬가지이다(동영상).
독일어 모어 화자인 Ernst Gombrich 본인은 영어로 어떻게 발음했는지 관찰할 수 있는 동영상은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또 영어권 인명의 발음을 찾을 때 주로 참고하는 《BBC 영국 이름 발음 사전》이나 《롱맨 발음 사전》, 《케임브리지 영어 발음 사전》, 《라우틀리지 발음 사전》, 《현대 영국 영어 사전》 등의 발음 사전이나 《메리엄·웹스터 인명 사전》에도 Gombrich는 실려 있지 않다. 하지만 《옥스퍼드 학습자 사전》에는 E H Gombrich의 영국식 발음이 /ˌiː eɪtʃ ˈɡɒmbrɪtʃ/, 미국식 발음이 /ˌiː eɪtʃ ˈɡɑːmbrɪtʃ/ 즉 ‘이에이치 곰브리치’로 나온다. 다른 영어 화자들이 Gombrich를 [ˈɡɒmbɹɪʧ] ‘곰브리치’로 발음한 예도 쉽게 찾을 수 있다(동영상 1, 동영상 2).
물론 독일어 모어 화자인 Ernst Gombrich 본인도 영어 철자식 ‘곰브리치’라는 발음을 썼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영어 철자식 발음은 그의 아들 대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짙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발음이 그를 이를 때 영어권에서 많이 쓰이는 발음이라면 ‘곰브리치’라는 표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곰브릭’과 ‘곰브리치’ 둘 다 일리가 있는 표기이며 이미 친숙해진 ‘곰브리치’를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
Gombrich를 영어 발음에 따라 적는다면 Ernst도 영어 발음 [ˈɜːɹnst]에 따라 ‘언스트’로 적어야 하지 않을까? 앞서 보았듯이 이 이름은 원 독일어 발음을 얼마나 흉내내느냐에 따라 영어로 [ˈɛə̯ɹnst] ‘에언스트’로 실현되기도 하니 그냥 독일어 이름으로 취급하여 [ˈɛʁnst] ‘에른스트’로 적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의 영어 저서에서 저자 이름을 아예 E. H. Gombrich로 표기한 것은 독일어 이름을 영어로 어떻게 발음하냐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어 모어 화자이니 이름과 성씨 모두 독일어로 취급해서 ‘에른스트 곰브리히’로 썼으면 간단했을 것이다. 똑같이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하여 영어로 저서를 남긴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ˈfʁiːdʁɪç ˈhaɪ̯ɛk], 1899~1992)는 독일어 이름으로 취급하여 표기한다. 하지만 E. H. Gombrich라는 이름으로 쓴 영어 저서가 먼저 한국에 소개되었으니 영어식 표기인 ‘곰브리치’를 썼다고 해서 이를 탓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