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모로코 북부 해안에 있는 에스파냐의 역외 영토인 세우타에 5~6만 명이 한꺼번에 무단 진입하면서 최소 60명의 사망자를 내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들 가운데 적어도 4만 8300명은 몇 시간만에 모로코로 돌아갔고 세우타로부터 유럽으로 향한 이는 전무했지만 유럽의 극우파 정치인들은 이민에 우호적인 에스파냐 정부의 정책 때문에 일어난 사태라며 공세를 펴고 있다.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와의 솅겐 협정을 일시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에스파냐 총리 페드로 산체스는 지난 5년 간 밀입국자의 수는 이탈리아가 에스파냐의 두 배를 기록하는 등 에스파냐의 국경 통제가 유럽 연합에 속하는 다른 지중해 국가에 비해 성공적이었다는 통계를 들어 반박했다.
에스파냐에 속하는 자치 도시인 세우타는 유럽 연합의 일부이자 국경 통제 없는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는 솅겐 지역의 일부이지만 특수 규정이 적용되어 그곳으로부터 배나 비행기를 타고 에스파냐 본토를 비롯한 다른 유럽 연합 지역으로 떠나는 모든 여객은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모로코 북부 해안에 속하는 또다른 에스파냐령 자치 도시인 멜리야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모로코 북부 해안에는 자치 도시인 세우타(Ceuta)와 멜리야(Melilla)를 비롯하여 벨레스데라고메라(Vélez de la Gomera) 바위, 알루세마스(Alhucemas) 제도, 차파리나스(Chafarinas) 제도, 페레힐(Perejil)섬 등 에스파냐에 속하는 역외 영토가 군데군데 있다. 세우타와 멜리야를 제외하면 나머지 영토에는 주민이 없고 에스파냐 군인들이 상주할 뿐이다. 이들은 어떻게 에스파냐 영토가 되었을까?
가장 좁은 곳의 폭이 14.2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둔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 지역은 예로부터 역사가 서로 밀접하게 얽혔다. 297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면서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있는 속주들을 묶어서 신설한 히스파니아(Hispania) 관구에 오늘날의 모로코 북부에 해당하는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Mauretania Tingitana) 속주도 같이 포함하였다. 5세기 초에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한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은 429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수년 후 북아프리카 해안 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반달 왕국을 세웠다.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상실되었던 영토의 재정복에 나서 533년에 반달 왕국을 무너뜨리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북아프리카를 다시 지배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팅기스(Tingis)와 셉템(Septem)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팅기스는 모로코의 항구 도시 탕헤르의 옛 이름이고 셉템은 세우타의 옛 이름이다. 550년대에 동로마군은 이베리아반도 남부 영토도 일부 되찾았으며 591년에는 오늘날의 튀니지에 있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총독부를 세웠는데 북아프리카 해안 서부와 함께 이베리아반도 남부 영토도 이 아프리카 총독부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지배는 647년에 시작된 이슬람 제국의 북아프리카 정복으로 끝이 났다. 709년에 북아프리카 정복을 완성한 우마이야 왕조는 711년에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여 10년 내에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750년에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자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우마이야 왕가의 압둘라흐만 1세가 아바스 왕조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756년에 오늘날의 에스파냐에 속하는 코르도바(Córdoba)를 수도로 하는 독립국을 세웠다. 우마이야조 코르도바 왕국은 안달루스(الأندلس al-ʾAndalus)라고 불린 이베리아반도 영토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모로코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일부도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 안달루스는 이슬람 세계와 유럽을 잇는 문화적·과학적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에 오늘날의 모로코에서 일어난 베르베르계 무라비트 왕조와 무와히드 왕조가 차례로 안달루스를 다스리면서 지브롤터 해협 양쪽에 영토를 거느렸으며 이베리아반도 최후의 이슬람계 독립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도 북아프리카에 일부 영토가 있었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의 북부에 잔존했던 기독교계 세력들도 다시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합친 이른바 카스티야 왕관이라고 불린 복합국(이하 카스티야)은 이베리아반도 중앙부를 차지하였으며 남하를 계속하여 13세기 중반에 이베리아반도의 남쪽 해안 일부에까지 이르렀다. 서쪽으로는 레온 왕국으로부터 12세기에 독립한 포르투갈 왕국이 이베리아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정복 활동을 계속하여 비슷한 시기에 남쪽 해안까지 도달했다. 이들은 곧 지브롤터 해협 건너의 땅에도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1399년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군대가 당시 베르베르계 마린 왕조가 지배하던 지브롤터 해협 근처의 항구 도시 테투안(Tétouan)을 근거지로 하는 해적들을 토벌한다는 목적으로 침공하여 주민의 절반은 학살하고 절반은 노예로 끌어가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카스티야는 이로서 황폐가 된 테투안을 자기 땅으로 삼지는 않았다.
마린 왕조는 1411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당시 그라나다 왕국이 지배하던 지브롤터를 공격했고 이에 그라나다 왕국이 마린 왕조를 상대로 하는 반란을 선동하여 모로코 북부는 혼란에 빠졌다. 1414년에는 오늘날의 알제리 서북부를 중심으로 있던 틀렘센 왕국이 세우타를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 한편 1411년에 앙숙 카스티야와 평화 조약을 맺은 포르투갈 왕국의 주앙 1세는 항해 왕자로 알려진 엥히크(Henrique, 현행 규정에 따른 표기 ‘엔히크’)를 비롯한 왕자들을 앞세워 1415년에 세우타를 점령하였다. 무역의 요충지인 세우타의 부를 탐내서였기도 하고 지브롤터 해협 북쪽 해안을 선점한 카스티야에 맞서 남쪽 해안에 거점을 잡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전성기에 비해서 이미 상당히 쇠퇴한 세우타에서 약탈한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테투안 점령 후에 철수한 카스티야와 달리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계속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계속된 정복 활동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포르투갈은 15~16세기에 걸쳐 모로코의 서쪽 대서양 해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탕헤르를 비롯하여 아자모르(Azamor), 마자강(Mazagão), 산타크루스두카부드게(Santa Cruz do Cabo de Gué) 등이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이들은 각각 오늘날의 아제무르(Azemmour), 엘자디다(El Jadida), 아가디르(Agadir)에 해당한다. 옛 해적 소굴 안파(Anfa)에도 요새를 세웠고 이는 ‘하얀 집’이라는 뜻으로 카자브랑카(Casa Branca)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로 오늘날의 카사블랑카(Casablanca)이다.
이들 영토는 포르투갈 왕국 남부에 있던 명목상의 왕국인 알가르브(Algarve)에 포함되었다. 포르투갈이 이베리아반도에서 마지막으로 정복한 땅인 알가르브는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자체 기관이나 자치권이 없어 허울뿐이었지만 계속 왕국으로 불렸고 포르투갈 왕은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이라는 칭호를 썼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북아프리카 영토는 ‘바다 너머의 알가르브(Algarve de Além-Mar)’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편 1469년에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는 아라곤 왕관(아라곤 왕국과 카탈루냐 공국이 합친 복합 국가)의 페르난도(Fernando, 카탈루냐어: Ferran ‘페란’) 2세와 혼인하여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공동 왕이 되었다. 법적으로는 18세기 초까지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별도의 국가로 유지되었지만 같은 군주가 다스리면서 하나의 복합 국가 같은 성격을 띄었으므로 편의상 이때부터도 에스파냐라고 부른다. 이들은 1492년에 이베리아반도 최후의 이슬람계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기 이전에도 바다 건너의 땅에도 눈독을 들였다. 1476년에는 서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카보베르데를 공격하였고 포르투갈령 세우타를 잠시 점령하기도 하는 등 포르투갈이 이미 정복한 영토를 공략하기도 했으며 15세기 초부터 카스티야 귀족들의 정복 활동이 시작되었던 모로코 서쪽 대서양 연안의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원주민 관체족(guanches)의 저항을 굴복시키고 1496년에 정복을 완성했다. 관체족은 90% 이상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 가면서 수가 급감하여 17세기에는 그들의 언어도 사라졌으며 카나리아 제도는 오늘날에도 에스파냐 영토이다. 포르투갈은 지브롤터 해협 서쪽의 대서양 연안에 주력했지만 에스파냐는 그 동쪽의 지중해 연안으로 눈을 돌려 1497년에 모로코 북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멜리야를 손에 넣었다. 그 후에도 정복 활동을 계속하여 1509~1510년에는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해안에 오늘날의 알제리에 속하는 오랑(Oran), 알제(Alger), 베자야(Béjaïa) 및 리비아에 속하는 트리폴리(Tripoli)까지도 차지하였다. 그래서 당시 아라곤 왕관의 일부이던 이탈리아반도 남부 및 시칠리아섬, 사르데냐섬과 함께 지중해 해안선의 상당 부분이 에스파냐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새로 정복한 영토는 대부분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북아프리카의 많은 영토를 잃은 것은 포르투갈도 마찬가지여서 1541년에는 모로코의 사디 왕조에게 아제무르와 아가디르를 빼앗겼다. 북아프리카 영토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던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는 1578년에 지브롤터 해협 바로 서쪽에 있는 오늘날의 크사르엘케비르(Ksar el-Kebir) 근처에서 사디 왕조와 맞서 싸우다가 실종되었다. 그 뒤를 이은 추기경 출신의 엥히크도 1580년에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겨 결국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도 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같은 군주가 다스린 동군연합, 이른바 이베리아 연합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세우타에는 에스파냐 출신 주민이 많이 유입되었다. 그리하여 1640년에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으로 포르투갈이 독립을 되찾았을 때 세우타의 주민들은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가운데 유일하게 에스파냐 편을 들었다. 포르투갈은 1668년 리스본 조약을 통해 세우타를 공식적으로 에스파냐에 양도하였다.
한편 포르투갈 영토였던 탕헤르는 포르투갈 공주 카타리나(후에 캐서린 왕비)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 찰스 2세와 혼인하게 되면서 1661년에 지참 재산으로 잉글랜드에 넘겨졌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탕헤르의 방어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이를 포기하였고 1684년에 알라위 왕조가 다스리는 모로코 차지가 되었다(알라위 왕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도중인 1704년에는 부르봉가의 펠리페 5세 대신 합스부르크가의 왕위 계승 후보를 지지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 북쪽의 요충지 지브롤터를 점령했다. 점령군에 의한 약탈이 자행되자 지브롤터 주민들은 강력히 저항했으며 재산과 종교의 권리를 보장해주겠다는 연합군측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주둔군과 함께 대부분 지브롤터를 떠났다. 결국 합스부르크가 후보를 에스파냐 왕위에 올리려는 노력도 실패에 돌아갔지만 지브롤터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에 정식으로 양도되었다(잉글랜드는 1707년에 스코틀랜드와 합쳐 영국이 되었다). 지브롤터는 오늘날까지도 영국의 해외 영토이다.
1694년부터 수 년 간 모로코로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세우타는 해협 건너 지브롤터가 주 보급처였기 때문에 지브롤터 함락에 의한 타격이 컸다. 세우타는 1727년까지 자그마치 30년 넘게 계속된 포위 공격을 이겨냈지만 오래된 가문들이 떠나고 주로 에스파냐 남부 출신 방어군이 들어오면서 언어도 포르투갈어에서 에스파냐어로 바뀌고 통화도 포르투갈 통화에서 에스파냐 통화로 바뀌는 등 문화적인 변화를 겪었다.
한편 세우타를 에스파냐에 넘겼던 포르투갈은 1755년 리스본 지진 이후 카사블랑카에서 철수했고 1769년에는 모로코의 공세에 엘자디다도 포기하면서 북아프리카 영토를 모두 잃었다. 에스파냐는 1732년에 알제리의 오랑 및 근처 해안을 두 세기만에 다시 빼앗는 데 성공했지만 1790년에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 1792년에 철수하여 다시 오스만 제국의 차지가 되었다. 19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북아프리카에는 세우타, 멜리야 등 오늘날에도 에스파냐 영토인 곳만 에스파냐 영토로 남았다.
그러다가 1830년 프랑스가 명목상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알제리 정복에 나서면서 지역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의 유럽 열강들은 북아프리카 해안의 몇몇 도시를 차지하는데 그쳤지만 프랑스는 20세기 초까지 정복 활동을 계속하여 사하라 사막을 포함한 알제리 내륙까지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시에 모로코는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세우타의 경계에 관한 분쟁으로 시작된 1859~1860년의 에스파냐·모로코 전쟁에서 에스파냐가 승리하여 세우타, 멜리야 등에 대한 영구적인 통치권을 승인받았으며 모로코에 큰 배상금을 물었다.
알제리 정복을 완성한 프랑스는 1907년에 모로코 정복에도 나섰으며 1912년에 모로코를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선포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시에 세우타, 멜리야 등 에스파냐 영토를 포함한 북쪽 지대는 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삼기로 에스파냐와 합의하였다. 테투안은 에스파냐의 보호령의 수도가 되었다. 에스파냐의 보호령에 둘러싸였지만 에스파냐와 프랑스가 둘 다 다스리기 원했던 탕헤르는 1925년에 공식적으로 탕헤르 국제 지구라는 복잡한 지위를 얻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모로코 지배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56년까지 계속되었다. 에스파냐령 사하라(오늘날의 서사하라)에 접한 남부 일부 지역은 1958년에야 모로코에 넘겨졌다. 1956년에 독립을 되찾은 모로코는 세우타, 멜리야 등 에스파냐의 북아프리카 영토도 요구했지만 에스파냐는 16세기부터 이어진 불가분한 에스파냐 영토라는 입장이다. 동시에 에스파냐는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영국은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며 의논을 거부하고 있다. 2000년대 초에 영국은 에스파냐와 비밀리에 논의한 끝에 에스파냐와 지브롤터를 공동 통치하는 안을 내놓았지만 2002년에 주민 투표에서 99%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한편 모로코 남쪽에 에스파냐가 다스리던 식민지인 서사하라는 1975년에 에스파냐가 철수하면서 이듬해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차지하려 침공했지만 독립을 요구하는 폴리사리오 전선의 저항으로 모리타니는 퇴각했고 모로코는 영토의 70% 정도를 점령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제 사회는 서사하라를 아프리카의 마지막 식민지로 간주하며 모로코의 서사하라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2020년에 미국은 관례를 깨고 모로코와 이스라엘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대가로 모로코의 서사하라 지배를 공식 인정하는 첫 국가가 되었다. 2023년에는 이스라엘도 모로코의 서사하라 지배를 공식 인정했다.
세우타의 옛 이름인 Septem ‘셉템’은 주변의 일곱 언덕을 ‘일곱 형제’라는 뜻으로 라틴어로 Septem Fratres ‘셉템프라트레스’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Septum ‘셉툼’ 또는 Septa ‘셉타’로 불리기도 했으며 베르베르어로 ⵙⴻⴱⵜⴰ Sebta ‘세브타’, 아랍어로 سبتة Sabtah ‘삽타’가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이 쓰는 베르베르어는 단일 언어가 아니라 아프리카·아시아어족 베르베르 어파에 속하는 여러 언어의 통칭이다. 아랍어에서 ‘야만인’을 뜻하는 بربر barbar ‘바르바르’에서 온 이름이라고 해서 스스로는 베르베르인 대신 아마지그(ⴰⵎⴰⵣⵉⵖ Amaziɣ), 베르베르어 대신 타마지그트(ⵜⴰⵎⴰⵣⵉⵖⵜ Tamaziɣt)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편의상 여기서는 베르베르인, 베르베르어라고 부르기로 한다. 모로코 북부 등 북쪽 지역에서 쓰이는 베르베르어 가운데에는 폐쇄음의 마찰음화가 일어나서 예를 들어 원래의 [b]가 [β]로 변한 것이 많으니 Sebta는 ‘세브타’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찰음 [β]는 [w]로 변하기 쉬우니 포르투갈어 및 에스파냐어에서 Ceuta ‘세우타’가 된 것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라틴어에서 그대로 전해진 이름이라면 첫 음이 s가 되었을 텐데 베르베르어나 아랍어를 거친 형태라서 c가 되었다. 중세 포르투갈어나 에스파냐어에서 s는 얼핏 [s]와 [ʃ]의 중간 소리처럼 들리는 [s̺]로 발음되었기 때문에 다른 언어의 s는 e, i 앞에서 [ʦ̪], 후에 [s̪]로 발음된 c로 흉내 내었다.
Melilla ‘멜리야’는 아랍어 مليلية Malīlyah ‘말릴리아’에서 나온 이름인데 꿀과 관련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꿀은 μέλι(méli) ‘멜리’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mel ‘멜’이라고 한다. 또 ‘흰’을 뜻하는 베르베르어 어근 M-L-L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모로코에서 선호하는 표준 베르베르어 형태는 ⵎⵍⵉⵍⵜ Mlilt ‘믈릴트’인 듯하며 멜리야 현지에서 쓰이는 베르베르어인 리프어로는 발음이 변화하여 ⵎⵕⵉⵜⵛ Mṛitc ‘므리치’라고 한다. 멜리야에는 유럽계 주민들 외에 리프어를 쓰는 리프계(베르베르계) 주민들도 있어서 리프어가 에스파냐어와 함께 제2언어로 쓰인다. 그에 비해 세우타에서는 베르베르어가 별로 쓰이지 않고 주민의 절반 정도가 아랍계라서 대신 모로코 구어체 아랍어가 에스파냐어와 함께 제2언어로 쓰인다.
오늘날 모로코 지명은 모로코 구어체 아랍어 및 베르베르어 이름을 프랑스어식 철자로 적은 형태가 널리 알려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에스파냐어 형태로 친숙한 것도 드물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탕헤르는 에스파냐어 이름 Tánger를 기준으로 한 표기이다. 포르투갈어로는 Tânger ‘탄제르’, 프랑스어로는 Tanger [tɑ̃ʒe] ‘탕제’, 영어로는 Tangier [tænˈʤɪə̯ɹ] ‘탠지어’라고 하는데 한국어에서는 에스파냐어식 표기를 쓰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도 1956년까지 국제 지구이면서도 에스파냐의 보호령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랍어로는 طَنجة Ṭanjah ‘탄자’라고 한다.
아무래도 국제적으로 알려진 에스파냐어식 모로코 지명으로 대표적인 것은 카사블랑카(Casablanca)일 것이다. ‘하얀 집’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이름 카자브랑카(Casa Branca)를 에스파냐어로 그대로 옮긴 형태이다. 프랑스어로는 의역하지 않고 에스파냐어 철자를 그대로 쓰면서 발음만 프랑스어식으로 카자블랑카(Casablanca [kazablɑ̃ka])라고 한다. 역시 ‘하얀 집’이라는 뜻으로 문어체 아랍어로는 الدار البيضاء ad-Dāru-l-Bayḍāʾ ‘(아)다룰바이다’, 모로코 구어체 아랍어로는 d-Dār l-Biḍā ‘다를비다’라고 부르지만 모로코인들은 지금도 프랑스어식으로 카자블라카 혹은 카자(Casa [kaza])라고 흔히 부른다.
테투안은 에스파냐어 Tetuán에 따른 표기와 프랑스어 Tétouan [tetwan]에 따른 표기가 동일하다. 아마 베르베르어 이름이 아랍어를 거쳐 에스파냐어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베르베르어로 ‘(보는) 눈’ 또는 ‘샘’을 뜻하는 ⵜⵉⵟⵟ tiṭṭ ‘티트/테트’의 복수형인 ⵜⵉⵟⵟⴰⵡⵉⵏ tiṭṭawin ‘티타윈/테타윈’과 관련된 이름일 것이다(강세 자음 ṭ [tˤ] 옆에서 i가 변이음 [e]로 실현되는 것을 반영하느냐에 따라 ‘이’ 또는 ‘에’로 적을 수 있다). 오늘날 베르베르어로는 ⵜⵉⵟⵟⴰⵡⵉⵏ Tiṭṭawin ‘티타윈’이나 ⵜⵉⵟⵟⴰⵡⴰⵏ Tiṭṭawan ‘티타완’, ⵜⵉⵟⵡⴰⵏ Tiṭwan ‘티트완’이라고 하며 문어체 아랍어로는 تطوان Tiṭṭawān ‘티타완’, 모로코 구어체 아랍어로는 Tiṭṭawān ‘티타완/테타완’ 또는 Tiṭwān ‘티트완/테트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