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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달린 댓글에 답하면서 언급한 얘기인데 잘 알려진 미국 배우 덴젤 워싱턴은 의외로 2002년 6월 28일 제46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표준 표기가 ‘워싱턴, 덴절’로 정해진 바 있다. 하지만 Denzel Washington의 실제 발음은 [dɛnˈzɛl ˈwɒˑʃɪŋtən] ‘덴젤 워싱턴’이 맞다. ‘덴절’은 발음을 잘못 알고 정한 표기이다.
그러나 이는 괜히 까닭 없이 나온 표기가 아니다. 원래 영국 잉글랜드 서남부 콘월 지역의 지명에서 나온 이름인 Denzel의 전통 발음은 [ˈdɛnz(ə)l] ‘덴즐/덴절’이 맞다. 콘월에서는 원래 웨일스어처럼 켈트 어파 브리튼 어군에 속하는 콘월어를 썼다. 영어에 밀려서 18세기 말에 사어가 되었지만 20세기에 콘월어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되어 오늘날 오백여 명의 화자가 있다. 콘월어 및 웨일스어에서 din은 ‘요새’를 뜻하고 여기에 증대형 접미사를 붙인 dinas는 적어도 웨일스어에서는 ‘도시’의 뜻으로 쓰이므로 Denzel/Denzell/Denzil은 이 요소를 포함하는 콘월어식 지명에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Denzil이라는 이철자는 [ˈdɛnz(ə)l] ‘덴즐’ 또는 [ˈdɛnzɪl] ‘덴질’로 발음된다. [ə]나 [ɪ]로 발음되는 약화된 모음을 나타내는 약식 기호 [ᵻ]를 쓰면 [ˈdɛnz(ᵻ)l]로 표기할 수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정식으로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는 이른바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에 따르면 영어의 한글 표기에서 [ə]로 발음되는 철자 i는 ‘이’로 적어야 한다. 그런데 원래의 /əl, əm, ən/ 등이 성절 자음 [l̩, m̩, n̩]으로 발음되는 경우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는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라서 pencil [ˈpɛns(ᵻ)l] ‘펜슬’과 stencil [ˈstɛns(ᵻ)l] ‘스텐실’과 같이 표준 표기가 엇갈린다. 그래도 표기를 통일하자면 성절 자음으로 발음되는 경우에도 ‘이’로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표기 용례를 보면 카리브해 지역의 영어 사용국인 세인트키츠 네비스의 인명에서 Denzil을 ‘덴질’로 심의한 바가 있다.
Denzel의 전통 발음 [ˈdɛnz(ə)l]도 표기가 ‘덴즐’과 ‘덴절’이 가능한데 기존 용례를 보면 ‘덴절’ 외에는 Hazel [ˈheɪ̯z(ə)l] ‘헤이즐’, Caviezel [kəˈviːz(ə)l] ‘커비즐’과 같이 -zel /zəl/을 ‘즐’로 표기하고 있으니 표기 방식이 일관성이 있도록 통일한다면 ‘덴즐’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덴젤 워싱턴은 어떻게 [dɛnˈzɛl] ‘덴젤’이라는 발음을 쓰게 되었을까? 그는 예전에 한 토크쇼에서 이름의 발음에 대해 질문을 받고 원래 발음은 ‘덴즐’이었다고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도 이름이 Denzel ‘덴즐’이었다. 그런데 부자가 같은 이름을 써서 헷갈리자 어머니는 아들 이름의 발음을 바꾸어 ‘덴젤’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덴젤 워싱턴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스타로 떠올라서 1989년에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 2001년에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이전까지 드문 이름이었던 Denzel은 전통적인 발음과는 다른 [dɛnˈzɛl] ‘덴젤’이라는 발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5년에 태어난 미국 래퍼 덴젤 커리(Denzel Curry [dɛnˈzɛl ˈkʌɹi])도 이 신형 발음을 쓴다.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게르만 어파에 속하는 다른 언어처럼 영어도 고유 어휘에서는 명사의 첫 음절에 강세를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Michael [ˈmaɪ̯k(ə)l] ‘마이클’, Robert [ˈɹɒbəɹt] ‘로버트’, William [ˈwɪljəm] ‘윌리엄’ 등 영어에서 쓴 역사가 오래된 이름은 첫 음절에 강세가 올 확률이 높다.
콘월어와 웨일스어는 강세 규칙이 달라서 보통 끝에서 둘째 음절에 강세를 준다. 그래서 웨일스어 남자 이름 Maredudd [maˈɹɛdɨð] ‘마레디드’와 여기서 나온 영어 여자 이름 Meredith [ˈmɛɹədɪθ] ‘메러디스/메레디스’는 강세를 받는 음절이 다르다. 하지만 두 음절 이하의 이름에서는 웨일스어 남자 이름 Arthur [ˈarθɨr] ‘아르시르’와 여기서 나온 영어 Arthur [ˈɑːɹθəɹ] ‘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콘월어·웨일스어와 영어의 강세 음절이 일치한다. Denzel/Denzell/Denzil 역시 원래의 콘월어나 영어 발음에서는 첫째 음절에 강세를 주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프랑스어에서 들어온 이름에서는 마지막 음절에 강세를 주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어는 영어처럼 음절 강세를 통해 의미를 구별하지는 않지만 보통 어절의 마지막 음절에 강세를 싣는다. 오래 전에 차용한 남자 이름 Michael에서는 첫째 음절에 강세를 주지만 이에 대응되는 프랑스어식 여자 이름 Michelle은 마지막 음절에 강세를 주어 [mɪˈʃɛl] ‘미셸’로 발음하는 식이다. 또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에서 온 모음으로 끝나는 말에서는 끝에서 둘째 음절에 강세를 주는 경향이 강하다. Robert에 대응되는 이탈리아어나 에스파냐어 남자 이름 Roberto ‘로베르토’는 영어에서 끝에서 둘째 음절에 강세를 준 [ɹə⟮oʊ̯⟯ˈbɜːɹtoʊ̯] ‘로버토’로 발음한다.
여담으로 원어에서 끝에서 셋째 음절에 강세를 주는 경우에도 영어에서는 가장 흔한 강세 규칙을 적용하여 끝에서 둘째 음절에 강세를 주는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전 라틴어 Genua [ˈɡɛnua] ‘게누아’ 및 현대 이탈리아식 라틴어 Genua [ˈʤɛːnua] ‘제누아’, 이탈리아어 Genova [ˈʤɛːnova] ‘제노바’에 대응되는 영어 Genoa는 원어 발음에 따른 [ˈʤɛnoʊ̯ə] ‘제노아’로 발음하기도 하지만 강세 음절이 다른 [ʤə⟮ɛ⟯ˈnoʊ̯ə] ‘제노아’로 발음하는 일이 매우 흔하다. 에스파냐어 성씨 Álvarez [ˈalbaɾeθ] ‘알바레스’도 영어에서 Alvarez [ælˈvɑːɹɛz] ‘앨바레즈’로 발음하는 일이 흔하다.
오늘날 영어의 두 음절 명사에서 어느 음절에 강세가 오는지는 철자를 보고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만약 *Denzle이라는 철자로 썼다면 발음은 보나마나 첫째 음절에 강세를 준 [ˈdɛnz(ə)l] ‘덴즐’이다. 그런데 -el로 끝나는 두 음절 명사에서는 첫째 음절 강세와 둘째 음절 강세가 둘 다 가능하다. 고대 프랑스어에서 들어온 hostel은 영어화되어 첫째 음절에 강세를 주는 [ˈhɒst(ə)l] ‘호스틀/호스털’이고 같은 말의 근세 프랑스어 형태 hôtel에서 들어온 hotel은 프랑스어식 강세를 흉내낸 [hoʊ̯ˈtɛl] ‘호텔’이다(물론 외래어로서는 hostel에서 온 말도 관용에 따라 ‘호스텔’로 쓴다).
프랑스어식 강세를 쓰면 어감이 차이가 나서인지 전통적으로 첫째 음절에 강세가 있던 이름을 둘째 음절에 강세가 있도록 발음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유대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왕년의 미국 배우 조 맨텔(Joe Mantell [ˈʤoʊ̯ mænˈtɛl], 1915~2010)의 성은 원래 Mantel [ˈmænt(ə)l] ‘맨틀/맨털’이었는데 배우로 데뷔하면서 성의 철자와 발음을 바꿔서 Mantell [mænˈtɛl] ‘맨텔’이 되었다.
영국 소설가 힐러리 맨텔(Hilary Mantel [ˈhɪləɹi mænˈtɛl], 1952~2022)은 철자 Mantel을 쓰면서도 본인 성을 [mænˈtɛl] ‘맨텔’로 발음했다. TRAP 모음 /æ/의 음가가 [a] 정도로 하강했기 때문에 한국어 화자에게는 거의 ‘만텔’로 들릴 정도이다. 그런데 그가 부커(Booker)상을 수상한 직후인 2009년 11월 9일 실무소위에서는 Hilary (Mary) Mantel의 표기를 ‘맨틀, 힐러리 (메리)’로 심의했다. mantel은 벽난로의 윗면에 설치한 장식용 선반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서는 [ˈmænt(ə)l] ‘맨틀’로 발음되며 외래어로서 표준 표기도 ‘맨틀’이기 때문에 성도 똑같이 발음될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성씨 Mantel의 전통 발음도 아마 ‘맨틀’이었을 것이다. 미국 야구 선수 미키 맨틀(Mickey Mantle [ˈmɪki ˈmænt(ə)l], 1931~1995)의 성은 Mantel/Mantell의 이철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Mantel의 발음으로 강세를 바꾼 ‘맨텔’도 쓰이기 시작한 듯하다.
지난 글의 댓글에서 이 논의는 하비 카이텔(Harvey Keitel [ˈhɑːɹvi kaɪ̯ˈtɛl], 1939~)이라는 미국 배우의 성 Keitel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폴란드 출신 유대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성이니 독일어 Keitel [ˈkaɪ̯tl̩] ‘카이텔’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영어에서처럼 독일어에서도 /əl/을 성절 자음으로 발음하느냐에 따라 [ˈkaɪ̯təl] 또는 [ˈkaɪ̯tl̩]로 실현될 수 있으므로 영어와 발음 표기 방식을 일치시킨다면 [ˈkaɪ̯t(ə)l]로 적을 수 있겠지만 《두덴 발음 사전》 등 대부분의 발음 사전에서 보통 쓰는 방식에 따라 여기서는 [ˈkaɪ̯tl̩]로 적는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독일어의 [ə]를 ‘에’로 적는데 성절 자음으로 발음되는 경우에도 철자 e에 해당한다면 ‘에’로 적으므로 독일어 Keitel은 [ˈkaɪ̯tl̩]은 ‘카이텔’로 표기한다.
영어에서도 Keitel의 독일어 발음을 따른다면 [ˈkaɪ̯t(ə)l] ‘카이틀/카이털’이 되겠지만 본인은 [kaɪ̯ˈtɛl] ‘카이텔’로 발음한다. 독일어에서는 무강세 음절 e [ə]도 ‘에’로 적으므로 발음이 [ˈkaɪ̯tl̩]이든 [kaɪ̯ˈtɛl]이든 둘 다 ‘카이텔’이 되지만 영어에서는 강세 변화에 따라 한글 표기도 ‘카이틀/카이털’에서 ‘카이텔’로 달라진다.
영국 출신인 힐러리 맨텔의 예도 있지만 덴젤 워싱턴, 조 맨텔, 하비 카이텔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첫째 음절에 강세가 있던 두 음절 이름의 강세를 바꾸는 것은 미국에서 좀 더 흔한 듯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철자 -ell로 끝나는 두 음절 이름에서는 둘째 음절에 강세를 주는 경향이 강하다.
아일랜드에서 온 성인 Farrell은 아일랜드 배우 콜린 패럴(Colin Farrell [ˈkɒlᵻn ˈfæɹəl])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첫째 음절에 강세를 준다. 그런데 이를 변형시킨 이름을 쓰는 미국 가수 퍼렐(Pharrell [fəˈɹɛl], 1973~)은 둘째 음절에 강세를 준다. 또 Burrell은 전통적으로 [ˈbʌɹəl] ‘버럴’로 발음되는 성이지만 미국 배우 타이 버렐(Ty Burrell [ˈtaɪ̯ bəˈɹɛl], 1967~)은 둘째 음절에 강세를 준다.
고대 그리스어·영어 사전을 편찬하여 영어권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해본 이들에게는 잘 알려진 영국의 고전학자 헨리 리들(Henry Liddell [ˈhɛnɹi ˈlɪd(ə)l], 1811~1898)은 첫째 음절에 강세를 주었다. 《BBC 영국 이름 발음 사전》에서는 성씨 Liddell의 발음으로 [ˈlɪd(ə)l] ‘리들’과 [lɪˈdɛl] ‘리델’을 둘 다 제시하지만 헨리 리들은 전자였다고 명시한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장으로 있을 때 떠돈 익살스러운 시에서는 Liddell과 fiddle [ˈfɪd(ə)l] ‘피들’의 각운을 맞춘다.
I am the Dean, and this is Mrs Liddell,
She plays the first, and I the second fiddle.
저는 학장이고 이분은 제 처 리들입니다.
그는 제1바이올린, 저는 제2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영어 숙어에서 play second fiddle 즉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다’는 주역이 아닌 보조역을 맡는 것을 뜻한다. 헨리 리들의 딸 앨리스 리들(Alice Liddell [ˈælᵻs ˈlɪd(ə)l], 1852~1934)는 그의 친구인 루이스 캐럴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모델이 되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Henry Liddell과 Alice Liddell의 올바른 발음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영어에서도 자음 뒤의 -el, -ell /əl/을 ‘엘’로 적는 것으로 통일한다면 강세를 따질 필요가 없어서 표기가 간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Denzel은 전통 발음이든 신형 발음이든 ‘덴젤’로 적을 수 있고 마찬가지로 Mantel은 ‘맨텔’, Keitel은 ‘카이텔’로, Liddell은 ‘리델’로 표기를 통일할 수 있다. 호스텔(hostel)이나 러셀(Russell [ˈɹʌs(ə)l]), 캠벨(Campbell [ˈkæmb(ə)l]) 같이 관용으로 인정되는 불규칙 표기도 -el, -ell /əl/을 ‘엘’로 적은 예이다.
그러나 barrel [ˈbæɹəl] ‘배럴’, channel [ˈʧæn(ə)l] ‘채널’ 같이 공명음([l, m, n, ɹ] 등) 뒤에 오는 -el, -ell을 제외하더라도 Garfunkel [⁽ˈ⁾ɡɑːɹˈfʌŋk(ə)l] ‘가펑클’, snorkel [ˈsnɔːɹk(ə)l] ‘스노클’, travel [ˈtɹæv(ə)l] ‘트래블’, yodel [ˈjoʊ̯d(ə)l] ‘요들’처럼 성절 자음을 반영한 표기가 익숙한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행 표기 방식을 바꾸지 않더라도 실제 쓰는 발음에 따라 Denzel Washington의 표준 표기는 ‘덴젤 워싱턴’, Hilary Mantel의 표준 표기는 ‘힐러리 맨텔’로 바꿔야 하겠다. 다행히도 덴젤 워싱턴은 이미 ‘덴절’보다는 ‘덴젤’이라는 표기로 더 널리 알려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