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수리남계 축구 선수들이 영어식 이름을 쓰는 까닭

본 글은 원래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날짜는 페이스북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퀴라소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대해 쓴 어제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퀴라소의 현 감독은 예전에 한국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던 네덜란드의 딕 아드보카트(Dick Advocaat)이다. 1947년생으로 78세인 아드보카트는 역대 월드컵 본선 최고령 감독의 기록을 세울 수도 있다. 다만 1945년생인 루마니아의 미르차 루체스쿠(Mircea Lucescu, 현행 규정에 따른 표기는 ‘미르체아 루체스쿠’) 감독이 이끄는 루마니아가 유럽 지역 플레이오프를 통과하여 본선 무대까지 오른다면 그를 제치게 된다.

아드보카트는 2024년 1월에 퀴라소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그 전에 임시로 감독직을 맡았던 수리남 출신의 네덜란드인 딘 호레(Dean Gorré)가 코치로 남아서 그를 돕고 있다. 호레의 아들인 켄지 호레(Kenji Gorré)는 퀴라소 대표팀 선수로서 이번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세 골을 기록했다.

딘 호레는 수리남이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970년에 수리남에서 태어났고 일찌감치 네덜란드 본토에서 선수 활동을 시작했다. 1975년에 수리남이 독립하면서 수리남보다는 네덜란드 국적을 선택하여 네덜란드로 이주한 주민이 많았다. 수리남은 복수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축구 선수 지미 플로이드 하셀방크(Jimmy Floyd Hasselbaink)와 에드거 다비츠(Edgar Davids), 클래런스 세이도르프/세도르프(Clarence Seedorf)는 수리남 독립을 전후한 1972년과 1973년, 1976년에 각각 수리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네덜란드로 이주한 경우이다(네덜란드어 이름의 한글 표기는 현행 규정에 따른 표기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표기를 병기한다).

패트릭 클라위버르트/클뢰이베르트(Patrick Kluivert)는 수리남 출신 아버지와 퀴라소 출신 어머니 사이에 1976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영어식 이름을 쓰는 것이 특이하다. Edgar [ˈɛdɡəɹ] ‘에드거’, Clarence [ˈklæɹəns] ‘클래런스’, Patrick [ˈpætɹɪk] ‘패트릭’, Jimmy Floyd [ˈʤɪmi ˈflɔɪ̯d] ‘지미 플로이드’는 모두 영어식 이름이다.

잉글랜드는 1650년에 남아메리카의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오늘날의 수리남에 식민지를 세웠는데 1667년에 제2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령 니우암스테르담(Nieuw Amsterdam, 오늘날의 뉴욕)이 잉글랜드 차지가 되는 대신 수리남은 네덜란드령이 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식민지 시절에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영어를 쓰는 노예주들에게서 배운 언어에서 비롯된 영어 기반 크레올어가 계속해서 쓰여서 오늘날 수리남 주민 대부분이 구사하는 스라난 통고(Sranan Tongo)가 되었다. 아울러 탈출하여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룬 노예들의 후손인 머룬(Maroon)족도 다양한 영어 기반 크레올어를 쓴다.

수리남 주민의 60% 이상은 공용어인 네덜란드어를 모어로 쓰지만 일상에서는 스라난 통고가 여전히 교통어 구실을 하며 모어로 구사하는 이들도 꽤 있다. 수리남은 서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온 다양한 민족 배경 때문에 아라와크어, 카리브어 같은 다양한 원주민 언어 외에도 수리남 힌두스탄어(인도 어파 여러 언어의 교통어로 형성된 공통 언어), 인도네시아 자와섬에서 유래한 자와어, 중국 어파에 속하는 하카어(객가어), 더 최근에 들어온 브라질 출신 이민자들이 쓰는 포르투갈어 등 수많은 언어의 집합소이다. 스라난 통고는 서로 다른 언어 집단에 속하는 이들 사이의 교통어 역할을 한다.

스라난 통고는 영어를 기반으로 했지만 영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영어 화자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니 단순히 영어 기반 크레올어를 쓴다는 사실만으로 수리남에서 영어식 이름이 많이 쓰이는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리남 주민 대부분, 특히 젊은 세대는 영어도 구사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정해야 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이다. 주변의 카리브해 영어권 지역과의 교류와 문화적인 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수리남에서는 영어식 이름을 쓰는 일이 매우 흔하다. 대신 성씨는 배경에 따라 다른데 노예들은 성씨가 없다가 1863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 네덜란드어식 성씨를 얻게 되었다. 다른 이주민들은 물론 출신 배경에 따라 다양한 성씨를 쓴다.

예전에는 한국 언론에서 수리남계 선수들이 영어식 이름을 쓴다는 사실을 몰라서 네덜란드 인명은 무조건 네덜란드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했다. 1998년 8월 26일 제23차 외래어 심의회에서는 Edgar Davids의 표기를 ‘에드가르 다비츠’로 심의했는데 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이 추가된 후로는 표준 표기가 ‘엣하르 다비츠’로 바뀌었다. 네덜란드어 고유 단어에서 g는 마찰음 [ɣ]나 [x](보통은 사실 [x])로 발음되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ㅎ’으로 적는다.

하지만 Edgar Davids는 네덜란드어로 [ˈɛdɡɑr ˈdaːvɪts]로 발음한다. Edgar는 영어식 이름이기 때문에 원어 발음을 흉내내어 g를 폐쇄음 [ɡ]로 발음한다. 그러니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 제정 이전에 정했던 표기인 ‘에드가르 다비츠’가 실제 발음에 더 가깝다. 그런데 Edgar의 d는 네덜란드어의 음절말 무성음화 때문에 [t]로 변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뒤따르는 유성 폐쇄음 [ɡ] 때문에 [d]로 유지되는 것이다. 한글 표기에서는 그런 역행 유성음화까지 반영할 필요는 없으므로 [t]로 간주하여 현행 규정에서처럼 받침 ‘ㅅ’으로 적거나 ‘트’로 적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니 Edgar의 네덜란드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면 ‘엣가르’ 또는 ‘에트가르’로 적는 것이 낫겠다. 하지만 영어 이름으로 쳐서 ‘에드거’로 적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여담으로 Dick Advocaat [ˈdɪk ɑtfoˈkaːt]에서는 Advocaat의 음절말 d가 [t]로 발음되는데 뒤따르는 v가 폐쇄음이 아니라 마찰음이라서 앞의 [t]에 이끌려 [f]로 무성음화된다. 그렇다고 해서 순행 무성음화를 한글 표기에 반영하는 것은 무리이고 현행 규정에 따르면 ‘앗보카트’로 적어야 하며 [t]를 밧침 ‘ㅅ’ 대신 ‘트’로 쓴다면 ‘아트보카트’가 된다. 표준 표기인 ‘*아드보카트’는 이전부터 쓰던 관용을 인정한 것이다.

Clarence Seedorf는 한국 언론에서 ‘클라렌세 세도르프’로 흔히 썼고 2005년 후에는 ‘클라렌서 세이도르프’로도 불렸지만 네덜란드어 발음은 [ˈklɛrəns ˈseːdɔr(ə)f] ‘클레런스 세이도르프/클레렌스 세도르프’이다. Clarence의 영어 발음 [ˈklæɹəns] ‘클래런스’를 [ˈklɛrəns]로 흉내낸 것이다. 네덜란드어에 없는 음인 [æ]는 [ɛ]로 대체한다. 이는 영어의 한글 표기에서 [æ]를 한국어에서 [ɛ]로 발음되는 ‘애’로 쓰는 것과 비슷하다.

Patrick Kluivert도 예전에는 ‘파트리크 클루이베르트’로 흔히 썼고 2005년 후에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라는 표기도 볼 수 있는데 네덜란드어로는 [ˈpɛtrɪk ˈklœy̯vərt] ‘페트릭 클라위버르트/클뢰이베르트’로 발음된다. 여기서도 역시 영어 발음 [ˈpætɹɪk] ‘패트릭’을 흉내내면서 [æ]를 [ɛ]로 대체한다.

Jimmy Floyd Hasselbaink는 ‘지미 플로이트 하셀바잉크’ 내지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로 흔히 쓰는데 네덜란드어 발음은 영어 발음을 흉내낸 [ˈdʑɪmi ˈflɔi̯t ˈhasəlbɑŋk] ‘지미 플로이트 하셀방크’이다. Jimmy에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을 적용하면 ‘이미’이지만 네덜란드어를 잘 모르는 이들이 봐서도 영어식 이름이라는 것이 너무 확실했는지 그렇게 쓴 경우는 거의 없다. 주의할 점은 Hasselbaink를 네덜란드어에서는 마치 *Hasselbank로 쓴 것처럼 발음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어 발음을 따져서 Clarence ‘클레런스’, Patrick ‘페트릭’, Jimmy Floyd ‘지미 플로이트’와 같은 표기를 쓸 수도 있겠지만 철자에서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표기가 아니므로 꽤 번거롭다. 네덜란드어에서도 영어 발음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니 아예 영어 이름으로 취급하여 ‘클래런스’, ‘패트릭’, ‘지미 플로이드’로 적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수리남계 축구 선수로는 1984년생인 나이절 더용/데용(Nigel de Jong), 1986년생인 라이언 바벌/바벨(Ryan Babel), 1991년생인 버질 판데이크/반데이크(Virgil van Dijk), 패트릭 클라위버르트/클뢰이베르트의 아들인 1999년생 저스틴 클라위버르트/클뢰이베르트(Justin Kluivert) 등을 꼽을 수 있다. Nigel [ˈnaɪ̯ʤəl] ‘나이절’, Ryan [ˈɹaɪ̯ən] ‘라이언’, Virgil [ˈvɜːɹʤᵻl] ‘버질’, Justin [ˈʤʌstn] ‘저스틴’ 등은 모두 영어식 이름이며 네덜란드어로도 영어 발음을 흉내내서 [ˈnɑi̯dʑəl], [ˈrɑi̯ən, -ɑn], [ˈvəːrdʑɪl, ˈvɪr-], [ˈdʑəstɪn, ˈdʑʏs-] 정도로 발음한다. 마치 일반 네덜란드어 이름인 것처럼 ‘*니헐’, ‘*리안’, ‘*피르힐’, ‘*유스틴’으로 적으면 실제 발음과 너무 차이가 난다. 그래서 2019년 11월 22일 실무소위에서는 Ryan Babel을 ‘바벌, 라이언’으로로 적도록 했고 2019년 12월 20일 실무소위에서는 Virgil van Dijk를 ‘판데이크, 버질’로 적도록 했다.

수리남에서 태어난 딘 호레(Dean Gorré)도 영어식 이름 [ˈdiːn] ‘딘’을 쓴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에서 성장하고 퀴라소 대표로 뛰는 그의 아들 켄지 호레(Kenji Gorré)의 이름은 네덜란드어식도 아니고 영어식도 아니다. 얼핏 일본어식 이름 같은데 아마도 독특한 이름을 지어준 것 같다. 1987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수리남계 축구 선수 엘제로 엘리아(Eljero Elia)도 이름이 독특한데 미국의 재즈 가수 앨 저로(Al Jarreau [ˈæl ʤəˈɹoʊ̯])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네덜란드어로는 [ˈɛldʑəroː]로 발음한다.

Kenji나 Eljero에서 j는 영어의 [ʤ]를 흉내내어 [dʑ] 정도로 발음하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의 반모음 [j]인 것으로 오해하여 ‘*케니/켄이’, ‘*엘례로/엘리에로/엘예로’ 등으로 적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복수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수리남의 정책 때문에 네덜란드 등 해외에서 태어난 선수들은 그동안 수리남 대표팀에 모집할 수 없었는데 2010년대에 들어 수리남에서도 대표팀 전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책을 완화하여 수리남 디아스포라에서 유망한 선수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수리남 대표팀은 대다수가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2세들이다. 수리남은 2026년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있다. 내년 3월에 볼리비아와 맞붙어서 승리하면 이라크와 본선 진출을 놓고 겨룬다. 수리남은 지리적으로는 남아메리카 본토에 있지만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Concacaf)에 속하기 때문에 남아메리카 축구 연맹(Conmebol)에 속하는 볼리비아와는 소속 대륙이 다르다.

쉬운 일정은 아니지만 만약 수리남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퀴라소에 이어서 내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네덜란드어를 쓰는 나라가 넷이나 한 대회에 참가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리남에서는 다양한 언어가 쓰이므로 이름을 표기할 때 모조리 네덜란드어 이름인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공유하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