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 부통령 딕 체니는 사실 ‘치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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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부통령을 지내면서 역대 미국 부통령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주도했던 딕 체니가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이름 Dick Cheney는 영어로 보통 [ˈdɪk ˈʧeɪ̯ni]라고 발음하는데 외래어 표기 규정을 따르면 ‘딕 체이니’로 적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막상 딕 체니 본인은 성씨를 [ˈʧiːni] ‘치니’로 발음했다.

아버지처럼 정치가로 활동하는 그의 딸 리즈 체니(Liz Cheney)는 ‘체이니’인지 ‘치니’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은 발음을 쓰기도 하지만 분명히 ‘치니’로 발음하는 것이 관찰되기도 한다.

딕 체니의 아내인 린 체니(Lynne Cheney)는 2007년에 출연한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남편 성씨의 올바른 발음을 알아내려고 체니 집안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가장 나이 든 어르신 아브 아저씨(Uncle Arv)에게 여쭤 보았더니 ‘치니’가 맞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메리엄·웹스터 사전》에서는 정식 이름이 Richard Bruce Cheney인 딕 체니의 성씨 발음을 ˈchē-nē 즉 [ˈʧiːni] ‘치니’로 제시하고 흔하게(commonly) ˈchā- 즉 [ˈʧeɪ̯-] ‘체이-‘로도 발음된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콜린스 영어 사전》에서는 Cheney의 영국식 발음을 ˈtʃeɪnɪ 즉 [ˈʧeɪ̯ni] ‘체이니’로만 제시한다.

미국 언론에서는 Cheney의 발음으로 ‘체이니’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듯하다. 그가 부통령 취임식 때 선서를 하는 동영상을 찾아보면 선서의 말을 읽어주는 이는 ‘체이니’라고 발음하지만 본인은 따라 할 때 ‘치니’로 발음한다.

2009년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한 기자가 리즈 체니에게 발음이 ‘치니’가 맞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본인은 ‘체이니’를 쓴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말한 인터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리즈 체니가 본인의 성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답변하는 오디오가 담긴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디오를 자세히 들어보면 리즈 체니 본인이 쓴 발음이 [ˈʧeɪ̯ni] ‘체이니’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ˈʧiːni] ‘치니’일 수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 인터뷰한 기자는 그의 답을 듣고 [ˈʧeɪ̯ni] ‘체이니’라고 말했냐고 되물었지만 이 오디오만 가지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사실 발음 기호로는 [iː]로 적지만 오늘날 영어 방언 대부분에서 FLEECE 모음의 음가는 [ɪj~ɪi̯] 정도의 이중 모음이기 때문에 FACE 모음 [eɪ̯]로 잘못 들을 여지가 있다. 오디오에서 쓰는 발음은 리즈 체니가 다른 단어에서 쓰는 FACE 모음과 FLEECE 모음의 중간 정도 되기 때문에 ‘체이니’에 가깝게 들리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딕 체니 본인이 자연스럽게 쓴 발음은 ‘치니’인 반면 대다수 언론에서 쓰는 발음은 ‘체이니’이다. 다만 일부 언론에서도 ‘치니’라는 발음을 들을 수 있다. 전 방송인 크리스 매슈스(Chris Matthews)는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에 참석한 이가 ‘체이니’라고 발음하자 ‘치니’가 맞는데 왜 틀린 발음을 쓰냐고 다그친 적도 있다.

그런데 2000년 7월 28일 제34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그의 정식 이름인 Cheney, Richard의 표기를 ‘체니, 리처드’로 정했고 2005년 4월 26일 제62차 외래어 심의회에서도 별명 Cheney, Dick의 표기를 ‘체니, 딕’으로 정했다. 25년 전에 결정된 표기라서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Cheney의 발음이 [*ˈʧɛni]라고 오해했던 것 같다.

영어의 FACE 이중 모음 [eɪ̯]는 대부분의 방언에서 시작되는 음가와 끝나는 음가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고 심지어 방언에 따라 거의 [eː]에 가까운 단순모음으로 발음되는 경우도 있으니 얼핏 듣기에 그냥 한국어의 ‘에’라고 인식하기 쉽다. 그러니 영어 [ˈʧeɪ̯ni]를 듣고도 ‘체니’로 인식했을 수 있다.

영어의 FACE 모음 [eɪ̯]를 ‘에’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일본어를 거친 외래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FACE 모음을 보통 ē [eː] ‘에’ 또는 e [e] ‘에’로 받아들인다. 영어 page [ˈpeɪ̯ʤ] ‘페이지’, radiator [ˈɹeɪ̯dieɪ̯təɹ] ‘레이디에이터’는 각각 ページ[pēji] ‘페지’, ラジエーター[rajiētā] ‘라지에타’가 되고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등의 range [ˈɹeɪ̯nʤ] ‘레인지’, stainless [ˈsteɪ̯nlᵻs] ‘스테인리스’는 각각 レンジ[renji] ‘렌지’, ステンレス[sutenresu] ‘스텐레스’가 된다. 한국어에서도 표준어로 인정되는 외래어 형태는 ‘페이지’, ‘*라디에이터’, ‘레인지’, ‘스테인리스’이지만 입말이나 비표준 표기로는 일본어 형태에 가깝게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Cheney를 ‘체니’로 적게 된 것은 일본어를 거쳤기 때문이 아니라 영어 철자의 영향이 클 것이다. Cheney라는 철자에서 FACE 모음 [eɪ̯]가 쓰인다고 짐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의 a, ai, ay, ei, ey 같은 철자가 [eɪ̯]로 발음되는 것은 익숙하지만 다른 모음자가 따르지 않는 e가 [eɪ̯]로 발음되는 것은 생소한 이가 많을 것이다.

보통 이런 예는 차용어에서 나타난다. 영어에서도 다른 언어의 [e] 비슷한 전설 비원순 중모음을 흉내낼 때 DRESS 모음 [ɛ] ‘에’ 대신 FACE 모음 [eɪ̯] ‘에이’를 쓰거나 둘이 혼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의 Émile [emil] ‘에밀’에서 온 영어 남자 이름 Emile은 [ɛˈmiːl] ‘에밀’로 발음하기도 하고 [eɪ̯ˈmiːl] ‘에이밀’로 발음하기도 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유래한 성씨 Carnegie는 영국식 발음에서 [kɑːɹˈnɛɡi] ‘카네기’ 또는 [kɑːɹˈneɪ̯ɡi] ‘카네이기’가 혼용된다. 원래의 스코트어(Scots language) 발음은 스코트어 특유의 장모음 [ɛː]를 쓴 [kɑrˈnɛːɡi]인데 [ɛː]를 DRESS 모음 [ɛ]로 흉내내느냐 FACE 모음 [eɪ̯] ‘에이’로 흉내내느냐에 따라 영어 발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스코트어는 중세 영어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영어와 매우 가까운 자매 언어 관계이다. 아일랜드어에 가까운 켈트 어파 언어인 스코틀랜드 게일어(Scottish Gaelic)와 스코트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철강 산업에 뛰어들어 갑부가 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스코트어식 발음 [kɑrˈnɛːɡi]를 썼는데 이를 두고 [kɑːɹˈneɪ̯ɡi] ‘카네이기’라고 발음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 본인 발음을 존중한다면 [ɛː]를 기준으로 ‘에’로 적어서 ‘카네기’로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편 특히 미국에서는 Carnegie를 첫째 음절에 강세를 주어 [ˈkɑːɹnəɡi] ‘카너기’로 발음하는 것이 보통이다. 앤드루 카네기의 이름을 딴 뉴욕시의 공연장 Carnegie Hall은 언제나 [ˈkɑːɹnəɡi ˈhɔːl] ‘카너기 홀’로 발음된다.

에스파냐어 San Diego ‘산디에고’, Las Vegas ‘라스베가스’에서 온 미국 도시 이름인 San Diego [ˈsæn-diˈeɪ̯ɡoʊ̯] ‘샌디에이고’, Las Vegas [lɑːs-ˈveɪ̯ɡəs] ‘라스베이거스’는 민간에서 흔히 ‘*샌디에고’, ‘*라스베거스’로 적지만 표준 표기에서는 FACE 모음을 살린다.

한편 아마존 창업자인 Jeff Bezos [ˈʤɛf ˈbeɪ̯zoʊ̯s] ‘제프 베이조스’는 2010년 10월 13일의 제93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베저스’로 표기를 정했다가 2017년 12월 6일 제136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베이조스’로 표기를 수정하는 혼란을 겪었다. Bezos는 원래 에스파냐어 성씨 Bezos ‘베소스’에서 왔다.

일본어에서 흉내내는 방식의 예로 든 page, radiator, range, stainless 등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살핀 여러 용례의 공통점은 다른 언어에서 영어로 차용된 말에서 철자 e가 원어의 [e], [ɛː] 등을 흉내내어 FACE 모음 [eɪ̯]로만 발음되거나 FACE 모음 [eɪ̯]와 DRESS 모음 [ɛ]가 혼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영어에서 [eɪ̯]로 발음하더라도 ‘에’로 적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니 Cheney [ˈʧeɪ̯ni]를 ‘체니’로 적는 것은 규정에 어긋나지만 관용으로 인정되는 예외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아예 철자 e가 [eɪ̯]로 발음되더라도 ‘에’로 적는 규칙을 추가해서 ‘체니’를 규범 표기로 삼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다. 그러면 적어도 영국식 발음에 따른 Carnegie의 표기는 이미 표준 표기로 정해진 ‘카네기’로 통일할 수 있다(미국식 [ˈkɑːɹnəɡi]도 ‘카네기’로 적는 것이 좋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대신 San Diego ‘샌디에이고’, Las Vegas ‘라스베이거스’, Bezos ‘베이조스’는 ‘샌디에고’, ‘라스베거스’, ‘베조스’로 표기를 수정해야 하겠지만 아마도 그에 따른 반발은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Cheney는 원래 ‘떡갈나무’, ‘참나무’를 뜻하는 중세 프랑스어 chesne에 접미사 -ei/-ai가 붙어 ‘떡갈나무 숲’을 뜻한 chenei에서 왔다. 현대 프랑스어의 chêne [ʃɛn] ‘셴’과 chênaie [ʃɛnɛ] ‘셰네’에 해당되며 프랑스어 성씨로는 Chesney/Chesnay [ʃɛnɛ] ‘셰네’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영어 발음으로는 [ˈʧeɪ̯ni] ‘체(이)니’와 [ˈʧiːni] ‘치니’가 둘 다 쓰인다.

중세 영어에서는 첫 모음이 [ɛː] 정도로 발음되었겠지만 영어의 대모음 추이(Great Vowel Shift)를 겪으면서 meat 같은 단어에 쓰였던 중세 영어의 [ɛː]가 현대 영어의 FLEECE 모음 [iː]로 발음이 바뀌었으니 Cheney도 규칙적인 변화를 겪었다면 [ˈʧiːni] ‘치니’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break [ˈbɹeɪ̯k] ‘브레이크’, great [ˈɡɹeɪ̯t] ‘그레이트’ 같은 일부 단어에서는 중세 영어의 [ɛː]가 [iː] 대신 FACE 모음 [eɪ̯]로 변했으니 Cheney도 비슷한 불규칙 변화를 겪었다면 [ˈʧeɪ̯ni] ‘체(이)니’가 되었을 것이다. 《BBC 영국 이름 발음 사전》에서는 성씨 Cheney의 가능 발음으로 [ˈʧeɪ̯ni] ‘체(이)니’와 [ˈʧiːni] ‘치니’를 둘 다 제시한다.

영어 철자 ea가 [eɪ̯]로 발음되는 것은 아주 흔하지는 않더라도 종종 있는 일이므로 한글로 표기할 때는 ‘에이’로 적는 것이 좋다. 여기서 e가 [eɪ̯]로 발음될 때 ‘에’로 표기하자고 하는 것은 e 뒤에 다른 모음자가 따르지 않을 때의 이야기이다.

딕 체니 본인은 사실 ‘치니’로 발음했다고 해도 익숙한 표기를 바꿀 필요까지 있을지는 의문이다. 언론을 통해 익숙한 발음인 [ˈʧeɪ̯ni]를 기준으로 하되 [eɪ̯]로 발음되는 철자 e를 ‘에’로 적어서 ‘체니’로 쓰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대신 영어에서 쓰는 Cheney의 표기를 전부 ‘체니’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메리엄·웹스터 인명 사전》에서는 미국 성공회 성직자 찰스 에드워드 치니(Charles Edward Cheney, 1836~1916)의 성씨를 \ˈchē-nē\ 즉 [ˈʧiːni]로 제시한다. 오늘날에도 Cheney라는 성을 가진 이 가운데는 ‘치니’로 발음하는 이들이 많다. 본인 발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한글 표기에서도 이를 존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소도시 Cheney나 캔자스주에 있는 소도시 Cheney는 [ˈʧiːni]로 발음되므로 ‘치니’로 표기하는 것이 좋겠다.

딕 체니에 대한 수많은 논란 가운데 성씨의 발음과 한글 표기에 관한 것이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본인이 쓰는 발음과 다른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는 발음이 다를 때 어느 쪽을 한글 표기의 기준으로 삼을지는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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