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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보석이나 시계, 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프랑스의 명품 상표인 Van Cleef & Arpels는 한국에서 ‘반클리프 아펠’이라고 쓴다. 그런데 올바른 프랑스어 발음을 따르면 ‘반클레프 아르펠스’ 정도로 써야 한다. ee는 영어식으로 발음되지 않으며 끝의 s는 묵음이 아니다.
파리에서 다이아몬드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난 알프레드 반클레프(Alfred Van Cleef [alfʁɛd van-klɛf], 1872~1938)는 1895년에 역시 파리에서 태어난 에스텔 아르펠스(Estelle Arpels [ɛstɛl aʁpə⟮ɛ⟯ls], 1877~1960)와 결혼했다. 에스텔의 아버지 살로몽 아르펠스(Salomon Arpels [salɔmɔ̃ aʁpə⟮ɛ⟯ls], 1846~1903)는 보석 거래상이었고 알프레드와 살로몽은 1896년부터 Van Cleef & Arpels라는 이름으로 동업을 시작했다. 살로몽이 세상을 떠난 후인 1906년에 알프레드는 에스텔의 동생 샤를(Charles [ʃaʁl], 1880~1951)과 쥘리앵(Julien [ʒyljɛ̃], 1884~1964)와 함께 파리 중심부의 방돔(Vendôme [vɑ̃dom]) 광장에 정식으로 업소를 차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살로몽 아르펠스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는데 Salomon Arpels의 네덜란드어 발음 [ˈsaːlomɔn ˈɑrpəls]에 따라 표기하면 ‘살로몬 아르펄스’이다. 알프레드 반클레프의 친할아버지도 네덜란드 출신 유대인이었고 알프레드는 에스텔과 샤를, 쥘리앵과 사실 사촌 관계였다.
네덜란드어 성씨 van Cleef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판클레이프’이지만 네덜란드어 발음 [vɑn-ˈkleːf → vɑŋˈkleːf]에 따른 표기는 ‘반클레프’가 더 나을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은 어두 /v/가 [f]로 무성음화하고 /eː/가 [eɪ̯] 정도의 이중모음이 되는 현대 네덜란드 북부 발음을 지나치게 의식했지만 네덜란드어권 전체의 발음을 대표하려면 전통적인 발음에 가까운 표기가 바람직하다. 앞으로 네덜란드어의 표기는 ‘판클레이프/반클레프’와 같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와 전통 네덜란드어 발음에 가까운 표기를 병기하도록 한다.
van Cleef는 독일 서북부 네덜란드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인 클레베(Kleve [ˈkleːvə]) 출신이라는 뜻의 성씨이다. 클레베를 네덜란드어로는 Kleef [ˈkleːf] ‘클레이프/클레프’라고 하며 Cleef는 Kleef의 이철자이다. ‘~의’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전치사 van [vɑn] ‘판/반’은 성씨에 많이 쓰이는데 독일어의 von [fɔn]이 흔히 귀족 성씨를 나타내는 것과 달리 네덜란드어의 van은 대부분 귀족과 관계가 없는 성씨에 쓰이는 매우 흔한 요소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문장 첫머리에 오지 않는 한 van Cleef와 같이 v를 소문자로 쓰지만 프랑스에 건너온 가문은 Van Cleef와 같이 v를 대문자로 쓴다. 참고로 벨기에에서는 네덜란드와 달리 성씨의 첫 요소로 나타나는 경우 언제나 대문자를 써서 Van으로 쓴다.
네덜란드어에서 온 성씨이기 때문에 프랑스어 화자들도 Van Cleef를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ee를 영어에서 [iː]를 나타내는 철자라고 생각하고 [van-klif] ‘반클리프’ 또는 [vɑ̃-klif] ‘방클리프’로 발음하거나 Cleef를 Clef [kle] ‘클레’의 이철자로 생각하고 [van-kle] ‘반클레’나 [vɑ̃-kle] ‘방클레’로 발음하는 식이다. 하지만 Van Cleef 가문이 쓰는 올바른 발음은 네덜란드어 발음을 흉내낸 [van-klɛf] ‘반클레프’이다.
네덜란드어 ee [eː]는 [e]로 흉내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겠지만 프랑스어에서는 보통 폐음절(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서 [e]가 쓰일 수 없기 때문에 [ɛ]로 대체된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e]와 [ɛ] 둘 다 ‘에’로 적으므로 한글 표기에는 영향이 없다.
그러니 네덜란드어 표기 방식을 고쳐서 Van Cleef를 ‘판클레이프’ 대신 ‘반클레프’로 적으면 Van Cleef의 프랑스어 발음에 따른 표기 ‘반클레프’와 같아진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이지만 프랑스어에서는 네덜란드 북부식 발음을 흉내내어 ee를 ‘에이’ 같은 이중모음으로 발음하는 일이 없다.
네덜란드어 성씨로 간주하고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Arpels [ˈɑrpəls]는 ‘아르펄스’가 되지만 두 음절 이상의 단어에서 마지막 음절의 e를 ‘어’로 적는다는 규정은 문제가 있다. 보통 마지막 음절은 강세가 없기 때문에 e가 [ə]로 발음되는 것을 고려한 규정이지만 예외도 수두룩하다. 네덜란드의 도시 Arnhem [ˈɑr(ə)nɦɛm, ˈɑrnɛm]이나 Enschede [ˈɛnsxədeː]는 발음에 따라 적으면 ‘아른헴’이나 ‘아르넴’, ‘엔스허데(이)’이지만 이 규정 때문에 표준 표기는 엉뚱하게 ‘아른험’, ‘엔스헤더’가 되었다. 독일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등 영어를 제외한 다른 게르만어의 표기에서는 e [ə]를 ‘에’로 적으니 네덜란드어에서도 e의 표기를 ‘에’로 통일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러면 네덜란드어 Arpels는 ‘아르펄스’보다는 ‘아르펠스’로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어말 s는 묵음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프랑스어 화자들은 Arpels의 s도 묵음으로 처리하기 쉽다. 하지만 아버지가 네덜란드 출신인 프랑스의 소설가 Joris-Karl Huysmans [ʒɔʁis-kaʁl ɥismɑ̃s]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나 벨기에 화가 Raphaëlle Goethals [ʁafaɛl ɡutals] ‘라파엘 구탈스’, 벨기에 사진작가 Willy Kessels [wili kɛsɛls] ‘윌리 케셀스’, 벨기에 유도 선수 Gabriella Willems [ɡabʁie⟮ɛ⟯la wilɛms] ‘가브리엘라 윌렘스’ 등 네덜란드어식 성씨를 쓰는 프랑스어권 인명에서 어말 s는 보통 발음된다. 참고로 외래어 표기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ɥi]는 ‘위이’로 적어야 하니 Huysmans는 ‘위이스망스’가 되지만 융통성을 발휘하여 [ɥi]를 ‘위’로 적은 ‘위스망스’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표준 표기이다.
다음 두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회사 관계자들이 쓰는 Van Cleef & Arpels의 프랑스어 발음은 네덜란드어에서처럼 s를 발음한 [van-klɛf e aʁpəls]로 관찰된다(&는 프랑스어에서 et [e] ‘에’로 발음한다).
여기서 Arpels의 발음은 표기 기준에 따라서 [aʁpəls] 또는 [aʁpœls]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음성학적으로는 같은 발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이다. 외래어 표기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각각 ‘아르플스’와 ‘아르푈스’로 표기되겠지만 Arpels의 한글 표기로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어에는 환경에 따라 묵음이 되기도 하는 불안정한 e가 있다. 19세기 말에 국제 음성 기호가 도입되면서 어중간한 음가라고 하여 이를 [ə]로 적게 되었는데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전치사 de [də] ‘드’, 정관사 le [lə] ‘르’에서 볼 수 있듯이 ‘으’로 적는다. 그런데 같은 기호 [ə]로 나타낸다고 해서 ‘어’로 적는 영어의 [ə]와 발음이 같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파리식 발음에서 보통 원순 중모음으로 발음되므로 환경에 따라 [ø]나 [œ]와 합쳐지는 것으로 본다.
Richelieu [ʁiʃəljø] ‘리슐리외’, Pasteur [pastœʁ] ‘파스퇴르’, Lebœuf [ləbœf] ‘르뵈프’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어의 [ø]나 [œ]는 보통 철자 eu, œu에 해당되는 모음이며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둘 다 ‘외’로 적는다.
오늘날 파리식 발음만 따진다면 [ə]가 [ø]나 [œ]로 발음되므로 Richelieu는 [ʁiʃəljø] 대신 [ʁiʃøljø], Lebœuf는 [ləbœf] 대신 [lœbœf]로 적는 것이 정확할 수 있다. 하지만 강세를 받을 수 없고 여차하면 탈락할 수 있는 [ə]의 특수성 때문에 계속해서 독자적인 기호를 쓴다. 기호대로 [ə]를 [ø]나 [œ]와 구별하여 발음하는 방언도 있다. 한글 표기에서도 ‘으’와 ‘외’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리슐리외’ 대신 ‘리쇨리외’, ‘르뵈프’ 대신 ‘뢰뵈프’로 적으라고 한다면 매우 어색할 것이다.
보통 [ə]는 철자 e, [ø]나 [œ]는 철자 eu나 œu에 해당되므로 구별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영어나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에서 온 차용어에서 원어의 [ə]를 흉내내는 경우 얘기가 달라진다.
영어나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은 강세를 받는 음절과 무강세 음절의 구별이 확실하지만 프랑스어는 어절 단위에서 강세를 따지지 않는다. 대신 어구에서 마지막 음절이 음성학적인 강세를 받는다. 물론 단어 하나만 따로 떼어 발음하는 경우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어구가 되므로 그 단어의 마지막 음절이 강세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ə]는 제외된다. 만일 어구 마지막 음절의 모음이 [ə]라면 그 앞의 음절이 강세를 받는다.
강세를 받지 않는 음절의 경우 차용어의 [ə]도 프랑스어의 일반적인 [ə]처럼 발음할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 그런데 차용어의 마지막 음절에 [ə]가 온다면 애매해진다. 영어 scooter [ˈskuːtəɹ] ‘스쿠터’를 차용한 프랑스어의 scooter를 [skutəʁ]로 발음하려면 마지막 음절 대신 그 앞의 음절에 강세를 주어 [ˈskutəʁ]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말 자음이 [ʁ]인 경우 보통 마지막 음절에 강세를 받게 되므로 실제로는 [skuˈtœːʁ]로 발음된다(어말 [ʁ] 앞의 강세를 받는 모음은 길게 발음된다). 음성학적으로는 [ˈskutəʁ]의 [ə]도 [œ]와 음가가 같지만 [ə]는 무강세 음절에서만 쓸 수 있기 때문에 scooter의 프랑스어 발음은 [skutəʁ]보다는 [skutœʁ]로 나타내는 것이 정확하다. scooter가 어구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면 강세를 받지 않아 [skutəʁ]로 쓸 수도 있겠지만 보통 프랑스어 단어의 발음 표기는 단독으로 발음될 때를 기준으로 한다.
차용어에서 나타나는 음을 프랑스어에서 쓰는 기존 음소에 대응시키려니 잠재적으로 강세를 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 언제는 [ə]로 쓰고 언제는 [œ]로 써서 복잡해지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 화자 가운데도 차용어에서 마지막 음절의 [ən], [əl] 등은 강세를 주지 않고 발음하는 이들이 많다. 예전 글에서 다룬 벨기에 가수 앙젤 반라켄(Angèle Van Laeken [ɑ̃ʒɛl van-lakən])의 이름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Van Laeken은 브뤼셀에 있는 구역인 Laeken에서 나왔는데 그의 노래에서 [lakən] ‘라큰’으로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또 미국 회사 Apple [ˈæp(ə)l] ‘애플’은 프랑스어에서도 보통 마지막 음절에 강세 없이 [apəl] ‘아플’로 발음한다. 그러니 Arpels도 [aʁpəls] ‘아르플스’로 발음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마지막 음절이 강세를 받는다고 볼 경우 [aʁpœls] ‘아르푈스’로 적을 수 있다. 일상적인 발화에서 강세의 유무를 확인하여 둘을 구별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런데 이런 차용어에 쓰이는 폐음절 [ən], [əl]은 철자 en, el로 쓰는 경우 보통 [ɛn], [ɛl]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Geneviève [ʒənəvjεv] ‘주느비에브’에서 둘째 e [ə]가 탈락한 발음인 Geneviève [ʒənvjεv] ‘준비에브’에서와 같이 드물게 폐음절 [ən]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단어 내부에서 [ə]는 보통 개음절(모음으로 끝나는 음절)에서만 쓰이기 때문에 폐음절 [ən], [əl]은 어색하다. 또 독일어 등 원어에서도 방언에 따라 [ə]와 무강세 [ɛ]가 잘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Apple의 프랑스어 발음에 따라 적는다면 ‘아플’이 되겠지만 Laeken은 [lakən] ‘라큰’ 대신 [lakɛn] ‘라켄’으로 발음할 수도 있으므로 한글 표기는 ‘라켄’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 Arpels도 [aʁpəls]나 [aʁpœls] 대신 [aʁpɛls]로 발음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음 동영상에서는 프랑스어 모어 화자가 영어로 말하면서도 Van Cleef & Arpels는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하는데 [aʁpɛls] ‘아르펠스’에 가까운 발음을 쓴다(끝에 살짝 영어식 [z]를 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프랑스어 Arpels 역시 ‘아르플스’로 적을 것인지 ‘아르푈스’로 적을 것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아르펠스’로 적으면 깔끔하다. 네덜란드어 Arpels도 ‘아르펄스’ 대신 ‘아르펠스’로 적으면 이와 표기가 통일된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에서 쓰는 ‘반클리프 아펠’은 프랑스어 화자가 잘못 짐작한 발음 [van-klif] ‘반클리프’와 [aʁpɛl] ‘아르펠’ 또는 이와 비슷한 영어식 발음을 따른 표기로 보인다. 물론 그렇더라도 이미 한국에서 상표를 그렇게 등록했다면 존중해야 하겠다. 그래도 원어에서 올바른 발음이 무엇인지 알아두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반클리프 아펠/반클레프 아르펠스’ 외에도 ‘록시땅’이라고 부르는 L’Occitane en Provence [lɔksitan-ɑ̃-pʁɔvɑ̃s] ‘록시탄앙프로방스’, ‘루이비통’이라고 부르는 Louis Vuitton [lwi-vɥitɔ̃] ‘루이뷔통'(외래어 표기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루이뷔이통’), ‘부쉐론’이라고 부르는 Boucheron [buʃʁɔ̃] ‘부슈롱’, ‘까르띠에’라고 부르는 Cartier [kaʁtje] ‘카르티에’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 상표 가운데 한국에서 쓰는 표기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와 차이가 나는 것은 수두룩하다. 이들을 굳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관심이 있다면 상표를 통해서 접하는 표기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는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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