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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30. 추가 내용: 이 글을 쓴 후 우크라이나의 수도의 한글 표기도 우크라이나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는 ‘키이우’로 바뀌었지만 기록 보존을 위해 옛 표기인 ‘키예프’를 그대로 두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드니프로강’이라고 부르는 강도 ‘드네프르강’으로 남겨두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관문인 보리스필(Бориспіль Boryspil’)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었다. 밤에는 영하 15도로 내려가는 한겨울이었지만 지금은 햇볕이 들어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터미널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안내문이 우크라이나어로만 써있었다. 폴란드와 유로 2012를 공동 개최하면서 대중교통에 영어 안내문을 많이 추가했다고 들었지만 여기에는 영어 안내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어는 같은 동슬라브 어군에 속하는 러시아어와 벨라루스어처럼 키릴 문자로 쓴다. 키릴 문자를 모르는 관광객들은 무척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크라이나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처음 방문한 것은 2004년 여름으로 한 달 가까이 지내면서 수도 키예프와 동부의 하르키우(Харків Kharkiv), 남부의 오데사(Одеса Odesa), 크림반도의 잔코이(Джанкой Dzhankoi, 크림 타타르어: Canköy ‘장쾨이’) 등 여러 곳에 가보았지만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갈 기회가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번에 가지 못한 서부의 르비우(Львів L’viv)를 보고 국경을 넘어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ów)까지 가볼 계획이었다.
보아하니 공항에서 하르키우스카(Харківська Kharkivs’ka) 지하철역까지 가는 요금이 50흐리우냐(약 2천원)였고 피우덴니(Південний Pivdennyi) 기차역, 즉 키예프 남역까지는 요금이 좀 더 비쌌다. 그래서 버스 기사에게서 하르키우스카까지 가는 표를 샀다.
하르키우스카에서 내려서 지하철역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 두리번거리니 같이 버스에서 내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근처의 지하 통로를 가리키며 ‘메트로(метро metro, 지하철)’라고 일러주셨다. 고맙다고 우크라이나어로 ‘댜쿠유(дякую dyakuyu)’라고 말하고 지하 통로를 따라 역에 들어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지하철 요금은 4흐리우냐(약 2백원)였다. 원래도 물가가 싸지만 요즘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사태 때문에 흐리우냐(гривня hryvnya)의 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에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유럽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저렴한 곳이다.

우크라이나의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 나라 전체가 소련의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러시아어를 쓰는 주민이 많다.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에 대규모로 정착하면서 러시아어는 도시의 언어가 되었으며 도시로 이주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어 출판을 금지하고 모든 교육을 러시아어로 시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지배하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비러시아 민족에 관대한 ‘토착화’ 또는 ‘현지화’를 뜻하는 ‘코레니자치야(러시아어: коренизация korenizatsiya, 우크라이나어: коренізація korenizatsiya)’ 정책에 편승하여 한동안 우크라이나어 교육과 출판이 장려되었다. 하지만 1929년 이후 소련의 민족 정책이 180도 바뀌면서 우크라이나어 보급에 힘썼던 당 지도부는 대대적으로 숙청되었고 실질적인 러시아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1980년 이후에는 모든 학생들이 1학년부터 러시아어를 배우도록 했다.
이 때문에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로 지정된지 25년이 넘었지만 특히 소련 시절에 교육받은 세대는 러시아어를 쓰는 이들이 많다. 특히 키예프는 주민 대부분이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쓰는 듯하다. 우크라이나에 가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우크라이나인 부부도 서로 러시아어로 말했고 공항에서도 안내 방송은 우크라이나어로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십중팔구 러시아어였다. 러시아어 방송이나 신문도 많다.
하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반발로 소련 시절에 교육받은 세대 중에도 우크라이나어를 더 많이 쓰려 노력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구사할 수 있으며 둘을 섞어 쓰는 이들도 많기 때문에 언어 사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벨라루스어는 모두 동슬라브 어군에 속하니 상당히 긴밀한 친연 관계에 있는 언어들이다. 하지만 특히 어휘에 있어서 꽤 다른 것들도 많다. 우크라이나어로 고맙다는 말은 ‘댜쿠유(дякую dyakuyu [ˈdʲakuju])’이지만 러시아어로는 전혀 다른 ‘스파시보(спасибо spasibo [spɐˈsʲibə])’이다(모음 약화 때문에 ‘스파시바’ 비슷하게 들린다).
우크라이나어의 ‘댜쿠유’와 벨라루스어의 ‘자쿠유(дзякую dzjakuju [ˈʣʲakuju])’는 오히려 서슬라브 어군에 속하는 폴란드어의 ‘지엥쿠예(dziękuję [ʥɛŋˈkujɛ])’와 뿌리가 같다. 모두 ‘감사하다’라는 뜻의 고대 고지독일어 dankon을 차용하여 슬라브어식 동사로 만든 것의 활용형이다. 고대 고지독일어의 dankon은 현대 독일어에서 danken이 되었고 독일어로 고맙다는 말인 ‘당케(danke [ˈdaŋkə])’는 그 활용형이다. 영어의 ‘생크(thank [ˈθæŋk])’도 뿌리가 같다. 즉 우크라이나어에서는 고맙다는 말은 러시아어가 아니라 서쪽의 폴란드어에서 온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오랫동안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 때문에 우크라이나어에는 이처럼 폴란드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뒤에 더 자세하게 하고자 한다.

숙소는 ‘금문(金門)’을 뜻하는 졸로티보로타(Золотi ворота Zoloti vorota) 지하철역 근처에 있었다. 졸로티보로타 역은 중세 키예프 대공국의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치로 덮여있어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지하철역으로 손꼽힌다. 승강장은 지하 96.5미터에 있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없이 올라가서 이제 지상에 도착했나 했더니 지하에 있는 중간 홀이였고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했다.

11세기 중반에 세워진 졸로티보로타는 키예프 대공국 시절 키예프의 주된 성문이었다. 하지만 1240년에 몽골군에 의해 일부 파괴된 후 방치되어 폐허로만 남아있다가 소련 시절인 1982년에 현재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재건했다. 졸로티보로타의 원래 모습은 알 수가 없어 순전히 상상에 따라 재건한 것이라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키예프는 동슬라브인들이 최초로 건설한 고대 국가의 중심지였다. 인도·유럽 어족의 한 갈래인 슬라브 어파 여러 언어를 쓰는 슬라브인들은 유럽 중동부 어딘가에서 살다가 5~6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이들이 비운 땅에 일부가 들어가 폴란드인, 체코인 등 오늘날의 서슬라브인들의 조상이 되었고 일부는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인, 옛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슬라브계 민족 등 오늘날의 남슬라브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의 조상이 된 동슬라브인들은 드네프르강, 드네스트르강, 볼가강 유역에 해당하는 방대한 지역에 퍼졌다.
동슬라브인들은 북쪽으로는 발트어를 쓰는 발트족(오늘날의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등의 조상)과 우랄 어족의 여러 언어를 쓰는 핀족(오늘날의 핀란드인, 에스토니아인 등의 조상), 남쪽으로는 튀르크 어족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쓰는 불가르족, 하자르족 등과 이웃했다. 그러다가 8세기경 지금의 스웨덴 출신의 바이킹들이 발트해를 건너 동슬라브인들이 살던 지역에 진출하여 무역과 노략질에 종사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하면서 붙은 이름인 ‘바랑기아인’으로 역사에 알려져있다.
바랑기아인들은 동슬라브 지역의 고대 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류리쿠(고대 동슬라브어: Рюрикъ Rjurikŭ, 고대 노르드어: Rørikr ‘뢰리크르’, 러시아어: Рюрик Ryurik ‘류리크’, 우크라이나어: Рюрик Ryuryk ‘류리크’)라는 이름의 바랑기아인 수장이 9세기에 오늘날의 러시아 라도가 호수 근처에서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의 아들인 올리구(고대 동슬라브어: Ольгъ Olĭgŭ 또는 Ѡльгъ Ōlĭgŭ, 고대 노르드어 Helgi ‘헬기’, 러시아어: Олег Oleg ‘올레크’, 우크라이나어: Олег Oleh ‘올레흐’)는 882년 드네프르 강가의 키예프에 수도를 세웠다.
이들이 세운 고대 국가의 주민은 대부분 동슬라브인이었다. 지배 계층인 바랑기아인들을 고대 동슬라브어로 루시(Рѹ́сь Rúsĭ)라고 했다. 현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로는 루스(Русь Rus’)라고 한다(다만 현행 러시아어 표기법으로는 ‘루시’로 쓴다). 핀란드어와 에스토니아어로 각각 스웨덴을 가리키는 이름인 Ruotsi ‘루오치’, Rootsi ‘로치’와 뿌리가 같다는 설이 유력하다. 바랑기아인들은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동슬라브인들과 동화되었기 때문에 루스는 바랑기아인들이 세운 고대 국가 뿐만이 아니라 그 주된 주민인 동슬라브인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중세 그리스어로 이들을 로스(Ῥῶς Rhôs)라고 했다. 나라는 로시아(Ῥωσία Rhōsía)라고 불렀다. 이것이 라틴어 루시아(Russia)를 거쳐서 영어에서 쓰는 이름인 러샤(Russia), 한글 통용 표기로는 ‘러시아’가 되었다. 중세 그리스어 로시아는 현대 러시아어 ‘로시야(Россия Rossiya)’가 되었다.
하지만 루스와 러시아는 동의어가 아니다. 중세 루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동슬라브인들이 오늘날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분화되기 전이다.
루스를 라틴어로 루테니아(Ruthenia)라고 부르기도 했다. 후에 루테니아는 옛 루스 땅 가운데 리투아니아 대공국 또는 폴란드 왕국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 문자권에 들어간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방을 주로 이르게 되었다.
벨라루스(벨라루스어: Беларусь Biełaruś)라는 국명은 원래 ‘하얀 루스’를 뜻하는 말에서 왔다. 그런데 많은 언어에서 루스와 러시아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하얀 러시아’를 뜻하는 이름으로 번역한다. 한국어에서도 예전에는 종종 ‘백러시아’라는 이름을 썼다.
초기 루스는 노브고로드(러시아어: Новгород Novgorod) 공국과 폴라츠크(벨라루스어: Полацк Polatsk, 러시아어: Полоцк Polotsk) 공국도 포함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중심지는 키예프(러시아어: Киев Kiev, 우크라이나어: Київ Kyiv ‘키이우’)였고 키예프의 대공이 루스 전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초기 루스를 ‘키예프 루스’라고 이름지었다.

‘키예프’ 및 영어 이름 Kiev는 [ˈkʲiɪf]로 발음되는 러시아어 이름에 따른 표기이다. 우크라이나어 이름은 [ˈkɪjiu̯] ‘키이우’로 발음된다. 199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붕괴로 독립을 얻은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어식인 Kiev 대신 우크라이나어 이름에 따른 로마자 표기인 Kyiv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크라이나 국내의 모든 공문서나 표지판에서 Kyiv를 쓰는 것은 물론 외국의 여러 국제 기구나 정부 기관, 일부 언론에서도 Kyiv를 채택했다. 하지만 영어권 일반인들은 압도적으로 Kiev라고 알고 있으며 영어권 주요 언론에서도 전통 표기인 Kiev를 계속 쓰는 곳이 많다. 그나마 이것은 영어권 이야기이고 한국에서는 ‘키예프’ 대신 ‘키이우’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여러 고유명사는 우크라이나어를 기준으로 적지만 키예프만은 러시아어식 관용 표기로 적는다. 참고로 키예프를 고대 동슬라브어로는 ‘크이예부(Кꙑѥвъ Kyjevŭ)’라고 했다.
중세 역사서에 따르면 10세기 후반 키예프의 대공이 된 볼로디매루(고대 동슬라브어: Володимѣръ Volodiměrŭ)는 슬라브인의 토속 신앙 대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자들을 유럽 각지에 보내 여러 종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음주를 금지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고 유대교의 신은 자신이 선택한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도록 허락한 힘없는 신으로 보였다. 로마 가톨릭교는 예식이 따분해 보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본 그리스 정교 예식은 볼로디매루가 보낸 사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988년 볼로디매루는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고 이를 키예프 루스의 국교로 채택했다.
볼로디매루는 우크라이나어로 볼로디미르(Володимир Volodymyr), 러시아어로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 Vladimir)로 알려져있다. 사실 그가 그리스 정교로 개종한 것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생각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는 그 후 동슬라브인의 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이 되었으며 후에 성인으로 떠받들여졌다. 오늘날 키예프의 중심부에는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이 있다. 1852년 모스크바의 관구장주교가 블라디미르/볼로디미르가 기독교로 개종한 9백주년을 기념하여 키예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제안해서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1882년 건물을 완공하고 벽화까지 모두 완성이 된 1896년 축성식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키예프 총대주교청 소속이다.

이 글에서는 일부러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가 나눠지기 이전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세 루스의 인명을 고대 동슬라브어 형태로 썼지만 보통은 류리크와 올레크, 블라디미르 등 러시아어 형태를 쓴다. 키예프 루스를 곧 고대 러시아로 보는 러시아의 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탓도 있겠지만 소련 시절에는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가 따로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어가 된 고대 동슬라브어는 말할 것도 없으니 비교적 잘 알려진 러시아어 형태를 쓰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키예프 루스의 인물들이 러시아 사람인지 우크라이나 사람인지 벨라루스 사람인지 묻는 것은 한국 고대사 인물들이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묻는 것처럼 말이 되지 않지만 언어 가운데 하나를 고르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이는 마치 영어 등 유럽 언어에서 중국의 역사 인명을 적을 때 광둥어, 민난어, 하카어 등이 아닌 표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키예프 루스의 인명은 보통 러시아어 형태로 쓰되 우크라이나 또는 벨라루스 역사에 한정해서 언급할 때에는 각각의 경우에 맞게 우크라이나어 또는 벨라루스어 형태를 쓰는 것이 좋겠다.
키예프 대공국은 11세기말 이후 분열되어 쇠퇴하다가 1240년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인구가 십만이 넘던 당시로서는 대도시였던 키예프는 몽골군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 후 키예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키예프는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볼셰비키 군이 지원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흡수되었다. 1922년에 소련이 출범할 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초대 구성국 가운데 하나였다. 소련은 말이 좋아 동등한 연방이지 사실은 모든 구성국들이 모스크바의 지배를 받았다.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맞서 볼셰비키 군이 지원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하르코프(러시아어: Харьков Khar’kov, 현행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하리코프’), 즉 오늘날의 하르키우(Харків Kharkiv)였다. 이것이 소련 출범 후에도 계속되다가 1934년에야 키예프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하였고 키예프는 다시 비로소 독립국의 수도가 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는 곧바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기념하여 이름지어진 독립 광장으로 향했다. 2004년 여름에 방문한 이후 키예프의 독립 광장은 두 차례 혁명의 주 무대가 되었으니 어떻게 모습이 바뀌었는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