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 대한 여러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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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쓴 한글에 대한 낚시성 펌글 분석에 대한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워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블로그를 확인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많은 덧글이 달렸다. 답글을 대신해서 덧글에서 언급된 몇몇 주제에 관해 새로이 글을 쓴다. 그냥 평소의 개인적인 의견을 정리해놓은 것임을 밝힌다.

언어에는 우열이 없다

우선 답글 가운데 미소짓는독사님의 말씀대로 언어에 있어서 우열은 없다고 본다. 이 시각이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언어의 우열을 가리려는 시도는 계속되었고, 아직도 어떤 언어는 뛰어나고 어떤 언어는 급이 낮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따져보면 결국에는 언어 외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나의 굳은 믿음이다.

철학의 언어라 해서 고전 그리스어가 최고의 언어라고 본다거나 이슬람에서 신의 계시가 기록된 언어인 고전 아랍어를 최고의 언어로 보는 것은 고전 그리스어나 고전 아랍어 자체의 뛰어남과는 관계가 없다. 간혹 특정 언어의 어휘나 조어법이 특정 개념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언어 전체가 뛰어나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다. 또 상대적으로 문명의 이기를 접하지 못한 이들의 언어에 대해서는 관련된 개념을 나타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열등한 언어로 치기도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영어도 현대 문명을 제대로 표현할만한 어휘가 없던 것은 마찬가지 아니인가?

문자의 우열은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문자를 논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천 개가 넘는 기호로 이루어져 있고 표의 요소와 표음 요소가 섞여 있어 배우는데 수 년이 걸렸을 것이라는 초기 수메르인들의 설형문자(쐐기문자)가 비효율적인 문자라는 데는 이의를 다는 이가 없을 것이다.

수메르인들이 쓴 설형문자 (그림 출처)

흔히들 문자의 종류를 논할 때 발전 단계를 따지고는 한다. 기호 하나가 의미 단위를 나타내는 표어 문자가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면 이보다는 발전한 것이 기호 하나가 소리의 단위를 나타내는 표음 문자이고, 표음 문자 중에서도 일본어의 가나처럼 음절 단위를 나타내는 음절 문자보다는 아랍 문자와 같이 자음을 표시하는 자음 문자 또는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와 같이 자음 문자에 모음을 나타내는 표시를 추가한 ‘아부기다’라는 것이 더 발전된 단계이며 이게 더 발전한 것이 그리스 문자, 로마 문자처럼 자음과 모음을 모두 기호로 나타내는 음소 문자, 즉 ‘알파벳’이라고 흔히 보는 것이다. 여기에 한글과 같이 음소를 더욱 분석해서 자질까지 표현한 자질 문자의 단계에 이르면 문자 발전의 최고봉으로 친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분석을 통해 문자의 우열을 따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 언어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기호 수를 최소화하는 문제와 소리의 단위에 대한 추상적인 분석에 있어서는 음절 문자보다는 음소 문자가 우수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처음 문자를 배우는 이들에게는 음절 문자가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음소 문자를 배운 우리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이라는 한 음절을 ‘ㅎ+ㅏ+ㄴ’과 같이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분석하는 것은 처음에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 표어 문자인 한자도 어떤 면에서는 표음 문자보다 뛰어날 수 있다. 사람은 글을 읽을 때 음소, 음절 단위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낱말, 나가서 여러 낱말로 이루어진 구절 단위로 읽는데 표어 문자인 한자는 기호 자체가 형태소를 나타내니 표음 문자보다는 읽기 쉬울 수가 있다. 물론 그런 몇가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겠지만 생각처럼 딱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한 문자를 놓고 다른 문자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식의 주장은 하기 힘들다.

문자가 성공하려면 맞춤법이 중요하다

또 문자는 언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언어를 문자로 어떻게 적을지에 관한 규칙인 맞춤법(철자법)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도 훈민정음 당시의 철자를 그대로 쓴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말ᄊᆞᆷ”이라고 쓰고 [말씀], “듀ᇰ귁”이라고 쓰고 [중국]이라고 읽는 식으로 말이다. 아래 아(ᆞ)라는 모음은 중세 국어의 발음이 어떻게 분화되었는지에 따라 [아]나 [오], [으]로 읽어야 한다면 영어에서 ough라는 철자가 rough, though, through, tough, plough 등 단어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중세 영어에서는 철자를 통해 발음을 예측하기가 꽤 쉬웠지만 이후 영어의 발음 자체는 크나큰 변화를 겪었는데 철자는 크게 바뀌지 않으면서 오늘날 보이는 철자와 발음과의 괴리가 생겨났다. 그에 비해 한국어의 맞춤법은 백 년도 안 된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강남콩’, ‘남비’로 쓰던 것을 ‘강낭콩’, ‘냄비’로 바꾸는 등 발음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표준어를 개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발음과 철자의 관계가 훨씬 더 규칙적이다.

그런가 하면 영어와 같은 로마 문자를 쓰는 핀란드어는 기호 하나가 음소 하나에 대응되는 매우 규칙적인 맞춤법 때문에 읽고 쓰기가 매우 쉽다. 이는 로마 문자로 기록된 역사가 짧은 다른 언어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문자 자체의 장단점을 논하기에 앞서 맞춤법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글이 아무리 우수한 문자라 해도 맞춤법이 영어 수준으로 불규칙적이었더라면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주장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언어학자를 위한 문자인가, 일반인을 위한 문자인가?

세종 대왕의 뛰어난 음성학적 분석력을 반영하는 한글의 제자 원리는 언어학자들을 감탄하게 하지만 실제 한글의 사용에 있어서는 과연 얼마나 장점이 되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ㄴ’, ‘ㄷ’, ‘ㅌ’ 등 조음 위치가 같은 소리를 비슷한 기호로 나타난다고 해서 배우고 읽고 쓰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연구가 필요하다. 오히려 비슷한 소리에 너무 비슷한 기호를 쓰면 분별력이 떨어져서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고려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한글의 이론적 토대가 아무리 뛰어나 언어학자들에게 인정을 받더라도 그것이 일반인이 쓰고 읽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게 과연 한글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한글이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제자 원리를 실용성과 적절히 조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세종 대왕이 쓰기 쉽고 분별력이 높은 문자 모양을 고른 다음 자음이 조음 기관을 나타낸다거나 모음이 천지인을 나타낸다는 식의 설명은 나중에 그럴 듯하게 갖다붙인 것이라고 이해해도 사실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한글의 문자 모양이 비효율적이고 분별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의견이 나올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문자의 가독성은 정확히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지의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가 글을 읽는 과정 전반에 대한 수많은 문제들이 아직도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아쓰기의 장단점

한글의 큰 특징 하나는 각 자모를 음절 단위로 모아쓰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한글을 쉽게 읽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에는 자모 하나하나를 읽는 것이 아니고 묶음을 지어 읽는데, 모아쓰기는 이런 묶음이 눈에 쉽게 들어오게 해준다. 모아쓰기는 또 말의 기본형을 밝히는 형태주의 표기를 더 쉽게 해준다. ‘아니’와 ‘안이’는 풀어쓰기를 한다면 구분할 수 없겠지만 모아쓰기를 했기 때문에 ‘안이’는 ‘안’에 ‘이’라는 조사가 붙은 어절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모아쓰기는 한글 쓰는 것을 조금 번거롭게 하고 특히 인쇄나 영상 매체를 위한 한글의 기계 구현을 어렵게 한다. 기호를 가로로 순서대로 나열하기만 하는 풀어쓰기 방식을 쓰는 로마 문자를 보면 글을 쓸 때의 움직임이 기준선을 중심으로 한정되어 있어 빠르게 쓸 수 있는 필기체가 발달하였다. 하지만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은 글을 쓸 때의 움직임이 다소 복잡하여 로마 문자만큼 빨리 쓸 수 있는 필기체가 발달하지 못했다. 또 음절 첫소리 위치에 들어올 자음이 없다는 빈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ㅇ’이란 기호를 사용하는 것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비효율적이다.

또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은 균형 잡힌 조형성을 통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같은 자모라도 음절을 구성하는 다른 자모에 따라 그 모양을 조금씩 바꾸어 쓴다. ‘가’, ‘고’, ‘윽’에 들어가는 ‘ㄱ’의 모양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 한글을 활자나 컴퓨터 글꼴로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약 2천 자를 일일이 디자인해야 한다. 잘 안 쓰는 글자는 이렇게 디자인한 글자의 자모를 조합하여 만든다. 로마 문자 글꼴은 대문자, 소문자, 숫자, 일반 기호 외에 웬만한 특수 문자를 포함하고 굵은 글꼴, 이탤릭 글꼴, 굵은 이탤릭 글꼴에다가 작은 대문자(small caps) 글꼴까지 같이 디자인한다고 해도 일반 한글 글꼴 하나를 디자인하는데 필요한 자수에 미치지 않는다. 그러니 로마 문자 글꼴 개발은 빠르면 한두 달이면 끝나는데 비해 한글 글꼴 개발은 보통 일 년이 넘는 대작업이다.

윤디자인의 회상체. 조합형 탈네모 글꼴처럼 생겼지만 각 자모를 조합만 한 것이 아니라 조형성을 높이기 위해 조금씩 수정한 것이다. (그림 출처)

타자기 글꼴과 같은 탈네모꼴 글꼴을 쓰면 적은 수의 자모를 디자인하고 조합하여 글꼴 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조합형 탈네모꼴 글꼴의 가독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시중에 나온 탈네모꼴 글꼴 대부분은 무늬만 조합형이고 자세히 보면 조형성을 높이기 위해 각 자를 일일이 손질한 것이다. 보통 탈네모꼴 글꼴이라 하는 한겨레 신문의 글꼴인 한결체도 사실 네모꼴과 탈네모꼴의 중간 형태이며 2천여 자를 일일이 디자인한 것이다. 주시경, 최현배 등 많은 국어학자들이 한글 풀어쓰기를 주장한 배경에는 아무래도 모아쓰기가 한글 기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타자기 대신 컴퓨터가 등장한 오늘날에는 이 걸림돌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아쓰기 때문에 새로운 한글 글꼴 개발이 매우 더딘 것은 여전히 한글 시각 문화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모아쓰기의 장점이 단점을 훨씬 앞지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자판을 통해 글을 입력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손으로 글을 쓸 때의 번거로움보다는 글을 읽을 때 각 음절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 모아쓰기의 장점이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글로 표현 못하는 발음

한국어의 발음은 계속 변화하여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한국어의 음소를 적는 한글 자모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아래아(ㆍ), 반시옷(ㅿ) 등의 자모는 원래 표현하던 음을 쓰지 않게 되면서 사라진 예이다. 오늘날 쓰는 한글 자모는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 대부분 정립되었으며 된소리를 ‘ㅺ’, ‘ㅼ’과 같은 ㅅ계 합용 병서 대신 ‘ㄲ’, ‘ㄸ’과 같은 각자 병서로 쓰게 된 것도 이 통일안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는 발음은 거의 모두 한글 자모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나 끊임없이 새로운 발음이 생기기 때문에 현재 쓰이는 한글 자모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발음이 생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바뀌어’, ‘쉬어’ 등을 빨리 발음할 때 /위어/를 한 음절로 축약한다. 이 때의 발음은 [ɥʌ]이다. 그러나 이를 적을 마땅한 글자가 없어 ‘바껴’, ‘셔’라고 흉내내기도 한다. ‘열중 쉬어’를 ‘열중셔’라고 하는 것이 그 예이다. 《한국어의 발음》의 저자 배주채는 옛 자모를 활용하여 [ɥʌ]를 ‘ㆊ’로 적을 것을 제안한다.

‘바뀌었다’를 빨리 발음한 것을 옛 자모 ‘ㆊ’를 활용하여 적은 예. (나눔명조체를 손질한 것)

또 답글 가운데  ‘이으’를 한 음절로 발음한 것, 즉 [jɯ]에 관한 질문도 있었는데 Puzzlet C.님의 말씀대로 옛 자모 가운데 ‘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소리는 ‘유’로 흉내내기도 한다(‘으유’, ‘븅신’).

요즘은 외국어 교육의 영향 때문인지 외래어를 발음할 때 [f] 음을 쓰는 것을 꽤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소리 역시 옛 자모인 ‘ㆄ’을 빌어 표기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소리들이 현실 발음에서 널리 쓰이게 되어 독립된 음소로 인정된다면 이들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지금은 쓰지 않는 자모를 부활시키거나 새로 만들 필요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가 든 예들이 한국어에서 널리 쓰이는 독립된 음소의 위치에까지 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f]의 경우 많은 이들이 발음조차 못하고, 발음은 하는데 들을 때 ‘ㅍ’과 제대로 구별 못하는 이들도 많으며 외래어를 발음할 때 [f]를 쓰는 사람도 규칙적이고 일관적으로 이를 적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지어 원 언어의 발음을 따르려면 [f] 발음을 할 이유가 없는 외래어에서 ‘ㅍ’을 [f]로 발음하는 것도 자주 듣게 된다. [ɥʌ]는 ‘위어’의 축약형으로 본다면 도입하는 것이 꽤 단순하겠지만 [ɥʌ]를 ‘여’와 제대로 구분하여 쓰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연구하여 만약 한국어 화자 대부분이 ‘위어’의 축약형으로 ‘여’를 사용한다는 것으로 판명되면 표준어 규정을 그에 맞도록 바꾸는 것이 새 자모를 도입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새 자모를 도입하려면 기존 글꼴에 새로 글자를 추가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비용이 절대 만만치 않다. 당장 국립국어원에서 새 자모 ‘ㆊ’를 도입한다고 결정해도 컴퓨터 자판으로 어떻게 입력할 것이며 ‘ㄲㆊㅆ’을 모아쓴 글자를 나타낼 수 있는 글꼴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또 한글 자모 하나는 음소 하나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각 음소가 위치에 따라, 방언에 따라 어떻게 발음되는지는 한글 자모로 나타낼 수 없다. 같은 ‘어’도 서울의 표준어 화자와 부산 토박이, 평양의 젊은 층은 각기 조금씩 달리 발음하지만, 한글 자모로는 이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ㅈ, ㅊ, ㅉ’은 연구개음으로 발음되기도 하고 특히 평양 방언에서는 치경파찰음으로 발음되기도 하지만 이 구별을 한글 자모만으로는 나타내기 어렵다.

문법이란

답글 가운데 acarasata님은 문법 규칙에 얽매여 거기에 어긋나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재단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이후에 문법이라는 개념은 개화기 이후 서양에서 도입된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는데 ‘문법’이란 말은 여러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헷갈리기 쉬우니 ‘문법’이란 말이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 해명해보려 한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규칙을 지니고 있다. 이를 ‘자연 문법’이라고 하자. 모든 언어는 저만의 자연 문법을 따른다. 흔히 표준어와 다른 방언을 쓰는 사람이 표준어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방언은 문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방언의 자연 문법이 표준어 문법과 다를 뿐이다.

파푸아 뉴기니의 공용어 가운데 하나인 ‘톡피신(Tok Pisin)’은 언어가 서로 다른 집단들의 접촉을 통해 생겨난 혼합어로 어휘는 주로 영어에서 따왔다. 그러니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듣기에 톡피신은 얼핏 엉터리 영어를 문법에 맞지 않게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몇몇 외국인들은 파푸아 뉴기니인들과 대화하려면 톡피신을 배우라는 말을 듣고 엉터리 영어만 하면 되는데 배울 게 뭐가 있냐며 자신있게 파푸아 뉴기니에 갔다. 그리고 현지인들 앞에서는 일부러 톡피신 화자들을 흉내내어 엉터리 영어를 하고는 그러면 뜻이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정작 현지인들은 알아듣기는 커녕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톡피신은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가 아니라 ‘영어 어휘를 많이 따왔지만 자체 문법을 가진 혼합어’이기 때문에 그 문법을 배우지 않고는 구사할 수가 없다.

규범 문법과 문법의 인공적 체계화

그런데 언어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자연 문법도 조금씩 변한다. 방언마다 자연 문법이 다르다. 그래서 언어 생활의 통일을 위해 표준어의 자연 문법을 체계화한 규범을 가르친다. 이를 ‘규범 문법’이라고 하자.

2023. 8. 11. 추가 내용: 원문에서는 ‘규정 문법’, ‘규정주의’로 썼지만 더 널리 쓰이는 ‘규범 문법’, ‘규범주의’로 용어를 수정하였다.

고대 인도와 그리스의 문법학자들이 자연 문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학문으로서의 문법의 기원이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자연 문법의 체계성이 밝혀졌을 뿐만이 아니라 이를 인공적으로 더욱 체계화하는 일도 일어났다. 고대 로마에서는 그리스의 문화를 숭상하여 고전 그리스어의 아티카 방언의 합리적인 문법 요소를 받아들여 매우 체계적인 고전 라틴어 문법을 완성하였다. 지금도 고전 라틴어를 배우는 이들은 문법의 합리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가 많다고 한다.

영어에서 to 부정사를 분리시키는 것이 문법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to boldly go와 같이 to와 동사 사이에 부사를 넣는 것은 틀리다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부터 to 부정사 분리를 금지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아마 고전 라틴어의 문법을 흉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어쨌든 고전 라틴어 문법처럼 다른 언어의 문법도 인공적으로 체계화, 합리화하려는 시도는 많았던 것 같다. 특히 프랑스어를 배우는 이들을 괴롭히는 여러 문법 규칙 상당수는 문법학자들이 고전 라틴어 문법을 흉내내어 도입한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한국어의 문법도 국어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분명 효율적인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통일된 문법이 필요하다. 규범 문법은 현실의 자연 문법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정해져야 하고 반대로 언중은 질서 있는 언어 생활을 위해 규범 문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정서적 반감 등의 이유로 규범 문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규범 문법을 현실의 자연 문법과 너무 달라지지 않도록 필요에 따라 바꾸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규범 문법에 대한 언중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고, 현실 언어에서 이미 규범 문법과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면 언중의 합의를 통해 현실에 맞게 규범 문법을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실제 한국어의 어문 규범이 몇 년마다 수시로 조금씩 바뀌는 것은 규범 문법이 현실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어 교육에서의 문법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말한 문법은 대충 언어의 사용에 관련된 규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키백과의 정의를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의 문법은 음성학, 음운론, 의미론, 형태론, 구문론(통사론), 화용론 등 언어 규칙에 관련된 언어학의 여러 분야를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법을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은 외국어 교육에 관련해서가 아닌가 한다. 이때 ‘문법’은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문장 성분, 문장 구조, 어순, 품사 등을 따지는 통사론과 형태론을 의미한다. 외국어 교육이 너무 문법 위주로 되어 있다는 말을 할 때는 이 좁은 의미를 쓰는 것이다. 문법 대신에 흔히 강조하는 회화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문법에 포함된다. 보통 ‘문법이 틀렸다’라고 할 때에도 이 좁은 의미의 문법, 정확히 말하면 통사론과 형태론 일부만을 말한다. 발음이 틀렸다고 해서 문법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법 위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은 규범 문법에 대한 비판과는 대상이 구별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문법 연구는 좁은 의미의 문법에 집중해왔기 때문에 규범 문법의 상당 부분은 통사론과 형태론을 다룬다. 또 외국어 교육에서 문법을 가르칠 때는 당연한 얘기이지만 문법에 맞도록 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문법은 규범적인 성격을 가진다.

규범주의에 대해

한국어나 외국어를 배우면서 어떻게 쓰는 것이 맞고 어떻게 쓰는 것이 틀리다는 얘기만 많이 들은 기억이 있다면 다소 의외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언어학자들은 대부분 규범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언어학자들은 언어 사용에 관련된 여러가지 규칙, 즉 문법을 기술하는 것이 목적이지 어떤 규칙이 맞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규범주의자들은 때로는 자의적인 규칙을 들이대어 언어 사용을 재단하려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언어의 발전에 규범주의가 족쇄를 채우려 한다는 불만이 나올만도 하다.

그러나 어느 한도 내에서 규범주의는 필요하다. 언중이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여 그를 따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남들 다 A라고 말하는데 혼자 B라고 말한다면 의사 소통에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또 언어 사용 규칙이 조금씩 다른 이들이 모두 불편함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기 위해 표준어가 있는 것이고, 이 표준어를 가르치고 보급하려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맞고 틀린지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언어 교육과 국가의 언어 정책은 규범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이 블로그에서 주로 다루는 외래어 표기법도 그렇게 해서 나온 언어 규범 가운데 포함된다.

이렇게 필요에 의해 언어 규범을 제정하고 관리하는 이들은 그것이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고 현실 언어에 맞도록 언어 규범을 끊임없이 보완해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고 ‘먹거리’, ‘바래요’ 등을 바른 표현으로 인정해야 할지와 같은 개별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을 모으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나는 외래어 표기법과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논할 자신이 없어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인터넷 상에서라도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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