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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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 표기법 가운데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이 있다. 세르보크로아트어(영어로 Serbo-Croatian)라는 표현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언어를 부르는 말이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이후 지금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는 다른 언어로 보고 있고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부였던 보스니아어, 또 세르보크로아트어와는 다른 남슬라브어군 언어인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등도 독자적인 언어로 인정되고 있다.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는 서로 매우 비슷하여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하나의 언어로 취급되었지만 각국이 독립하면서 저마다 다른 표준을 따르며 각자 제갈길을 가고 있다.

정치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흥미로운 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글을 쓸까 해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세르보ㆍ크로아트^어(Serbo-Croat語)
『언어』
인도ㆍ유럽 어족 슬라브 어파의 남슬라브 어군에 속한 언어. 불가리아 어ㆍ슬로베니아 어ㆍ마케도니아 어 따위가 있으며, 세르비아ㆍ크로아티아 등지의 공용어이다.

여기서 뭔가 이상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가?

불가리아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고?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한 적이 없다. 불가리아어는 남슬라브어군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부 남슬라브어인 세르보크로아트어와는 달리 동부 남슬라브어로 분류된다. 남슬라브어군의 계통도는 다음과 같다.

통상적으로 세르보크로아트어라고 부르는 것은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뿐이다. 슬로베니아어와 마케도니아어도 엄밀히는 세르보크로아트어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는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였으므로 이들이 쓰는 언어도 세르보크로아트어에 포함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불가리아어까지 세르보크로아트어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결국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통상적으로 쓰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남슬라브어군’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 불가리아어의 한글 표기 용례 분석

그럼 지금까지 국립국어원에서는 불가리아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법을 적용했다는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국립국어원이 낸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서 불가리아어를 표기한 예를 찾아보았다.

불가리아어 지명

  • Burgas.  부르가스 :  ①불가리아 남동부의 주. ②부르가스 주의 주도.
  • Kazanluk.  카잔루크 :  불가리아 툰자(Tunja) 강 상류에 있는 도시.
  • Maritsa 강.  마리차 강 :  불가리아에 있는 강.
  • Pernik.  페르니크 :  불가리아 중서부에 있는 도시.
  • Plovdiv.  플로브디브 :  불가리아 중앙부의 도시.
  • Rhodopi 산맥.  로도피 산맥 :  불가리아 남서부에서 그리스 북동쪽 끝에 이르는 산맥.
  • Ruse.  루세 :  불가리아 북부 다뉴브 강 오른쪽 기슭에 위치한 항구 도시.
  • Sofia.  소피아 :  불가리아의 수도.
  • Stara Planina 산맥.  스타라플라니나 산맥 :  불가리아 중앙부의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 산맥.
  • Varna.  바르나 :  불가리아 북동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불가리아어 인명

  • Botev, Khristo.  보테프, 크리스토 :  불가리아의 시인·혁명가(1848~1876).
  • Dimitrov, Georgi Mikhailovich.  디미트로프,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  불가리아의 혁명 운동가·정치가(1882~1949).
  • Elin-Pelin.  엘린펠린 :  불가리아의 소설가(1877~1949).
  • Kostov, Ivan.  코스토프, 이반 :  불가리아의 정치가.
  • Mirtchev, Boyko.  미르체프, 보이코 :  불가리아의 외교관.
  • Purvanov, Georgi.  푸르바노프, 게오르기 :  불가리아의 대통령(1957~ ).
  • Simeon Sakskoburggotski.  시메온 삭스코부르고츠키 :  불가리아의 정치가(1937~ ). 시메온 이세.
  • Stoyanov, Petar.  스토야노프, 페타르 :  불가리아의 대통령.
  • Vazov, Ivan.  바조프, 이반 :  불가리아의 작가(1850~1921).

2023. 8. 4. 추가 내용: 이 글을 쓴 이후 위 표기 용례 가운데 몇 개는 수정되었다. Purvanov, Georgi ‘푸르바노프, 게오르기’는 제73차 외래어 심의회(2006. 12. 6.)에서 Parvanov, Georgi ‘파르바노프, 게오르기’로 수정되었다. Plovdiv ‘플로브디브’는 제123차 외래어 심의회(2015. 10. 21.)에서 Plovdiv ‘플로브디프’로 수정되었다. 용례집에만 나와있던 Botev, Khristo ‘보테프, 크리스토’도 ‘보테프, 흐리스토’로 한글 표기가 바뀌었는데 로마자 표기는 그대로 Khristo로 남겨두었다.

위의 내용을 분석해보자.

먼저 Plovdiv라는 지명은 ‘플로브디브’로 끝의 -v를 ‘브’로 적는데 Botev, Dimitrov 등 인명이 -v로 끝날 때는 ‘프’로 적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 원 발음이 달라서 표기를 다르게 한 것은 아니다. 불가리아어에서는 어말의 자음이 모두 무성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어말의 -v는 [f]로 발음된다.

어말 자음이 무성음으로 발음되는 것은 거의 모든 슬라브어계 언어의 특징이다. 하지만 세르보크로아트어와 우크라이나어만은 예외이다. 그래서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따르면 어말의 -v도 ‘브’로 적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의 정치인 Vojislav Koštunica는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로 표기한다.

혹시 Plovdiv의 한글 표기에만 세르보크로아트어 규정을 적용한 것 아닐까? 그러면 나머지 불가리아 인명은 왜 세르보크로아트어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을까?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중간 이름을 ‘미하일로비치’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어식이고 불가리아어로는 ‘미하일로프(Mikhaylov)’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혹시 불가리아 인명을 모두 러시아어식으로 표기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머지 이름들은 모두 불가리아어식 이름을 원어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페타르 스토야노프’는 러시아어식으로 표기한다면 ‘표트르 스토야노프’가 되어야 한다.

2023. 8. 4. 추가 내용: 알고 보니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소련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소련 시민권도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어식 부칭 ‘미하일로비치’를 포함한 러시아어식 이름으로도 알려진 것이다.

또 [x]를 나타내는 철자 kh는 ‘미하일로비치’에서처럼 ‘ㅎ’으로 적는 것이 원칙인데 Khristo는 ‘크리스토’라고 적고 있다. 더구나 로마자 표기 방식에 따라 이 음은 h로 적을 수도 있다. 실제 이 이름은 Hristo라는 표기로 더 잘 알려져있다.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외래어 표기법에 불가리아어 관련 규정이 없고 세르보크로아트어 관련 규정의 적용 범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혼동이 있어 불가리아어의 한글 표기가 일관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기준이 없으니 불가리아어의 한글 표기 방식은 그때 그때 표기를 결정한 사람에 따라 달라져 위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아’, ‘우’로 둔갑하는 불가리아어의 ъ의 표기

그러면 기준을 세우기 위해 불가리아어 한글 표기에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어떨까? 아쉽게도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일단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가리아어와 세르보크로아트어는 어말 자음의 발음에서 차이가 난다. 불가리아어 인명은 -v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인데 발음에 따라 ‘프’로 표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축구 선수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를 불가리아어 발음에도 맞지 않게 ‘스토이치코브’라고 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좀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불가리아어는 영어에서 쓰는 로마문자가 아니라 러시아어에서 쓰는 키릴문자를 쓴다. 세르보크로아트어는 로마문자와 키릴문자 둘 다 사용하고 둘 사이에 거의 일대일 대응이 있기 때문에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불가리아어에 적용하는 것 자체는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불가리아어 발음에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지만). 예를 들어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불가리아어 표기는 София이다. 이는 세르보크로아트어식 로마문자·키릴문자 변환을 통해 Sofija로 옮길 수 있다. 여기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하면 ‘소피야’가 된다. ‘소피아’는 아마 영어나 라틴어식 이름을 따른 관용 표기일 것이다.

하지만 불가리아어에서는 세르보크로아트어에서 쓰지 않는 글자를 두 개 쓴다. 바로 щ와 ъ이다.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할래야 할 수가 없다.

그나마 щ는 [ʃt]라는 소리를 나타내므로 sht로 보고 적으면 된다. 하지만 ъ의 발음은 [ə] 또는 [ɤ]로 보통 나타내며 다른 슬라브어계 언어에서는 찾기 어려운 모음 소리이다.

불가리아어를 로마자로 적을 때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ъ의 표기는 ŭ, ǎ, u, a 등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위의 표기 용례에 나온 이름 가운데 원어에서 ъ로 표기되는 음이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Kazanluk (Казанлък) 카잔
  • Purvanov, Georgi (Първанов, Георги) 르바노프, 게오르기
  • Stoyanov, Petar (Стоянов, Петър) 스토야노프, 페

‘카잔루크’와 ‘푸르바노프’에서는 이 음을 ‘우’로 적었고 ‘페타르’에서는 이 음을 ‘아’로 적었다. 순전히 로마자로 표기된 이름만을 참조했기 때문에 같은 음이 이렇게 둘로 갈린 것이다. 그런데 같은 한국어 이름도 사람에 따라 로마자 표기를 다르게 적을 수 있는 것처럼, 불가리아어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여러 개가 쓰인다. Kazanluk는 Kazanlak로도 쓰이고 Purvanov는 Parvanov로도 쓰인다. 로마자 표기가 다른 방식으로 된 자료를 참고한다면 ‘카잔라크’, ‘파르바노프’라는 표기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불가리아어를 일관된 기준으로 표기하려면 키릴문자로 된 원 표기를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럼 ъ는 어떻게 표기하는 것이 좋을까? 발음에 따른다면 ‘어’가 가장 가깝다. 이 발음은 [ə] 또는 [ɤ]로 적는다고 했는데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에서 [ə]는 ‘어’로 적게 되어 있고 [ɤ]는 중국어의 한어병음 e, 베트남어의 ơ가 나타내는 모음을 표시할 때도 쓰는데 둘 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어’로 적게 되어 있다. 한국어의 ‘어’ 발음을 [ɤ]로 표기하기도 한다.

‘어’라는 표기를 사용하는 것이 생소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지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표기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영어와 독일어의 Peter, Alexander에 해당하는 불가리아어 이름 Petǎr와 Aleksandǎr는 ‘페터르’, ‘알렉산더르’가 된다. 끝의 r 발음을 나타내려 ‘르’를 붙인다는 것을 빼면 독일어식 ‘페터’, ‘알렉산더’와 똑같아진다.

불가리아어 한글 표기 방식의 정립을 기대하며

글을 정리해보자. 국립국어원의 해명을 들어야겠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된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쓰는 의미와 달라 혼동의 우려가 있다. 특히 불가리아어를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 하고 있어 불가리아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혼선을 빚을 수 있다.

하지만 불가리아어는 세르보크로아트어와 발음 규칙이 다르고 세르보크로아트어에는 없는 소리와 글자도 있어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래도 불가리아어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와 발음이 같은 글자는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에 따라 적되 어말에서는 자음을 무성음이 된 것으로 적고 특유의 모음 ъ는 ‘어’로 적으면 일관되고 자연스러운 표기 방식이 될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위의 목록에서 굵게 표시한 이름의 표기를 고친다면 다음과 같다.

  • 카잔루크 → 카잔러크
  • 플로브디브 → 플로브디프
  • 소피아 → 소피야
  • 보테프, 크리스토 → 보테프, 흐리스토
  • 푸르바노프, 게오르기 → 퍼르바노프, 게오르기
  • 스토야노프, 페타르 → 스토야노프, 페터르

이건 예로 든 것이고 꼭 위의 표기를 고치자는 것은 아니다. ‘소피아’ 같은 표기는 관용 표기이며 딱히 고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불가리아어를 표기할 때는 제대로 된 기준을 세우고 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크리스토’, ‘흐리스토’처럼 똑같은 불가리아어 이름이 로마자 표기 방식에 따라 한글 표기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2023. 8. 4. 추가 내용: 여전히 불가리아어의 ъ는 ‘어’로 적는 것이 가장 낫다는 의견이지만 2006년에 지정된 불가리아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에서 키릴 문자 а와 구별 없이 ъ도 로마자 a로 옮기는 것을 감안해서 ‘아’로 통일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카잔라크’, ‘파르바노프’, ‘페타르’ 등의 표기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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