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방향의 역사

본 글은 한국어문기자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 《말과글 》 174호(2023년 봄)에 실렸던 것으로 해당 호는 여기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필자가 《말과글》 지난 호에 기고한 글에서는 여러 언어의 한글 표기를 논하면서 원어 철자도 같이 소개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가운데 아랍 문자로 쓰인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이름이 잘못 인쇄된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랍 문자는 한글이나 로마자와는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대부분의 자모가 이어진다. 그런데 인쇄된 기사에서는 각 자모가 이어짐 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열되었다. 예를 들어 아랍어 남자 이름 ʿAbdu llāhi ‘압둘라히’는 모음 부호를 추가한 아랍 문자로 왼쪽과 같이 적어야 하는데 오른쪽과 같이 인쇄되었다.

확인해보니 인쇄소에 보낸 원고를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인 인디자인으로 조판하는 과정에서 글이 잘못 출력된 것이었다. 아랍 문자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처럼 낱자가 분리되어 거꾸로 인쇄되어도 눈치채기 어려우니 조판 과정에서 아랍 문자 처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확인을 부탁했어야 하는데 미처 생각을 못했다.

어도비에서 만드는 인디자인은 세계 출판업계에서 널리 쓰이지만 2012년 이전에만 해도 아랍 문자가 정식으로 지원되지 않아 아랍 문자를 쓰려면 외부 플러그인이 필요했다. 지금도 이른바 컴포저(composer) 설정을 제대로 해야지 아랍 문자가 올바르게 구현되고 단순히 외부 파일에서 글을 복사하여 붙이기만 하면 아랍 문자가 이처럼 깨져서 나오기 마련이다. 또 몇몇 단어 정도가 아니라 장문을 아랍 문자로 쓸 때 필요한 조판 기능을 활용하려면 중동·북아프리카판 인디자인을 따로 설치해야 한다.

오늘날 일반 사용자가 흔히 쓰는 텍스트 편집기, 웹 브라우저, 워드프로세서 등에서는 아랍 문자를 별문제 없이 구현할 수 있는데 오히려 전문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에서 애를 먹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도 전자는 사용자가 관여하지 않아도 문자 방향에 대한 세세한 조정을 알아서 자동적으로 처리하게 되어있지만 후자는 사용자에게 전적으로 맡기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일 것이다.

방향이 서로 다른 문자를 혼용할 때는 그 경계에 놓인 문장 부호를 어디에 붙일지, 글을 어떻게 정렬할지 등 결정할 사항이 많다. 아랍 문자로 된 글도 순수하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만 쓰는 것은 아니고 숫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데 대신 마이너스 부호는 오른쪽에 붙이는 등 꽤나 복잡하다. 이처럼 문자마다 다른 쓰기 방향은 어떻게 정해졌을까?

다양한 방향으로 쓸 수 있던 초기 문자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이래 글은 다양한 방향으로 써왔다. 특히 초기 문자는 쓰는 방향에 큰 구애를 받지 않은 것이 많다. 쓰는 평면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4~6세기경 원시 아일랜드어를 적는 데 쓰인 오검 문자는 선돌에 새길 때 흔히 왼쪽 밑에서부터 시작해서 모서리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서 새겼으며 맨 위에 다다른 후에도 글이 계속되면 위쪽 모서리를 활용했고 필요하면 반대쪽 모서리를 따라서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수평으로 놓인 돌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새겼다.

선돌에 새긴 오검 문자(CIIC 81, 아일랜드 코크 대학교 소장)와 아일랜드 고고학자 스튜어트 매캘리스터(R. A. Stewart Macalister)가 이를 그린 그림. 왼쪽 밑에서부터 모서리를 따라 썼다(Wikimedia: Florian Thiery, CC BY 4.0).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인 신성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도 했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기도 했다. 이에 따라 글자 방향도 바뀌어서 인간이나 동물 모습을 한 글자가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면 왼쪽에서부터 읽었는데 심지어 같은 비문에서 두 방향이 혼용되기도 했다.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쓰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 관리 우세르하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봉납 석비(미국 뉴욕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가로쓰기 부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고 세로쓰기 부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 때문에 서로 글자 방향도 반대이다.

기원전 19세기 무렵 셈 어파에 속한 언어를 쓰던 이들이 이집트 신성 문자의 표음 글자를 취해 오늘날 원시 시나이 문자라고 불리는 문자를 만들었다. 여기서 유래한 페니키아 문자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전해져 그리스 문자를 낳았다. 초기에는 그리스 문자도 오른쪽에서부터 쓰거나 왼쪽에서부터 쓸 수 있었으며 쓰는 방향에 따라 각 자모의 방향도 달라졌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그리스 문자는 기원전 8세기에 제작된 도기 두 점에 적힌 것인데 둘 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있으며 오늘날 쓰는 문자와 비교해서 좌우가 뒤집힌 꼴이다.

초기 비문에 나타나는 그리스 문자 가운데는 특이하게 줄을 바꿀 때마다 바로 그 밑에서 이어 쓰면서 쓰는 방향도 바꾼 것이 많다. 마치 소가 밭을 가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런 방식을 ‘소가 도는 것처럼’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온 이름인 부스트로페돈(boustrophēdón)으로 부른다.

그리스 문자는 에트루리아 문자를 거쳐 고대 로마에 전해져 라틴어를 적는 라틴 문자, 즉 우리에게 친숙한 로마자로 이어졌다. 초기 라틴어 비문 가운데도 부스트로페돈 방식으로 쓴 것이 많다.

문자마다 통일되기 시작한 쓰기 방향

이처럼 초기에 꽤 자유롭던 문자 방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문자마다 한가지 방식으로 통일되었다. 이집트 신성 문자에서 발달한 필기체인 신관 문자나 후에 이를 더욱 단순화한 민중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만 썼다.

페니키아 문자는 부스트로페돈 방식으로 쓴 것도 있지만 대부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으며 이는 여기서 나온 아람 문자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아람 문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아랍 문자와 히브리 문자는 오늘날까지도 오른쪽에서부터 쓴다.

반면 그리스 문자와 로마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으로 통일되었는데 오른손잡이가 쓰기 편하다는 것을 고려했을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왼쪽에서 시작하는 가로쓰기가 다른 문자에도 퍼졌다. 예를 들어 8세기 이후 수도사들이 라틴어로 제작한 필사본에 오검 문자로 된 글을 삽입했을 때는 대부분 로마자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를 했다.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 에리트레아의 공용어인 티그리냐어 등을 적는 에티오피아 문자는 원시 시나이 문자에서 고대 남아라비아 문자를 거쳐 나온 것인데 고대 남아라비아 문자는 부스트로페돈 방식을 많이 썼고 초기 에티오피아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4세기경 에티오피아에 기독교가 전해지면서 왼쪽에서부터 쓰는 것으로 통일되어 오늘날까지 이른다.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문학은 그리스어를 통해 소개되었으므로 필자의 생각에 에티오피아 문자를 왼쪽에서부터 쓰게 된 것은 아마 그리스 문자의 영향일 듯하다.

약 2000년 전 고대 인도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카로슈티 문자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브라흐미 문자가 양립하였다. 카로슈티 문자는 아람 문자에서 유래했다는 것에 별 이견이 없지만 브라흐미 문자는 아람 문자 혹은 기타 셈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정확한 기원이 확실하지 않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인도에 전해진 그리스 문자의 영향으로 왼쪽에서부터 쓰게 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카로슈티 문자는 3세기 이후 명맥이 끊겼지만 브라흐미 문자는 데바나가리 문자, 벵골 문자, 텔루구 문자, 타밀 문자, 버마 문자, 크메르 문자, 타이 문자, 티베트 문자 등 오늘날 아시아 각지에서 쓰는 다양한 문자의 시조가 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왼쪽에서부터 쓴다.

동북아시아에서 쓰이는 두 가지 방식의 세로쓰기

고대 중국에서는 아마도 대쪽이나 얇은 나무쪽에 글씨를 쓰면서 일찍이 위에서 아래로 쓰는 세로쓰기가 일반화된 듯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인 갑골 문자나 청동기에 새겨진 금석 문자도 대부분 세로쓰기를 보인다.

한자를 비롯하여 그 영향을 받은 한글이나 일본의 가나도 전통적으로는 세로쓰기를 하면서 오른쪽부터 첫 줄을 시작했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에서는 또다른 세로쓰기 방식도 쓰인다.

몽골에서는 오늘날 로마자처럼 가로쓰기를 하는 키릴 문자를 주로 쓰지만 전통적으로는 세로쓰기를 하는 몽골 문자를 썼으며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에서는 지금도 몽골 문자를 쓴다. 몽골 문자에서 파생된 만주 문자도 세로쓰기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왼쪽부터 첫 줄을 시작한다.

몽골 문자는 칭기즈 칸 시대에 서역의 튀르크계 민족 회홀(回鶻)이 쓰던 문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회홀은 원래 돌궐 문자를 쓰다가 실크 로드에서 널리 쓰이던 소그드 문자를 받아들였는데 소그드 문자는 아람 문자에서 시리아 문자를 거쳐 파생된 것으로 이들처럼 원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그런데 후기 소그드 문자는 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90도 회전시켜 위에서 아래로 쓰는 세로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첫 줄이 왼쪽부터 시작하게 되었고 여기서 나온 회홀 문자와 몽골 문자, 만주 문자도 같은 방식을 따랐다. 원나라 세조 때 티베트 출신 국사인 파스파가 몽골어를 포함한 원나라의 여러 언어를 적기 위해 고안한 파스파 문자도 자형은 왼쪽부터 가로쓰기하는 티베트 문자에서 땄지만 적는 방향은 몽골 문자처럼 첫 줄을 왼쪽부터 시작하는 세로쓰기였다.

계속되는 쓰기 방향의 변화와 새로운 기술과의 관계

한글과 한자, 가나는 20세기 중반 이후 왼쪽부터 시작하는 가로쓰기로 쓰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특히 한글은 이제 세로쓰기를 보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한글은 세로쓰기가 일반적이었고 20세기 이전에는 1880년에 파리외방선교회에서 편찬한 한불 대역 사전인 《한불자전》이나 1895년에 이준영·정현 등이 편찬한 국한 대역 사전인 《국한회어》에서 한글 가로쓰기가 산발적으로 쓰인 정도였다.

주시경은 1897년 《독립신문》에 실린 〈국문론〉에서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바 있는데 그의 제자들이 결성한 조선어학회는 광복 후 편찬한 한글 교과서에서 가로쓰기를 채택하였다. 가로쓰기로 교육을 받은 세대가 성장하면서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 1980년대에 이르러는 거의 모든 출판물이 가로쓰기를 받아들였고 끝까지 세로쓰기를 고집하던 신문마저 가로쓰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예로부터 익숙했던 세로쓰기 대신 가로쓰기를 받아들인 외부적인 요인으로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로마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수식, 물리 공식, 화학식 등은 로마자 중심으로 표현 방식이 정립되었기 때문에 세로로 쓴 글에서는 다루기가 불편하다.

그 후 199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2000년대에는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한글 가로쓰기만 지원하였다. 이런 기술은 애초에 왼쪽부터 가로쓰기를 하는 로마자 중심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세로쓰기는 물론 아랍 문자나 히브리 문자처럼 오른쪽부터 가로쓰기를 하는 문자가 제대로 지원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요즘은 상황이 많이 나아져서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일상적인 용도로 아랍 문자나 히브리 문자를 다루는 데는 별 문제가 없으며 세로쓰기를 하는 몽골 문자나 만주 문자도 웹 브라우저 상에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호 기사에서 나온 인쇄 오류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쓰기 방향이 다른 문자가 언제나 완벽하게 처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이들의 구현이 꾸준히 개선되어 이런 문제도 사라지기를 기대해본다.

몽골 대통령실 홈페이지(https://president.mn/mng/)에 쓰인 몽골 문자. 몽골은 키릴 문자를 쓰지만 최근에는 몽골 문자도 장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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