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국기
외국어와 외래어의 한글 표기를 심의하는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는 12월 11일 제82차 회의 결과를 발표하였다. 특기할만한 부분은 지금까지 ‘벨로루시’로 표기하던 국명을 ‘벨라루스’로 적기로 한 것이다. 다음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실린 설명이다.
특히, 이 밖에 옛 소련에서 1991년에 독립함과 동시에 국명을 바꾼 ‘벨로루시’의 표기를 새 국명에 맞게 ‘벨라루스'(정식 명칭은 ‘벨라루스 공화국’)로 통일해서 적기로 했다.
17년 늦은 개정
소련의 해체로 독립한 벨라루스를 ‘벨로루시’로 적기로 결정한 것은 1991년 12월 10일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였다. 당시 Belorus’를 ‘벨로루시(공화국)’ 또는 ‘백러시아공화국’으로 적기로 결정했다.
이 Belorus’는 러시아어 옛 철자인 Белорусь를 로마자로 적은 것이다. 그러나 1991년 9월 19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는 국명을 러시아어로 Беларусь(Belarus’)로 표기하고 다른 언어로도 이를 바탕으로 한 표기를 사용할 것을 법으로 정했다(러시아어 원문은 여기에). 벨라루스의 영어 국명이 Belarus인 것도 여기서 연유했다.
벨라루스 외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다른 국가에서는 옛 철자인 Белорусь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Беларусь가 대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벨라루스의 옛 이름인 ‘벨로루시야(Белоруссия, Belorussiya)’는 아직도 러시아어 사용국에서 많이 쓰인다.
벨라루스어 철자는 철저히 발음을 따른다
그럼 왜 옛 철자인 Белорусь를 Беларусь로 바꾸었을까? 바로 벨라루스어 표기와 통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벨라루스어에서는 국명을 Беларусь로 표기한다.
벨라루스어는 러시아어와 같은 동슬라브계 언어로, 벨라루스에서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공용어로 쓰고 있다. 벨라루스어는 러시아어보다는 발음에 충실한 철자법을 택하고 있다. 러시아어에서는 보통 무강세 음절에 오는 о와 а가 둘 다 [ə] 또는 [ɐ]가 되는 모음 약화 현상이 일어난다(지역에 따라 그러지 않은 곳도 있다). 쉽게 말해서 강세가 없는 음절에서는 о가 а처럼 발음된다고 보면 된다. 또 화자에 따라 d음과 t음이 뒤따르는 모음에 따라 dz음, ts음이 되는 구개음화 현상도 많이 일어난다.
전광용의 단편소설 〈꺼삐딴 리〉에 보면 ‘하나’란 뜻의 러시아어 один(odin)을 ‘아진’이라고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러시아어의 음운 현상을 흉내낸 표기이다. 외래어 표기법의 러시아어 규정은 이런 현상을 무시하고 ‘오딘’으로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벨라루스어에서 ‘하나’라는 뜻의 단어는 адзін(adzin)이다. 러시아어와 거의 같은 발음인데 철자를 발음 그대로 쓴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어 옛 철자 Белорусь는 Беларусь로 쓴 것처럼 발음되니 벨라루스어 철자는 Беларус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어 철자도 아예 Беларусь로 통일하자고 바꾼 것인데, 발음이 바뀐 것은 아니고 철자만 바꾼 것이다. 물론 모음 약화 현상이 있는 억양에 한해서.
지금까지 구식 철자 Белорусь에 얽매여 실제 러시아 발음과도 동떨어진 ‘벨로루시’라는 표기를 사용했던 것을 이제야 개정하는 것은 늦은 감이 있다.
2023. 8. 2. 추가 내용: 러시아어에서 Белорусь라는 형태가 얼마나 쓰였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지만 인터넷 상으로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이다. 실제로는 Белоруссия가 러시아어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이름이다. 그러니 ‘벨로루시’는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은 이름에서 비롯된 표기일 수 있다.
‘벨라루시’로 적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벨라루스’가 과연 알맞은 표기일까?
만약 Беларусь를 러시아어 국명으로 보고 외래어 표기법의 러시아어 규정을 적용하면 ‘벨라루시’가 된다. 연음 부호 ь는 ‘이’로 표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벨라루스’는 Беларусь를 벨라루스어 국명으로 보고 임의로 표기한 것이거나 로마자 표기 Belarus를 그대로 옮긴 것이 된다. 후자라면 문제삼을 일은 없지만 만약 Беларусь를 벨라루스어로 보고 정한 표기라면 적어도 s 음을 따르는 벨라루스어의 연음 부호는 무시한다는 선례가 된다.
그런데 벨라루스의 언어학자 블리나바(Э. Д. Блінава) 저 《벨라루스어(Беларуская мова)》에 따르면 s와 z 음은 구개음화되는 정도가 꽤 강하다고 나와있다. 러시아어보다 강하고 폴란드어보다는 약하다는 것이 블리나바의 설명이다.
그러니 러시아어의 сь는 ‘시’가 되고 벨라루스어의 сь는 ‘스’가 되는 것은 무언가 뒤바뀐 느낌이다. 참고로 외래어 표기법의 폴란드어 규정에 따르면 폴란드어의 ś는 ‘시’로 적는다. 폴란드어의 ś의 발음은 보통 [ɕ]로 표시하는데, 한국어의 ‘시’의 발음도 [ɕi]이다. 그러니 폴란드어의 ś를 ‘시’로 적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어보인다.
러시아어, 벨라루스어와 함께 동슬라브 어군을 형성하는 우크라이나어에서도 연자음(연음 부호가 붙어 구개음화되는 자음)이 많이 쓰인다. 특히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에서는 s, z 음의 연음화와 러시아어에는 없는 ts 음의 연음화도 많이 일어난다. 이를 러시아어에서처럼 ‘이’를 붙여 표기하려면 우크라이나 지명인 Луганськ(Luhans’k)는 ‘루한시크’, Донецьк(Donets’k)는 ‘도네치크’로 적게 된다. 하지만 ‘루한스크’, ‘도네츠크’라고 써도 우크라이나어 발음과 크게 차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아직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표기하는 규정을 마련하지 못했고 우크라이나 지명도 러시아어 이름을 따라 표기하는데, 앞으로 우크라이나어 이름을 바탕으로 한글 표기를 정하려면 연자음을 ‘이’를 붙여 표기하느냐의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러시아어의 한글 표기에서 연자음을 ‘이’를 붙여 표기하는 것은 꽤 전통이 깊다. 러시아어를 아는 이들은 러시아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연음 부호(ь)를 한글로도 표현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생소한 언어인 벨라루스어와 우크라이나어의 연자음을 한글로 적을 때도 러시아어를 한글로 적을 때의 습관을 꼭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벨라루시’가 아니라 ‘벨라루스’로 정한 것은 나름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아니면 정말 로마자 Belarus를 별다른 생각 없이 ‘벨라루스’로 옮긴 것일 수도 있고…
** 내용 추가: 벨라루스 정부가 공문을 보내 표기 요청을 변경한 것 (아래 글은 원 글을 올린 후 추가된 내용)
이 글을 올린 후 벨라루스 국명 표기 변경에 대한 연합뉴스 기사를 찾았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
외래어심의위는 종전까지 현지어 발음 존중 원칙에 따라 벨로루시로 표기토록 해왔으나 최근 벨라루스 정부가 외래어 심의 공동위에 공문을 보내 ‘벨라루스 공화국’으로 표기해 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11일 이같이 결정했습니다.
17년만에 벨라루스의 표기를 개정한 이유는 웬일인지 했더니 역시나 당사국의 요청을 받아서였다. 그런데 ‘벨로루시’가 현지어 발음을 존중한 표기라는 것은 과장된 주장이다. 앞서 말했듯이 옛 러시아어 철자를 러시아어의 음운 현상을 일부 무시하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적용하여 한글로 표기한 것이지 실제로는 오히려 ‘벨라루스’가 현지어 발음에 더 가깝다.
그런데 “종전까지 현지어 발음 존중 원칙에 따라 벨로루시로 표기토록 해왔”다는 주장은 예전에 내린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아예 근거가 없는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1991년 당시 벨라루스 정부가 러시아어 국명의 철자를 Беларусь로 개정한 것을 존중하여 ‘벨라루시’로 표기하기로 결정하기만 했어도 이제와서 벨라루스 정부가 문제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벨라루스’는 벨라루스 정부가 원하는 표기였던 것으로 밝혀졌으니 외래어심의위는 벨라루스어의 연자음 표기고 뭐고 고민한 것이 아니라 그냥 당사국의 요청에 수동적으로 표기를 개정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외래어심의위에서 벨라루스어의 표기 기준을 놓고 심각한 고민을 했을 줄 알고 위의 글을 썼는데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2023. 8. 2. 추가 내용: 요즘 입장은 벨라루스어와 우크라이나어는 물론 러시아어의 сь(s’)도 ‘시’가 아닌 ‘스’로 적도록 외래어 표기법을 고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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