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지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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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는 2019년에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이름을 따서 누르술탄으로 개명했다가 2022년에 아스타나로 되돌려졌다. 그런데 이 도시는 그 전에도 이름이 여러 번 바뀐 역사가 있다. 1830년에 아크몰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후 아크몰린스크(1832~1961), 첼리노그라드(1961~1992)를 거쳐 카자흐스탄 독립 후 아크몰라로 불리다가 1997년에 예전의 알마티를 대신하여 수도가 된 후 1998년에 카자흐어로 ‘수도’를 뜻하는 아스타나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다만 이는 러시아어 이름을 기준으로 한 설명이다. 이 도시의 러시아어 이름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Akmoly(Акмолы) ‘아크몰리’
Akmolinsk(Акмолинск) ‘아크몰린스크’
Tselinograd(Целиноград) ‘첼리노그라드’
Akmola(Акмола) ‘아크몰라’
Astana(Астана) ‘아스타나’
Nur-Sultan(Нур-Султан) ‘누르술탄’
Astana(Астана) ‘아스타나’

그런데 러시아어 이름이 아크몰리, 아크몰린스크였던 시절에도 카자흐어 이름은 Aqmola(Ақмола) ‘아크몰라’였다. 독립 이후에 러시아어 이름을 카자흐어 형태에 가깝게 고쳐서 ‘아크몰라’가 된 것이다. 참고로 누르술탄은 카자흐어로 Nūr-Sūltan(Нұр-Сұлтан)이다.

그 전의 수도 알마티도 원래는 러시아어로 Alma-Ata(Алма-Ата) ‘알마아타’라고 부르다가 1993년에 카자흐어 이름 Almaty(Алматы) ‘알마트’와 철자가 동일하게 Almaty(Алматы) ‘알마티’로 러시아어 공식 이름이 바뀐 것이다. 카자흐어 모음 y(ы)는 보통 [ə] 정도로 발음되지만 [ɯ]로 묘사되기도 하고 다른 튀르크 어족 언어의 [ɯ]에 대응되며 키릴 문자로 적는 튀르크 어족 언어의 ы는 보통 [ɯ]로 발음되므로 카자흐어에서도 ‘으’로 적는 것이 좋다. 러시아어의 y(ы) [ɨ]도 ‘으’에 가깝게 들리지만 i(и) [i]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음인 것을 고려하여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로 적는다. 그러니 같은 Almaty도 카자흐어 이름으로 간주하면 ‘알마트’, 러시아어 이름으로 간주하면 ‘알마티’로 표기할 수 있다.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 영토는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정복되었다.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후 주민들은 이른바 알라시(Alash/Алаш) 자치국을 선포했지만 카자흐스탄을 점령한 볼셰비키군에 의해 해체되었다. 대신 소련을 세우게 되는 볼셰비키 정권은 중앙아시아를 구성 민족에 따른 여러 지역으로 나누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오늘날의 카자흐, 키르기스, 우즈베크, 투르크멘, 타지크 등 민족 구별과 민족명은 이때부터 정립되기 시작했다.

카자흐는 원래 키르기스라고 불리다가 원래 이들의 일파로 간주되던 카라키르기스가 독립된 민족으로 분리되면서 후자를 키르기스라고 부르게 되었고 전자를 카자흐로 부르게 된 것이다. 원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한 자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던 카자흐와 키르기스는 1936년에 러시아와 동등한 자격으로 소련을 구성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우즈베크와 투르크멘은 1925년에, 우즈베크의 일부이던 타지크는 1929년에 이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위를 얻었다).

소련 시절에는 별 의미 없는 구별이었지만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구성 공화국 지위가 있느냐가 향후 독립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은 독립국이 되었다. 반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한 자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았던 바슈키르와 타타르는 국민 투표에 이어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했지만 무위로 돌아가면서 러시아 연방에 속한 바슈코르토스탄 공화국, 타타르스탄 공화국으로 남아 오늘까지 이른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절 얻었던 일부 자치마저 대부분 잃어버렸다.

튀르크 어족에 속하는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우즈베크어, 투르크멘어 및 페르시아어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는 타지크어는 정책적으로 중앙아시아의 민족 구별이 이루어진 1920년대에 표준화되었다. 그때까지 이들 지역에서는 주로 차가타이어라고 하는 고전 중앙아시아 튀르크어와 고전 페르시아어가 글말로 쓰였지만 입말과 상당한 차이가 났다. 예전의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로 적는 정서법이 마련되었는데 1930년대 말에 소련의 정책 전환으로 인해 키릴 문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오늘날 카자흐어는 주로 키릴 문자로 적는데 카자흐스탄 정부는 수년째 이를 로마자로 대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대신 마감일은 계속 미루고 있다.

카자흐어를 적는 키릴 문자는 카자흐어에서 쓰는 여러 음을 나타내기 위해 러시아어에서 쓰지 않는 ә, ғ, қ, ң, ө, ұ, ү, һ, і 등의 자모를 쓴다. 예를 들어 Aqmola(Ақмола)의 q(қ)는 러시아어에는 없는 무성 구개수 폐쇄음 [q]를 나타낸다. 러시아어 국호는 Kazakhstan(Казахстан) ‘카자흐스탄’이지만 카자흐어로는 Qazaqstan(Қазақстан) ‘카작스탄’이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주민의 71% 정도가 카자흐계이고 15%가 러시아계이며 나머지 우즈베크계, 우크라이나계, 위구르계, 독일계, 타타르계 등이다. 카자흐스탄의 국어는 카자흐어이지만 이런 민족 사정을 감안하여 카자흐어와 함께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소련 시절의 교육 정책 때문에 오늘날에도 카자흐계 주민 가운데 카자흐어 대신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이들이 많다.

카자흐스탄의 지명이나 인명은 지금도 러시아어 형태를 기준으로 알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즈베크어가 유일한 공용어로 쓰이는 우즈베키스탄의 지명과 인명조차 보통 대외적으로 러시아어 형태로 알려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의 수도는 우즈베크어 Toshkent ‘토슈켄트’ 대신 러시아어 Tashkent(Ташкент)에 따라 ‘타슈켄트’로 통용된다.

대신 카자흐스탄에서 쓰는 공식 러시아어 지명은 최근에 카자흐어 형태에 가깝게 고쳐진 경우가 많다. 카자흐스탄 동남부 알마티 근처에 있는 도시는 예전에 러시아어로 Issyk(Иссык) ‘이시크’로 알려졌다. 이 근처에서 이른바 황금 인간이 출토된 고분인 이시크 쿠르간(Issyk kurgan)이 유명하다(흔히 ‘이식 쿠르간’으로 표기된다). 그러나 1993년에는 카자흐어 이름 Esık(Есік) ‘예시크’를 흉내내어 러시아어 공식 이름이 Yesik(Есик) ‘예시크’로 바뀌었다.

카자흐스탄 남부에는 아스타나와 알마티에 이어 카자흐스탄 제3의 도시인 심켄트(Shymkent/Шымкент)가 있다. 그런데 1992년 전에는 이를 러시아어로 침켄트(Chimkent/Чимкент)라고 불렀다.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서 카자흐어 이름인 슘켄트(Şymkent/Шымкент)에 따라 러시아어 공식 이름도 바뀐 것이다. 카자흐어 Şymkent는 [ʃɯmˈkʲent]로 발음되는데 ‘으’로 표기할 수 있는 모음 y(ы) [ə] 앞에 ş(ш) [ʃ]가 결합한 것은 ‘슈’로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프랑스어의 [ə]는 ‘으’로 적지만 Richelieu [ʁiʃəljø] ‘리슐리외’ 등에서 [ʃə]를 ‘슈’로 적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신 이미 설명한 것처럼 러시아어의 y(ы) [ɨ]는 ‘이’로 적으므로 러시아어 이름 Shymkent는 ‘심켄트’로 적는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 국경에 가까운 심켄트는 주민 18% 정도가 우즈베크계이고 아제르바이잔계도 2%, 타타르계도 1% 정도이다. 심켄트를 우즈베크어로는 전통적으로 Chimkent ‘침켄트’ 아제르바이잔어로는 Çimkənd ‘침캔드’, 타타르어로는 Çimkänt(Чимкәнт) ‘침캔트’라고 부른다(오늘날에는 우즈베크어로도 카자흐어를 흉내내어 Shimkent ‘심켄트’라고 흔히 부른다). 원래 이란 어파에 속하는 언어인 소그드어에서 온 지명인데 원래는 파찰음 [ʧ]로 발음되던 것이 카자흐어에서 마찰음 [ʃ]로 변했지만 다른 언어에서는 원래의 파찰음이 남아있는 것이다.

러시아어로 예적에 Kokchetav(Кокчетав) ‘콕체타프’라고 부르던 도시가 카자흐어 Kökşetau(Көкшетау) ‘쾩셰타우’를 흉내내어 1993년에 공식 러시아어 이름이 Kokshetau(Кокшетау) ‘콕셰타우’로 바뀐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주민의 2%는 타타르계인데 타타르어로는 Kükçätau(Күкчәтау) ‘퀵채타우’라고 부른다. 참고로 타타르어는 원래의 중모음 *e ‘에’, *ö ‘외’, *o ‘오’가 i ‘이’, ü ‘위’, u ‘우’로 각각 상승하고 원래의 고모음 *i ‘이’, *ü ‘위’, *u ‘우’가 약화되면서 중모음 e ‘에’, ö ‘외’, o ‘오’로 변하는 바람에 다른 튀르크어와 비교하여 마치 i, ü, u와 e, ö, o가 뒤바뀐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또 예전에 러시아어로 Dzhezkazgan(Джезказган) ‘제스카즈간’으로 쓰던 도시는 카자흐어 Jezqazğan(Жезқазған) ‘제즈카즈간’을 흉내내어 오늘날 공식 러시아어 이름이 Zhezkazgan(Жезказган) ‘제스카즈간’이다. 카자흐어에서 원래의 [ʧ]가 [ʃ]로 바뀐 것처럼 이에 대응되는 유성 파찰음 [ʤ]도 마찰음 [ʒ]로 바뀐 것이다. 다만 한글 표기에서는 [ʤ]와 [ʒ] 모두 ‘ㅈ’으로 적으므로 발음이 달라진 것이 표가 나지 않는다.

또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인 Zharkent(Жаркент) ‘자르켄트’는 1942년부터 1991년까지 한 소련 장군 이름을 따서 Panfilov(Панфилов) ‘판필로프’로 불렸지만 그 전에는 러시아어로 Dzharkent(Джаркент) ‘자르켄트’로 불렸다. 그런데 위구르어로는 ياركەنت Yarkent ‘야르캔트’라고 부른다(여기서 쓰는 위구르어의 로마자 표기에서 e는 [ɛ~æ]를 나타내므로 ‘애’로 적는다). 카자흐어는 튀르크 어족 가운데 킵차크 어파에 속하는데 킵차크 어파에서는 원래의 y [j]가 [ʤ]로 경음화하는 현상이 흔히 일어났다. 이게 다시 마찰음이 된 카자흐어의 [ʒ]는 킵차크 어파 외의 다른 어파의 [j]에 대응되는 경우가 많다(위구르어는 카를루크 어파에 속한다).

문자 교체를 시도하고 있는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언어 상황은 꽤 유동적이라서 계속 지켜봐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아직까지는 카자흐스탄 지명을 러시아어 형태에 따라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하지만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지명의 공식 러시아어 형태도 카자흐어에 가깝게 바뀐 경우가 많아 흥미롭다. 민족 간의 교통어이자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언어로서 러시아어의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되도록이면 국어인 카자흐어에서 쓰는 것과 가까운 이름을 쓰자는 절충적인 태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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