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예술가 ‘모호이너지’ 혹은 ‘모홀리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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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에는 ‘모호이너지’라는 인명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모호이너지(Moholy-Nagy, László)
「명사」 『인명』 헝가리 태생의 미국 화가·사진작가(1895~1946). 구성주의적 이념에 의하여 회화, 조각, 사진, 인쇄 따위의 분야에서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바우하우스 지도진의 한 사람이다.

서양에서는 이름-성 순으로 보통 László Moholy-Nagy라고 쓰지만 헝가리어에서는 성-이름 순을 따르기 때문에 Moholy-Nagy László라고 부른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했던 헝가리에서 태어났으며 1923년에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ˈvaltɐ ˈɡʁoːpi̯ʊs], 1883~1969)의 초청으로 미술사·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립 조형 학교 바우하우스 지도진에 합류했다.

개신교 신자였지만 유대계였던 그는 1937년에 그로피우스의 추천으로 미국 시카고에 이주하여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라는 새 디자인 학교를 설립했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938년에 문을 닫았지만 1939년에 다시 시카고 디자인 학교(Chicago School of Design)으로 재탄생했고 1944년에 디자인 학교(Institute of Design)으로 개명했으며 1949년에 일리노이 공과대학교(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의 일부가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그는 1946년에 미국에 귀화했으나 같은 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모호이너지’가 과연 올바른 표기일까? 이 글에서는 《표준국어대사전》을 존중하여 일단 ‘모호이너지’로 표기를 통일하겠지만 표준 표기를 다시 정한다면 ‘모홀리나지’가 더 어울리는 표기라고 생각한다.

외래어 표기법의 헝가리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에 따르면 헝가리어 철자 ly는 반모음으로 간주하여 모음 앞에서는 ‘이*’로 적되 뒤따르는 모음과 합쳐 ‘야’, ‘예’ 등 한 음절로 적으며 자음 앞이나 어말에서는 ‘이’로 적는다. ‘왕’을 뜻하는 király [ˈkiraːj]를 ‘키라이’로 적는 것이 예로 나온다. 그러니 외래어 표기법의 대조표에 따르면 Moholy는 ‘모호이’로 적어야 하는 듯하다.

이처럼 헝가리어 철자 ly는 반모음 [j]를 나타낸다는 상식 때문에 미국의 《메리엄·웹스터 인명 사전》에서는 Moholy-Nagy의 영어 발음을 \ˈmȯ-hȯi-ˈnädʸ\ 즉 [ˈmɔː.hɔɪ̯ ˈnɑːdʲ] ‘모호이나디’로 제시했다. 독일의 《두덴 발음 사전》에서는 Moholy의 헝가리어 발음을 [ˈmohoj] ‘모호이’로 제시하고 있으며 데그로이터 출판사의 《독일어 발음 사전》에서는 Moholy-Nagy의 독일어 발음을 [mˈɔhɔœ̯ nɔtç], 즉 더 친숙한 발음 표기 방식으로 쓰면 [ˈmɔhɔʏ̯ ˈnɔtç] ‘모호이노티’로 제시했다. 헝가리어 철자 gy의 발음을 영어와 독일어로 흉내낸 [dʲ], [tç]의 한글 표기는 일단 논외로 하면 이들은 모두 Moholy의 발음을 ‘모호이’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어판 위키백과에서는 Moholy의 헝가리어 발음을 [ˈmoholi] ‘모홀리’로, 영어 발음을 [mə.ˈhoʊ̯l.i] ‘머홀리’로 제시한다. 어느 설명을 따라야 할까?

헝가리 작곡가 외트뵈시 페테르(Eötvös Péter)에 대한 예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헝가리어 인명에서는 구식 철자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어말의 [i]를 -i 대신 -y로 적는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글에서는 Esterházy [ˈɛstɛrhaːzi] ‘에스테르하지’, Horthy [ˈhorti] ‘호르티’를 언급했다. 이들을 오늘날의 철자 방식에 따라 규칙적으로 쓴다면 각각 *Eszterházi, *Horti가 된다.

그래서 -ly로 끝나는 이름에서는 이게 규칙적으로 반모음 [j]로 끝나는 것인지, -li [li]의 구식 철자인지 알기 힘들다. 헝가리 작곡가 코다이 졸탄(Kodály Zoltán [ˈkodaːj ˈzoltaːn], 1882~1967)의 성에서는 -ly가 [j]로 발음되지만 헝가리 시인 아프릴리 러요시(Áprily Lajos [ˈaːprili ˈlɒjoʃ], 1887~1967)의 성에서는 -ly가 [li]로 발음된다.

그렇다면 Moholy에서는 -ly가 [j]일까, [li]일까?

Moholy-Nagy László의 본명은 원래 Weisz László ‘베이스 라슬로’였다. 그런데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떠나고 대신 이모부 너지 구스타브(Nagy Gusztáv) 밑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모부의 성 Nagy [ˈnɒɟ]를 땄다. 후에 어린 시절의 일부를 보냈던 소도시 모홀(Mohol)에서 이름을 딴 Moholy를 덧붙였다. 이곳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지만 오늘날 세르비아에 속해 있고 세르비아어로는 몰(Mol)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주민 62% 정도가 헝가리계이다.

헝가리어에서 -i는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로 널리 쓰인다. 그러니 Moholy는 Mohol의 형용사형을 구식 철자로 적은 것이다. Mohol에서 나온 이름인만큼 헝가리에서는 보통 [ˈmoholi] ‘모홀리’로 발음하는 듯하다.

그의 이름을 딴 부다페스트의 모호이너지 미술·디자인 대학교(Moholy-Nagy Művészeti Egyetem, MOME)에서 2020년에 그의 생일 125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 단편 《모호이너지 125(Moholy-Nagy 125)》은 세 명이 잇따라 Moholy-Nagy László를 헝가리어로 발음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모두 ‘모홀리’라는 발음을 쓴다.

다음 여러 동영상에서도 ‘모홀리’라는 발음을 쓰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https://youtu.be/AyZjg2H4pdI&t=14
https://youtu.be/pLN3TrgKKv4&t=5
https://youtu.be/SumEekQgjh8&t=139

그러니 헝가리어에서 쓰이는 Moholy의 일반적인 발음은 분명히 ‘모홀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헝가리어에서 ‘모호이’라는 발음이 틀렸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는 듯하다. 소도시 이름 Mohol의 형용사형은 구어에서 Moholi 대신 Mohoj ‘모호이’로 나타나며 그 주민들은 mohojiak ‘모호이아크’라고 부른다는 정보도 찾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모호이너지가 1919년에 〈혁명가들!(Forradalmárok!)〉이라는 활동주의 예술가 선언문에 서명했을 때는 Mohoj Nagy László라는 철자를 썼다고 한다. 적어도 초기에는 본인도 ‘모호이’라는 발음을 썼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본인이 쓴 발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대신 미국 시카고에서 자라나 고고학자가 된 그의 딸 하툴라(Hattula Moholy-Nagy)는 영어로 [mə.ˈhoʊ̯l.i] ‘머홀리’라고 발음한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스위스·미국 복수 국적자인 그의 손자 다니엘 후크(Daniel Hug, 독일어: [ˈdaːni̯eː⟮ɛ⟯l ˈhuːk])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Hattula는 독일어로 [haˈtuːla]로 발음되는 것으로 짐작하고 ‘하툴라’로 적었다(미국에서 자라났지만 독일에서 태어났으니 독일어 이름으로 본다). 본인 발음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한 동영상에서는 영어로 [hə.ˈtuːl.ə] ‘허툴라’로 발음한다.

한 동영상에서 하툴라는 독일어로 모호이너지의 첫째 부인 Lucia Moholy를 [luˈʦiːa moˈhoːli] ‘루치아 모홀리’라고 발음한다. 참고로 하툴라는 둘째 부인 지빌레(Sibylle [ziˈbɪlə])의 딸이다.

그런데 한 동영상에서는 흥미롭게도 Lucia Moholy를 독일어로 [luˈsiːa moˈhɔʏ̯] ‘루시아 모호이’로 발음한다. 어쩌면 《두덴 발음 사전》의 발음 설명을 따랐는지도 모른다.

반면 영어 발음은 보통 [lu.ˈsiː.ə mə.ˈhoʊ̯l.i] ‘루시아 머홀리’로 관찰된다.
https://youtu.be/2ndKZUzmHZI?&t=30
https://youtu.be/Rxsf5ALOXyE?&t=264
https://youtu.be/AQcfW9JG_ss?&t=1767
https://youtu.be/-k5MePMqMkw?&t=191
https://youtu.be/c72oqpLIKVM?&t=16

사진작가인 루시아 슐츠(Lucia Schulz [luˈs⟮ʦ⟯iːa ˈʃʊlʦ], 1894~1989)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스트리아령 보헤미아에 속한 프라하(오늘날 체코의 수도)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에서 모호이너지를 만나 혼인하여 Lucia Moholy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고 바우하우스 출판물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바우하우스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가 남편과 공동 작업한 1925년작 《회화, 사진, 영화(Malerei, Photographie, Film)》에는 남편만 저자로 소개되는 등 각종 출판물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

모호이너지와 1929년에 결별한 후 만난 애인이 1933년에 체포되자 유대계였던 그는 미처 그동안 찍었던 사진의 필름을 챙기지 못하고 독일에서 도피했다. 그로피우스는 루시아의 필름을 손에 넣어 바우하우스 관련 각종 도록에서 루시아가 찍은 사진을 그의 이름 언급 없이 무단으로 도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그로피우스로부터 자신의 필름을 되찾으려고 변호사를 고용하기까지 했다. 이런 연유로 바우하우스 활동 기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후에 바우하우스 주역 가운데 한 명이자 사진작가로서 재조명받고 있다.

그는 1947년에 영국으로 귀화했고 Lucia도 독일어에서 흔한 이름은 아니기 때문에 독일어에서도 대개 Lucia를 좀 더 독일어식인 [luˈʦiːa] ‘루치아’보다는 영어식 [luˈsiːa] ‘루시아’로 발음하는 듯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루시아’로 표기를 통일한다. 아쉽게도 그 역시 본인이 쓴 Moholy의 발음은 확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확인한 헝가리어, 독일어, 영어 동영상을 보면 《메리엄·웹스터 인명 사전》, 《두덴 발음 사전》, 《독일어 발음 사전》의 발음 설명이 무색하게 절대 다수가 Moholy를 ‘모홀리/머홀리’로 발음하며 ‘모호이’로 발음한 것은 Lucia Moholy에 대한 독일어 동영상 하나뿐이다. 그러니 적어도 오늘날 널리 쓰이는 발음을 기준으로는 ‘모홀리’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실 영어나 독일어 등 다른 언어 화자들은 헝가리어에서 ly가 보통 반모음 [j]를 나타낸다는 것을 잘 모른다. 작곡가 Kodály도 《롱맨 발음 사전》을 보면 영어로 [ˈkoʊ̯d.aɪ̯, koʊ̯.ˈdaɪ̯] ‘코다이’로 발음해야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koʊ̯.ˈdɑːl.i] ‘코달리’로 발음하는 이가 많다. 그러니 Moholy라는 철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mə.ˈhoʊ̯l.i] ‘머홀리’라고 발음하게 된다. 그런데 사전 편집자들은 ly가 [j]를 나타내는 헝가리어의 발음 규칙을 알기 때문에 Moholy에서도 적용된다고 짐작하고 ‘모호이’라는 발음을 제시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헝가리어에서는 보통 ‘모홀리’라고 발음되는데도 말이다.

끝으로 외트뵈시 페테르에 관한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헝가리어의 짧은 모음 a [ɒ]는 외래어 표기법에서 ‘어’로 적도록 하고 있지만 ‘아’로 적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Nagy [ˈnɒɟ]는 ‘너지’ 대신 ‘나지’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에서 Áprily Lajos는 ‘아프릴리 러요시’로 적었는데 이도 ‘아프릴리 라요시’가 낫다고 생각한다.

헝가리어의 gy는 경구개 폐쇄음 [ɟ] 또는 경구개 파찰음 [ɟ͜ʝ]이며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모음 앞에서 ‘ㅈ’, 자음 앞이나 어말에서 ‘지’로 적는다. 영어, 독일어 등 다른 언어에는 비슷한 음이 없기 때문에 영어로는 [ʤ]로, 독일어로는 [dj]로 흉내낼 수 있다(《메리엄·웹스터 인명 사전》에서 제시한 [dʲ]는 일반 영어 화자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음이다). 그런데 독일어에서는 어말 장애음이 무성음화하기 때문에 Nagy의 어말 gy는 [tç]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독일어의 어말 [tç]를 어떻게 적을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기존 규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앞의 모음 길이에 따라 ‘트히’ 또는 ‘ㅅ히’로 적어야 하겠지만 [c]나 [tʲ]에 해당하는 음으로 보아 ‘티’ 정도로 적는 것이 적당하겠다. 따라서 Nagy는 영어로 [ˈnɒʤ] ‘노지’, 독일어로 [ˈnɔtç] ‘노티’로 적을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어로도 철자의 영향으로 [ˈnɑːʤ] ‘나지’나 심지어 마찰음 [ʒ]를 쓴 [ˈnɑːʒ] ‘나지’로 발음하는 것이 흔하다(물론 미국 영어 화자들은 애초에 LOT 모음 [ɒ]와 PALM 모음 [ɑː]를 구별하지 않는다). 굳이 영어나 독일어 발음을 따지기보다는 헝가리어로 보고 ‘나지’로 적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 헝가리, 독일, 미국 등을 오간 Moholy-Nagy 가문은 국적을 따질 필요 없이 ‘모홀리나지’로 표기를 통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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