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테니스 메이저 대회인 오스트레일리아 오픈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옐레나 도키치(Jelena Dokic)가 타미라 파셰크와 17번 시드 안나 차크베타제, 11번 시드 카롤리네 보스니아키 등 강호들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현재 4회전에 진출해 있다.
옐레나 도키치
1999년 만 16세의 나이로 윔블던에서 당시 세계 1위 마르티나 힝기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샛별처럼 등장한 도키치는 2002년 세계 랭킹 4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기행으로 악명이 높은 아버지 다미르와의 불화와 우울증으로 고생하며 2006년 617위까지 추락하고 2007년에는 7개월 동안 테니스 라켓도 집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도키치가 테니스계에 복귀를 결심, 2008년 마이너 급인 ITF 대회를 전전하는 노력 끝에 2009년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 대회를 통해 출전권을 획득, 시즌 첫 메이저 대회에서 다시 4회전까지 오른 것이다.
이 선수 이름의 한글 표기를 ‘옐레나 도키치’로 정한 것은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제28차 회의(1999년 6월 30일)에서였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면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국적 문제
외국인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할 때는 현지 발음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 ‘현지’가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보통 국적을 따지지만, 다른 언어권에서 이민 온 경우, 복수 국적인 경우, 또 국적을 바꾼 경우 등 애매한 경우가 있다.
도키치는 옛 유고슬라비아(현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계 가정에 세르비아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민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으로 선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다미르가 오스트레일리아 테니스 협회를 맹비난하면서 유고슬라비아(후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적을 변경하였다. 그러다가 2005년 도키치는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오스트레일리아에 복귀하여 이듬해부터는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으로 뛰고 있다.
내용 추가: 한동안 WTA 홈페이지에서는 도키치를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태생으로 소개했으나 도키치가 인터뷰에서 현 크로아티아의 오시예크(Osijek) 태생이라고 밝힌 후 수정되었다. 베오그라드 태생으로 소개되었던 것은 세르비아인 아버지가 딸이 세르비아 태생인 것처럼 알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러면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공용어였던 세르보크로아트어(또는 세르비아어) 이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오스트레일리아의 공용어인 영어 이름으로 봐야 할까?
원 언어 발음이냐 영어식 발음이냐
외래어 심의위에서 ‘옐레나 도키치’라는 표기를 정했을 당시 도키치는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으로 뛰고 있었다. 하지만 외래어 심의위에서는 그의 태생지를 고려하여 원 언어를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잡은 듯하다. 회의록에는 원 언어 표기를 세르비아어식으로 Jelena Dokić라고 쓰고 있고, “1983~ 오스트레일리아(유고 태생) 테니스 선수”로 설명하면서 태생지를 언급하고 있다. Jelena Dokić를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에 따라 적으면 ‘옐레나 도키치’가 된다.
물론 Jelena Dokic의 영어 발음도 원 세르보크로아트어 발음과 같을 것이라 생각해서 영어 이름이라고 보고도 그렇게 적은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영어의 표기는 발음을 따르게 되어 있는데 Jelena Dokic는 전통적인 영어 이름이 아니니 원 언어의 발음대로 발음된다고 생각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영어권 이름을 영어로 발음할 때 꽤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심의된 인명 표기 용례를 보면 비영어권 출신으로 영어권에 귀화한 이들 가운데 알베르트 아이슈타인, 쿠르트 괴델처럼 영어식 발음이 아니라 원 언어 발음대로 표기를 정한 사례가 많다. 하지만 영어식 발음대로 표기를 정하는 예도 있다. 폴란드 태생 미국 정치가 Zbigniew Brzezinski는 영어식 발음을 따라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로 표기한다. 원 폴란드어 이름 Zbigniew Brzeziński를 폴란드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면 ‘즈비그니에프 브제진스키’이지만, 영어권에서는 폴란드어식 철자법과 발음법이 생소해서 폴란드어 발음과 크게 차이가 나는 영어화된 발음을 쓴다. 또 스위스 태생의 미국 작곡가 Ernest Bloch는 이름은 영어식으로 ‘어니스트’, 성은 독일어식으로 ‘블로흐’라고 쓴다. 이런 것은 일정한 기준은 없고 개별적으로 결정되는 듯하다.
Jelena Dokic의 영어 발음은?
세르보크로아트어 이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ić는 특수 문자를 잘 사용하지 않는 영어에서 보통 -ic으로 쓴다. 이것을 영어식 읽기에 익숙한 이들은 보통 ick [ɪk] 즉 ‘익’처럼 발음한다. 그러나 세르보크로아트어 발음을 흉내내어 ich [ɪʧ] 즉 ‘이치’처럼 발음하기도 한다. 특히 이민 1세대에서 ‘이치’라는 발음을 많이 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일간지 《디 에이지(The Age)》의 1월 21일자 기사에 따르면 도키치 본인도 Dokic의 영어 발음에 대해 오락가락했다.
Dokic preferred to be called Jelena ‘Dokich’ when she was younger, switched to ‘Dokick,’ but is back in the ‘ich’ camp. Asked recently what he preferred, Tomic requested ‘Tomick.’
Dokic는 어려서 옐레나 ‘도키치’로 불리는 것을 선호했다가 ‘도킥’으로 바꿨으나 다시 ‘이치’ 진영에 돌아왔다. 최근 어떤 발음을 선호하는지 질문 받은 Tomic은 ‘토믹’이라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이 기사에서 언급한 버나드 토믹(Bernard Tomic)은 이번 오스트레일리아 오픈에서 2회전에 오른 만 16세의 크로아티아계 오스트레일리아 선수이다.
실제 1999년 윔블던 당시 도키치는 ‘Pronounce me Dokick, pronounce me Dokitch, call me whatever you want (도킥이라 발음하든 도키치라 발음하든 원하는대로 불러달라)’라고 말한 적이 있고(기사) 당시 AP 기사에는 발음이 “DAH-kich”라고 소개되었다. 그랬다가 2003년 AP 인명 발음 자료에는 “DOH’-kihk”이라고 바뀌었다. 하지만 요즘은 WTA 투어 홈페이지에 발음이 “YELL-e-nuh DOK-itch”로 나온다. 예전에는 ‘도킥’이라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래 영어 이름이 아니니 모음 발음까지 따지면 복잡해진다. 그나마 Dokic의 o는 ‘long o’ [oʊ̯]로 보든 ‘short o’ [ɒ]로 보든 ‘오’로 적는 것은 마찬가지이다(예전 글 참조). 하지만 Jelena는 [jɛ.ˈleɪ̯n.ə] ‘옐레이나’, [jə.ˈleɪ̯n.ə] ‘열레이나’, [ˈjɛl.ən.ə] ‘옐러나’, [ˈjɛl.ɛn.ə] ‘옐레나’ 등 어느 음절에 강세를 주고 어느 모음을 약화시키느냐에 따라 다양한 발음이 가능하다. 전 오스트레일리아 선수 얼리샤 몰릭을 포함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이 가장 많이 쓰는 발음은 둘째 음절에 강세를 주는 ‘열레이나’인 것 같다.
하지만 세르보크로아트어 발음에서는 첫 음절에 강세가 오는 듯하고(발음 듣기), WTA 투어 홈페이지에 소개된 발음 “YELL-e-nuh”도 첫 음절에 강세가 오는 ‘옐레나’로 세르보크로아트어 발음에 가장 근접한 영어 발음인 듯하다. 그러니 ‘옐레나’가 가장 나은 표기 같다. (하지만 보통 WTA 투어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선수 이름 발음은 엉터리가 너무 많아 믿을 것이 못된다. 조윤정 선수의 발음은 아직까지도 ‘cho yoon yong’으로 나와있다.)
2023. 8. 7. 추가 내용: 세르보크로아트어로 Jelena는 [ˈjɛ̌lɛna] ‘옐레나’와 같이 첫 음절에 강세가 온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결론을 내자면 ‘옐레나 도키치’는 세르보크로아트어 이름이라고 본 표기이기도 하지만 영어 발음에 따른 표기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외래어 심의위에서는 원 발음과 영어 발음이 거의 같다고 보고 일부러 어느 발음을 기준으로 할지 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 이름 발음은 내 마음대로 바꾼다
도키치가 본인 이름의 발음을 놓고 오락가락 한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닌 것이 영어권에서는 본인 이름의 발음을 마음대로 바꾸는 경우가 가끔 있다.
미국 배우 린지 로언(Lindsay Lohan)은 활동 초기에 [ˈloʊ̯.hæn], 즉 ‘로핸’이라는 발음을 썼으나 요즘은 [ˈloʊ̯.ən], 즉 ‘로언’이라는 발음을 쓰고 있다. Lohan은 아일랜드 이름으로 ‘로언’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맞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린제이 로한’이라는 표기를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이름과 성의 발음을 모두 잘못 안 표기이다.
스티븐 콜베어
미국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Stephen Colbert)는 대학 시절에 Colbert의 발음을 마치 어말의 t를 발음하지 않는 프랑스어 이름인 것처럼 [koʊ̯l.ˈbɛə̯ɹ], 즉 ‘콜베어’로 고쳤다. Colbert는 원래 아일랜드 이름으로 영어에서 보통 [ˈkoʊ̯l.bəɹt] 또는 [ˈkɔl.bəɹt], 즉 ‘콜버트’로 발음된다.
테니스 선수 이름 표기 사례 분석
오늘날 국제 무대에서 뛰는 테니스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출신 국가도 다양하고 여러 언어권에 얽혀 있는 경우도 많아 이름의 한글 표기를 정하기가 난감할 때가 많다.
로저 페더러
스위스의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는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 출신이다. 독일어로 Roger는 보통 ‘로거’로 발음된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다르다. 스위스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Roger를 ‘로셰’ 또는 ‘로제’로 발음한다. 하지만 로저 페더러의 경우에는 ‘로거’나 ‘로셰’, ‘로제’가 아니라 영어식으로 ‘로저’라고 발음한다. 왜일까? 바로 페더러의 어머니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으로 영어 사용자로서 아들의 이름을 영어 이름으로 지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마리 피르스(Mary Pierce)는 미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가 캐나다에 여행 중에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났으며 프랑스와 미국 이중국적자이다. 영어가 모국어로 선수 생활 초기에는 프랑스어를 잘 못해 프랑스인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메리 피어스’라고 표기할지 프랑스어식 ‘마리 피르스’로 표기할지 꽤 애매한데, 일단 프랑스 대표로 뛰고 있으니(아직 정식 은퇴는 안했다) ‘마리 피르스’라고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름의 프랑스어 발음을 잘못 안 ‘마리 피에르스’라는 표기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옐레나 도키치가 이번 대회 3회전에서 제압한 카롤리네 보스니아스키보스니아키(Caroline Wozniacki)는 폴란드계 덴마크 선수이다. Wozniacki (Woźniacki)는 폴란드어 이름이라 덴마크어의 철자에 따른 발음 규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의 덴마크어 표기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폴란드어 발음대로 표기하면 ‘보지니아츠키’인데 덴마크어에서는 이를 흉내내어 Vosniaski라고 적은 것처럼 발음한다. 덴마크어에서는 [z]나 [ʦ] 발음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s]로 대체한다.
2023. 8. 7. 추가 내용: 원문에서는 ‘보스니아스키’라고 썼지만 그 후 본인이 선호하는 발음은 마치 Vosniaki라고 적은 것처럼 발음한 ‘보스니아키’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동영상에서 본인의 덴마크어 발음을 들을 수 있고 이 동영상에서는 영어로 본인 이름 발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폴란드어로는 여자는 성씨도 여성형으로 쓰므로 원래 Woźniacka [vɔʑˈɲaʦka] ‘보지니아츠카’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만 덴마크어 화자들에게는 폴란드어식 발음이 어려워 덴마크어로도 ‘보스니아키’로 발음한다는 것이다. 덴마크어 발음은 [kʰɑ(ʁ)oˈliːnə vʌsniˈɑɡ̊i]로 나타낼 수 있다. 강세 음절 첫머리를 제외한 어중 위치에서는 /k/와 /ɡ/의 구별이 사라져 [ɡ̊]로 발음된다. 요즘 발음에서는 Caroline의 r이 앞의 a에 흡수되고 어말의 e /ə/ 역시 앞의 n에 흡수되기 때문에 [kʰɑoˈliːnn̩] ‘카올린(느)’ 정도로 들린다. 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런 발음의 변화를 무시하고 ‘카롤리네’라고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편 본인은 영어로 말할 때는 Caroline도 영어식으로 [ˈkæɹ.ə.laɪ̯n] ‘캐럴라인’이라고 발음한다.
업데이트한지는 꽤 됐지만 예전에 테니스 선수 이름의 한글 표기를 정리해놓은 문서가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참고 바란다.
레베카 함몬? 아, 베키 해먼!
다른 종목 이야기도 하나 해보자. 국립국어원에서 배포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선수명 한글 표기 자료를 보니 러시아의 농구 선수 가운데 ‘레베카 함몬(Ребекка Хаммон/Rebekka Khammon)‘이란 이름이 있었다.
베키 해먼
러시아어 이름 같지가 않아서 ‘레베카 함몬’이 누군가 생각해봤더니 바로 미국 출신 농구 선수 베키 해먼(Becky Hammon)이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레베카 함몬’은 정식 이름 Rebecca Hammon을 러시아어식으로 옮긴 이름이었던 것이다. 베키 해먼은 2008년 초에 러시아에 귀화, 러시아 대표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러시아에 귀화하기 훨씬 전부터 WNBA에서의 활약으로 꽤 이름이 알려진 베키 해먼을 굳이 러시아어식으로 ‘레베카 함몬’이라고 표기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글 표기 자료를 준비한 쪽에서는 러시아어 이름만 보고 표기를 결정했을테니 그 속사정을 알았을 리가 없다.
이처럼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이름의 한글 표기를 제대로 정하려면 여러 가지를 따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미묘한 것들을 따지기는커녕 외래어 표기법의 기본도 모르는 스포츠 기자들이 원 발음도 모르고 생각 없이 양산하는 표기가 계속 고쳐지지 않고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