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thon과 Guido van Rossum의 한글 표기

본 글은 원래 이글루스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글루스가 종료되었기에 열람이 가능하도록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기한이 지난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사항에 따라 글을 쓴 후 의견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오타 수정이나 발음 기호를 균일하게 고치는 것 외에는 원문 그대로 두었고 훗날 내용을 추가한 경우에는 이를 밝혔습니다. 외부 링크는 가능한 경우 업데이트했지만 오래되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은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날짜는 이글루스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파이썬’이라 하는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다. 원래 이름은 Python. 텔레비전과 영화를 통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영국 코미디 팀 ‘몬티 파이선(Monty Python)’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그러니 Python은 영어 이름으로 보면 된다. Python은 고대 그리스어의 ‘피톤(Πύθων)’에서 나온 말로 원래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이 죽였다고 하는 델포이의 거대한 뱀의 이름인데 영어에서는 ‘비단뱀’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Python의 발음은 Longman Pronunciation Dictionary에 따르면 영국식으로는 [ˈpaɪ̯θ.(ə)n]이고, 미국식으로는 [ˈpaɪ̯θ.ɑːn]이란 발음이 주로 쓰이며 [ˈpaɪ̯θ.(ə)n]도 쓰인다고 한다. 미국식의 [ˈpaɪ̯θ.ɑːn]이란 발음은 마지막 모음이 John, Ron 등의 모음과 같다는 것인데 이에 대응하는 영국식 발음은 [ˈpaɪ̯θ.ɒn]이 되겠지만 그런 발음은 쓰이지 않는다.

Python의 로고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ˈpaɪ̯θ.n]은 ‘파이슨’, [ˈpaɪ̯θ.ən]은 ‘파이선’, [ˈpaɪ̯θ.ɑːn]은 ‘파이산’으로 적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파이썬 사용자 모임에서 쓰는 표기는 ‘파이썬’이다. 영어의 [θ] 발음은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ㅅ’으로 적도록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ㅆ’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된소리 ‘ㅆ’에 가깝게 인식되는 영어의 [s] 발음을 ‘ㅅ’으로 적으면서도 [θ]는 ‘ㅆ’으로 적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여하튼 ‘파이썬’이 공식 표기처럼 되었으니 외래어 표기법에는 어긋나더라도 이를 존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 이 글을 올리고 난 후 daewonyoon님의 제보로 “한국에서 파이썬이 파이썬이 된 사연“이라는 블로그 글을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막 파이썬이 각광받기 시작할 즈음인 2000년 4월 28일 한국의 파이썬 사용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당시 ‘파이선’, ‘파이톤’, ‘퓌톤’ 등 매우 다양하게 불리던 Python의 한글 표기를 통일했다는 내용이다. ‘파이선’이라고 하면 약한 느낌이 들어 “강하고 새로운 인상을 주자”는 의미로 ‘파이썬’이라고 표기를 정했다고 한다.

‘파이썬’이라는 표기가 원 발음을 [ˈpaɪ̯θ.ən]으로 본 것인지 [ˈpaɪ̯θ.ɑːn]으로 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얼핏 봐서는 [ˈpaɪ̯θ.ən]을 적은 것 같지만 [ˈpaɪ̯θ.ɑːn]을 ‘파이썬’으로 인식한 것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철자에서 o로 적는 미국식 발음의 [ɑː]는 ‘ㅓ’로 적는 일이 많다.

보통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영국식 발음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어의 철자 o는 발음에 따라 ‘ㅗ’ 또는 ‘ㅓ’로 표기된다. 그러니 미국식 발음의 [ɑː]를 듣고도 철자가 o라면 ‘ㅗ’ 아니면 ‘ㅓ’라고 생각해서 상대적으로 [ɑː]에 가까운 ‘ㅓ’로 적는 일이 많은 듯하다.

미국 지명인 Hollywood [ˈhɑːl.i.wʊd]는 미국식 발음을 따라 ‘할리우드’로 적는 것이 표준이지만 ‘헐리웃’ 또는 ‘헐리우드’로 적는 것을 많이 본다. Sean [ˈʃɔːn]을 표준 표기인 ‘숀’이 아니라 ‘션’으로 적는 것은 [ɔː]를 ‘ㅓ’로 인식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미국 일부에서 쓰는 발음인 [ˈʃɑːn]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외래어 표기법을 지키지 않은 표기가 흔히 쓰이는 대표적인 예로 ‘컨텐츠’가 뽑힌 적이 있다. 영어 contents는 영국식 발음인 [ˈkɒn.tɛnts]를 따른 ‘콘텐츠’로 쓰는 것이 표준이다. 미국식 발음인 [ˈkɑːn.tɛnts]는 ‘칸텐츠’라 적어야 하지만 condition ([kən.ˈdɪʃ.(ə)n], ‘컨디션’)과 같은 단어에서 con-이 무강세 음절로 [kən]으로 발음되어 ‘컨’으로 적는 것과 혼동하여 ‘컨텐츠’라는 표기가 나온 것 같다. ‘콘퍼런스’ (conference [ˈkɒn.f(ə)ɹ‿əns])를 흔히 ‘컨퍼런스’로 잘못 적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Guido van Rossum

파이썬을 개발한 사람은 Guido van Rossum이라고 하는 네덜란드인이다. 이 이름은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

파이썬의 개발자 Guido van Rossum

외래어 표기법에는 오랫동안 네덜란드어 표기 기준이 없다가 2005년 12월 28일 네덜란드어와 포르투갈어, 러시아어의 표기 기준이 추가되었다. 고시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잘 홍보도 안 된 만큼 4년이 지난 지금도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제대로 지키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초창기부터 있었던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의 규정도 몇 십년이 지나도록 안 지켜지는 경우가 많지만…

van은 ‘판’인가 ‘반’인가

일단 van Rossum부터 보자.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판로쉼’이 된다. 네덜란드어 이름에 흔히 나오는 van은 예전에는 ‘반’으로 많이 적었다. 지금도 화가 van Gogh는 예전에 널리 쓰인 관용 표기를 인정하여 ‘반고흐’로 적는 것이 표준이다. 그러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어두의 v는 ‘ㅍ’으로, 어중에서는 ‘ㅂ’으로 적도록 하고 있다.

2023. 8. 3. 추가 내용: 원래 글에서는 ‘판 로쉼’, ‘반 고흐’로 띄어 썼지만 최근의 표기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van 같은 전치사는 뒤따르는 이름과 붙여 쓰는 것으로 지침이 확립되었으므로 ‘판로쉼’, ‘반고흐’로 수정했다. 또 원래 글에서는 Van Rossum으로 van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썼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문장 첫머리에 오지 않는 한 van의 첫 글자를 소문자로 쓴다. 다만 벨기에에서는 Van과 같이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다.

사실 네덜란드어의 표준 발음에서는 v, z, g를 위치와 상관 없이 각각 [v], [z], [ɣ]으로 발음하는게 원칙이라고 한다(Geert Booij 저 The Phonology of Dutch 참고). 하지만 네덜란드 북부로 갈수록 이들이 무성음화하여 각각 [f], [s], [x]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다. 암스테르담과 북부 프리슬란트 주에서는 위치와 상관 없이 v, z, g가 [f], [s], [x]로 발음되고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어중에서는 표준 발음에서처럼 [v], [z], [ɣ]로 발음되지만 어두에서는 [f], [s], [x]로 발음된다. 실상은 더 복잡한데 여하튼 이런 이유로 v의 한글 표기를 어두에 오느냐, 어말에 오느냐에 따라 나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z는 위치에 상관없이 ‘ㅈ’으로 적는 것으로 통일했다. g는 [ɣ]나 [x]나 둘 다 ‘ㅎ’ 비슷하게 들릴 수 있으니 어떤 발음을 따랐는지 알 수 없다.

모음의 표기 방식을 보아도 외래어 표기법의 네덜란드어 규정은 벨기에에서 쓰는 네덜란드어 발음보다는 네덜란드에서 쓰는 발음을 기준으로 하였고 꼭 표준 네덜란드어 발음이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쓰는 현실 발음을 종합한 것 같다. 철자 ee로 적는 모음이 표준 발음에서는 장모음 [eː]인데 반해 네덜란드의 현실 발음에서는 이중모음으로 발음되는 것을 존중하여 ‘에이’로 적도록 한 것이 한 예이다.

어쨌든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van을 [fɑn]으로 발음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전에 ‘반’이라고 적었던 것을 굳이 고칠 필요가 있었는지 하는 의문도 든다.

네덜란드어에서 u는 [ʏ] 또는 [y]를 나타낸다고 하여 ‘ㅟ’로 적도록 했는데, 요즘 ‘ㅟ’를 단모음 [y]가 아니라 [wi]로 보통 발음하는데다 ‘쉬’에서는 ‘ㅅ’이 [ʃ]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로쉼’이라고 적으면 [ˈrɔsʏm]이라는 원 발음에 얼마나 가깝게 발음될지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y] 앞에 [s]가 올 수 없는 한국어 음운 체계의 한계이니 어쩔 수 없다. 모음은 조금 달라지더라도 ‘수’라고 표기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2023. 8. 3. 추가 내용: 네덜란드식 발음에서는 또 어말 무강세 -um, -us의 모음을 [ʏ] 대신 [ə]로 약화시킬 수가 있다. 그러니 [ˈrɔsəm] ‘로섬’과 같은 발음도 가능하다. 다만 이런 발음을 한글 표기에 반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Guido의 발음은?

네덜란드어의 철자는 꽤 규칙적이어서 대체로 발음을 짐작하기가 쉽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대조표와 세칙만으로 네덜란드어의 한글 표기를 정할 수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어가 아닌 언어에서 온 이름은 원 언어의 발음을 흉내내어 발음하기 때문에 표기 문제가 복잡해진다.

Guido는 이탈리아어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에서도 흔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어에서 온 이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탈리아어 Guido 자체가 게르만어 이름에서 온 것이니 네덜란드어 이름 Guido는 이탈리아어를 거치지 않고 옛 게르만어 이름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겠다.

Guido를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억지 적용하여 표기하면 ‘하위도’인데, 실제 발음과는 딴판이다. Guido는 옛 네덜란드어 철자로 Gwido라고도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한글로 ‘아위’로 표기하는 이중모음 ui와는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발음도 다르다.

Guido van Rossum 자신이 Guido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설명한 것을 보면 네덜란드어에서 g가 [x] 비슷한 발음이 난다는 내용은 있지만 모음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링크된 발음 파일을 들어보면 ui가 [i]로 들린다. 같은 이름을 가진 Guido Verbeck의 네덜란드어 발음도 [ˈxido]처럼 들린다. 네덜란드어에서 Guido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확실한 설명은 찾지 못했지만 발음이 [ˈxido]가 맞다면 Guido는 ‘히도’로 적는 것이 네덜란드어 발음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네덜란드어에는 이렇게 발음이 불규칙한 외래어 이름이 많다. 네덜란드어 사용자들의 발음을 들어보면 프랑스어에서 온 Yves는 [if] 즉 ‘이프’, 영어에서 온 Ryan은 [ˈrɑjən] 즉 ‘라이언’으로 발음되는 것 같다. 이것을 모르고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이버스’, ‘리안’ 같은 표기가 나온다.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적용한 용례집을 보아도 Vincent를 ‘빈센트’, Pierre를 ‘피에르’로 적는 등 철자가 아니라 실제 발음에 의거한 표기를 쓰고 있다. 이렇게 발음이 불규칙한 네덜란드어 이름 가운데 빈도가 높은 것을 선정하여 발음에 따른 한글 표기 용례를 정하는 것이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Guido van Rossum은 ‘히도 판 로쉼’으로 적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의 정신을 가장 잘 따른 것 같다. 만약 네덜란드어의 발음과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들이 표기를 심의한다면 아마도 ‘히도 판 로쉼’이라고 정할 것이다.

네덜란드인들도 외국인들 앞에서는 영어식 발음을 쓴다

하지만 이 표기가 대중화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검색해보니 한국의 파이썬 사용자들은 ‘귀도 반 로섬’이란 표기를 많이 쓰는 듯하다. Guido van Rossum 본인은 Guido를 네덜란드어로 발음하는 법을 소개하면서도 영어식으로 [gwiːdoʊ]라는 발음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하고 있고, 실제 영어로 말할 때는 Guido를 그렇게 발음한 적이 적어도 한 번은 있다(Google Techtalk 동영상 참조). 영어 발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면 ‘귀도’가 맞다(이 동영상을 보고 ‘귀도 반 로썸’이라고 발음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있는데, 내가 듣기에는 Van Rossum은 네덜란드어 발음에 가깝게 [fɑn ˈɹɔsʏm]이라고 한 것으로 들린다).

네덜란드인들은 외국인들이 네덜란드어 발음을 잘 못하는 것에 민감해하여 이름을 외국인들에게 편하도록 영어식으로 발음을하거나 아예 영어식 애칭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렸을 때 ‘맷(Mat)’이라는 네덜란드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네덜란드어 본명은 마테이스(Mattijs)였고, 발음하기 힘들다고 영어식 애칭을 사용한 것이었다. 축구 감독 Guus Hiddink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하면서 Guus를 영어 이름 Gus처럼 발음하라고 주문하고는 했다. 처음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되었을 때 네덜란드어 발음에 따라 ‘휘스 히딩크’라고 표기하다가 영어식으로 발음하라는 본인의 요청에 따라 표준 표기를 ‘거스 히딩크’로 정했다고 하는데, 아마 한국인들에게도 영어식 발음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Guus라는 철자를 보고 ‘거스’를 연상한 한국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Guido van Rossum을 ‘귀도 판로쉼’이라 적는 것도 네덜란드어 발음에는 맞지 않지만 본인이 영어로 자신을 소개할 때 쓰는 발음이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표준 표기 하나를 고르라면 ‘히도 판로쉼’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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