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말 할 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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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산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하면 가끔 듣는 질문이 있다.

“아프리카 말 할 줄 아세요?” 또는 “케냐 말 할 줄 아세요?”

그런데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아프리카의 언어 상황에 대한 소고〉라는 글에서 저자 김학수도 이 ‘아프리카 말’에 대해서 받는 질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통 우리는 ‘아프리카’라고 하는 개념을 ‘아시아’, ‘유럽’에 비하여 좀 더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흑인인 경우 나이지리아인, 케냐인, 콩고인이라는 세분된 명칭대신 그냥 아프리카인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은 우리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온 사람들을 볼 때 단순히 아시아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베트남인, 중국인, 일본인 등으로 부르는 것과 명백히 대비된다. 또 다른 예로는 필자가 흔히 받는 질문인 ‘아프리카 말로 …을 뭐라고 합니까?’인데, 이 말은 질문자에 따라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번째 의미는 한국에는 ‘한국어’, 독일에는 ‘독일어’와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는 ‘아프리카어’라고 하는 단일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과 연관되어 있고, 두번째로는 아프리카에 많은 언어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 언어들의 개별 명칭들을 몰라서 그냥 ‘아프리카어’로 부르는 경우이다. 결국은 이 두 의미 모두가 아프리카의 언어 상황에 대한 지식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케냐에는 ‘케냐 말’이라는 언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은 어떨까? 유럽을 보면 모나코, 안도라, 리히텐슈타인 등 소국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나라들이 나라 이름을 딴 국어를 가지고 있다. 예외를 꼽자면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키프로스 정도? 심지어 소국 몰타에는 몰타어, 룩셈부르크에는 룩셈부르크어라는 언어가 있다. 그러니 아프리카 케냐에도 ‘케냐어’라는 언어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53개국에서 2,100여개 언어 사용

하지만 아프리카에는 나라마다 그 나라 이름을 딴 언어가 있다는 공식이 잘 설립하지 않는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쓰는 마다가스카르어(혹은 ‘말라가시’), 르완다에서 쓰는 르완다어, 보츠와나에서 쓰는 츠와나어, 레소토에서 쓰는 소토어, 에스와티니에서 쓰는 스와티어, 콩고 민주 공화국과 콩고 공화국에서 쓰는 콩고어 등이 있지만 아프리카 53개국 가운데 많이 잡아야 10여 개에만 해당하는 사항이다. 또 같은 언어를 쓰는 집단이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경우도 많다.
이는 오늘날 아프리카의 국경이 현지 민족과 문화 구분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 유럽 열강등이 자의적으로 그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프리카가 워낙 다양한 언어의 보고라는 사실도 작용한다. 이에 대한 김학수의 설명을 인용한다.

최근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아프리카 대륙에는 2,100여 개의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6,900개로 추산되는 전세계 언어들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며, 2005년도 기준으로 약 9억인 아프리카의 인구 수(총 세계인구 64억의 약 7분의 1) 및 53개의 아프리카 전체 국가 수에 비해 상당히 분화된 양상을 보인다.

아프리카에는 단순히 언어 개수만 많은 것이 아니다. 언어의 친족 관계를 연구하면 계통이 같은 언어를 묶는 가장 상위 분류를 어족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쓰는 언어는 아프리카·아시아 어족, 나일·사하라 어족, 니제르·콩고 어족, 코이산 어족 등 여러 어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형성된 어족으로 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아시아 어족은 아랍어, 히브리어, 아람어와 고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에서 썼던 아카드어 등을 포함하는데, 서양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언어들의 뿌리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2023. 8. 2. 추가 내용: 아프리카 남부에서 주로 쓰이는, Khoisan languages로 분류되는 여러 언어들은 한때 하나의 어족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들이 모두 같은 계통이 아니라 대략 세 개의 어족 및 두 개의 외톨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므로 ‘코이산 어족’보다는 ‘코이산 제어’로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아시아 어족은 아프리카 동북부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지만 서아시아에서 형성되었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또 아프리카 밖에서 형성된 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아프리카에서만 쓰이는 언어도 있다. 바로 마다가스카르에서 쓰는 마다가스카르어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미비아 등에서 쓰는 아프리칸스어이다. 마다가스카르어는 남도(오스트로네시아) 어족 언어이고 아프리칸스어는 인도·유럽 어족 언어이다.

아프리카의 어족 분포와 몇몇 주요 언어

니제르·콩고 어족의 한 갈래인 반투 어군은 단일 언어 집단으로는 특이하게 워낙 널리 분포되어 있어 이 지도에서는 니제르·콩고 어족을 반투 어군과 기타로 나눠서 칠하고 있다. 지금의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의 국경 지대에 기원을 가진 반투어 사용 집단이 농경 기술과 금속 가공 기술의 힘을 업어 지난 수천년 동안 아프리카 중부와 남부로 널리 진출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널리 쓰이던 코이산 어족 언어가 몇 덩어리로 고립되고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은 아예 고유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위 지도에서 케냐는 동쪽에 노란색의 나일·사하라 어족, 파란색의 아프리카·아시아 어족, 주황색의 니제르·콩고 어족 B가 만나는 부분에 있다. 영어와 함께 케냐의 공용어인 스와힐리어를 비롯하여 키쿠유어, 루히아어, 캄바어 등은 반투 어군에 속하고 루오어, 칼렌진어, 마사이어 등은 나일·사하라 어족에 속한다. 아프리카·아시아 어족 언어를 쓰는 이들은 대부분 케냐 북동부에 있는데 오로모어, 소말리어 등은 대부분의 구사자가 이웃한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 케냐 바깥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보니어, 가레아주란어, 다할로어 등 화자 수가 적더라도 케냐에서만 쓰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도 있다.

세계의 언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Ethnologue에 따르면 케냐에는 61개 언어가 쓰이고 있으며, 백만 명을 넘는 구사자가 있는 언어만해도 키쿠유어(5,347,000명)와 루히아어(3,418,083명), 루오어(3,185,000명), 칼렌진어(2,458,123명), 캄바어(2,448,300명), 키시어(1,582,000명), 메루어(1,305,000명) 등 7개나 된다.
케냐 뿐만이 아니라 웬만한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이처럼 여러 개의 언어가 쓰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공용어만 11개가 있다.

아프리카 인명과 지명은 어떻게 한글로 표기할 것인가?

서론이 길어졌는데,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언어의 다양성이 이 블로그의 주 관심사인 외국어 고유명사의 한글 표기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자.

케냐의 Wangari Maathai

케냐의 환경 운동가 Wangari Maathai가 2004년 노벨 평화상을 타자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에서는 그 한글 표기를 ‘왕가리 마타이’로 정했다. 하지만 Maathai의 th는 영어의 thing과 같은 단어에서처럼 [θ] 발음을 나타낸다. 스와힐리어에서도, Maathai의 모어인 키쿠유어에서도 th는 [θ] 발음을 나타낸다. 발음만 따지면 ‘마사이’로 적어야 한다.

이를 ‘마타이’로 적기로 한 이유는 아프리카의 언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였을 수도 있다. 이는 한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어권 방송, 언론에서 나온 발음 설명을 봐도 Maathai의 발음을 제대로 안 것은 찾을 수 없었다. Merriam-Webster 사전과 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마타이’라고 하는 것은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미국 National Library Service의 ‘마티’와 AP 통신의 ‘마다이’는 정말 정답이 없다.

2023. 8. 2. 추가 내용: 키쿠유어에서 th는 사실 유성음 [ð]를 나타내므로 키쿠유어에서도 [θ]로 발음된다는 원래 설명은 잘못되었다. Maathai는 원래 키쿠유인 전 남편 성 Mathai에서 나온 것으로 이혼 후에 a를 하나 덧붙였는데 Mathai의 키쿠유어 발음에 따라 적으면 ‘마다이’가 맞다. AP 통신의 설명은 mah-DY’ 즉 [mɑː.ˈdaɪ̯]로 [ð]가 아닌 [d]처럼 썼으니 여전히 키쿠유어 발음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Maathai를 케냐에서는 발음할 때는 보통 무성음 [θ]를 쓰는 듯하다. 철자를 바꿨으니 키쿠유어 발음 대신 스와힐리어식으로 발음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국 National Library Service의 발음 설명은 2008년에 원문을 올릴 당시에는 MÄ-tē 즉 [ˈmɑː.tiː] ‘마티’였는데 지금은 mə-THĪ 즉 [mə.ˈθaɪ̯] ‘머사이’로 정정되었다. 케냐에서 실제 쓰는 발음을 영어식으로 제대로 흉내낸 것이다.

하지만 Maathai의 발음을 제대로 알고서도 표기를 ‘마타이’로 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외래어 표기법처럼 정식으로 고시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준하는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가운데 기타 언어의 표기에 관한 원칙 가운데 th는 ‘ㅌ/트’로 적는다는 것이 있다. 이에 따르면 Maathai의 th가 실제로는 [θ]로 발음된다 해도 ‘ㅌ’으로 적어 ‘마타이’가 된다.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이란 것은 예전에 외래어 표기 용례집을 발표하면서 원 언어의 발음에 관한 정보를 찾기 힘들 때 편의를 위해 일괄적으로 몇가지 원칙을 정한 것이라 실제 발음을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조금 있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대통령 Thabo Mbeki는 ‘타보 음베키’로 적기로한 결정은 원 발음에도 맞게 된 경우이다. 음베키의 모국어는 남아공의 11개 공용어 가운데 하나인 코사어로 여기서 th는 한국어의 ‘ㅌ’처럼 [tʰ] 음을 나타낸다. 코사어의 t는 한국어의 ‘ㄸ’와 비슷한 음이다.

그러니 아프리카 언어라면 모두 동일한 표기 원칙을 적용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아프리카 전체에 ‘아프리카 말’이라는 단일 언어가 있을 거라는 생각만큼 잘못된 생각이다. 그럼 아프리카 이름을 표기하려면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할까?

원 언어가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운 아프리카 이름

케냐의 Wangari Maathai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Thabo Mbeki의 한글 표기를 정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보통 외국어 이름의 한글 표기를 정하려면 우선 그 외국어의 정체부터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인의 이름은 프랑스어 이름, 중국인의 이름은 중국어 이름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니 프랑스어 표기법, 중국어 표기법을 각각 적용하면 된다. 3개 공용어가 사용되는 벨기에, 4개 공용어가 사용되는 스위스처럼 다중 언어 사용국 출신의 이름은 원 언어를 알기가 좀더 까다롭다. 사용되는 언어만 수십 개인 케냐와 남아공의 인물은 원 언어를 알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더 현실적인 해결책이 있다. 언어 단위로 표기 방식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케냐의 고유 언어, 또는 남아공의 고유 언어를 하나로 묶어 똑같은 표기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영어, 아프리칸스어 등은 여기서 제외한다).

앞에서 케냐에서 쓰는 스와힐리어와 키쿠유어는 둘 다 th로 [θ]음을 나타낸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보통 한 나라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표기에 따른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가 많다. 남아공의 코사어에서 th가 [tʰ] 음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같은 남아공에서 쓰이는 줄루어, 츠와나어, 벤다어 등에서도 th가 [tʰ] 음을 나타낸다. 그러니 꼭 원 언어를 모르더라도 케냐 이름에 나오는 th는 [θ]음을, 영어가 아닌 남아공 이름에 나오는 th는 [tʰ] 음을 나타낸다고 보면 된다.

같은 언어에서 온 이름이라도 남아공에서 쓰는 철자와 모잠비크에서 쓰는 철자가 다른 경우도 있다. 남아공은 영어권,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어권이기 때문에 음을 적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프리카 고유 언어는 언어를 기준으로 하는 것보다 나라를 기준으로 표기를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남아공의 현 대통령 Kgalema Motlanthe의 표기는 최근 ‘칼레마 모틀란테’로 결정되었는데, 여기서 kg라는 철자는 남아프리카에서 쓰이는 소토·츠와나 어군 언어의 표기에 두루 쓰인다. kg라는 철자가 나타내는 음은 원래 [kxʰ]였으나 소토어에서는 일부 [x]음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한글로는 ‘ㅋ’ 내지 ‘ㅎ’에 대응될 수 있겠는데, ‘ㅋ’이 더 어울린다. 어쨌든 이번 결정을 계기로 남아프리카 이름에서 kg라는 철자는 실제 음가의 차이는 있더라도 ‘ㅋ’으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면 앞으로 남아공 이름을 한글로 표기할 때 훨씬 간편해진다. 남아공 사람인 내 친구 한 명은 성이 Makgetla인데 한글로 적으려면 이 원칙을 적용해 ‘마케틀라’라고 하면 된다.

물론 남아공의 언어라고 표기에 따른 발음이 다 비슷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sh라는 철자는 소토어에서 [ʃ]음을, 츠와나어에서 [sʰ]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한글로 표기할 때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은 남아공 이름이란 것만 알면 세부 언어를 알 필요 없이 한글 표기를 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솔직히 외래어 표기법에 아프리카 언어를 다룬 규정이 추가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추가된다면 지금까지처럼 개별 언어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아프리카 남부 영어 사용국 언어의 표기 원칙’, ‘동아프리카 3국 언어의 표기 원칙’같은 규정이 되지 않을까?

아프리칸스어 이름의 경우

영어와 아프리칸스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은 아프리카 고유 언어와는 표기에 따른 발음 방식이 매우 다르다.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의 한글 표기에 대해서는 다행히 외래어 표기법에 세부 규정이 있다. 이에 따라 남아공 Nelson Mandela의 Nelson은 영어 표기법을 따라 ‘넬슨’, 세네갈 Léopold Sédar Senghor는 프랑스어 표기법을 따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앙골라 José Eduardo dos Santos는 포르투갈어 표기법을 따라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라고 적으면 된다.

2023. 8. 2. 추가 내용: Léopold Sédar Senghor의 표기는 2002년 2월 28일 제44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로 정해진 것인데 프랑스어 발음을 [leɔpɔl sedaːʁ sɑ̃ɡɔːʁ]로 본 결과이다. 그런데 본인이 쓴 발음은 [sɛ̃ɡɔːʁ] ‘생고르’ 내지 [sɛŋɡɔːʁ] ‘셍고르’에 가깝다(따지자면 그의 r 발음도 [ʁ]보다는 [r]에 가깝다). 각종 사전에서는 Senghor의 발음이 [sɑ̃ɡɔːʁ] 또는 [sɛ̃ɡɔːʁ]로 제시되니 둘 다 표준 프랑스어 발음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이름이 세레르어에서 온 것을 고려하면 기타 언어로 취급하여 ‘셍고르’로 적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한편 프랑스어 남자 이름인 Léopold은 [leɔpɔl] ‘레오폴’과 [leɔpɔld] ‘레오폴드’ 둘 다 가능한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벨기에 왕 이름으로 쓰이는 Léopold를 ‘레오폴드’로 적고 있고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의 전 이름인 Léopoldville도 ‘레오폴드빌’로 적고 있으니 이에 따라 통일하자면 ‘레오폴드’로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다만 프랑스어권 아프리카나 벨기에 발음에서는 [leɔpɔl] ‘레오폴’ 발음이 우세한 듯하다.

하지만 아프리칸스어에 대해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세부 규정이 없을 뿐더러 아프리칸스어 이름을 한글로 제대로 표기한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아프리칸스어는 17세기 네덜란드어에서 나온 언어이다. 네덜란드어에 대해서는 외래어 표기법 세부 규정이 있으나 아프리칸스어의 발음은 네덜란드어와 꽤 다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John Maxwell Coetzee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남아공 작가 John Maxwell Coetzee의 표기는 ‘존 맥스웰 쿠체’로 결정되었다. Coetzee는 가장 흔한 아프리칸스어 성 가운데 하나이다. Wikipedia에 따르면 발음은 영어로는 [kʊt.ˈsiː.ə], 아프리칸스어로는 [kutˈsiˑe]이다. 그런데 어떻게 ‘쿠체’라는 표기가 나왔을까?

Coetzee를 영어 이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영어에는 어말에 ‘에’로 표기되는 발음이 없고 [eɪ], 즉 ‘에이’로 대체된다. 그럼 Coetzee를 아프리칸스어 이름으로 보았다는 것인데 사실 당시에는 아프리칸스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당시는 외래어 표기법의 네덜란드어 규정이 고시되기 전인데 Coetzee를 ‘쿠체’로 표기한 것은 당시의 네덜란드어 이름 표기 방식과 상통한다. 지금은 네덜란드어의 ee를 이중모음으로 보아 ‘에이’로 적지만 당시에는 e의 장모음으로 보고 ‘에’로 적었다.

아프리칸스어의 ee는 [iˑe]라고 쓰기도 하고 Bruce C. Donaldson의 A Grammar of Afrikaans에는 [eə]라고 쓰고 있는 이중모음이다. 지역과 세대에 따라 발음이 약간씩 달라지는 것 같다. 영어로 이 이중모음을 흉내낼 때는 보통 seer의 [iːə]로 흉내낸다. 내가 들은 아프리칸스어 발음으로는 ‘이에’ 또는 ‘이어’ 비슷하게 들린다. 한글 표기를 어떻게 할지는 연구해야 할 사항이다. 어쨌든 ‘에’로 쓸 일은 아니다. 이른바 ‘기타 언어’라고 해서 그냥 철자 그대로 읽기만 하면 2003년 당시 일부 언론에서 썼던 것처럼 ‘코에체’라고 써도 할 말이 없다.

나라면 ‘존 맥스웰 쿠치어’라고 적겠다. 이름 전체를 영어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네덜란드계 집안에서 태어나서도 본명인 John Michael 대신 확실한 영어 이름인 John Maxwell을 쓰며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한 작가 이름을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도 없는 아프리칸스어(사실은 ‘기타 언어’)로 분류하여 표기하기보다는 Coetzee를 아프리칸스어에서 온 영어 이름으로 보고 영어식 발음인 ‘쿠치어’로 표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남아공에는 아프리칸스계 후손으로 아프리칸스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프리칸스 정체성을 버리고 영어를 쓰는 이들이 많다. (아프리칸스인을 ‘아프리카너’라고도 하지만 정작 남아공에서는 ‘아프리칸스인’이라고 보통 부른다.) 그러니 널리 쓰이는 아프리칸스어 이름은 영어 발음에 따라 한글 표기를 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23. 8. 2. 추가 내용: 영국 BBC 방송은 원래 Coetzee의 발음을 [kʊt.ˈsiː.ə]로 제시했다가 남아공의 SABC 방송과 그의 출판사와 확인한 끝에 권장 발음을 [kʊt.ˈsiː] ‘쿠치’로 수정했다고 한다. 정작 J.M. Coetzee 본인이 이 발음을 쓴다는 것이다. 아프리칸스어의 ee는 특히 남아공 남쪽, 특히 볼란트(Boland) 지역 방언에서 단순모음으로 실현되기도 하는데 학자에 따라 [ɪ], [iː], [i] 등으로 음가를 묘사한다. 그러니 영어 이름으로 본다면 ‘쿠치어’보다는 ‘쿠치’로 적는 것이 낫다는 것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대신 아프리칸스어 이름으로 본다면 실제 발음과 상관 없이 ee의 표기를 ‘에’로 통일하여 ‘쿠체’로 적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남아공에도 프랑스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아프리칸스어 이름 가운데는 프랑스어에서 온 이름이 꽤 많다. 아프리칸스인의 조상 가운데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이런 이름의 발음은 프랑스어 발음과는 딴판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 쪽 다리가 절단되었으면서도 장애가 없는 다른 선수들과 당당히 겨룬 남아공 수영 선수 Natalie du Toit가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언론과 방송에서는 대부분 ‘나탈리 뒤 투아’로 표기했다. 프랑스어 이름으로 본 것이다. 아프리칸스어 이름 가운데 프랑스어에서 온 이름이 많다는 것을 모르면 남아공에도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남아공에서는 Du Toit는 흔한 아프리칸스어 이름으로 통한다. 발음도 ‘뒤 투아’가 아니다. 남아공 사람들은 Du Toit가 아프리칸스어로는 [də ˈtoːɪ], 영어로는 [də ˈtɔɪ̯], 즉 ‘더토이’로 발음된다는 것을 잘 안다. 영어권인 미국에서 뉴올리언스의 Orleans는 프랑스어에서 온 이름이지만 프랑스어식으로 ‘오를레앙’이라고 하지 않고 ‘올린스’라고 발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뉴올리언스’는 실제 발음과는 조금 차이가 나는 관용 표기가 굳어진 예이다).

2023. 8. 2. 추가 내용: 영어로 Orleans는 보통 [ˈɔːɹl.i‿ənz] ‘올리언스’로 발음되기 때문에 영국식 발음에서는 New Orleans도 보통 ‘뉴올리언스’이며 미국 발음에서도 이 발음이 많이 쓰이므로 ‘뉴올리언스’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표기이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Orleans가 두 음절로 축약되어 [ˈɔːɹl.ənz] 정도로 발음되는 것이 보통이다.

Natalie du Toit를 영어 이름으로 보고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내털리 더토이’로 표기하자고 올림픽 기간에 나름대로 운동을 벌였지만 호응은 없었다… (올림픽 기간에는 어차피 외국 선수 이름의 엉터리 표기가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외래어 표기법 세부 규정이 마련되어 있는 언어에 대해서도 외래어 표기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데, 공용어가 11개나 되는 남아공 출신 인물의 이름을 제대로 적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이름이라도 제대로 표기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의 인명과 지명의 한글 표기도 여타 지역 인명과 지명처럼 세심히 발음을 따져서 정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생각이 얼마나 동의를 얻을지는 모르겠다. 같은 아프리카 사람들인데 귀찮게 왜 Thabo의 th는 ‘ㅌ’으로 적고 Maathai의 th는 ‘ㅅ’으로 적자고 그러는지 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우일까?

글 올린 다음 괜히 덧붙이는 말:

아프리칸스어 얘기를 꽤 길게 했는데 ‘아프리칸스어(Afrikaans)’는 그 언어로 ‘아프리카 말’이라는 뜻이다. 글을 올린 다음 “아프리카 말 할 줄 아세요?”라는 글 제목을 다시 보니 생각이 났다. 한국의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남아공 출신 패널이 ‘아프리카 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알아보니 ‘아프리칸스어’를 말한 것이었다. 그러니 ‘아프리카 말’이란 것이 있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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