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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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 세계의 다양한 언어와 문자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 없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란 환경 덕분에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프랑스어와 스웨덴어도 공부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한국어 이외의 언어(이하 외국어)를 한글로 적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세계가 비좁아진 오늘날 외국어의 발음을 한글로 적을 일이 참 많아졌다. 외국의 인명과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는 물론이고 각종 보통명사도 끊임없이 한국어에 들어오고 있다.

어렸을 때 같은 작곡가의 이름을 어떤 책에서는 ‘바흐’로 적고 다른 책에서는 ‘바하’로 적는 것을 보면서 한국어와 발음이 다른 외국어의 이름을 한글로 적는 기준에 대해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한국어의 어문 규정 가운데 하나인 “외래어 표기법”이 그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지만 이 외래어 표기법의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본 것은 대학생이 다 돼서였다.

학교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의 자세한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가르친다 해도 그냥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것이 있고 몇 가지 특징만을 가르치는 것 같다. 많이 쓰는 몇 가지 외래어를 맞춤법, 즉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쓸 수 있는지 알아보는 문제가 시험에 나오는 정도일 것이다. 예를 들면 ‘케잌’과 ‘케이크’ 가운데 바른 표기를 고르시오… 그러니 외래어 표기법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잘 지켜지지 않는 외래어 표기법

외래어 표기법은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과 마찬가지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언어 생활에 통일성을 주기 위해 마련한 규범이다. 같은 외국어를 사람에 따라 한글로 다르게 적어 생길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의도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만약 외래어 표기법을 잘 알고 있는 출판사나 언론사, 방송사의 교열 담당자와 같은 전문가가 한국어에 들어오는 모든 외국어의 한글 표기를 결정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외국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어 외국어의 한글 표기를 결정하는 주체는 외래어 표기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이 되었다. 예전에는 교과서나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통해 외국의 문물을 접했다면 요즘은 외국 서적을 직접 읽거나 외국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접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아졌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계기로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외국어의 한글 표기를 바로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교열 부서를 축소시키거나 폐지하여 일반 기자들이 생산한 한글 표기가 걸러지지 않은 채로 기사에 실린다.

외래어 표기법의 수난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외래어 표기법을 아는 사람들이 외래어 표기법의 기준으로 볼 때 잘못 알려진 표기를 지적하면 이미 그 표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반발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 오히려 외래어 표기법이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펼친다.

또 외국어를 배우는데 외래어 표기법이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모두들 영어 배우기에 혈안이 된 요즘 잘못된 외래어 표기법 때문에 영어 발음을 제대로 배우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는 주장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한국어에 섞어 쓰는 외국어는 모두 외국어 발음대로 흉내내어야 할텐데, 한국어를 쓰는 모든 이들이 그 외국어의 발음에 통달하지 않은 이상 한국어에 섞어 쓰는 외국어가 한국어 발음에 맞게 고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쓰는 것에 따른 불운

영어처럼 로마 문자를 기반으로 한 알파벳(이하 로마자)을 쓰는 언어에서는 외국어를 들여오는데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 일단 로마자를 쓰는 언어가 매우 많다. 공통된 문자를 쓰는 언어에서는 표기를 거의 그대로 옮겨올 수 있다. 예를 들어 Kwaśniewski라는 폴란드 전 대통령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하자. 영어를 쓰는 사람은 폴란드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이것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더라도 그 이름을 적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폴란드어 철자 그대로 쓰거나 익숙하지 않은 특수문자 ś는 s로 적어 Kwasniewski라고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한글로 적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다.

방송, 언론 등을 통해서 폴란드 소식을 접해왔거나 폴란드어에 적용되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으면 이 이름은 ‘크바시니에프스키’로 적는다는 것을 알아맞힐 한국어 사용자가 얼마나 될까?

한글은 표음 문자여서 어느 언어의 소리라도 흉내내어 적기 쉬운 장점이 있다. (지금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어려움을 논하고 있지만 표음 문자가 아닌 한자를 쓰는 중국어로 외국어를 적는 어려움에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적으려는 언어의 발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것이 절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로마자를 쓰는 언어들은 공통된 문자 덕택에 세계 주요 언어의 대부분은 거저 옮겨 적을 수 있는 반면 한글은 한국어에서만 쓰므로 한국어에서 외국어를 적으려면 다른 문자에서 한글로 옮겨야 하는 어려움이 필수적으로 따른다.

영어가 사실상 국제 공통어이기 때문에 로마자를 쓰지 않는 언어에서도 웬만한 고유 명사는 로마자로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리스 문자를 쓰는 그리스인이나 한자를 쓰는 중국인이나 외국인을 위한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로 적어 소개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이 한국인을 위해서 친절하게도 자기 이름을 한글로 적는 법을 소개할 리는 없다. 이들 이름의 한글 표기는 한국어 사용자들이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

“외국어의 한글 표기” 위키 사이트, 그리고 이 블로그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는 방대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세부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 언어의 표기는 물론이고 중요도에서 1순위인 영어의 표기마저도 외래어 표기법을 제대로 적용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름대로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자료집을 마련하려 몇 달 전 “표기위키: 외국어의 한글 표기”라는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론상 여러 사용자가 편집할 수 있는 위키 사이트이지만 아직까지는 나 혼자 내용을 채우고 있고 그나마 개인 사정으로 바쁜 요즘은 편집이 매우 뜸해졌다.

그런데도 이 블로그를 만드는 것은 여기저기 일을 벌여놓고 마는 내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생각을 두서 없이, 형식 없이, 사견과 개인적 경험도 곁들어가며 적고 싶기 때문이다. 또 내 생각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다. 외국어의 한글 표기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이면서도 한국어를 쓰는 모든 이의 언어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 아닌가? 위키 사이트에는 덧글 기능이 없어서 그 내용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알 수 없어 아쉬웠는데 블로그에서는 내 독백만이 아니라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다른 이들과 어느정도의 소통도 가능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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