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서 트랙백(깨진 링크).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국내에 ‘슬라보예 지젝’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슬로베니아어 이름인 Slavoj Žižek [ˈslavɔj ˈʒiʒәk]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면 ‘슬라보이 지제크’이다. 슬로베니아어의 표기에 대해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특별히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세르보크로아트어 규정대로 적는다. 슬로베니아어와 세르보크로아트어는 언어분류상 꽤 가까운 언어이고 철자와 발음 규칙도 비슷한 것이 많으며 같은 슬로베니아가 옛 유고 연방의 일부였기 때문이다(불가리아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니? 참조). 이 이름의 발음은 한글로 옮기는 측면에서 보면 세르보크로아트어나 슬로베니아어나 대동소이하다.
어말의 파열음 [k]를 ‘ㄱ’ 받침으로 적지 않고 ‘크’로 적는 것은 외래어 표기법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 지명 ‘블라디보스토크’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적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프’로 적어야 할 어말 [p]를 ‘ㅂ’ 받침으로 적는 일도 흔하다. 그런데 ‘트’로 적어야 할 어말 [t]를 ‘ㅅ’ 받침으로 적는 것은 상대적으로 드물고 오히려 ‘ㅅ’ 받침으로 적어야 하는 경우에도 ‘트’를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한 음절 이름의 경우 더욱 심하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어말의 [k]를 ‘크’ 대신 ‘ㄱ’ 받침으로 적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짧은 모음 뒤에 올 경우이다. 영어의 book, 네덜란드어의 Hendrik의 마지막 모음은 짧은 모음이니 각각 ‘북’, ‘헨드릭’으로 쓴다. 반대로 영어의 Luke, 네덜란드어의 maak에서 [k]는 긴 모음 뒤에 오므로 각각 ‘루크’, ‘마크’로 쓴다.
또 말레이인도네시아어와 타이어, 베트남어의 표기에서 어말의 [k]는 언제나 ‘ㄱ’ 받침으로 적는다. 예를 들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의 Taufiq은 ‘타우픽’, 타이어의 ตาก (Tak)은 ‘딱’, 베트남어의 khac은 ‘칵’으로 적는다. 이들 언어는 한국어의 받침처럼 어말 파열음을 터뜨리지 않고 불파음(不破音)으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이런 발음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언어에서 많이 발견된다. 광둥어도 어말 파열음이 불파음인데 이 때문인지 광둥어에 대한 표기 규정은 없지만 홍콩 국제 공항의 소재지로 널리 알려진 광둥어 지명 Chek Lap Kok (赤鱲角 월병: cek3 laap6 gok3)은 ‘첵랍콕’으로 표기가 심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어에서 어말의 [k, t, p] 등은 파열되기 때문에 ‘크, 트, 프’와 같이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슬로베니아어의 Žižek도 ‘지젝’이 아니라 ‘지제크’로 적는 것이 원칙에 맞다.
각설하고…
‘슬라보이’가 ‘슬라보예’로 둔갑한 이유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지젝’이 아니라 ‘지제크’라고 지적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지젝’은 원 발음을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니라 한글로 옮길 때 외래어 표기법에서 택한 방식과 어긋나는 방식을 쓴 것 뿐이다.
그러나 ‘슬라보예’는 정말 알쏭달쏭한 표기이다. 어떻게 Slavoj라는 철자에서 ‘슬라보예’를 연상할 수 있었을까? 어말에 반모음 [j]가 오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이’로 적으면 된다는 것을 잘 몰랐겠지만 그렇다고 ‘예’로 쓴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것은 원 표기를 잘못 파악한 것 같다는 생각에 혹시나 해서 Slavoje라는 철자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나온 결과 대부분은 Slavoj가 격 변화로 Slavoje의 형태가 된 것이었다(슬라브어에서는 보통 이름도 격에 따라 변화한다). 그래서 슬로베니아어의 격 변화로 나온 Slavoje를 원형으로 잘못 알고 표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사실 Slavoje는 체코어에서 나오는 형태이고 슬로베니아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트랙백을 한 글의 덧글에서 양몽구님께서 지적).
체코어에서 ‘슬라보이 지제크’의 단수 속격은 ‘슬라보예 지슈카(Slavoje Žižka)’이다. 슬로베니아어에서 단수 조격은 ‘슬라보옘 지주콤(Slavojem Žižkom)’, 드물겠지만 복수 속격은 ‘슬라보예브 지주코브(Slavojev Žižkov)’이다. 그러니 여기서 ‘슬라보예’라는 표기가 나왔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참고로 Slavoj의 단수 속격은 ‘슬라보야(Slavoja)’, 단수 여격 또는 위치격은 ‘슬라보유(Slavoju)’이다(슬로베니아 명사에 대한 영문 위키백과 문서 참고). 결국 ‘슬라보예’라는 표기의 유래는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다.
‘슬라보예 지젝’이란 표기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1991년작 Looking Awry가 1995년 《삐딱하게 보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을 때부터 이미 쓰인 표기이다. 이 책을 포함하여 그의 저작 가운데는 영어로 쓰인 것이 많으니 이를 번역하는 이들은 영어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일 테고 슬로베니아어 발음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요즘에야 영어로 Slavoj Žižek의 발음을 ‘SLA-voy ZHEE-zhek’이라고 풀어쓴 것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1995년에만해도 슬로베니아어 발음 정보는 찾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계속 국내에서 출판되고 그가 방한까지 했는데도 잘못된 표기를 지금까지 고치지 않는 것도 재미있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원 표기가 틀렸다는 것을 눈치챘을 법도 한데.
Lehane이 ‘루헤인’이 된 이유
보너스로 미국의 소설가 Dennis Lehane이 국내에서 ‘데니스 루헤인’이 된 이유도 살펴보자.
데니스 러헤인
Lehane에서 어떻게 ‘우’ 모음이 나오는지 궁금해할 사람이 많겠지만 Lehane에는 ‘우’ 모음이 없다. Lehane은 [lәˈheɪn]으로 발음된다면 ‘러헤인’으로 적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에 맞다. 그럼 ‘루헤인’이란 표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발음 안내 웹사이트 inogolo에 실린 설명을 보면 Lehane의 발음은 ‘luh-HAYN’이라고 나와있다. 영어권에서 일반인들은 국제 음성 기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발음 설명을 하려면 보통 이처럼 쉬운 철자로 풀어쓴다. 대문자로 강세 음절을 나타내고 uh라는 철자로 모음 [ә]를, ay라는 철자로 이중모음 [eɪ]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발음 설명을 보고 uh가 ‘우’라는 모음을 나타내는 줄로 잘못 알고 ‘루헤인’으로 쓴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런 식으로 영어권에서 발음을 설명하는 방식은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도리어 매우 헷갈릴 수가 있다. 한번은 이런 발음 설명에서 ‘아이’라는 발음을 나타내기 위해 영어 단어 eye를 쓴 것을 한글로 ‘에예’로 옮긴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혼동이 없도록 되도록이면 국제 음성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다.
추가 내용: ‘루헤인’이란 표기는 저자의 방한 당시 이름 표기에 대해 저자가 스페인어의 u처럼 써달라는 답변을 해서 정해졌다는 제보가 들어왔다.하지만 Lehane의 첫 모음이 영어에서 스페인어의 u가 나타내는 [u]와 비슷한 원순 모음으로 발음되는 일은 없다. Lehane은 아일랜드어 ‘오리어한(Ó Liatháin)’에서 왔으며 아일랜드에서는 ‘리핸’ [liːˈhæn], ‘러핸’ [ləˈhæn] 등으로 주로 발음되고 미국에서는 ‘러헤인’ [lәˈheɪn]으로 주로 발음된다. 보스턴의 아일랜드계 출신 작가인 Dennis Lehane은 [lәˈheɪn]이란 발음을 쓴다. 미국 국립도서국(National Library Service)의 발음 안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직까지 본인이 직접 Lehane을 발음하는 동영상을 찾지는 못했지만 다른 이들이 그를 부를 때 쓰는 발음은 하나같이 [lәˈheɪn]이다.
그가 Lehane의 첫 모음을 스페인어의 u처럼 써달라는 답변을 했다면 한국어가 스페인어처럼 [a e i o u] 다섯 모음만 있는 언어인 것으로 잘못 알았다든지 하는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모음이 제한된 언어라면 중설 중모음 /ә/는 [u]로 흉내낼 수 있다. 역시 모음이 다섯인 일본어에서는 ‘루헤인(ルヘイン)’이란 표기를 쓰는 듯하다(하지만 일본어의 ‘우’는 원순성이 덜해 한국어의 ‘으’와 비슷한 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