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 또는 콩클라베

본 글은 원래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날짜는 페이스북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전 세계 추기경들의 회의를 ‘콘클라베(Conclave)’라고 한다. 라틴어로 ‘(잠글 수 있는) 방’, ‘침실’, ‘식당’ 등을 뜻하는 conclave ‘콩클라베’에서 나온 말로 방 안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는 회의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열쇠’를 뜻하는 clavis ‘클라비스’에 ‘~와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con- ‘콘-‘이 붙은 말이다.

1268년에 교황 클레멘스 4세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스 출신 교황을 선출하려는 프랑스 추기경들과 이를 막으려는 다른 추기경들이 대립하면서 거의 삼 년 동안 차기 교황 선출이 지연되는 공백기를 겪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271년에 새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에 교황 선출 절차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방에서 진행하고 추기경단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도록 하는 새 규칙을 담은 칙서를 발표했다. 음식도 좁은 틈 사이로만 받을 수 있게 하고 사흘이 지나면 한 끼 음식을 하나로 제한하며 여드레가 지나면 빵과 포도주, 물만 제공하도록 했다. 너무 시간을 끌지 못하게 하려는 압박이다.

사실 이런 교황 선출 방식은 그레고리오 10세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고 예전부터 자의로든 타의로든 추기경들이 썼던 여러 방식을 명문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그를 승계한 교황들은 이 칙서에 따른 교황 선출 규칙의 적용을 유예하거나 아예 철회하기도 했지만 1294년에 교황 첼레스티노 5세가 이를 복원시킨 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에서 라틴어 conclave를 ‘콩클라베’로 적은 것은 교회 라틴어 발음에서 비음 n /n/은 연구개 폐쇄음 c /k/ 앞에서 연구개 비음 [ŋ]으로 동화하기 때문이다. conclave의 교회 라틴어 발음은 [koŋˈklaːve]이다. 즉 이탈리아어 화자가 conclave를 발음한 것과 동일하다.

고전 라틴어 발음은 [kɔŋˈklaːwɛ] ‘콩클라웨’ 정도로 재구된다. 고전 라틴어에서 철자 v는 자음으로 쓰일 때 [w]로 발음되었다(모음으로 쓰인 v는 오늘날 u로 적어서 구별하지만 원래는 철자에서 u와 v의 구별이 없었다). 하지만 라틴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는 자음 v를 ‘ㅂ’으로 적는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라틴어는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1986년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되면서 발간된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의 일러두기에 세칙의 형태로 라틴어 표기 원칙을 덧붙였는데 여기서 g나 c 앞의 n은 받침 ‘ㅇ’으로 적고 v는 음가가 [w]인 경우에도 ‘ㅂ’으로 적도록 하고 있다. ae, oe는 각각 ‘아이’, ‘오이’로 적고 c와 g는 뒤따르는 모음에 상관없이 ‘ㅋ’, ‘ㄱ’으로 통일하는 등 나머지 표기 원칙은 재구되는 고전 라틴어 발음에 대체로 충실하지만 자음 v의 표기는 후대의 발음을 따른 것이다. 후기 라틴어에서 자음 v는 먼저 양순 마찰음 [β] 정도로 변했고 라틴어에서 유래한 로망 어군의 여러 언어에서는 오늘날 대부분 순치 마찰음 [v]로 변했으며 에스파냐어나 카탈루냐어 일부 방언에서는 위치에 따라 폐쇄음 [b] 또는 접근음 [β̞]로 발음한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에서 쓰는 교회 라틴어 발음은 대체로 이탈리아어식으로 라틴어를 발음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모음 e, i가 따르는 c, g는 각각 [ʧ] ‘ㅊ’, [ʤ] ‘ㅈ’로 발음하는 식이다. 천주교에서 성인 이름을 한글로 표기할 때 쓰는 방식도 대체로 교회 라틴어 발음과 비슷하다. 앞서 언급한 교황 이름 가운데 하나인 Caelestinus는 고전 라틴어로 [kae̯lɛsˈtiːnʊs] ‘카일레스티누스’ 정도로 발음되었겠지만 교회 라틴어로는 [ʧelesˈtiːnus] ‘첼레스티누스’인데 천주교에서는 ‘첼레스티노’로 적는다. 물론 이 경우는 이탈리아어 Celestino [ʧelesˈtiːno] ‘첼레스티노’와 한글 표기가 동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식 표기가 단순히 이탈리아어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Franciscus는 고전 라틴어로 [fraŋˈkɪskʊs] ‘프랑키스쿠스’, 교회 라틴어로 [franˈʧiskus] ‘프란치스쿠스’인데 이탈리아어로는 Francesco [franˈʧesko] ‘프란체스코’이다. 천주교에서 쓰는 ‘프란치스코’는 교회 라틴어 ‘프란치스쿠스’에서 -us만 ‘오’로 처리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라틴어의 표기 원칙에 따르면 conclave는 ‘콩클라베’로 적을 수 있다. 이는 conclave의 교회 라틴어 발음 [koŋˈklaːve]에 부합하며 고전 라틴어를 표기할 때도 자음 v는 ‘ㅂ’으로 적는 것으로 통일하는 것으로 치면 고전 라틴어 발음 [kɔŋˈklaːwɛ]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콩클라베’가 아닌 ‘콘클라베’를 표제어로 싣고 있다.

이탈리아어로는 라틴어 conclave를 교회 라틴어 발음과 동일하게 [koŋˈklaːve]로 발음하지만 현행 외래어 표기 규정만 보면 ‘콘클라베’로 적게 되어있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탈리아어의 n을 ‘ㄴ’으로 적는다는 것 외의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어에서 c와 g 앞에 오는 n은 받침 ‘ㅇ’으로 적도록 한 것과 대조적이다.

아마도 에스파냐어에 비해서 이런 조합이 드물어서 규정이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86년의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에 실린 이탈리아어권 지명과 인명 가운데 폐쇄음으로 발음되는 c나 g 앞에 n이 오는 용례는 이탈리아 지명 Ancona ‘안코나’가 유일하다. 물론 ‘앙코나’로 적는 것이 이탈리아어 발음 [aŋˈkoːna]에 더 가깝다.

이탈리아어에 [n]과 [ŋ]의 음소적인 구별은 없다. 즉 [n]과 [ŋ]의 차이로만 의미를 구별하는 일은 없다. 음소는 /n/ 하나인데 뒤따르는 음에 따라 자동적으로 변이음 [ŋ]이 쓰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에스파냐어도 마찬가지이다. 에스파냐어에서 변이음 [ŋ]을 받침 ‘ㅇ’으로 적는다면 이탈리아어의 변이음 [ŋ]도 받침 ‘ㅇ’으로 적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1998년 12월 15일 제2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이탈리아 경제학자 Franco Modigliani의 표기를 ‘프랑코 모딜리아니’로, 이탈리아 정치가 Edo Ronchi의 표기를 ‘에도 롱키’ 결정한 이래 Gianfranco ‘잔프랑코’, Stanca ‘스탕카’ 등의 표기가 심의된 바가 있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레온카발로(Leoncavallo, Ruggiero)’, ‘말린코니코(malinconico)’, ‘빌라프란카의 화약(Villafranca의和約)’, ‘폰키엘리(Ponchielli, Amilcare)’ 등 [ŋ]을 받침 ‘ㄴ’으로 적은 표기를 볼 수 있다. 대신 ‘데상크티스(De Sanctis, Francesco)’에서는 받침 ‘ㅇ’을 썼으니 《표준국어대사전》도 완전히 일관적인 것은 아니다.

장차 이탈리아어의 [ŋ]은 최근의 심의 경향에 따라 받침 ‘ㅇ’으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혼란이 없다면 기존 표기도 ‘앙코나’, ‘레옹카발로’, ‘말링코니코’, ‘빌라프랑카의 화약’, ‘퐁키엘리’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conclave를 이탈리아어로 간주한 표기라고 해도 ‘콘클라베’는 ‘콩클라베’로 쓰는 것이 좋다.

영어로는 conclave를 [ˈkɒnkleɪ̯v] ‘콘클레이브’로 발음하며 자음 동화에 의한 [ˈkɒŋkleɪ̯v] ‘콩클레이브’도 가능하다. con-, in-, syn-, un- 등 [n]으로 끝나는 접두사가 [k], [ɡ] 앞에 올 때는 [ŋ]으로 동화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단어에 따라 양상이 조금 복잡하다. con-에 강세가 오고 뒤따르는 [k]나 [ɡ]가 같은 음절에 붙는 congress [ˈkɒŋɡɹ.ɛ⟮ə⟯s] ‘콩그레스’, conquer [ˈkɒŋk.əɹ] ‘콩커’ 같은 경우는 아예 [ŋ] 발음만 가능하다. conclave는 [ˈkɒn.kleɪ̯v]로 분절되기 때문에 [ˈkɒn-] 발음이 가능하지만 [*ˈkɒnɡɹ-]나 [*ˈkɒnk-]는 불가능하다.

대신 영국 음성학자 존 웰스(John Wells)의 분석을 따른 이 음절 구분은 학계에서 널리 따르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에 자료를 찾기 힘들고 간단한 설명이 어렵다. conquer [ˈkɒŋk.əɹ]의 둘째 [k]는 음절말이라서 기식음이 없어 언뜻 [ㄲ]처럼 들리고 conclave [ˈkɒn.kleɪ̯v]의 둘째 [k]는 음절초라서 기식음이 있는 [ㅋ]처럼 들린다는 차이가 있다는 정도만 언급하겠다.

어쨌든 이탈리아어나 에스파냐어와 달리 영어는 /n/과 /ŋ/이 구별되는 음소이다. sin [ˈsɪn] ‘신’과 sing [ˈsɪŋ] ‘싱’의 뜻이 다르다. [k]나 [ɡ] 앞에 온다고 해서 철자 n이 무조건 [ŋ]으로 발음되는 것은 아니라서 한글로 표기할 때 주의해야 한다. 영어 conclave는 ‘콘클레이브’와 ‘콩클레이브’ 둘 다 가능하겠지만 전자를 기본형으로 보고 ‘콘클레이브’로 쓰는 것이 낫겠다.

독일어도 영어와 마찬가지로 /n/과 /ŋ/을 구별하니 상황이 비슷하다. 라틴어 conclave에서 차용한 Konklave는 [kɔŋˈklaːvə] ‘콩클라베’ 또는 [kɔnˈklaːvə] ‘콘클라베’로 발음한다. 《두덴 발음 사전》에서는 [kɔŋˈklaːvə]를 먼저 제시하고 [kɔnˈklaːvə]를 가능 발음으로 덧붙이며 데그로이터(De Gruyter)사의 《독일어 발음 사전》에서는 [kɔŋˈklaːvə] 하나만 제시한다. Konklave는 ‘콘클라베’로 쓸 수도 있겠지만 ‘콩클라베’로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편 에스파냐어 conclave는 ‘콩클라베’, 프랑스어 conclave [kɔ̃klav]는 ‘콩클라브’, 포르투갈어 conclave는 ‘콩클라브’로 적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콘클라베’ 외에도 ‘프로빈키아(provincia)’, ‘프린켑스(princeps)’ 등 라틴어 어휘에서 라틴어의 표기 원칙을 지키지 않고 c 앞의 n을 받침 ‘ㄴ’으로 쓴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표준 표기로 정해졌고 ‘콘클라베’는 소설과 영화 제목으로도 친근해졌다. 장차 라틴어 표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면 원칙적으로는 ‘콩클라베’로 고쳐야 할 텐데 언중은 얼마나 호응할지 궁금하다.

공유하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