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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학술지 《네이처》 최근호에서는 라이다(Lidar) 기술을 사용하여 최근에 우즈베키스탄 동남부 해발 2000~2200미터의 산악 지대에서 발견된 중세 실크로드 도시 유적 투군불라크(Tugunbulak)와 타슈불라크(Tashbulak)를 조사한 내용이 실려있다.
그 가운데 투군불라크는 120헥타르에 달하는 면적에 성곽과 요새, 도로 등 각종 구조물이 형성되어 있었다. 당대 중앙아시아의 최대 도시였던 아프라시아브(Afrāsīāb), 즉 현대의 사마르칸드/사마르칸트(Samarkand)나 탈라스(Talas), 즉 현대의 타라즈/타라스(Taraz) 등이 150~200헥타르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발견이었다.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험한 고지대에 그런 대규모 도시가 존재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근대 이전에 해발 2000미터 정도의 고지대에 건설된 도시는 매우 드물어서 볼리비아의 티와나쿠, 페루의 쿠스코, 티베트의 라싸 등이 손꼽히는 정도이다.
2011년에 미국 고고학자 마이클 프러셰티(Michael Frachetti)와 우즈베키스탄 국립 고고학 센터 원장 파르호드 막수도프(Farhod Maksudov)는 위성 사진의 도움으로 우즈베키스탄 동부 지역을 답사하던 중 우연히 도기 파편 등이 널린 타슈불라크 유적지를 발견하였다. 2015년에 그곳에서 발굴을 진행하던 중 현지 삼림 관리자가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도기 파편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또 있다고 알려줬다. 찾아가 보니 그의 집은 중세 요새의 터에 지어져 있었다. 투군불라크라고 불리는 이 유적지는 훨씬 더 규모가 컸지만 산악 지대라서 제대로 조사하기가 어려웠고 다른 학자들은 그런 고지대에 대규모 도시가 있었다는 것을 좀처럼 믿지 않았다.
그래서 2022년부터 무인기에 라이다 시스템을 탑재하여 유적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라이다(Lidar [ˈlaɪ̯dɑːɹ])는 ‘빛을 통한 탐지와 거리 측정’을 뜻하는 light detection and ranging의 약자로 레이저 신호를 이용하여 목표물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전파를 통한 탐지와 거리 측정’을 뜻하는 radio detection and ranging의 약자인 레이더/레이다(radar [ˈɹeɪ̯dɑːɹ])와 작동 원리는 같지만 훨씬 더 파장이 짧은 레이저 신호를 쓰기 때문에 고해상도로 목표물의 입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땅 속에 파묻힌 구조물의 윤곽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최근 10년 동안 라이다 기술은 고고학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아마존의 밀림에 덮인 대규모 도시를 발견하는 등 직접 탐사가 어려운 지역에서 유적지를 찾아내고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투군불라크와 타라불라크는 금속 기구 생산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돔 형태의 용광로를 포함한 대규모 철 주조소가 발견되었으며 강철을 생산했을 수도 있다. 이 지대는 철광석과 땔감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풍부하며 강한 바람은 제련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탄소 연대 측정과 현지에서 발굴된 주화를 통해 이 두 유적지에는 6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까지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한다. 여기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무렵에는 이란계 민족인 소그드인들이 중앙아시아의 무역과 아프라시아브를 비롯한 실크로드 도시를 지배했지만 프러셰티는 산지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주변부의 튀르크계 유목민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주거용 건물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에도 현지 유목민이 하는 것과 비슷하게 여름에 성곽 내외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다가 겨울에는 더 따뜻한 저지대의 목축지를 찾아 옮겨다녔을 수 있다는 것이다.
9~10세기부터는 몽골 제국이 나타나기 전까지 가장 큰 유목 제국이었던 튀르크계 카라한 왕조가 중앙아시아를 다스렸으니 투군불라크와 타슈불라크의 전성기에는 카라한 왕조의 도시였을 것이다.
투군불라크와 타슈불라크는 오늘날 유적지를 부르는 이름인 듯하고 중세에는 어떻게 불렀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 연구에 대한 영어권 보도에서는 모두 Tugunbulak, Tashbulak라고 부른다. 이들은 러시아어명인 Тугунбулак, Ташбулак의 로마자 표기이다. 그런데 우즈베크어로는 Tugunbuloq/Тугунбулоқ ‘투군불로크’, Toshbuloq/Тoшбулоқ ‘토슈불로크’라고 부른다. 튀르크 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는 오늘날 공식적으로 로마자로 쓰지만 아직도 소련 시절의 키릴 문자가 많이 쓰인다.
여기서 bulak/buloq는 ‘샘’을 뜻하는 말이다. 튀르키예어 bulak ‘불라크’, 아제르바이잔어 bulaq ‘불라크’, 타타르어 bolaq ‘볼라크’, 카자흐어 бұлақ(būlaq) ‘불라크’, 키르기스어 булак(bulak) ‘불라크’, 위구르어 بۇلاق bulaq ‘불라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공통 튀르크어 조어는 *bulak로 재구된다. 몽골 조어 *bulag에서 튀르크어에 차용된 어휘로 짐작된다.
그런데 우즈베크어에서는 페르시아어의 영향으로 튀르크어의 후설 모음 a /ɑ/ ‘아’가 o [ɔ~ɒ] ‘오’로 원순화했다([ɔ]나 [ɒ]는 한국어 ‘어’와 비슷한 음으로 들리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o]처럼 ‘오’로 적는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호도 우즈베크어로는 O‘zbekiston/Ўзбекистон [ozbɛkistɒn] ‘오즈베키스톤’이다. 러시아어로는 Узбекистан(Uzbekistan) ‘우즈베키스탄’, 고전 페르시아어로는 ازبکستان Uzbakistān ‘우즈바키스탄’이다. 우즈베크어의 o /ɔ/ [ɔ~ɒ], oʻ /ɵ/ [o~ɵ]의 한글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고전 페르시아어는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여러 왕조에서 중요한 문자 언어 구실을 했다. 카라한 왕조도 말기에는 이슬람교와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였다. 중앙아시아에서 널리 쓰인 튀르크 문자 언어인 차가타이어도 고전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련이 세워진 1920년대에는 차가타이어 대신 각지의 튀르크어 말씨를 따로따로 표준화하여 우즈베크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투르크멘어 등이 새로운 문자 언어로 정립되었다(타지키스탄에서 쓰는 페르시아어도 현지 발음에 따라 키릴 문자로 적는 타지크어로 표준화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차가타이어에 대한 자료는 찾기 힘들지만 고전 페르시아어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다.
러시아어에서 쓰는 중앙아시아 지명 등 여러 고유 명사는 고전 페르시아어 내지 차가타이어의 예스런 발음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각국이 독립한 이후에도 영어권에서는 우즈베크어, 카자흐어 이름보다는 러시아어 이름을 따른 형태를 계속 쓰는 일이 많다. 또 역사 이름은 영어권에서도 고전 페르시아어 형태로 알려진 것이 많다.
‘아프라시아브(افراسیاب Afrāsīāb)’는 고전 페르시아어 이름으로 우즈베크어로는 Afrosiyob/Афросиёб ‘아프로시요브’이다(고전 페르시아어의 긴 모음 ā는 우즈베크어의 o에 대응되지만 짧은 모음 a /a/ [a~æ]는 우즈베크어의 전설 모음 a [æ]에 대응된다). 러시아어로도 Афрасиаб(Afrasiab) ‘아프라시아프’라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러시아어의 어말 무성음화 때문에 -б(-b)가 [p]로 발음되면서 한글 표기가 달라진다. 우즈베크어 등 여러 튀르크어에서도 부분적인 어말 무성음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Afrosiyob는 ‘아프로시요프’로 적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우즈베크어의 어말 -b를 ‘-브’로 통일한다. 페르시아어에서도 부분적인 어말 무성음화가 일어나지만 한글 표기에서 이를 반영하는 일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프라시아브의 현대 이름이 ‘사마르칸트(Samarkand)’로 나온다. 러시아어 Самарканд(Samarkand)를 따른 표기로 여기서도 -д(-d)가 [t]로 발음되는 어말 무성음화를 적용했다. 하지만 고전 페르시아어 سمرقند Samarqand나 현대 우즈베크어 Samarqand/Самарқанд를 따르면 ‘사마르칸드’로 적을 수 있다.
카라한 왕조는 통치자의 칭호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페르시아어로는 قراخان Qarākhān ‘카라한’이고 이는 튀르크어로 ‘검은’, ‘용감한’을 뜻하는 ‘카라'(고대 튀르크어어 𐰴𐰺𐰀 kara)와 전통 지도자 칭호인 ‘카간'(고대 튀르크어 𐰴𐰍𐰣 qaɣan)이 결합한 것이다. 참고로 돌궐 문자로 적은 고대 튀르크어는 10세기까지도 나타나니 시기상 카라한 왕조와 겹치지만 사용 지역이 다르고 카라한 왕조에서는 페르시아식 아랍 문자를 써서 이른바 카라한어(Karakhanid language)라고 부르는 튀르크어를 기록했다. 카라한어는 차가타이어의 조상뻘이다.
흥미롭게도 Farhod Maksudov는 마치 이름은 우즈베크어식으로, 성은 러시아어식으로 로마자로 적은 듯하다. 우즈베크어로는 Farhod Maqsudov/Фарҳод Мақсудов ‘파르호드 막수도프’이다. 성은 아랍어 مقصود maqṣūd ‘막수드’에서 온 고전 페르시아어 이름 مقصود Maqṣūd에 해당하는 Maqsud에 러시아어에서 성씨를 만드는 접미사 -ov/-ов를 붙인 것으로 러시아어식으로 어말 무성음화가 일어나므로 ‘막수도프’로 적는다.
원래 Farhod는 고전 페르시아어 فرهاد Farhād ‘파르하드’에서 나온 이름이므로 러시아어로는 전통적으로 Фархад(Farkhad) ‘파르하트’라고 적는다. 그러나 이 인물은 러시아어로도 Фарход Максудов(Farkhod Maksudov) ‘파르호트 막수도프’라는 표기를 쓰는 듯하다. 즉 러시아어에 없는 우즈베크어 키릴 자모 ҳ(h), қ(q)만 가장 가까운 러시아어 음인 х(kh), к(k)로 대체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처럼 중앙아시아 인명을 러시아어로 쓸 때에도 전통 형태보다는 현지어 발음에 가까운 형태로 적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니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명이나 인명을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는 참 까다롭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영어권에서도 러시아어식 내지 고전 페르시아어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고 중앙아시아 각국의 독립 이후 우즈베크어, 카자흐어 등이 국가 공용어가 된 후에도 대외적으로 쓰는 로마자 표기는 여전히 예전 방식을 따르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이들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데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러시아어가 다른 언어 집단 사이의 교통어로 널리 쓰이고 있어 사실상 비공식적인 제2의 국가공용어 역할을 한다.
따라서 미국 연구자들이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지 20년이 지난 시점에 발견된 유적을 우즈베크어식 Tugunbuloq, Toshbuloq 대신 러시아어식 Tugunbulak, Tashbulak로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앙아시아 고유 명사의 한글 표기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어느 한 언어를 기준으로 통일하는 대신 상황에 따라 유연히 처리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