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나마지라의 지나 라인하트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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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부호 지나 라인하트(Gina Rinehart [ˈʤiːn.ə ˈɹaɪ̯n.hɑːɹt], 1954~)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초상화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외신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아런더(Arrernte [aɾəⁿɖə])족 출신으로서 2020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으로는 처음으로 오스트레일리아 회화 부문 최고 권위의 상인 아치볼드상(Archibald Prize [ˈɑːɹʧ.ᵻ.bɔːld—])을 수상한 빈센트 나마지라(Vincent Namatjira [ˈvɪns.ənt—], 1983~)이다. 나마지라는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미술의 선구자인 수채화 화가 앨버트 나마지라(Albert Namatjira [ˈælb.əɹt—], 1902~1959)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캔버라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은 ‘컬러로 보는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in Colour)’라는 제목으로 빈센트 나마지라 초대전을 열었다. 여기에는 그의 자화상과 함께 여러 유명인의 초상화 연작이 포함되었다. 가운데 줄에서는 영국 전 여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ᵻ.ˈlɪz.əb.əθ—], 1926~2022), 미국 기타리스트·가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ˈʤɪm.i ˈhɛndɹ.ɪks], 1942~1970), 오스트레일리아 전 총리 줄리아 길라드(Julia Gillard [ˈʤuːl.i‿ə ˈgɪl.ɑːɹd], 1961~) 등을 볼 수 있다.
지나 라인하트의 초상화는 나마지라 본인의 자화상과 구지(Goodesy [ˈgʊdz.i]])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 선수 애덤 구즈(Adam Goodes [ˈæd.əm ˈgʊdz], 1980~) 초상화 사이에 있다. 구즈는 어머니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다.

라인하트가 본인의 초상화를 내려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나마지라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I paint the world as I see it.
“나는 내가 보는 대로 세상을 그린다.”
People don’t have to like my paintings, but I hope they take the time to look and think, ‘why has this Aboriginal bloke painted these powerful people? What is he trying to say?’.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이를 보고 ‘왜 이 원주민 남자가 이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그렸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I paint people who are wealthy, powerful, or significant – people who have had an influence on this country, and on me personally, whether directly or indirectly, whether for good or for bad.
“나는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거나 중요한 이들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좋든 나쁘든 우리 나라와 내 자신에게 영향력을 끼친 이들을 그린다.”
Some people might not like it, other people might find it funny, but I hope people look beneath the surface and see the serious side too.
“어떤 이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은 웃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표면 밑에 있는 진지한 면도 보았으면 한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나마지라의 초상화는 특유의 과장된 화법을 쓰기 때문에 라인하트의 초상화만 특별히 못생기게 그린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괜히 내려달라고 요청해서 국제적으로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라인하트 집안은 예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라인하트는 아버지 랭 핸콕(Lang Hancock [ˈlæŋ ˈhæn.kɒk → -ˈhæŋ-], 1909~1992)으로부터 광물 추출 회사 핸콕 프로스펙팅(Hancock Prospecting [ˈhæn.kɒk pɹə⟮ɒ⟯.ˈspɛkt.ɪŋ, → ˈhæŋ-])을 물려받았으며 순자산은 3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핸콕은 광산 개발에 방해가 되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토지 권리를 비판했으며 이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발언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1984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원주민 실업자들을 복지 수당을 받으러 한 곳에 모이게 한 뒤 물에 약을 타서 불임 상태가 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라인하트는 아버지 핸콕의 발언에 대해 사과하라는 여론에 불구하고 침묵해왔다. 2022년에는 원주민 넷볼 선수 도널 왈럼(Donnell Wallam [ˈdɒn.(ə)l ˈwɒl.əm], 1994~)이 핸콕 프로스펙팅의 로고가 달린 유니폼을 입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 오스트레일리아 넷볼 대표팀이 지지를 표명하자 핸콕 프로스펙팅은 오스트레일리아 넷볼 협회와 맺었던 약 천만 달러 상당의 스폰서 계약을 철회하기도 했다.
라인하트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의 후원자이기도 한데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장 닉 미처비치(Nick Mitzevich [ˈnɪk ˈmɪts.əv.ɪʧ], 1970~)와 이사회 회장 라이언 스토크스(Ryan Stokes [ˈɹaɪ̯‿ən ˈstoʊ̯ks], 1976~)에게 본인의 초상화를 치워달라고 직접 요청했으며 그의 회사 직원들은 미술관에 10여 차례 불만을 제기했다고 한다. 또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수영 선수 카일 차머스(Kyle Chalmers [ˈkaɪ̯l ˈʧɑːm.əɹz], 1998~)를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 수영 선수 스무 명도 라인하트의 초상화를 내려달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라인하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수영 협회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하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에는 나마지라가 2018년에 펜과 연필로 그린 또다른 라인하트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는데 라인하트측은 이 그림도 치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술관은 그림을 내려달라는 요구가 있었는지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대변인을 통해 미술관의 작품과 전시에 대한 대중의 대화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미술계에서도 나마지라를 지지하는 입장이 잇따랐다.

이번 전시에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2020년 나마지라의 아치볼드상 수상작이 된 초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애덤 구즈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An artist’s view on the world is what it is. I have always loved the lens that Vincent has on our world.
“예술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그런 것이다. 나는 항상 빈센트가 우리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좋아했다.”

영어 이름 Vincent [ˈvɪns.ənt]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따르면 ‘빈선트’로 적어야 하지만 관용 표기인 ‘빈센트’가 표준으로 인정된다.

성씨인 Namatjira는 한글로 표기하기가 좀 까다롭다. 우선 본인은 영어로 [ˌnæm.ə.ˈʤɪɹ.ə] ‘내머지라’라고 발음한다(듣기).

아런더족 출신이니 아마도 아런더어 성씨일 것이다. 영어판 위키백과의 Albert Namatjira 문서에서는 발음을 [namacɪra] ‘나마치라’로 제시하고 있다. 아런더어는 특이하게 모음 음소가 /a/와 /ə/ 둘뿐인 것으로 분석되지만 /ə/는 대부분의 환경에서 [ɪ~e~ə~ʊ] 등으로 자유 변이를 보인다.

그런데 아런더어 철자에는 tj가 쓰이지 않는다. Namatjira라는 철자는 아마도 경구개 폐쇄음 /c/를 tj로 나타내는 피찬차차라(Pitjantjatjara)어 등 다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언어에서 쓰는 철자를 흉내낸 것으로 보인다. 아런더어 철자에서는 /c/를 ty로 적는다. 그런데 확실한 내용을 찾기는 힘들지만 유성 환경인 모음 사이에서 /c/가 유성 경구개 폐쇄음 [ɟ]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대부분의 오스트레일리아 언어에서는 폐쇄음의 유무성음을 음소적으로 구별하지 않아서 [c]와 [ɟ]는 단일 음소 /c/의 변이음이다. 유성음으로 발음되더라도 규칙적인 철자법에서는 보통 무성음인 것처럼 쓴다. Arrernte로 쓰는 이름에서 보이는 철자 rnt는 [ⁿɖ]를 나타내는 것을 참고할 수 있다.

경구개 폐쇄음 [c]와 [ɟ]는 영어에서는 각각 [ʧ], [ʤ]와 가까운 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성음 [c]로 발음되더라도 한국어 ‘ㅉ’와 비슷한 무기음이라면 영어에서는 [ʤ]와 가까운 음으로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영어화시킨 발음에 따른 표기인 ‘내머지라’보다는 아런더어 성씨로 보고 철자에 가깝게 ‘나마지라’로 표기했다. 영어는 원어 모음 발음을 제대로 흉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영어에 정착한 이름이 아닌 경우 발음이 통일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되도록이면 영어 발음보다는 원어를 기준으로 표기하는 것이 좋겠다.

‘나마치라’로 쓸 수도 있겠지만 본인 영어 발음, 또 원어에서 [ɟ]로 발음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나마지라’로 적었다. 물론 앞으로 이 성씨의 원어 발음에 대한 정보를 찾게 되면 한글 표기가 수정될 여지가 있다. 한국 언론에서는 ‘나맛지라’라고 쓴 것을 볼 수 있는데 tj가 한 음을 나타내고 영어에서도 [tʤ]가 아니라 그냥 [ʤ]로 발음되므로 바람직한 표기는 아니다.

Arrernte는 예전에 Aranda라고 흔히 적었으며 《옥스퍼드 영어 사전》 등에서는 옛 철자에 따라 Arrernte의 영어 발음을 [ə.ˈɹænd.ə] ‘어랜더’로 제시한다. 캔버라 교외에는 Aranda라는 지명이 있으며 ‘어랜다’로 발음한다. 한글 표기에서는 어말의 a [ə]를 ‘아’로 적기 때문에 발음이 동일하더라도 Arrernte의 영어 발음의 표기는 ‘어랜더’, Aranda의 표기는 ‘어랜다’로 구별된다. 그런데 원어에 가깝게 Arrernte는 UH-rrahn-da로 발음해야 한다는 설명도 볼 수 있다. 이는 [ˈʌɹ.ɑːnd.ə] ‘어란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한글로 표기하려고 하면 어느 발음을 따를지의 문제가 생기므로 웬만하면 원어 발음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는 Arrernte를 원어 발음 [aɾəⁿɖə]을 기준으로 e [ə]는 ‘어’로 옮겨 ‘아런더’로 적었다.

빈센트 나마지라의 출생지인 앨리스스프링스(Alice Springs) 지역에서는 동아런더어(Eastern Arrernte) 혹은 중앙아런더어(Central Arrernte)로 알려진 아런더어 방언이 쓰인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동아런더어의 화자 수는 1910명으로 아런더어 방언을 통틀어 가장 화자 수가 많은 것은 물론 방언 구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언어 가운데도 가장 화자 수가 많은 쪽에 속한다.

그런데 앨버트 나마지라는 원래 서아런더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서쪽으로 있는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인 서아런더어(Western Arrernte/Western Aranda)에서는 어말 e를 쓰는 Arrernte를 동아런더어식 철자로 보고 a를 쓴 Arrarnta나 차라리 Aranda를 선호한다. 아마 이들의 발음은 [aɾəⁿɖa] ‘아런다’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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