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의 옛 이름 ‘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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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 글에 대한 댓글에서 타이(태국)의 옛 이름인 시암(Siam)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시암(Siam)’이 ”타이’의 전 이름’으로, ‘시암만(Siam灣)’은 ”타이만’의 전 이름’으로 나온다.

그런데 샴고양이(Siamese cat)와 샴쌍둥이 혹은 샴쌍생아(Siamese twin)에서는 ‘샴’으로 쓰는 것이 표준이다. 샴고양이는 시암에서 유래한 품종이며 19세기에 시암에서 태어난 신체 일부가 붙은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유명해지면서 샴쌍둥이·샴쌍생아라는 말이 생겼다.

예전에는 국호로서 ‘샴’과 ‘시암’이 혼용되었지만 ‘샴’이 더 흔했다. 그런데 1986년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되면서 나온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에서 원어를 로마자 Siam으로 보고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 따라 ‘시암’으로 표기를 통일했다. 하지만 샴고양이, 샴쌍둥이 등 고정된 표현은 그대로 두면서 이처럼 두 가지 표기가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타이어로는 Siam을 สยาม Sayam [sà.jǎːm] ‘사얌’이라고 쓰며 영어로는 Siam을 [ˌsaɪ̯.ˈæm, ˈsaɪ̯.æm] ‘사이앰’으로, 형용사형 Siamese는 [ˌsaɪ̯‿ə.ˈmiːz] ‘사이어미즈’로 발음한다. 타이어와 영어에서는 ‘시암’이나 ‘샴’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발음을 쓰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잘못된 표기일까?

다른 언어에서 쓰는 표기를 살펴보자. 프랑스어 Siam [sjam] ‘시암’, 독일어 Siam [ˈziːam] ‘지암’, 이탈리아어 Siam [ˈsiˑam, siˈaːm] ‘시암’, 러시아어 Сиам Siam [sʲɪˈam] ‘시암’ 등 여러 유럽 언어에서는 보통 Siam 또는 이와 비슷한 이름을 쓰고 철자식으로 발음한다. 이들을 한글로 표기하면 보통 ‘시암’이 되며 독일어에서는 어두 s가 [z]로 발음되는 특성에 따라 ‘지암’이 되는 정도이다.

영어는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철자와 발음의 대응이 워낙 유별나기 때문에 Siam을 ‘사이앰’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셋’을 뜻하는 trias ‘트리아스’에서 나온 말은 프랑스어 triade [tʁiad] ‘트리아드’, 독일어 Triade [tʁiˈ(ʔ)aːdə] ‘트리아데’, 이탈리아어 triade [http://xn--tria-pnc1d.de/] ‘트리아데’, 러시아어 триада triada [trʲɪˈadə] ‘트리아다’ 등인데 영어에서는 triad [ˈtɹaɪ̯.æd, -əd] ‘트라이애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어식 ‘사이앰’이 얼핏 타이어 ‘사얌’과 비슷한 것은 순전한 우연이다.

‘시암’의 어원이 된 옛 타이어 형태는 원래 เซียม Siam ‘시암’이었다. 다른 여러 언어에서 쓰는 이름은 이 옛 형태에서 나온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는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에 최초로 도달하여 1511년 말레이반도 남쪽의 믈라카(현 말레이시아)를 정복하고 북쪽의 시암(당시 아유타야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초기 포르투갈어 기록에는 나라 이름이 Siam으로 기록되었고 이 이름이 다른 유럽 언어에 퍼졌다. 하지만 정작 현대 포르투갈어로 시암은 Sião [ˈsjɐ̃ũ̯] ‘시앙’, 시암인은 siamês [포: sjɐˈmeʃ, 브: sjãˈmes] ‘시아메스’라고 한다. 라틴어 등 다른 언어에서 Abraham ‘아브라함’으로 쓰는 이름을 포르투갈어로는 Abraão ‘아브라앙’으로 부르듯 포르투갈어에서 -am은 -ão으로 보통 변했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이르는 라틴어 Sion도 원래의 -on이 -ão이 되는 발음 변화 때문에 포르투갈어로 Sião ‘시앙’이 되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어에서는 시암과 시온의 형태가 같아졌다.

옛 포르투갈어 Siam은 믈라카를 비롯한 말레이반도와 말레이 제도 지역에서 널리 무역의 언어로 쓰인 말레이어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현대 표준 말레이어로는 Siam ‘시암’이라고 하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는 ‘시암 국수’를 뜻하는 국수 요리인 mee siam/mi siam ‘미시암’이 유명하다. 타이 남부 빠따니(ปัตตานี Pattani)를 중심으로 하는 타이 남부와 말레이시아 서북부에 걸친 지역인 파타니(말레이어: Patani)의 말레이어 방언 내지 자매어인 파타니 말레이어에서는 아직도 타이를 سيٍّي ซีแย Siyae ‘시얘’라고 부른다.

캄보디아의 크메르어로는 전통적으로 សៀម Siĕm [siəm] ‘시엠’이라는 이름을 썼다. 크메르 제국의 고대 도시 앙코르의 자리에 세워진 도시 시엠리업(សៀមរាប Siĕm Réab)은 ‘시암을 평정하다’라는 뜻으로 구전에 의하면 16세기에 캄보디아가 시암을 물리친 것을 기념한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후세에 나타난 민간 어원으로 보고 실제로는 7세기부터 중국 기록에 나타나는 이름인 진랍(眞臘)과 관련된 이름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면 왜 정작 타이어에서는 ‘시암’이 ‘사얌’으로 변했을까? 이는 원래의 이름을 산스크리트어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은 일찌감치 인도로부터 문자와 함께 인도의 고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소승 불교 경전에 쓰이는 팔리어를 받아들였으며 오늘날에도 타이어의 고급 어휘는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한문을 썼고 오늘날에도 고급 어휘가 한자어인 것과 비슷하다.

산스크리트어로 ‘검은’ 또는 ‘어두운 청색의’, ‘어두운 갈색의’ 등을 뜻라는 श्याम śyāma ‘시아마’라는 말이 있다. 인도에서 태어난 유명 영화감독의 성씨인 Shyamalan(표준 ‘시아말란’, 통용 ‘샤말란’, 말라얄람어 ശ്യാമളന്‍ Śyāmaḷaṉ ‘시아말란’)도 같은 산스크리트어 어근에서 나왔다.

그런데 śyāma를 타이 문자로 적으면 ศฺยาม이다. 타이 문자를 비롯하여 인도의 고대 문자인 브라흐미 문자에서 유래한 대부분의 문자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도 표기할 수 있다(타이 문자의 자음자 수가 타이어를 적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전 산스크리트어로는 śyāma의 발음이 [ˈɕjɑːmɐ] ‘시아마’로 재구되지만 오늘날에는 언어마다 조금씩 다른 발음을 쓴다. 힌디어로는 산스크리트어 śyāma를 데바나가리 문자로 श्याम이라고 쓰고 마지막 모음을 탈락시켜 श्याम śyām [ʃjaːm] ‘시암’이라고 발음한다. 크메르어로는 산스크리트어 śyāma를 크메르 문자로 ឝ្យាម이라고 쓰고 syam [sjaːm] ‘시암’이라고 발음한다. 한자 문화권에서 언어마다 각기 다른 한자음을 쓰는 것이나 유럽 여러 언어에서 각기 다른 라틴어 발음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타이 문자로 ศ로 적는 산스크리트어 ś는 타이어에서 [s]로 발음한다. 그런데 타이어에서는 음절초 자음 뒤에 y [j]가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발음하려면 모음을 삽입해야 한다. 산스크리트어를 발음할 때 모음 표시가 붙지 않는 자음자는 내재 모음 a가 뒤따르는 것으로 읽는다. 이 내재 모음이 발음되지 않는 것을 나타내려면 그 자음자 밑에 ศฺ와 같이 점을 찍는다. 그런데 어차피 타이어식으로는 [s] 뒤에 모음을 발음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타이어식 발음은 내재 모음을 생략하지 않은 ศยาม sayam [sà.jāːm] ‘사얌’이 된다. 오늘날 ‘시암’을 뜻하는 สยาม Sayam과 발음이 동일하다.

그러니 타이어 Sayam은 원래 Siam이었던 것이 산스크리트어 śyāma의 영향으로 철자가 바뀐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시암’이라는 이름은 주로 외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역대 타이계 여러 나라는 보통 수코타이 왕국(สุโขทัย Sukhothai, 1238~1438), 아유타야 왕국(อยุธยา Ayutthaya, 1350~1767), 톤부리 왕국(ธนบุรี Thonburi, 1767~1782), 라따나꼬신 왕국(รัตนโกสินทร์ Rattanakosin, 1782~1932) 등 수도 이름을 따서 불렀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코타이’는 고문체 크메르어 សុខោទ័យ Sukhodaya ‘수코다야’에서 나온 이름으로 궁극적으로 산스크리트어 सुख sukha ‘수카’와 उदय udaya ‘우다야’에서 유래했고 민족명 ไทย Thai ‘타이’와는 관련이 없다.

‘아유타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정복할 수 없는’을 뜻하는 Ayudhyā ‘아유디아’에서 나왔다. 타이 문자로 적으면 อยุธฺยา인데 śyāma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타이어로 발음할 수 있도록 a를 삽입하였다. 그래서 내재 모음을 탈락시키는 점 없이 อยุธยา로 적고 Ayutthaya [ʔà.jút.tʰá.jāː] ‘아유타야’로 발음한다. 철자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모음 a가 붙을 때는 앞의 자음이 덧나기 때문에 dh에 해당하는 th가 겹자음 tth로 발음된다(이런 장애음의 겹침은 한글 표기에 반영하지 않으므로 ‘*아윳타야’라고 적지 않는다).

그러면 ไทย Thai ‘타이’라는 국호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민족명 ไท Thai ‘타이’와 발음이 동일하게 [tʰāj]로 발음된다. 오늘날 타이와 라오스의 주류를 형성하는 민족은 중국 남부에서 남하안 따이(Tai)족에 속한다. 이들은 크라·다이 어족 따이 어파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쓴다. 이들 언어에서는 대부분 ‘다이’ 또는 ‘따이’와 같은 민족명을 쓰는데 중앙타이어와 라오어에서는 발음이 ‘타이’가 되었다(타이 북부에서 전통적으로 쓰인 북타이어로는 ‘따이’이다). 보통 ‘자유로운’ 또는 ‘자유인’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설명하지만 원래는 그냥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유타야 왕국 시절에는 나라를 กรุงไท Krung Thai ‘끄룽타이’라고 불렀다는 자료가 있다. กรุง krung ‘끄룽’은 오늘날 보통 ‘수도’를 뜻하지만 예전에는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럽 열강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근대 국민국가에 걸맞는 국호가 필요하다고 해서 19세기에는 대외적으로 Siam ‘시암’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 유럽 여러 언어에서 쓰는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를 국내에서도 쓰면서 Sayam ‘사얌’이라는 형태를 채택했다. ‘나라’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pradeśa ‘프라데샤’에서 온 ประเทศ prathet ‘쁘라텟’을 써서 ประเทศสยาม Prathet Sayam ‘쁘라텟사얌’이라고도 했다.

‘시암’이 ‘타이’로 바뀐지는 백 년도 되지 않았다. 1932년에는 쿠데타로 시암의 절대 왕정이 무너졌는데 몇 년 후 이에 가담한 군인 가운데 한 명인 쁠랙 피분송크람(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Plaek Phibunsongkhram, 1897~1964)이 총리가 되었다. 그는 서양에서 ‘피분’이라고 흔히 부른다.

피분은 1939년에 국호를 ประเทศสยาม Prathet Sayam ‘쁘라텟사얌’에서 ประเทศไทย Prathet Thai ‘쁘라텟타이’로, 영어로는 Siam ‘사이앰’에서 Thailand ‘타일랜드’로 바꾸었다. 여기서 Thai ‘타이’를 ไท 대신 ไทย로 쓴 것이 눈에 띈다. 철자는 다르게 썼지만 사실상 타이 민족을 내세운 이름이다. 중국계, 말레이계, 몬계 등 타이 민족에 속하지 않는 주민은 배제하는 이름이며 주변국의 타이·따이·다이계 민족도 포괄하겠다는 대외 팽창주의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피분 자신도 중국 출신 이민자의 후손이었지만 이를 숨기고 타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화교를 탄압하였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피분이 이끄는 타이는 일본과 동맹을 맺고 이듬해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하였으며 프랑스령 라오스와 캄보디아 및 영국령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일부 영토를 점령하여 합병했다. 일본과 함께 다이족 거주 지역인 중국 윈난성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전황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피분은 실각하였고 타이는 일본과의 동맹을 파기하였다. 종전 이후 합병했던 영토를 돌려주었으며 1946년에 국호를 다시 Si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고작 2년만인 1948년 피분이 쿠데타로 재집권하면서 이듬해 다시 Thailand로 돌아가 오늘날에 이른다.

그러니 알고 보면 ‘타이’라는 국호의 채택 배경은 논란이 될 수 있다(비슷한 시기에 페르시아의 레자 샤 팔라비가 대외적으로 쓰는 국호를 ‘이란’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타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익숙해졌고 ‘시암’이라는 국호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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