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리즈 콩데의 언어로 글을 쓴다”

본 글은 원래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날짜는 페이스북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카리브해 문학, 탈식민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오늘날 프랑스어권을 대표하는 작가인 과들루프 출신의 마리즈 콩데(Maryse Condé, [maʁiːz kɔ̃de])가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양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무대로 삼은 역사 소설을 통해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와 여성, 인종 문제 등을 다루었다. 17세기 매사추세츠 세일럼(현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1986년작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Moi, Tituba sorcière noire de Salem)》, 19세기 밤바라 제국(현 말리)을 배경으로 하는 1984년작 《세구: 흙의 장벽(Ségou: les murailles de terre)》 등이 대표적이다.

2018년에는 그해 노벨 문학상이 성폭행과 부패 스캔들로 수상자 선정이 보류되면서 스웨덴 문화 예술 관계자들이 대안 노벨 문학상으로서 일시적으로 신설한 뉴 아카데미 문학상(New Academy Prize in Literature)을 수상하기도 했다.

콩데는 1934년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과들루프(Guadeloupe [ɡwadlup])의 경제 중심지인 푸앵트아피트르(Pointe-à-Pitre [pwɛ̃ːt a pitʁ])에서 마리즈 부콜롱(Marise Boucolon [maʁiːz bukɔlɔ̃])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덟 남매의 막내로서 유복한 환경에서 프랑스어를 쓰고 스스로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라났다. 그러다가 열여섯 살에 본토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거리낌 없는 인종 차별을 경험하면서 백인 중심 사회에서는 카리브해 출신 흑인인 자신이 다르게 취급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17세기에 과달루프에 식민 개척자로 들어온 프랑스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를 사탕수수 재배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원주민의 수가 유럽인들이 들여온 전염병과 폭력으로 급감하였고 1848년에 프랑스 제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될 때까지 소수의 유럽인 농장주들이 대규모 노예 인력을 부려서 설탕, 커피 등을 생산하는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과들루프인의 4분의 3 정도가 아프리카인의 후손이다. 비슷한 역사를 겪은 아이티, 자메이카 등 카리브해의 여러 지역과 마찬가지로 흑인 다수 사회이다.

마리즈는 파리에서 만난 서아프리카 기니 출신 배우 마마두 콩데(Mamadou Condé [mamadu kɔ̃de])와 1958년에 혼인하였지만 곧 사이가 틀어졌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던 그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갓 독립한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로 혼자 떠나 1년 간 교사 생활을 했다. 그는 이어서 기니, 가나, 세네갈 등 서아프리카의 여러 신생 독립국에서 십여 년을 보냈다. 1973년에 파리로 돌아가서 파리 7대학, 파리 10대학, 파리 3대학에서 프랑스어 문학을 가르치고 1976년에 데뷔 소설 《헤레마코농(Hérémakhonon)》을 발표하였다. 오랜 별거 끝에 마마두 콩데와는 1981년에 이혼했지만 첫 작품을 마리즈 콩데라는 이름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그 후로도 계속 이 이름을 쓰게 되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둘째 남편인 영국인 리처드 필콕스(Richard Philcox [ˈɹɪʧ.əɹd ˈfɪl.kɒks])와는 1982년에 혼인했는데 그는 콩데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이기도 하다.

《헤레마코농》은 주로 기니에서 목격한 정치적 격변을 바탕으로 하였다. 아프리카 사회주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열광하던 시대에 신생 독립국 정권의 독재와 부패를 폭로하여 여러 나라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한 이 소설은 확실히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주인공인 베로니카 메르시에(Véronica Mercier [veʁɔnika mɛʁsje])는 콩데 자신처럼 카리브해 출신으로 파리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서아프리카로 떠나 교사가 된 여성이다. 그는 현지인들의 언어인 말링케어(malinké)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어를 고집한다.

말링케어는 프랑스어권에서 주로 쓰는 이름이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마닝카어(maninka)라고 부른다. 이 언어는 만딩 어군에 속하며 기니의 주요 언어 가운데 하나이고 말리, 세네갈, 코트디부아르를 비롯한 서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쓰인다.

베로니카는 현지 유력 정치가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의 저택 이름이 소설의 제목인 Hérémakhonon이며 말링케어로 ‘행복을 기다리며’를 뜻한다. 흔히 프랑스어 발음 [eʁemakɔnɔ̃]에 따라 ‘에레마코농’으로 쓰지만 말링케어 발음에 가깝게 적으려면 ‘헤레마코농’이 더 나을 것이다.

같은 만딩 어군에 속하며 말링케어와 상당 부분 의사 소통이 가능한 언어인 밤바라어로 hεrε ‘헤레’는 ‘행복’ 또는 ‘평안’을 뜻하고 makɔnɔ ‘마코노’는 ‘기다리다’를 뜻한다. 만딩 어군에 속하는 여러 언어의 공통 문자 언어로서 도입된 응코어(N’Ko, ߒߞߏ ŋko)로는 ߤߙߍ hɛ̂rɛ̂ ‘헤레’, ߡߊߞߐ߬ߣߐ߲߬ mâkɔ̀nɔ̀n ‘마코농’으로 각각 적는 듯하다. 프랑스어에서는 h가 보통 묵음이지만 만딩 어군의 h는 [h]를 나타내므로 ‘ㅎ’으로 적어야 한다.

Hérémakhonon의 kh는 마찰음 [x]를 의도한 철자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말링케어의 음운 묘사에는 [x]가 포함되지 않으며 밤바라어, 응코어 형태도 k를 쓰므로 한글 표기도 ‘ㅎ’보다는 ‘ㅋ’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들 언어의 로마자 표기에서 어말이나 자음 앞 n은 앞 모음의 비음화를 나타내므로 프랑스어의 비음화된 모음 [ɔ̃]을 ‘옹’으로 적는 것을 감안하면 mâkɔ̀nɔ̀n도 ‘마코농’으로 적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 여성이 조상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서아프리카에서 느끼는 이질감의 중심에는 언어 문제가 있다. 베로니카의 동료 교사 살리우(Saliou)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말링케어를 배울 것을 제안한다. 베로니카가 만난 군인들은 풀라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베로니카와 같은 외부인으로서 그 나라의 다섯 개 주요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 의사 예호굴(Yehogul)은 어렵지 않다며 현지 언어를 배울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계속하여 의사 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를 거부한다.

베로니카는 분명 콩데 본인을 바탕으로 한 등장인물이지만 자기도취에 빠져있고 현지 정세에 무지한 것으로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콩데는 그를 ‘반대의 나(anti-moi)’라고 불렀다. 하지만 작중의 언어 문제는 콩데 본인의 경험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서인도 제도로 잡혀 간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후손은 선조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언어 배경이 같은 노예가 많으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니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을 한 데 섞었놓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프랑스 출신 노예주들이 이들과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 주로 프랑스어를 바탕으로 한 피진 즉 임시 언어를 썼다. 이것이 다음 세대에 전해져 모어화하면서 탄생한 것이 프랑스어로 크레올(créole [kʁeɔl]), 과들루프 현지어로 크레욜(kréyòl)이라고 하는 프랑스어 기반 언어이다(영어 creole [ˈkɹiː.oʊ̯l, ˈkɹeɪ̯-] ‘크리올/크레이올’에 따라 ‘크리올’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곳은 프랑스어권이니 ‘크레올’이라고 쓰기로 한다). 원래의 피진이 간략한 단어에 의존하고 문법을 최소화하였으며 노예주들도 프랑스의 여러 지역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탄생한 크레올어는 표준 프랑스어와는 상당히 다른 별개의 언어이다.

하지만 과들루프를 비롯한 프랑스령에서는 프랑스어가 유일한 공용어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이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교장이었던 콩데의 어머니는 집에서 크레올어를 쓰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로 독립 운동이 활기를 띄면서 프랑스어에 대신 크레올어를 내세우는 움직임이 동력을 얻었다. 1980년대에는 같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Martinique [maʁtinik]) 출신 작가인 파트리크 샤무아조(Patrick Chamoiseau [patʁik ʃamwazo]) 등이 프랑스령 카리브해의 정체성으로 프랑스어 대신 크레올어를 내세우는 크레올리테(créolité [kʁeɔlite])를 표방했다.

이 시기에는 독립 운동이 과격해지기도 해서 1984년에는 경찰서, 은행 등 과들루프에 있는 이른바 프랑스 식민주의의 상징에 대한 폭탄 테러가 15건 발생하기도 했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그 배후로 지목된 카리브 혁명 동맹(Alliance révolutionnaire caraïbe)은 불법화되었다. 요즘은 프랑스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나 유럽 연합에 속함으로써 얻는 혜택 때문에 독립 요구가 상대적으로 수그러드렀지만 프랑스 본토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과 불만은 여전하다.

1986년에 콩데는 오랜만에 과들루프로 돌아갔는데 어려서 유학을 떠난 이후 프랑스와 서아프리카에서 오래 거주했기 때문에 복귀 후 얼마 되지 않아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이 없는 크레올어 대신 프랑스어를 썼다. 그러자 왜 프랑스어를 쓰느냐, 백인 작가냐고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현지 행정가들도 교육과 행정에서 크레올어 사용을 확대하려 했기 때문에 그가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콩데는 단순히 프랑스어가 식민주의 언어라서 배척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그에게 프랑스어는 더이상 식민주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을 바탕으로 재해석하여 자신의 언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영문학을 섭렵하고 후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기도 한 그는 작품에서 프랑스어와 크레올어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여러 언어, 영어, 에스파냐어 등에서 소리와 심상을 빌렸다.

D’ailleurs, je n’écris ni en français ni en créole, mais en Maryse Condé !
“그나저나 나는 프랑스어나 크레올어가 아니라 마리즈 콩데의 언어로 글을 쓴다.”

공유하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