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와 van의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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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태생으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귀화한 Ludwig Mies van der Rohe [ˈluːtvɪç ˈmiːs v⟮f⟯an deːɐ ˈʁoːə]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라고 하는 건축가가 있다. 그는 철과 유리라는 현대적인 건축 재료를 사용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한 근대 건축의 조형미를 정립시킨 선구자로서 독일 바이마르에서 국립 조형 학교인 바우하우스 학장을 맡기도 했는데 1930년대에 여건이 나빠지자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본래 성씨는 그냥 Mies였는데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어머니의 혼인 전 성씨 Rohe ‘로에’에 네덜란드어식 van der를 붙인 복합 성씨 Mies van der Rohe를 예명으로 썼다.

지난 글에서 다룬 것처럼 독일어 인명에 들어가는 전치사 von [fɔn] ‘폰’은 대부분 귀족 가문 출신을 나타냈다(이에 반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의 인명에 들어가는 전치사는 귀족과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귀족들은 성씨에 영지 또는 그 집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소에 von이나 zu [ʦuː] ‘추’를 붙여 더한 복합 성씨를 많이 썼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작곡가 카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Carl Ditters von Dittersdorf [ˈkaʁl ˈdɪtɐs fɔn ˈdɪtɐsdɔʁf])는 본명이 요한 카를 디터스(Johann Carl Ditters [ˈjoːhan ˈkaʁl ˈdɪtɐs])였는데 귀족이 되면서 여기에 von Dittersdorf가 붙어 Ditters von Dittersdorf라는 복합 성씨를 쓰게 되었다. 음악 활동 때문에 귀족이 된 것이니 Dittersdorf는 실제 영지와는 관련이 없고 그냥 원래 성씨인 Ditters와 비슷한 지명을 갖다 붙인 듯하다. 대신 Ditters von Dittersdorf가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일반적으로는 Dittersdorf로 줄여 부르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디터스도르프’를 표제어로 쓴다.

네덜란드어에는 van ‘판’, van de ‘판더’, van den ‘판덴’, van der ‘판데르’ 등이 들어간 성씨가 매우 흔하고 귀족 출신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이를 빌려 쓴 Mies van der Rohe는 독일어 화자에게 어렴풋이 귀족적인 복합 성씨 비슷하게 근사하게 들려서 예명으로 고른 듯하다.

네덜란드어 van der는 [vɑn dɛr]로 발음되며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판데르’로 쓴다. 흔히 /v/와 /f/를 합치는 네덜란드 북부식 발음의 영향으로 어두 v는 ‘ㅍ’으로 적게 했기 때문이다. 정관사 형태 가운데 하나인 der는 예전에 정관사 de [də] ‘더’처럼 모음이 약화되어 [dər] ‘더르’로 발음되었지만 현대 네덜란드어에서 잘 안 쓰게 되면서 철자식 발음인 [dɛr] ‘데르’가 쓰인다(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de ‘더’에서처럼 네덜란드어의 어말 e는 ‘어’로 쓰고 어말이 아닌 e는 다음절 단어의 마지막 음절에서만 ‘어’로 쓰기 때문에 der는 ‘데르’로 적는다).

대표적인 독일어 발음 사전인 두덴(Duden)사의 《발음 사전(Das Aussprachewörterbuch)》이나 데그로이터(De Gruyter)사의 《독일어 발음 사전(Deutsches Aussprachewörterbuch)》에 따르면 van의 독일어 발음은 [van] ‘반’ 또는 [fan] ‘판’이다(위에 쓴 약식 표기에서는 이를 [v⟮f⟯an]으로 나타냈다).

그러니 Mies van der Rohe는 ‘미스 반데어로에’와 ‘미스 판데어로에’ 둘 다 가능하겠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미스 반데어로에’로 쓴다. 지난 글에서 설명했듯이 성씨의 일부로 치는 전치사와 관사는 뒤따르는 요소와 붙여 쓰기 때문에 ‘미스 반 데어 로에’로 띄어 쓰지 않고 ‘미스 반데어로에’로 붙여 쓴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네덜란드어권(현 벨기에) 출신 할아버지에게서 성을 물려받은 독일 작곡가 Ludwig van Beethoven [ˈluːtvɪç v⟮f⟯an ˈbeːthoːfn̩]을 표기할 때는 ‘판’을 써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으로 적는데 왜 Mies van der Rohe에서는 ‘반’을 썼을까?

지난 글에서 네덜란드어식 인명 요소 van은 프랑스어에서 [van] ‘반’ 또는 [vɑ̃] ‘방’으로 발음된다고 설명했는데 영어로는 [væn] ‘밴’으로 발음된다. 영어로는 Mies van der Rohe를 [ˈmiːs⟮z⟯ væn dəɹ ˈɹoʊ̯.ə] ‘미스 밴더로어’라고 정도로 발음한다. 영어식 ‘밴’까지는 아니어도 ‘반’으로 쓴 것은 1930년대 이후 그가 독일 국적을 버리고 미국으로 귀하하여 미국을 무대로 활동한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겠다.

오늘날 네덜란드 북부식 발음에서는 /v/와 /f/의 구별이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단계이어서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어두 v를 ‘ㅍ’으로 적게 했지만 원래 어두의 v는 [v]로 발음되는 것이 표준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 영어 등 대부분의 다른 언어에서는 네덜란드어식 인명 요소 van의 첫 자음을 [v]로 발음한다. 그런데 독일어에서는 고유 어휘에서 철자 v가 [f]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van과 뿌리가 같고 뜻도 같은 독일어 전치사 von이 [fɔn] ‘폰’으로 발음되는 것의 영향으로 van도 [fan] ‘판’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어에서 철자 v는 보통 고유 어휘에서 [f]로, 차용 어휘에서는 [v]로 발음되지만 언제나 똑부러지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같은 단어에서도 [f]와 [v]가 혼용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에서는 특히 어두 v가 차용 어휘에서도 [f]로 발음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후기 라틴어 vagabundus ‘바가분두스’ 또는 프랑스어 vagabond [vaɡabɔ̃] ‘바가봉’에서 차용되어 ‘나그네’를 뜻하는 Vagabund [vaɡaˈbʊnt] ‘바가분트’는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에서 [faɡaˈbʊnt] ‘파가분트’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두덴사와 데그로이터사의 독일어 발음 사전에서는 van의 발음으로 둘 다 [van]을 먼저 제시하고 [fan]을 나중에 제시했지만 실제 독일어 발음을 관찰하면 적어도 독일어권 인명에서는 [fan]이 더 많이 들리는 듯하다. 사전에서는 독일어로 네덜란드어권 인명을 발음할 때를 고려하여 [van]을 우선시했을 수 있지만 네덜란드어권에서 유래한 성씨를 쓴 베토벤이나 네덜란드어를 흉내낸 예명을 쓴 미스 반데어로에의 경우처럼 독일어권 인명에서도 van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어 화자 입장에서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 네덜란드어권 인명이라면 이론적인 원어 발음을 고려해서 [v]를 쓸지 몰라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어권 인명이라면 독일어식으로 [f]를 쓴 발음을 선호하기 쉽다.

현 오스트리아 대통령 Alexander Van der Bellen [alɛˈksandɐ fan deːɐ̯ ˈbɛl(ə)n]은 2016년 5월 20일 외래어 심의 실무소위에서 표준 표기를 ‘판데어벨렌, 알렉산더’로 정했다. 실제 발음에서도 van은 보통 [f]를 쓴 것이 주로 관찰되므로 이하 독일어권 인명에 나오는 van의 발음 표기는 [fan]으로 통일한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네덜란드계 귀족 집안인 Ван дер Беллен(Van der Bellen) ‘반데르벨렌’ 가문 출신이다. 이 집안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1763년 러시아 제국에 이주한 인물의 후손인데 러시아 혁명 후 에스토니아로 피신했다가 1940년에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점령당하면서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 흩어졌다. ‘반데르벨렌’은 러시아어 발음에 따른 표기이고 네덜란드어 발음 [vɑn dɛr ˈbɛlən]에 따라 적으면 ‘판데르벨런’이다(사실 네덜란드어 발음도 ‘반데르벨렌’으로 적는 것이 나았을 수 있지만 현행 표기 규정상 ‘판데르벨런’이 된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특히 발트 연안에 독일계 귀족이 많았기 때문에 흥미롭게도 예전에는 성씨가 독일어화된 형태인 фон дер Беллен(fon der Bellen) ‘폰데르벨렌’으로 많이 쓰였다. 대문자를 쓴 Фон дер Беллен(Fon der Bellen), 붙임표를 쓴 Фон-дер-Беллен(Fon-der-Bellen) 등 다양한 형태로 검색된다. 러시아어에서 독일어 von ‘폰’은 фон(fon) ‘폰’으로 옮기는데 네덜란드어 van ‘판’은 ван(van) ‘반’으로 옮긴다.

Ludwig van Beethoven은 van 없이 그냥 Beethoven으로 줄여 부르지만 Alexander Van der Bellen의 경우 러시아어를 거쳐 들어왔기 때문인지 몰라도 van der를 생략하지 않고 Van der Bellen으로 줄여 부르며 첫 글자도 대문자로 쓴다. 독일어권에서도 요즘 인물은 van을 생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래서 표준 표기도 ‘판데어벨렌, 알렉산더’로 정해서 ‘판데어벨렌’으로 줄여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계 독일 축구 선수 Johannes van den Bergh [joˈhanə⟮ɛ⟯s fan deːn ˈbɛʁk]도 2018년 10월 5일 외래어 심의 실무소위에서 van을 ‘판’으로 써서 ‘판덴베르크, 요하네스’를 표기로 정했다. 이 인물도 van den Bergh로 줄여 부른다. 참고로 van den Bergh는 네덜란드어 발음 [vɑn dɛn ˈbɛr(ə)x]에 따라 적으면 ‘판덴베르흐’이다.

이처럼 표기 용례에서는 미스 반데어로에를 제외하고는 독일어권 인명의 van을 모두 ‘판’으로 적고 있으니 나머지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독일어 인명에서 von은 일반적으로 줄여 부를 때 생략하지만 van, van den, van der 등은 베토벤을 제외하고는 줄여 부를 때도 생략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니 ‘판데어벨렌’, ‘판덴베르크’와 같이 이들을 뒤따르는 성씨에 붙여 써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수영 선수 Franziska van Almsick [fʁanˈʦɪska fan ˈalmzɪk]는 ‘프란치스카 판알름지크’로, 독일 배우 Lea van Acken [ˈleːa fan ˈakn̩]은 ‘레아 판아켄’으로, 독일 배우·영화감독 Sanny van Heteren [ˈzani fan ˈheːtəʁən]은 ‘자니 판헤테렌’으로, 독일 배우 Ingrid van Bergen [ˈɪŋɡʁɪ⟮iː⟯t fan ˈbɛʁɡn̩]은 ‘잉그리트 판베르겐’으로, 독일 배우 Dan van Husen [ˈdan fan ˈhuːzn̩]은 ‘단 판후젠’으로, 독일 화가 Emil van Hauth [ˈeːmiːl fan ˈhaʊ̯t]는 ‘에밀 판하우트’로 적을 수 있다.

독일 소설가 Birgit Vanderbeke [ˈbɪʁɡɪt fandɐˈbeːkə] ‘비르기트 판더베케’의 경우처럼 아예 van der를 붙여 쓰게 된 경우도 있다. der는 따로 설 때 [deːɐ̯]로 발음하므로 ‘데어’로 적지만(빠른 발화에서는 이도 [dɐ]로 약화될 수 있다) Vanderbeke에서는 그냥 [dɐ]로 발음하므로 ‘더’로 적는다.

그런데 베토벤과 같은 역사 인명에서는 줄여 부를 때 van을 독일어의 von처럼 생략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네덜란드 출신인 스웨덴 태생의 18세기 오스트리아 화가 Martin van Meytens [ˈmaʁtiːn fan ˈmaɪtn̩s]는 보통 van을 생략하고 Meytens로 줄여 부른다. ‘마르틴 판 마이텐스’로 띄어 쓰고 ‘마이텐스’로 줄여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흔히 ‘폴 반 다이크’로 부르는 독일 트랜스 음악 DJ인 Paul van Dyk는 독일어로 [ˈpaʊ̯l fan ˈdʏk] ‘파울 판뒤크’로 발음한다. 그런데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명시하지 않지만 Gryphius [ˈɡʁyːfi̯ʊs] ‘그리피우스’, Gymnasium [ɡʏmˈnaːzi̯ʊm] ‘김나지움’, Lynen [ˈlyːnən] ‘리넨’, Sybel [ˈzyːbl̩] ‘지벨’ 같은 기존 독일어 표기 용례를 보면 [yː]나 [ʏ]로 발음되는 철자 y는 ‘위’ 대신 그냥 ‘이’로 적고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Paul van Dyk는 ‘파울 판디크’로 적을 수 있다.

그의 본명은 Matthias Paul [maˈtiːas ˈpaʊ̯l] ‘마티아스 파울’이고 Paul van Dyk는 예명인데 흔한 네덜란드어 성씨 van Dijk [vɑn ˈdɛi̯k] ‘판데이크’의 이철자에서 따온 듯하다. 고유 명사에서 네덜란드어 ij는 간혹 y로 쓰는 경우가 있다. 영어에서는 이 성씨를 보통 [væn ˈdaɪ̯k] ‘밴다이크’로 발음하므로 이철자를 쓰는 Paul van Dyk도 [ˈpɔːl væn ˈdaɪ̯k] ‘폴 밴다이크’로 발음한다. 그러니 ‘폴 반 다이크’는 주로 영어 발음을 따른 표기이다. 그런데 독일어에서 van Dyk를 [fan ˈdʏk]로 발음하는 것은 독일어 철자식 발음이다. 독일어에서 자모 y는 보통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에서 볼 수 있는데 Gryphius, Gymnasium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그리스 문자 입실론(Υ/υ)에 해당하는 y는 독일어에서 보통 [yː]나 [ʏ]로 발음한다. 그래서 Dyk도 마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독일인이니 원칙적으로는 독일어 발음에 따라 ‘파울 판디크’로 적는 것이 맞겠지만 영어식 ‘폴 밴다이크’의 영향으로 ‘폴 반 다이크’로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어떻게 적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오늘날 벨기에에 해당하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남부 출신의 플랑드르 화가로서 잉글랜드에서 주로 활동하여 영어식 이름인 Anthony van Dyck로 알려진 17세기 인물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반다이크’로 실려있다. 네덜란드어 이름은 Antoon van Dyck [ˈɑntoːn vɑn ˈdɛi̯k] ‘안톤 판데이크’인데 영어 발음을 따르되 ‘밴’만 ‘반’으로 적은 것을 표제어로 삼은 것이다(Dyck 역시 Dijk의 이철자이고 발음은 같다).

그러니 Paul van Dyk도 영어 발음을 따르되 ‘밴’만 ‘반’으로 적은 ‘폴 반다이크’를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겠다. 화가 반다이크와 달리 DJ 반다이크는 영어권에서 생활하지 않으니 이름을 영어식으로 취급할 근거가 부족할지 몰라도 그의 음악은 영어 가사와 제목이 많이 쓰인다는 것과 대중 음악계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그의 이름이 영어식 표기로 통용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네덜란드 트랜스 DJ인 Armin van Buuren [ˈɑrmɪn vɑn ˈbyːrə(n)] 역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아르민 판뷔런’으로 적어야 하지만 ‘아민 반 뷰렌’이나 ‘아르민 반 뷰렌’으로 적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영어 발음 [ˈɑːɹm.ᵻn væn ˈbjʊə̯ɹ.ən]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아민 밴뷰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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