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와이캄바스 국립 공원에서 태어난 멸종 위기 코뿔소와 코끼리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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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남부에 있는 와이캄바스(Way Kambas) 국립 공원에서는 멸종 위기의 수마트라코뿔소 새끼 두 마리와 수마트라코끼리 새끼 두 마리가 태어났다. 세계 자연 기금에 의하면 현존하는 코뿔소 다섯 종 가운데 가장 덩치가 작은 종인 수마트라코뿔소는 개체 수가 약 40마리에 지나지 않으며 아시아코끼리의 아종인 수마트라코끼리도 야생에 2400~2800마리밖에 남아있지 않고 그 가운데 3분의 1이 수마트라섬에 산다.

수마트라코뿔소(Dicerorhinus sumatrensis)는 아시아 지역 코뿔소 가운데 유일하게 뿔이 두 개이며 온몸이 털로 뒤덮여있다. 현존하는 코뿔소 가운데 빙하기에 유라시아 초원에서 서식했다가 멸종한 털코뿔소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도 하다. 한때 인도와 중국 서남부, 인도차이나반도 등에 널리 분포했으나 오늘날 수마트라섬과 보르네오섬에만 남아있으며 2019년에는 말레이시아에 속한 보르네오섬 북부에 살던 최후의 수마트라코뿔소인 암컷 이만(Iman)이 25세에 암으로 병사하면서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9월 30일 와이캄바스 국립 공원의 코뿔소 보호 구역에서 스물 두 살된 암컷 라투(Ratu)와 수컷 안달라스(Andalas) 사이에서 암컷 새끼가 태어났는데 11월 23일에는 델릴라(Delilah)라는 암컷과 하라판(Harapan)이라는 수컷 사이에서 수컷 새끼가 태어났다. 델릴라 자신도 2016년 라투와 안달라스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살짜리이니 라투와 안달라스는 두 달 사이에 새 딸과 새 손자를 본 셈이다.

한편 11월 11일에는 와이캄바스 국립 공원에서 운영하는 붕우르(Bungur) 제2지역 코끼리 대응단 기지에서 리스카(Riska)라는 암컷 코끼리가 수컷 아지(Aji)와 짝지어 수컷 새끼를 낳았고 11월 28일에는 마르가하유(Margahayu) 제3지역 코끼리 대응단 기지에서 암컷 아멜(Amel)과 수컷 렌디(Rendy) 사이에 암컷 새끼가 태어났다. 코끼리 대응단(Elephant Response Unit)은 길들인 코끼리 수십 마리의 재활에 주력하며 자연 번식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국립 공원에는 야생 코끼리도 있는데 지난 10년 동안 영내에서 수마트라코끼리 스물 두 마리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상아를 노려 밀렵하거나 농작물을 보호하려 독살하여 코끼리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지난 8월에도 야생 코끼리 한마리가 상아 없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수마트라코끼리(Elephas maximus sumatranus)는 인도코끼리, 스리랑카코끼리와 함께 아시아코끼리의 세 아종 가운데 하나인데 수마트라섬에만 서식한다. 그런데 예전에 수마트라섬을 덮었던 숲이 많이 사라지면서 이들에 필요한 서식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아 개체수가 급감하였고 밀렵이 중단되지 않으면 십 년 내에 멸종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와이캄바스 국립 공원이 위치한 수마트라섬 남부의 람풍(Lampung)주는 고유의 말과 글을 가진 람풍족에서 이름을 땄다(아쉽게도 람풍 문자는 아직 유니코드에서 지원하지 않는다). 1920년에만 해도 람풍족이 람풍주 주민의 70%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15% 이하로 줄어들었고 자바(자와)섬 등 다른 섬에서 이주해온 이들의 후손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자바(자와)어, 순다어 등을 쓴다. 또 서로 다른 언어 집단 사이의 의사 소통에는 수마트라섬 남부에서 교통어로 널리 쓰이는 팔렘방 말레이어 내지는 말레이어에서 비롯된 인도네시아의 국가 공용어인 인도네시아어가 쓰인다. 람풍어와 자바어, 순다어, 팔렘방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는 모두 남도 어족(오스트로네시아 어족)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에 속하는 언어이다.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다언어 국가이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쓰이는 이름이 어떤 언어에서 왔는지조차도 확인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어는 로마자로 쓰며 어느 언어에서 나온 이름이든 비슷한 철자법을 쓰기 때문에 보통 발음을 짐작하기는 쉽다. 외래어 표기법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표기 규정이 있는데 대체로 이를 따르면 된다. 인도네시아어는 인도네시아에서 교통어로 쓰던 말레이어를 표준화한 것이어서 같은 언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를 묶어서 취급한다. 다만 인도네시아에서 쓰는 여러 언어 가운데는 아체어나 순다어에서 쓰는 eu [ɨ~ɯ] ‘으’처럼 독특한 철자를 쓰는 것도 있어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표기 규정만으로는 처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예전에 인도네시아의 여러 언어는 인도계 문자에서 유래한 자바(자와) 문자, 순다 문자, 람풍 문자 등으로 적거나 말레이어, 아체어처럼 자위(Jawi) 문자라고 하는 아랍 문자로 적었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로마자를 쓴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는 네덜란드어식 철자법을 썼지만 독립 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에서 영어식 철자법을 쓰던 말레이어와 철자법을 통일하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어식으로 tj로 쓰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에서 영어식으로 ch로 쓰던 파찰음 [ʧ]는 오늘날 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서 c로 쓴다.

와이캄바스(Way Kambas) 국립 공원은 한국 언론에서 ‘웨이 캄바스’ 또는 ‘웨이캄바스’라고 흔히 적고 있는데 이 이름의 way는 영어 단어가 아니고 그처럼 발음되지도 않는다. way는 람풍어로 ‘강’, ‘물’을 뜻하며 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서 ‘강’을 뜻하는 말은 주로 sungai ‘숭아이’를 쓰지만 람풍어 way와 동계어인 wai ‘와이’도 쓴다. 그 영향인지 Wai Kambas라는 이철자로도 검색된다.

람풍주 일대에서는 Way로 시작하는 지명이 많이 발견된다. 이 가운데 적어도 Way Kanan ‘와이카난’이라는 지명은 강 이름으로도 쓰이는 듯하다. 핵어가 뒤에 놓이는 핵어말(head-final) 언어인 한국어와 달리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에서는 핵어를 앞에 놓는 핵어선(head-initial) 구조를 쓰기 때문에 ‘강’이나 ‘물’을 뜻하는 말이 이름 앞에 온다. 지명은 붙여 쓰는 것이 원칙이므로 Way Kambas ‘와이캄바스’, Way Kanan ‘와이카난’ 같이 써야 하겠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표기 규정은 대조표를 따르므로 대체로 간단하다. Iman ‘이만’, Ratu ‘라투’, Andalas ‘안달라스’, Harapan ‘하라판’, Bungur ‘붕우르’, Riska ‘리스카’, Margahayu ‘마르가하유’ 등은 별 문제가 없다. Bungur ‘붕우르’의 ng는 받침 ‘ㅇ’으로 적고 ‘동남쪽’을 뜻하는 tenggara ‘틍가라’에서처럼 철자가 ngg일 때만 ‘ㄱ’을 덧붙인다. 배롱나무속(Lagerstroemia)에 속하는 자주색 꽃을 피우는 나무를 인도네시아어로 bungur ‘붕우르’라고 하는데 순다어로 ‘자주색’을 뜻하는 bungur에서 차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와 람풍어에서 ‘자주색’을 뜻하는 동계어는 ungu ‘웅우’이다. 인도네시아어는 말레이어를 기반으로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쓰이는 여러 언어에서 들여온 차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들이 같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에 속한 언어들이다 보니 이런 차용어로 인하여 ungu, bungur처럼 형태가 약간 다른 동계어가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말레이인도네시아어의 e는 [e]로 발음될 때는 ‘에’로, [ə]로 발음될 때는 ‘으’로 적게 했기 때문에 e가 들어간 이름을 표기할 때는 발음을 확인해야 한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언급하지 않지만 인도네시아어에서는 e가 [ɛ]로도 발음될 수 있는데 이도 ‘에’로 적어야 하겠다. 인도네시아어에서 [ɛ]는 폐음절, 특히 어말 폐음절에서 /e/의 변이음으로 나타나거나 차용어에서 원어 발음을 흉내낼 때 쓴다.

Delilah는 히브리 성경에서 장사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른 여인 들릴라에서 나온 이름이다. 고대 히브리어로는 דְּלִילָה Dəlîlāh ‘들릴라’이고 현대 히브리어로도 Dlila ‘들릴라’, 한국어 성경에서도 ‘들릴라’라고 부른다. 그러니 혹시 인도네시아어에서도 [ə] 발음을 쓰는 ‘들릴라’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겠지만 동영상에서는 [e]를 쓴 ‘델릴라’가 관찰된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여인을 인도네시아어에서는 보통 어말 h 없이 Delila라고 하는데 이 역시 [e]를 쓰는 ‘델릴라’로 발음한다.

참고로 삼손은 고대 히브리어로 שִׁמְשׁוֹן Šimšôn ‘심숀’, 현대 히브리어로 Shimshon ‘심숀’이라고 하며 인도네시아어로는 Simson ‘심손’이라고 한다. ‘삼손’은 고대 그리스어 Σαμψών(Sampsṓn) ‘삼프손’, 라틴어 Samson ‘삼손’을 거쳐 전해진 표기이다. 예전에 1949년작 할리우드 영화 Samson and Delilah가 《삼손과 데릴라》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한국어 성경식 ‘들릴라’보다 오히려 ‘데릴라’라는 표기가 익숙한 이들이 많다. 참고로 영어로는 Samson [ˈsæms.ən] ‘샘슨’, Delilah [dᵻ.ˈlaɪ̯l.ə] ‘딜라일라’로 발음한다.

인도네시아어의 Simson과 Delila는 네덜란드어의 Simson ‘심손’과 Delila ‘델릴라’를 그대로 따른 표기로 보인다. 네덜란드어권에서도 가톨릭교에서는 주로 Samson ‘삼손’을 쓰고 개신교에서는 주로 Simson ‘심손’을 쓴다. 네덜란드어로 Delila는 [deˈlila] ‘델릴라’로 발음된다.

Amel은 ‘소망’을 뜻하는 아랍어 이름 أمل ʾAmal ‘아말’에서 유래했으며 인도네시아어에서는 [ɛ]를 써서 ‘아멜’로 발음한다.

아랍어 이름은 보통 로마자로 Amal로 쓰고 여기서 유래한 튀르키예어 이름은 Emel이지만 특히 북아프리카 알제리, 튀니지 등의 구어체 아랍어 발음을 반영한 로마자 표기로 Amel을 쓰는 경우가 있으며 프랑스어로는 [amɛl] ‘아멜’로 발음한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아랍어 إيمان ʾĪmān ‘이만’에서 유래한 Iman ‘이만’처럼 아랍어에서 기원하는 이름을 흔히 찾을 수 있다. 아랍어 ‘아말’은 남녀 공동으로 쓰는 이름인데 인도네시아에서 Amel은 주로 여자 이름으로 쓰이는 듯하다. 마침 harapan ‘하라판’도 말레이인도네시아어로 ‘소망’를 뜻한다.

Rendi라는 이철자로도 쓰는 Rendy는 어원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렵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꽤 흔한 남자 이름으로 [e~ɛ] 발음을 쓴 ‘렌디’이다.

한편 ratu ‘라투’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서 ‘여왕’을 뜻하는데 ‘왕’, ‘여왕’을 뜻하는 자바어 ꦫꦠꦸ ratu에서 차용한 말이다. 이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서 ‘왕’, ‘여왕’을 뜻하는 datu ‘다투’와 ‘할아버지’, ‘어르신’을 뜻하는 datuk ‘다툭’과 동계어이다. andalas ‘안달라스’는 ‘뽕나무’를 뜻하며 Andalas는 수마트라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을 ‘자바-섬(Java섬)’, 그 중부에서 쓰는 언어를 ‘자바-어(Java語)’라고 부르는데 인도네시아어로는 Jawa [ʤawa] ‘자와’라고 쓴다. 그러니 인도네시아어 발음을 따른다면 ‘자와섬’, ‘자와어’로 부를 수 있겠지만 ‘자바’를 관용 표기로 인정한 듯하다. 자바어로도 ꦗꦮ Jawa인데 실제 발음은 [ʤɔwɔ]로 ‘조워’에 가깝다.

수마트라코뿔소와 수마트라코끼리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람풍어 같은 인도네시아의 소수 언어도 팔렘방 말레이어 같은 지역 단위 교통어나 공용어인 인도네시아어에 밀려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람풍주 정부는 람풍어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람풍어 보존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멸종 위기 동식물 보호에 애쓰는 국립 공원 직원들이나 소수 언어 보존에 애쓰는 교육자들에게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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