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문학상 메디시스상을 제정한 갈라 바르비잔의 독특한 사연

본 글은 원래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날짜는 페이스북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한국 소설가 한강(1970~)이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프랑스어제: Impossibles Adieux)》로 포르투갈의 리디아 조르즈(Lídia Jorge, 1946~)와 함께 프랑스 대표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메디시스상(prix Médicis) 외국어 소설 부문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언론에 따라 이를 ‘메디치상’으로 보도한 곳도 있는데 이도 나름 일리가 있다.

메디시스상은 1958년 러시아 태생의 갈라 바르비잔(Gala Barbisan [ɡala baʁbizan, -zɑ̃], 1904~1982)과 프랑스 작가 장피에르 지로두(Jean-Pierre Giraudoux [ʒɑ̃ pjɛːʁ ʒiʁodu], 1919~2000)가 제정했다.

바르비잔은 당시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에서 저명한 외과 의사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솔로비요프(Nikolai Vasil’yevich Solov’yov/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Соловьёв, 1874~1922)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갈리나 니콜라예브나 솔로비요바(Galina Nikolayevna Solov’yova/Галина Николаевна Соловьёва)였다. 지금도 야로슬라블에는 솔로비요프의 이름을 딴 병원이 있다.

그는 1935년 모스크바 주재 이탈리아인 기술자 루차노 바르비산(Luciano Barbisan [luˈʧaːno barbiˈzan], 1908~1991)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러면서 몽마르트르(Montmartre [mɔ̃maʁtʁ]) 구역에 있는 저택에서 문예 살롱을 개최하여 문학가와 예술가를 맞아들였으며 스스로도 화가로 활동했다.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니 마치 러시아 혁명 이후 대규모로 발생한 구체제 지지 망명자를 연상시킬 수도 있지만 바르비잔은 공산주의자였다고 하니 적어도 겉으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소련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1958년 유명한 극작가 장 지로두(Jean Giraudoux, 1882~1944)의 아들로서 자신도 작가로 활동하던 장피에르 지로두는 새로운 문학상을 제정하고자 했다. 실력에 비해 명성이 따르지 않는 소설가에게 수여한다는 목적이었는데 아버지의 그늘에 가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동기일 수도 있겠다.

이에 바르비잔은 기꺼이 후원하여 메디시스상이 제정되었는데 수상자 선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초대 수상자인 클로드 올리에(Claude Ollier [kloːd ɔlje], 1922~2014)의 수상작 《연출(La Mise en scène)》은 당시 전후 프랑스에서 전통적인 소설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된 누보로망(nouveau roman [nuvo ʁɔmɑ̃]) 즉 ‘새로운 소설’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메디시스상은 공쿠르(Goncourt [ɡɔ̃kuːʁ])상, 르노도(Renaudot [ʁənodo])상, 페미나(Fémina [femina])상과 함께 프랑스의 4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70년에는 기존의 프랑스어 소설 부문(prix Médicis français) 외에도 프랑스어로 번역된 외국어 소설 부문(prix Médicis étranger)이 신설되었다. 바르비잔은 역시 수상자 선정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남편을 기념하여 첫해는 이탈리아인 작가에게 수여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루이지 말레르바(Luigi Malerba, 1927~2008)가 《죽음의 도약(Salto mortale, 프랑스어제: Saut de la mort)》으로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

외국 부문 주요 수상자로는 1973년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2003), 1976년 영국의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ˈdɒɹ.ᵻs ˈlɛs.ɪŋ], 1919~2013), 1982년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 1993년 미국의 폴 오스터(Paul Auster [ˈpɔːl ˈɔːst.əɹ], 1947~), 2005년 튀르키예의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 1952~) 등을 꼽을 수 있다. 1985년에는 수필 부문(prix Médicis essai)도 신설되었다.

왜 상의 이름이 메디시스상으로 정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Médicis [medisis] ‘메디시스’는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출신의 유명한 가문 Medici [ˈmɛːdiʧi] ‘메디치’의 프랑스어 이름이다. 여기서는 프랑스어에서 어말 s를 발음한다. 메디시스상의 프랑스어 이름인 prix Médicis는 [pʁi medisis] ‘프리 메디시스’로 발음한다.

이 가문 출신의 카테리나 데메디치(Catherine de’ Medici [kateˈriːna de ˈmɛːdiʧi], 1519~1589)는 1547년 프랑스의 앙리 2세와 혼인하여 프랑스의 왕후가 되었으며 프랑스어로 카트린 드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katʁin də medisis])라고 부른다. 1559년 앙리 2세가 세상을 떠나고 어린 세 아들이 차례로 왕이 되면서 막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메디치 가문의 일원답게 문예 후원자로 활동하여 후기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는데 일조했다.

아마도 바르비잔의 남편이 이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 문화의 후원자가 된 카트린 드메디시스를 기념하여 문학상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로렌초 데메디치(Lorenzo de Medici)'(이는 de’ Medici의 잘못이다), ‘카트린 드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를 표제어로 삼아 ‘데메디치’, ‘드메디시스’와 같이 붙여 쓰는데 가문은 ‘메디치’, ‘메디시스’로 부르고 de’나 de는 성씨의 일부가 아니므로 de’ Medici는 ‘데 미디치’, de Médicis는 ‘드 메디시스’로 띄어 쓰는 것이 더 나을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라 ‘데메디치’, ‘드메디시스’로 적었다.

메디시스는 메디치의 프랑스어 이름이고 가문 이름으로는 이탈리아어 형태인 ‘메디치’가 훨씬 더 친숙하므로 문학상도 ‘메디치상’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수여되는 상이고 카트린 드메디시스의 이름을 딴 것이라면 ‘메디시스상’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서는 ‘메디시스상’으로 썼다.

남편의 이탈리아어 이름 Barbisan [barbiˈzan] ‘바르비산’을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하면 [baʁbizan] ‘바르비잔’ 또는 [baʁbizɑ̃] ‘바르비장’인데 사실 프랑스어 화자는 후자로 발음할 확률이 더 높다. 다음 동영상에서 동명이인 Barbisan은 ‘바르비장’으로 발음한다(보기). 그러나 그리 저명한 인사는 아니라서 그런지 그의 이름을 언급한 동영상은 찾지 못해서 실제 발음은 확인하지 못했고 러시아어로는 Барбизан(Barbizan) [bərbʲɪˈzan] ‘바르비잔’이라고 쓰므로 여기서는 이탈리아어 원 발음과 좀 더 가까운 형태인 ‘바르비잔’으로 통일했다.

이탈리아어의 s는 특히 형태소 내부, 모음 사이에서 유성음 [z]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발음은 ‘바르비잔’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s를 ‘ㅅ’으로 통일한다. 따라서 흔히 ‘리조또’나 ‘리조토’라고 부르는 risotto [riˈzɔtto, -ˈsɔt-]도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리소토’로 써야 한다. 이탈리아어에서 요즘은 보통 [z]를 써서 [riˈzɔtto] ‘리조토’라고 발음하지만 전통 발음은 [s]를 쓴 [riˈsɔtto] ‘리소토’이다. 또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철자 s는 모음 사이에서도 [s]로 발음한다. 이탈리아 남부식으로는 Barbisan도 [s]를 쓴 [barbiˈsan] ‘바르비산’이다.

이탈리아어에서 온 성이기는 하지만 본인이 이탈리아인이라고 보기는 힘드니 여기서는 프랑스어 또는 러시아어 발음에 따라 표기했다. 그를 프랑스인으로 부른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러시아인이라고 부르며 남편의 고향인 이탈리아에 묻히기는 했지만 이탈리아인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지 못했다.

본문을 처음 올릴 때 누락했는데 한강의 수상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이는 최경란(Kyungran Choi)과 피에르 비지우(Pierre Bisiou [pjɛːʁ bizju])이다. 참고로 한강과 공동 수상한 리디아 조르즈의 수상작은 《자비(Misericórdia)》인데 흥미롭게도 일리자베트 몬테이루 호드리그스(Elisabeth Monteiro Rodrigues)의 프랑스어 번역에서는 프랑스어 Miséricorde [mizeʁikɔʁd] ‘미제리코르드’ 대신 악센트 부호만 빼고는 포르투갈어 원제와 동일한 라틴어 Misericordia ‘미세리코르디아’를 제목으로 썼다.
공유하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