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블라비크 국제공항과 할도르 락스네스 – 아이슬란드어의 한글 표기 손질하기

본 글은 원래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날짜는 페이스북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예전 블로그 글을 보존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2009년쯤 제안했던 아이슬란드어 한글 표기안에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아이슬란드어는 꽤 특이한 음운 현상을 많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원래 폐쇄음이 아닌 자음이 폐쇄음으로 변하는 폐쇄음화(stopping) 현상이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 근교에 있는 국제공항은 Keflavík [ˈcʰɛplaviːk]라는 지명에서 이름을 땄는데 예전의 표기안을 따르면 ‘케플라비크’로 적어야 한다.

하지만 제126차 외래어 심의회(2016. 4. 27.)에서는 ‘케블라비크 국제공항’으로 표기를 심의했다. 원래 제18차 외래어 심의회(1997. 9. 24.)에서 원어를 *Keelavik로 잘못 파악하고 ‘*켈라비크’라는 잘못된 표기를 정했던 것을 정정한 것이다.

아이슬란드어의 f는 어두나 무성음 앞, ff로 겹친 경우에는 [f]로 발음되고 모음 사이나 모음과 유성음 사이, 어말에서는 [v]로 발음된다. 그런데 Keflavík [ˈcʰɛplaviːk]에서는 f가 [p]로 발음된다.

아이슬란드어에서 b, p는 어두에서 각각 [p, pʰ]로 발음되고 어중 l 앞에서는 각각 [p, hp]로 발음된다. 그러니 Keflavík는 마치 *Keblavík로 적은 것처럼 발음되는 것이다. 그래서 ‘케블라비크’로 표기를 정했다. 미국의 《메리엄·웹스터 지명 사전》에서는 Keflavík의 발음을 \ˈkye-blä-ˌvēk, ˈke-flə-\ 즉 [ˈkjɛb.lɑː.ˌviːk, ˈkɛf.lə-]로 제시하는데 [ˈkjɛb.lɑː.ˌviːk] ‘켸블라비크’는 아이슬란드어 발음을 흉내낸 것이고 [ˈkɛf.lə.ˌviːk] ‘케플러비크’는 영어식 철자와 발음 대응에 더 가깝게 발음한 것이다(아이슬란드어의 k가 전설 모음 앞에서 경구개음 [cʰ]로 발음되는 것을 [kj]로 흉내냈다).

이처럼 본래 마찰음 [f] 또는 [v]로 발음되는 f는 l이나 n 앞에서는 마치 b로 쓴 것처럼 폐쇄음 [p]로 발음된다. 예전에 처음 아이슬란드어 표기안을 마련했을 때에는 어차피 한국어 화자는 f를 ‘ㅍ’으로 옮기는 데 익숙하니 원어의 발음 구별과 달라지더라도 자음 앞의 f는 ‘ㅍ’으로 통일하자고 했지만 사실 원어 발음을 체계적으로 옮기려면 [p]로 발음되는 f는 ‘ㅂ’으로 옮기는 게 낫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마련했던 아이슬란드어 표기안을 다시 고친다면 종전에 ‘케플라비크’로 적었던 Keflavík는 ‘케블라비크’로 적도록 할 것 같다.

Keflavík는 ‘원통’, ‘통나무’를 뜻하는 kefli ‘케블리’의 복수 속격형 kefla ‘케블라’에 ‘만’을 뜻하는 vík ‘비크’를 합친 이름이다. 물위에 떠다니는 나무에서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kefli는 고대 노르드어 kefli ‘케블리’에서 왔는데 고대 노르드어의 f는 환경에 따라 [f] 또는 [v]로 발음되었으며 kefli에서 f는 모음과 유성음 사이에 있으니 [v]로 발음되었을 것이다. 아이슬란드어에서는 형태소 내부에서 이런 [v]가 [p]로 폐쇄음화했다.

‘항구’를 뜻하는 höfn [ˈhœpn] ‘회븐’에서도 f는 [p]로 발음된다. 고대 노르드어 hǫfn ‘호븐’에서는 f가 [v]로 발음되었겠지만 아이슬란드어에서는 [p]로 변했다.

아이슬란드어의 p는 보통 위치에 따라 [pʰ, p, hp] 등 폐쇄음으로 발음되는데 재미있게도 ‘나누다’를 뜻하는 skipta [ˈscɪfta] ‘스키프타’나 ‘9월’을 뜻하는 september [ˈsɛftɛmpɛr̥] ‘세프템베르’, ‘손실’을 뜻하는 tap [ˈtʰaːp] ‘타프’의 속격형 taps [ˈtʰaːfs] ‘타프스’에서처럼 s나 k, t 앞에서는 일종의 연음화를 거쳐서 마찰음 [f]가 된다.

그러나 f가 l이나 n 앞에서 [p]로 변하는 것은 형태소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이슬란드어에서 어두의 f를 비롯하여 형태소 첫머리의 f는 [f]로 발음되는데 형태소 첫머리의 자음군 fl에서도 f가 [f]로 발음된다. ‘날기’, ‘비행’을 뜻하는 flug [ˈflʏːɣ] ‘플뤼그’에서는 f가 [f]으로 발음된다.

따라서 flug와 höfn의 합성어로 ‘공항’을 뜻하는 flughöfn [ˈflʏɣhœpn̥]은 ‘플뤼그회븐’으로 표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flug 뒤에 붙은 자음 때문에 u가 더이상 긴 모음으로 발음되지 않는다).

그런데 ‘공항’을 뜻하는 말로는 flughöfn 대신 flug와 ‘들판’을 뜻하는 völlur [ˈvœtlʏr̥] ‘뵈들뤼르’를 합친 flugvöllur [ˈflʏɣvœtlʏr̥] ‘플뤼그뵈들뤼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케블라비크 공항의 아이슬란드어 이름도 Keflavíkurflugvöllur [ˈcʰɛplaviːkʏrˌflʏɣvœtlʏr̥]이다. völlur의 ll이 마치 dl로 쓴 것처럼 [tl]로 발음되는 것이 특이하다. 아이슬란드어의 ll은 차용어나 애칭에서 [lː]로 발음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처럼 [tl]로 발음된다. 이것도 폐쇄음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을 뜻하는 allur [ˈatlʏr̥] ‘아들뤼르’의 중성형 allt [ˈal̥t] ‘알트’나 속격형 alls [ˈals] ‘알스’, ‘쓰러뜨리다’를 뜻하는 fella [ˈfɛtla] ‘페들라’의 1인칭 단수 과거형 felldi [ˈfɛlti] ‘펠디’에서 볼 수 있듯이 d, s, t 앞에서는 폐쇄음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남자 이름 Halldór [ˈhaltour̥] ‘할도르’, 여자 이름 Halldóra [ˈhaltoura] ‘할도라’에서도 보통 폐쇄음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예전의 표기안에서는 d, s, t 앞에서는 ll을 ‘ㄹ’로 적게 하면서도 Halldór는 ‘하들도르’, Halldóra는 ‘하들도라’로 적게 하는 예외를 두었다.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이들 이름의 발음에 관한 잘못된 설명을 봐서 그랬던 것 같다. 아이슬란드어의 ll이 [tl]로 발음된다는 것을 확대 적용하여 Halldór에서도 [tl]로 발음된다고 설명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하지만 이후 알아낸 바로는 Halldór에서도 [l]로 발음한다.

재미있게도 Forvo에서 발음을 들어보면 Halldór에서는 다섯 개 발음 모두 그냥 [l]을 쓰는데 Halldóra는 발음 하나는 [tl]을 쓰고 다른 하나는 [l]을 쓴다. 혹시 Halldóra를 합성어 Hall + dóra로 분석해서 [tl] 발음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다시 표기안을 고치자면 이 예외는 빼고 Halldór ‘할도르’, Halldóra ‘할도라’로 적게 해야겠다. 제126차 외래어 심의회(2016. 4. 27.)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Halldór (Guðjónsson Kiljan) Laxness의 한글 표기를 종전의 ‘할도르’에서 ‘락스네스, 하들도르 (그뷔드욘손 킬랸)’으로 재심의했는데(국립국어원 누리집의 용례집에서는 ð를 đ로 잘못 썼다) 이것도 잘못된 정보에 따라 괜히 고친 것 같다. 혹시 누군가 내가 만든 아이슬란드어 표기안을 보고 Halldór의 발음을 잘못 알아서 그렇게 된 것인가 하는 죄책감도 든다.

참고로 내 표기안에서는 gj, hj, kj, sj를 제외하고 자음 뒤에 오는 j를 뒤따르는 모음과 끊어서 ‘이’로 적게했으니 Kiljan은 ‘킬랸’이 아니라 ‘킬리안’으로 적게 하는 차이가 있다. Guðjónsson [ˈkvʏðjounsɔn] ‘그뷔드욘손’의 guð는 불규칙적으로 [ˈkvʏːð]로 발음되므로 ‘그뷔드’로 적는다(guð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모음 뒤에 자음 하나만 따르므로 모음이 길게 발음된다).

한편 아이슬란드어의 nn은 고모음 í [i], ú [u] 또는 á [au], ó [ou], æ [ai], ei [ei], au [œi] 등 고모음부로 끝나는 이중 모음 뒤에서 마치 dn으로 쓴 것처럼 [tn]으로 발음된다. 이것도 폐쇄음화 현상의 일종이다.

아이슬란드어의 rl, rn에서도 폐쇄음화가 일어나 [(r)tl, (r)tn]으로 발음된다. 예를 들어 남자 이름 Karl은 [ˈkʰa(r)tl̥] ‘카(르)들’로, 남자 이름 Björn은 [ˈpjœ(r)tn̥] ‘비외(르)든’으로 발음된다. 원래는 rl, rn의 발음이 [tl, tn]으로 바뀌었다가 철자식 발음으로 다시 [r]이 삽입되어 [rtl, rtn]이 되었다고 하는데 요즘도 그냥 [tl, tn]으로 발음하는 일이 흔하다. 그래도 표기안에서는 ‘르’를 밝혀서 ‘카르들’, ‘비외르든’과 같이 적도록 했다.
표기안에서 고치고 싶은 부분 또 하나는 모음 뒤 어말 g를 ‘흐’로 적게 한 것이다. ‘층’을 뜻하는 lag [ˈlaːɣ], ‘와/과’를 뜻하는 접속사 og [ɔːɣ]를 각각 ‘라흐’, ‘오흐’로 적게 했다. 실제 발음을 들어보면 ‘흐’와 비슷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말에서 나타나는 무성음화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이슬란드어에는 유성 폐쇄음이 없지만(b, d, g는 애초에 무성음 [p, t, k/c]로 발음된다) 특이하게도 공명음 /l, r/가 어말에서 [l̥, r̥]로 무성음화한다. 레이캬비크 발음에서는 어말의 /l/이 아예 [ɬ] 비슷한 마찰음이 될 정도이다. 어말의 유성 마찰음 ð [ð], g [ɣ]도 표면적으로는 무성음화하여 각각 [θ], [x]로 발음된다. 그러니 이를 반영하여 guð는 [ˈkvʏːθ]로, flug, lag, og는 [ˈflʏːx], [ˈlaːx], [ɔːx]로 발음을 표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어의 발음 표기를 보면 어말의 /l, r, ð, ɣ/를 무성음화되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 것처럼 나타내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표기 방식을 따라서 어말의 /l, r/는 [l̥, r̥]로 썼지만 /ð, ɣ/는 여전히 [ð, ɣ]로 썼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독일어, 폴란드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등의 어말 무성음화를 반영하는 것은 이들 언어에서 무성음화로 인한 음소의 중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령 독일어에서는 ‘바퀴’를 뜻하는 Rad가 어말 무성음화로 인해 ‘의회’를 뜻하는 Rat와 동일하게 [ˈʁaːt] ‘라트’로 발음된다. 어말에서는 /d/와 /t/의 구별이 사라져 [t]로 발음되니 한글 표기에서도 이를 반영한다.

그런데 아이슬란드어에서 [ð]와 [θ]는 원래 같은 음소의 변이음이다. 형태소 첫머리에서는 무성음 [θ]로 발음되기 때문에 þ로 적고 그 외의 위치에서는 [ð]로 발음되기 때문에 ð로 적어서 두 자모 및 변이음은 상보적 분포를 보였다. 대신 그리스의 ‘아테네’ 또는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를 뜻하는 Aþena [ˈaːθɛna] ‘아세나’에서처럼 차용어에서는 þ가 형태소 첫머리 외의 위치에도 올 수 있다. 원래 어말의 /ð/는 어두의 þ와 발음이 구별되었기 때문에 ð로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발음에서 무성음화 때문에 어말의 /ð/가 [θ]로 발음되더라도 표면적인 변이음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음소와의 구별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러니 철자에 따라 ‘드’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표기안에서도 ð는 언제나 ‘ㄷ’, ‘드’로 적게 했다.

마찬가지로 [ɣ]와 [x]도 같은 음소의 변이음이며 둘 다 자모 g에 대응된다. 어말 ng [ŋk]를 제외하면 어말 g는 폐쇄음으로 발음되는 일이 없으니 ‘그’로 적는다고 해서 혼동이 될 음도 없다(마찬가지로 아이슬란드어에서 어말 d는 주로 nd, ld, md 등 자음군에서만 나타나고 보통은 ð로 대체된다). /x/ 음소는 따로 없으며 k가 일부 환경에서 변이음 [x]로 실현되기는 하지만 어말에서는 언제나 폐쇄음으로 발음되니 g가 어말에서 [x]로 실현된다고 해도 이를 굳이 흉내낼 필요가 없다. 그러니 어말 /ð, ɣ/는 같은 한글 표기 방식을 쓰는 것이 적절한데 무성음화를 흉내내려 하는 것보다는 그냥 기본 음대로 ‘드, 그’로 적는 것이 낫다고 본다. lag, og는 그냥 ‘라그’, ‘오그’로 적는 것이 좋겠다.

아이슬란드어의 어말 무성음화를 흉내내려 한다면 ll /tl/이 어말에서는 [tl̥](레이캬비크식 발음에서는 아예 [tɬ])이 되는 것도 반영해야 할 테니 표기가 꽤 복잡해질 것이다. 2010년에 분화하여 화산재를 퍼뜨리면서 유럽의 항공 운항을 중단시킨 화산 이름인 Eyjafjallajökull [ˈeiːjaˌfjatlaˌjœːkʏtl̥]은 표기안에서 ‘에이야피아들라예퀴들’로 적게 했는데 어말 무성음화를 반영하면 ‘에이야피아들라예퀴틀’로 흉내낼 수 있다. 이처럼 ll의 폐쇄음화를 반영하는 것도 모자라 위치에 따라 표기를 다르게 한다면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질 것이다. 참고로 제106차 외래어 심의회(2012. 11. 28.)에서는 ‘Eyjafjallajökull산’의 표기를 ‘에이야퍄들라이외퀴들산’으로 심의했다.

마찬가지로 어말의 rl, rn의 무성음화도 반영하면 Karl [ˈkʰa(r)tl̥], Björn [ˈpjœ(r)tn̥]은 ‘카르들’, ‘비외르든’ 대신에 ‘카르틀’, ‘비외르튼’으로 적는 반면 ‘남자들’을 뜻하는 karlar [ˈkʰa(r)tlar̥]는 그냥 ‘카르들라’, 남자 이름 Bjarni [ˈpja(r)tnɪ]는 그냥 ‘비아르드니’로 적어야 하니 번거로워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이슬란드어의 철자와 발음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아이슬란드어 발음을 최대한 충실히 반영하도록 한글 표기를 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표기안을 마련했는데 과연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놓으면 쓰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특히 ll, nn, rl, rn에서 일어나는 폐쇄음화를 꼭 한글 표기에 반영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흉내내보았자 원어 발음과는 거리가 있으니 그리 비슷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앞으로도 더 많은 고민을 할 것 같지만 당분간은 당초의 의도대로 폐쇄음화를 비롯한 아이슬란드어의 발음을 충실히 반영하면서 체계적으로 한글로 표기할 수 있도록 표기안을 손질해볼까 한다. 앞으로 또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다소 복잡한 표기법을 더 쓰기 쉽도록 간소화하는 것이 이미 간소화된 표기법을 원어 발음에 맞게 다시 고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공유하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