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이 우리와 같은 말을 썼다는 주장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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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어를 전공한 배재대학교 교수 손성태는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책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우리 민족이며 멕시코의 아스테카 제국을 건설한 주체도 한민족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책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쓴 글 〈멕이코에 나타난 우리민족의 언어: 나와들어의 생활용어를 중심으로〉와 관련 신문 기사, 블로그 글 등에 실린 아스테카 제국의 언어인 고전 나와틀어 속에서 우리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물론 그의 주장은 다양한 각도에서 반박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언어에 관련된 주장에 초점을 맞춘다.

고전 나와틀어는 고유 문자로도 기록되었으며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에 의해 문법과 사전도 기록되었고 오늘날에도 백만 명 이상이 고전 나와틀어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언어를 모어로 쓰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언어 가운데 매우 잘 알려진 축에 속하나 일반인들은 이에 대한 정보를 찾아서언어에 관련된 손성태의 주장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힘들 것이다.

참고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에스파냐어 Náhuatl은 ‘나우아틀’로 써야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나우아틀어’로 쓰지만 본 글에서는 모두 나와틀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면서 언어명도 ‘나와틀어’로 적는다.

‘멕이코’는 ‘멕이족의 곳’?

손성태는 ‘멕시코’를 ‘멕이코’로 쓴 이유를 “멕시코인들은 모두 그들이 ‘멕이족’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항상 ‘멕이코’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말 그럴까? 에스파냐어로 멕시코는 México [ˈme.xi.ko] ‘메히코’라고 한다. 여기서 ‘히’의 자음은 [h]가 아닌 연구개 마찰음 [x]이므로 얼핏 ‘멕이코’랑 비슷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대신 방언에 따라 [χ], [h]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México의 어원은 고전 나와틀어의 Mēxihco [meː.ˈʃiʔ.ko] ‘메시코’이다. 즉 철자 x는 원래 [x]가 아니라 영어의 sh처럼 [ʃ]를 나타내는 음이였다.

중세 에스파냐어에서 철자 x는 [ʃ]를 나타냈다. 오늘날에도 이웃한 포르투갈어와 카탈루냐어, 바스크어에서는 x가 [ʃ]를 나타내는 음으로 쓰인다. 그런데 에스파냐어에서는 대략 16세기 중기부터 [ʃ]가 [x] 또는 [ç]로 발음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하층민의 발음으로 간주되었으나 17세기 초부터 대부분의 문법서적에서 이 발음을 언급하며 17세기 중엽에는 궁정에서도 [x] 발음을 썼다.

오늘날에는 원래 철자 x로 쓰고 [ʃ]로 발음되었으나 [x]로 발음이 바뀐 음을 철자 j로 적거나 전설 모음 i, e 앞에서는 철자 g로 적는다. 대신 철자 x는 고전 라틴어식 어휘에서 [ks]를 나타내는 경우에 보통 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도 에스파냐어의 x는 ‘ㄱㅅ’으로 적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México라는 철자에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멕시코’가 맞을 듯 싶다. 하지만 México는 아메리카의 지명이라서 에스파냐어의 철자 개혁이 적용되지 않아 발음이 예외적인 경우로 발음에 따라 적으면 ‘메히코’가 맞다. 간혹 에스파냐나 아르헨티나 등에서 Méjico라는 철자를 쓰기도 하나 에스파냐 왕립 학술원(Real Academia Española)에서 발음과 맞지 않지만 México를 표준 표기로 규정했다. 다만 영어 등 다른 언어에서는 x는 [ks]로 읽는 습관 때문에 영어의 Mexico [ˈmɛks.ɨ.koʊ̯] ‘멕시코’, 프랑스어 Mexico [mɛk.si.ko] ‘멕시코’ (멕시코시티), Mexique [mɛk.sikə] ‘멕시크’ (국명 멕시코) 등으로 알려진 것이다.

16세기 초반에 태어난 에스파냐의 문호 세르반테스는 철자 x를 [ʃ]로 발음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돈 키호테》는 중세 에스파냐어로 Don Quixote라고 적었으며 프랑스어로는 Don Quichotte [dɔ̃.ki.ʃɔtə] ‘동 키쇼트’, 이탈리아어로는 Don Chisciotte [dɔŋ.kiʃ.ˈʃɔt.te] ‘돈 키쇼테’로 번역되어 원래의 [ʃ] 발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철자 개혁 이후 현대 에스파냐어에서는 Don Quijote [dɔŋ.ki.ˈxo.te] ‘돈 키호테’라고 적는다. 참고로 표면 발음에 따르면 ‘동키호테’가 맞겠지만 두 단어 사이에 일어나는 자음동화는 인정하지 않아 ‘돈 키호테’로 적는 것이 표준이다.

에스파냐의 아스테카 정복은 1521년에 완성되었고 에스파냐인 프란시스코회 신부 안드레스 데 올모스(Andrés de Olmos)가 1547년 고전 나와틀어 문법서를 펴냈으며 역시 프란시스코회 신부인 알론소 데 몰리나(Alonso de Molina)는 1571년 고전 나와틀어 사전을 펴냈다. 그러니 고전 나와틀어가 최초로 로마자로 기록된 시기에는 에스파냐어에서도 x가 [ʃ] 발음을 나타내었다.

고전 나와틀어 Mēxihco [meː.ˈʃiʔ.ko] ‘메시코’는 원래 멕시코 중부 고원 지대에 위치한 넓은 계곡인 ‘멕시코 계곡(Valle de México)’을 가리킨 지명이다. 아스테카인 가운데 오늘날의 멕시코시티인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의 주민은 ‘메시카인(Mexica)’라고 불렀다. 고전 나와틀어로는 Mēxihcah [meː.ˈʃiʔ.kaʔ] ‘메시카’이다. Mēxihco는 Mēxihcah에 위치를 나타내는 어미 -co를 쓴 것으로 ‘메시카의 곳’이란 뜻이다. ‘메시카’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쯤되면 Mexico가 ‘멕이족의 곳’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던 발음상의 유사성이 상당히 약하다. 손성태는 에스파냐어 전공 교수이지만 중세 에스파냐어에서 철자 x의 발음과 México가 예외적으로 발음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듯하다.

참고로 손성태가 말하는 ‘멕이족’은 후한서에 나오는 명칭인 ‘맥이(貊夷)’라는 설명이다. 중국의 관점에서 부여, 고구려, 삼한 등을 동이(東夷)로 묶어서 쓴 책에서 맥족을 오랑캐로 지칭한 표현인데 이들이 스스로도 ‘맥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아스텍족’은 ‘아스땅’, 곧 ‘아사달’에서 출발한 사람들?

흔히 영어식 철자 Aztec [ˈæz.tɛk] ‘애즈텍’에 이끌려 ‘아즈텍’ 또는 ‘아스텍’이라고 적지만 에스파냐어로는 Azteca [as.ˈte.ka] ‘아스테카’, 고전 나와틀어로는 Aztēcah [as.ˈte.kaʔ] ‘아스테카’라고 하니 이 글에서는 ‘아스테카’로 통일한다. 이 이름은 고전 나와틀어로 Aztlān [ˈas.t͡ɬaːn] ‘아스틀란’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아스틀란’은 아스테카 인의 전설적 고향이다. 그런데 손성태는 Aztlān이 ‘아스땅’, 곧 ‘아사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고조선의 수도로 전해지는 ‘아사달(阿斯達)’을 중국말로 읽으면 ‘아스다’이며 ‘다’는 ‘땅’을 뜻하는 말이라는 주장이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일본어에서 あさ ‘아사’가 ‘아침’을 뜻하는 것에서 착안하여 ‘아사’가 ‘아침’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아사달’을 ‘아침의 땅’을 뜻하는 고유어로 해석하였다. ‘달’은 ‘양달’, ‘응달’에서처럼 ‘땅’을 뜻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이 부분은 손성태의 주장과 일치한다. ‘땅’은 예전에 ‘따’라고 했으니 ‘달’, 더 전에는 ‘닫’과 같은 형태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북송의 운서 《광운(廣韻)》을 토대로 재구성한 ‘아사달(阿斯達)’의 중고시기 중국어 발음은 *ʔa.sje.dat이다.

그런데 이게 Aztlān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가 문제이다. Aztlān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적어도 에스파냐인들에 의한 정복 후에는 아스테카 인들도 이를 잘 모르는 듯했다. 일단 앤드루스(J. Richard Andrews)의 Introduction to Classical Nahuatl에 의하면 -tlā-n은 ‘~ 근처의 곳(place in the vicinity of)’이라는 뜻의 복합 어근이다. 나와틀어 지명은 특이하게 부사형이므로 ‘~ 근처의 곳에서(at the place in the vicinity of ~)’이란 뜻일 텐데 첫 부분의 해석이 쉽지 않다. Āztatlān은 ‘백로 근처의 곳(At the Place in the Vicinity of Snowy Egrets)’라는 뜻인데 이와 혼동하기도 하지만 Āztatlān과 Āztlān은 별개의 지명이다(앤드루스는 첫 모음을 장모음으로 보아 Āztlān이라고 쓴다). 오히려 Āztlān은 ‘도구 근처의 곳에서(At the Place in the Vicinity of Tools)’라는 뜻으로 추정한다. 그러면서 이 지명이 ‘하양의 나라(The Country of Whiteness)’란 뜻이라는 주장은 비슷한 표현을 잘못 이해한 근거 없는 추측으로 일축한다.

하지만 손성태는 이 Az-/Āz-가 ‘하양’과 관련이 있다는 식민 시대 초기 문헌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아사달’과 ‘아스땅’을 ‘하얀 땅’, ‘하얀 흙’으로 해석한다. ‘아사/아스’가 한국어에서 어떻게 ‘하양’과 연관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지 못했다.

고전 나와틀어 지명에 쓰이는 복합 어근 -tlā-n과 ‘달/땅’과의 관계나 Az-/Āz-와 ‘아사/아스’와의 관계는 표면적인 유사성 외에는 입증하기가 힘들다.

나와틀어 = 나와다들이 말한다?

손성태는 에스파냐인들이 원주민들에게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너희들은 무슨 말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였고 ‘아스땅(Aztlan)에서 왔다, 나와다들이(Nahuatlatli) 말한다’라고 대답하였다고 주장한다.

새로 발견한 지역의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상대방이 한 말이 땅 이름이나 종족 이름이라고 잘못 이해했다는 이야기는 꽤 흔하지만 언어의 이름을 물어봤다는 것은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단지 한국어의 ‘나와 다들이’와 발음이 비슷한데서 착안해 지은 이야기 같다.

나와틀어는 nāhuatlahtōlli [naː.wa.t͡ɬaʔ.ˈtoːl.li] ‘나와틀라톨리’라고 하는데 ‘소리가 분명한 말’이란 뜻으로 보통 해석한다. nāhua- ‘나와’는 ‘소리가 분명한’이란 뜻의 어근이며 nāhuatl ‘나와틀’은 여기에 접사 -tl이 더해 ‘소리가 분명한 것, 또는 사람’이란 뜻이 된 것이다. 여기에 ‘말’이란 뜻의 tlahtōlli ‘틀라톨리’가 결합할 때는 어근 nāhua- ‘나와’를 써서 nāhuatlahtōlli ‘나와틀라톨리’라고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다른 형태소가 결합할 때는 접사 -tl이 생략되는 예를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손성태는 학자에 따라 lengua nahua (나와어)라고 하기도 하고 lenhua nahuatl (나와틀어)이라고 하기도 한다면서 마치 nāhua+tlahtōlli 로 분석하는지, nāhuatl+ahtōlli 로 분석하는지에 대한 이견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것은 고전 나와틀어의 기본적인 형태소 결합 원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학자는 ‘분명한 말’이라는 뜻이라고까지 주장했다며 ‘나와 다들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썼다.

tlahtōlli ‘틀라톨리’가 ‘다들이’라면 이게 고전 나와틀어에서 ‘말(word)’이란 뜻으로 쓰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Tlacopan은 ‘땅 + 곳 + 판’?

위에서 -tlān ‘틀란’과 ‘땅’, tlahtōlli ‘틀라톨리’와 ‘다들이’는 발음 차이가 커 보이지만 손성태는 고전 나와틀어에서 원래 ta였던 것이 무조건 tla로 바뀌었다는 주장을 한다. 정복 전쟁 이후의 언어 혼란으로 자음 t 다음에 무조건 l이 들어가서 모든 ta가 tla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Tlacopan ‘틀라코판’이라는 옛 지명이 현대 에스파냐어에서 Tacuba ‘타쿠바’로 변한 것을 예로 들면서 언어 혼란기를 겪은 후에 t에서 tl로 변했던 것이 그 지역 사람들이 계속 t로 발음했기 때문에 다시 t로 복원되었다는 설명했다.

Tacuba ‘타쿠바’에 대한 설명 자체는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고전 나와틀어의 tla가 원래 *ta였다는 것은 정설이 맞다. 그렇다고 손성태의 설명이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고전 나와틀어에서 쓰는 tl은 단순한 t와 l의 자음군이 아니라 무성 치경 설측 파찰음 [t͡ɬ]이란 것이다(링크에서 발음을 들을 수 있다). 무성 치경음 [t]와 무성 설측 마찰음 [ɬ]이 합쳐서 발음되는 음으로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체로키어(Cherokee) 등 아메리카 언어 가운데에서는 심심찮게 발견된다.

고전 나와틀어를 보면 대체로 a 앞에는 tl이 쓰이고 다른 모음 앞에는 t가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내부적인 증거와 같은 조어에서 갈라진 이웃 언어와의 비교를 통해 고전 나와틀어의 조어인 유트·아스테카 조어(Proto-Uto-Aztecan)의 *t는 고전 나와틀어에서는 *a 앞에서 이 무성 치경 설측 파찰음, 즉 tl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언어학자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의 이름을 따서 워프의 법칙(Whorf’s law)이라고 한다. 다만 1521년 에스파냐에 의한 정복 이후에 일어난 변화라는 손성태의 설명과 달리 아스테카 조어(proto-Aztecan) 시기에 일어난 변화로 아스테카 제국 시대의 고전 나와틀어에서는 이미 tl 음소가 정착되어 있었다.

참고로 고전 나와틀어에서 분화된 오늘날의 나와 제어는 중부와 북부에서는 tl이 유지되었으나 동부에서는 tl이 t로 변했고 서부에서는 tl이 l로 변했다. 타쿠바(Tacuba)에서 쓰이는 언어는 동부 제어 가운데 하나인 피필어(Pipil)로 tl이 t로 변해서 고전 나와틀어의 Tlacopan ‘틀라코판’은 피필어로 Takupan ‘타쿠판’이 되었다. 에스파냐어에서 쓰는 ‘타쿠바’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Tlacopan ‘틀라코판’에 대한 손성태의 설명을 보자. 그는 이 지명이 ‘Ta (따) + co (고) + pan (판)’으로 구성되었으며 Ta (따)는 ‘땅’의 고어, co (고)는 ‘곳’에서 받침소리 ‘ㅅ’이 탈락한 것, pan (판)은 ‘벌판, 들판, 모래판’의 ‘판’이라고 주장한다. 즉 장소를 나타내는 낱말 세 개를 겹친 지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 나와틀어 Tlacōpan ‘틀라코판’의 어원을 찾아보면 ‘막대기’ 또는 ‘창(무기)’을 뜻하는 tlacōtl ‘틀라코틀’에 위치 접미사 -pan ‘판’을 붙인 이름으로 나온다. 장소를 나타내는 말 세 개를 겹친 것보다는 더 설득력이 있다.

산을 뜻하는 지명 형태소 tepec는 ‘태백’에서 왔다?

손성태는 산과 관련된 고전 나와틀어 지명에 등장하는 tepec ‘테페크’는 뜻을 기준으로 우리말 발음에 맞게 ‘복원’하면 우리말에 존재하는 산의 명칭에 ‘합치’하도록 ‘태백’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말에는 ‘태백산’이라는 명칭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 나와틀어의 tepēc ‘테페크’는 ‘산, 언덕’을 뜻하는 tepētl ‘테페틀’에 위치 접미사 -c가 더해진 형태이다. 즉 -c가 없는 어근 tepē- ‘테페’를 원형으로 삼아야 한다. 또 ‘태백(太白/太伯)’ 자체가 고유어 이름을 한자로 뜻을 풀어 쓴 것일 가능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원래의 한자음은 ‘타이박’과 비슷했을 것이다. 참고로 중고시기 중국어 발음은 *thajH.bæk였으며(H는 성조 가운데 거성을 표시) 중세 국어에서도 ‘ㅐ’는 ‘아이’ 비슷한 이중모음으로 발음되었다.

차라리 고전 나와틀어의 tepē- ‘테페’는 ‘언덕’을 뜻하는 터키어 tepe ‘테페’에 관련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일 것이다. 물론 우연의 일치 뿐이다.

고전 나와틀어는 에스파냐어식 표기 때문에 원래의 발음 구별이 사라진 것이다?

앞에서 tepec ‘테페크’는 ‘태백’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보인 것처럼 손성태는 고전 나와틀어에 원래 우리말처럼 평음, 경음, 격음의 구별이 있었는데 에스파냐어식 표기 때문에 이들을 구별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말의 ‘달, 딸, 탈’을 에스파냐어로 표기하면 모두 tal이 되어 구별을 못하는 것처럼 고전 나와틀어에서 쓰인 음의 구별도 에스파냐어식 표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며 이 때문에 고전 나와틀어의 표기와 대응되는 여러 우리말식 발음 가운데 우리말에 ‘합치’하는 것을 찾아 원 발음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말로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 외에는 고전 나와틀어가 우리말과 같은 평음, 경음, 격음의 구별이 있었다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실제 이런 음의 구별이 있었다면 비록 에스파냐인 선교사들이 문법서와 사전을 기록했다고 해도 완전히 무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고전 나와틀어에서 갈라져 나온 피필어 같은 현대의 언어, 또 유트·아스테카 어군에 속하는 쇼쇼니어(Shoshoni), 코만치어(Comanche) 등의 다른 언어에 흔적이라도 남아있을 텐데 이들은 모두 평음, 경음, 격음의 구별이 없이 각 조음 위치마다 무성 파열음 하나씩 밖에 없다. 즉 [p, t, k]만 있고 [b, d, ɡ]는 이들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의 구별이 사라진 것을 에스파냐어의 영향으로 돌리더라도 에스파냐어에는 무성 파열음 [p, t, k]와 유성 파열음 [b, d, ɡ]가 모두 존재하는데 왜 이들 언어에는 무성 파열음만 남았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에스파냐에 의한 정복 이전에 쓰인 아스테카 문자에서도 여러 계열의 자음이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단 아스테카 문자는 주로 표의 문자로 쓰였고 지명 등 일부 용도로만 표음 문자처럼 쓰였기 때문에 원 발음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는 못한다.

또 고전 나와틀어에 우리말의 ‘ㅡ’, ‘ㅓ’와 같은 모음이 있었는데 에스파냐어에서 이들을 제대로 표기할 길이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든 예들이 재미있다.

지명 가운데 Tlatelolco (다델올고)는 ‘다들 올 곳’이며 Tlatilco (다딜고)는 ‘다들 곳’이라고 주장한다. 복수형 접사 ‘들’을 tel 또는 til로 적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 설명을 보면 Tlatelōlco ‘틀라텔롤코’는 ‘작은 언덕’을 뜻하는 tlatilli ‘틀라틸리’, Tlātilco ‘틀라틸코’는 숨기다를 뜻하는 tlātia ‘틀라티아’와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 고전 나와틀어에서 복수형 접미사는 격과 단어 종류에 따라 -h, -tin, -meh, -huān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말의 ‘들’과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또 conetl은 형태소 구조가 ‘큰 애들’이라고 주장했다. ‘애’는 중세 국어에서 ‘아히’라고 했다는 것을 둘째치더라도 conētl ‘코네틀’의 -tl은 이미 여러 번 보아온, 고전 나와틀어에서 대표적인 단수형 접미사이다. 이미 언급한 tepētl ‘테페틀’, tlacōtl ‘틀라코틀’을 비롯하여 ‘토마토’의 어원인 tomatl ‘토마틀’, ‘아보카도’의 어원인 ahuácatl ‘아와카틀’, ‘초콜릿’의 어원인 chocolātl ‘초콜라틀’, ‘코요테’의 어원인 coyotl ‘코요틀’ 등 잘 알려진 나와틀어 명사는 대부분 -tl로 끝나는 형태인데 모두 단수형이다. 참고로 집단 이름인 Mēxihcah ‘메시카’, Aztēcah ‘아스테카’는 복수형을 쓰는 것이며 단수형은 각각 Mēxihcatl ‘메시카틀’, Aztēcatl ‘아스테카틀’이다. 그러니 conetl의 -tl을 복수형 접사 ‘들’로 보는 것을 고전 나와틀어 문법의 기본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전쟁 도구 명칭 가운데 macahuitl (마까기틀)을 ‘막 까기 틀’로 분석한 것도 단수형 접미사 -tl을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사실 maccuahuitl ‘마콰위틀’ (또는 mācuahuitl ‘마콰위틀’)은 ‘손’을 뜻하는 māitl의 합성어 형태 mac-에 ‘나무, 장대’를 뜻하는 cuahuitl ‘콰위틀’이 결합한 것이다.

어순 등의 문법이 우리말과 같다?

손성태 본인의 주장인지 모르겠지만 고전 나와틀어에 대한 블로그 글을 보면 우리말과 어순이 똑같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전 나와틀어는 어순에서 비교적 자유롭기는 하지만 보통 서술어가 먼저 오는 형태로 대부분 VSO 언어로 분류한다. 학자에 따라 VOS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SOV 언어인 우리말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국어처럼 어근에 접사가 붙는 교착어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워낙 많은 형태소가 결합할 수 있어 포합어(polysynthetic language)로 분류된다. 한국어에서는 한 문장으로 나타낼 것을 고전 나와틀어에서는 동사절에 주어, 목적어 등의 의미를 포함하는 접사를 여러 개 덧붙여 한 단어로 나타낼 수 있다.

결론

고전 나와틀어에서 우리말을 찾을 수 있다는 손성태의 주장은 파열음과 파찰음이 무성음 계열 하나밖에 없고 모음 체계도 비교적 단순한 언어에서 그에 대응하는 한국어를 짜맞추기 쉽다는 점에 힘입어 기본적인 문법 규칙조차 무시하면서 연상되는 소리가 비슷한 말로 해석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t는 ‘ㄷ’, ‘ㅌ’, ‘ㄸ’이 될 수 있고, e는 ‘애’, ‘에’, ‘어’, ‘으’가 될 수 있으며 우리말의 받침은 보통 생략된다고 친다면 te는 ‘테’, ‘때’, ‘더’, 덤’, ‘댁’, ‘터’ 등 우리말로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이 수없이도 많다. 그런 식으로 짜맞춘다면 여기저기서 우리말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고전 나와틀어는 이미 설명한대로 아메리카의 언어 가운데 예로부터 연구가 많이 되어있지만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에스파냐어 수준만큼이라도 알려져 있었다면 이 정도로 무너뜨리기 쉬운 주장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한국어의 역사에 대한 지식도 이런 얄팍한 주장을 간파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사랑하다’를 뜻하는 tlazohtla [t͡ɬa.ˈsoʔ.t͡ɬa] ‘틀라소틀라’를 ‘다 좋다’로 해석하는 것은 그렇 듯하게 들릴 수 있지만 ‘좋다’가 중세 국어에서 ‘둏다’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혀 비슷하지 않다. 고전 나와틀어 철자에서 z가 [s]를 나타낸다는 점도 있다(고전 나와틀어 철자에는 s가 쓰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 글을 통해 ‘토마토’와 ‘초콜릿’을 우리에게 선사한 언어인 고전 나와틀어가 제대로 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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