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가 ‘조지아’로 바뀐다

본 글은 원래 이글루스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글루스가 종료되었기에 열람이 가능하도록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기한이 지난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사항에 따라 글을 쓴 후 의견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오타 수정이나 발음 기호를 균일하게 고치는 것 외에는 원문 그대로 두었고 훗날 내용을 추가한 경우에는 이를 밝혔습니다. 외부 링크는 가능한 경우 업데이트했지만 오래되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은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날짜는 이글루스 게재 당시의 날짜로 표시합니다.

‘벨로루시’가 ‘벨라루스’로 바뀐지 얼마 안되어 비슷한 소식을 또 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지금까지 ‘그루지야’라고 부르던 나라의 한글 표기를 ‘조지아’로 변경한다고 한다.

조지아 국기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기타 공개 자료’에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 실무소위원회 7월 첫째 주 심의 확정안’이란 제목으로 올라온 글에 첨부된 문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조지아 Georgia
캅카스 산맥 남쪽, 흑해 동쪽에 있는 공화국.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었으나 1991년 4월 독립. 구칭 ‘그루지야(Gruziya)’는 러시아 어명 Грузия의 표기임. 2008년 8월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기로 선언한 당국으로부터 국가의 대외적 명칭을 영어식 표기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함. 수도 트빌리시(Tbilisi). 면적 7만 7000㎢. 인구는 463만 명(2008년 추정).

일국의 국명 표기를 변경하는 것이라면 꽤 중요한 결정 같은데 이 첨부문서가 붙은 게시판 글에조차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이미 연합뉴스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최근 뉴스에서 ‘조지아(러시아어로는 그루지야)’라는 표기를 쓰고 있으니 정말로 앞으로 ‘조지아’가 공식 표기가 되는가보다. 아직 어색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 글에서도 ‘조지아’로 통일하기로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 실린 글(http://en.wikipedia.org/wiki/Name_of_Georgia)을 토대로 조지아의 국명을 논하고자 한다.

표기가 변경된 배경

위의 설명대로 구칭 ‘그루지야’는 러시아어명 Грузия (Gruziya)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조지아가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었을 때부터 ‘그루지야’라고 불렀고 소련이 해체된 후인 1992년 1월 28일 외래어심의위 제3차 회의 때 ‘그루지야공화국’이란 표기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조지아의 공용어는 러시아어가 아니라 조지아어이다. 조지아어는 남캅카스어족(영어: South Caucasian languages)에 속하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러시아어와는 계통 자체가 다르다. 조지아어는 독자적인 조지아 문자로 표기한다. 조지아 인구의 71%가 조지아어를 쓰며 9%만이 러시아어를 쓴다.

조지아 문자로 쓴 조지아의 국명 ‘사카르트벨로(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

조지아는 2003년 이른바 장미혁명 이후 2004년 미헤일 사카슈빌리(მიხეილ სააკაშვილი Mikheil Saakashvili)의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면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심해져 2008년 8월에는 러시아와 전쟁까지 치르고 러시아와 단교하였다. 이 때문에 자국이 대외적으로 러시아어식 이름으로 알려지는 것에 민감한 듯하다.

2005년 8월에 이미 조지아의 주이스라엘 대사 라샤 주바니아(ლაშა ჟვანია Lasha Zhvania)는 당시 히브리어에서 쓰던 러시아어식 이름 ‘그루지야(גרוזיה)’ 대신 예전에 쓰던 이름인 ‘게오르기아(גאורגיה)’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현 이스라엘 영토에는 약 4세기부터 조지아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이들에 대해 ‘게오르기아’, ‘구르지아(גורג’יה )’ 등의 이름이 사용되었으나 1970년대 옛 소련에서 이민이 많아지면서 ‘그루지야’라는 러시아어 이름이 대신 쓰이게 되었다. 현재 히브리어판 위키백과를 보니 나라 이름을 ‘조르지아(ג’ורג’יה)’로 쓰고 있다.

2024. 5. 27. 추가 내용: 현재 히브리어판 위키백과에서는 라틴어식 독음인 גאורגיה Georgya ‘게오르기아’를 표제어로 쓰고 있다.

2009년 3월 일본을 방문한 조지아의 외무장관 그리골 바샤제(გრიგოლ ვაშაძე Grigol Vashadze)는 일본의 외무장관 나카소네 히로후미에게 공식적으로 일본어에서 쓰는 조지아의 국명 표기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일본어에서도 러시아어 이름을 따라 ‘구루지아(グルジア)’라는 표기를 쓰는데 영어 이름을 따라 ‘조지아(ジョージア)’로 바꿔달라고 한 것이다. 일본측에서는 미국의 조지아 주와 표기가 같아지는 문제가 있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일본어 기사 보기·영어 기사 보기). 그런데 아직 일본에서 쓰는 공식 표기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일본어판 위키백과에서는 ‘구루지아’를 표제어로 쓰고 있다.

2024. 5. 27. 추가 내용: 현재 일본어판 위키백과에서는 ジョージア[Jōjia] ‘조지아’를 표제어로 쓰고 있다.

조지아는 또 2009년 12월 리투아니아에 공식적으로 ‘그루지야(Gruzija)’ 대신 ‘게오르기야(Georgija)’라는 이름을 써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어 위키백과에서는 ‘그루지야’를 아직 쓰는 것을 보니 여기도 역시 진전이 없는 것 같다.

2024. 5. 27. 추가 내용: 현재 리투아니아어판 위키백과에서는 Sakartvelas ‘사카르트벨라스’를 표제어로 쓰고 있다.

이렇게 러시아어식 이름을 쓰던 것은 바꿔달라는 것이 조지아의 일관된 입장이며 한국에도 비슷한 요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에 벨라루스 정부의 공문을 받고 표기를 ‘벨로루시’에서 ‘벨라루스’로 변경했던 것처럼 ‘그루지야’를 ‘조지아’로 바꾸는 것이다.

조지아의 어원

그런데 정작 조지아의 조지아어 이름은 조지아나 그루지야가 아니라 ‘사카르트벨로(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 [sɑkʰɑrtʰvɛlɔ]이다. 이 이름은 ‘조지아인’을 뜻하는 어근 ‘카르트벨리(ქართველი)’에서 나왔다. 조지아어가 속한 어족인 남캅카스어족의 다른 이름은 ‘카르트벨리어족(Kartvelian languages)’이다. 조지아어에서 어근 X를 두르는 분리접사 ‘사-X-오’는 ‘X가 사는 지역’을 뜻한다. ‘카르트벨리’는 조지아 중부 ‘카르틀리(ქართლი)’ 지방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이들을 ‘사카르트벨로’로 부르는 이는 거의 없다. 영어의 Georgia, 러시아어의 Грузия 외에도 독일어의 Georgien (게오르기엔), 프랑스어의 Géorgie (제오르지) 등 유럽 여러 언어에서는 사카르트벨로와는 전혀 다른 어원의 이름을 쓴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름은 라틴어 ‘게오르기아(Georgia)’에서 나온 것인데 십자군 원정 또는 성지 순례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찾은 유럽인들이 쓴 이름이다. 게오르기우스(라틴어: Georgius)라는 이름과 유사하다. 이 이름은 영어에서는 ‘조지(George)’, 독일어에서는 ‘게오르크(Georg)’, 프랑스어에서는 ‘조르주(George)’가 된다. 악한 용과 싸우는 모습으로 유럽 미술에 많이 등장하는 성 게오르기우스는 조지아의 수호성인이다.

성 게오르기우스가 황제의 딸을 구출하는 모습을 그린 15세기 조지아 작품(그림 출처)

프랑스의 13세기 신학자이자 사가 자크 드 비트리(Jacques de Vitry)와 17세기 독일인 여행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트로일로(Franz Ferdinand von Troilo)는 ‘게오르기아’는 바로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설명하였다. 그런가 하면 17세기 프랑스인 여행가 장 샤르댕(Jean Chardin)은 ‘게오르기아’의 어원을 그리스어 ‘게오르고스(γεωργός; ‘농부’)’, 라틴어 ‘게오르기쿠스(georgicus; ‘농사의’)’에서 찾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소 플리니우스(Plinius), 폼포니우스 멜라(Pomponius Mela) 등 로마 시대 작가들이 언급하는 ‘게오르기(Georgi)’ 부족들을 조지아와 연관시켰는데 사실 ‘게오르기’는 농경 부족들을 근처 유목민과 대비시켜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럴 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설이나 ‘농부’, ‘농사’를 뜻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나왔다는 설은 오늘날에는 민간 어원으로 친다.

‘게오르기아’나 러시아어 이름 ‘그루지야’나 어원은 사실 페르시아어의 ‘구르그(gurğ)’, ‘구르간(gurğān)’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이 시리아어(중세 아람어)의 ‘구르잔(gurz-ān)’, ‘구르지얀(gurz-iyān)’ 또는 아랍어의 ‘주르잔(ĵurĵan, ĵurzan)’을 거치고 라틴어의 -ia가 붙어 Jorgania, Giorginia 등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Georgia라는 형태로 굳어진 것은 아마 Georgius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하는 것이 개인적인 추측이다(여기서 표기는 라틴어 표기법을 따라 ‘게오르기아’, ‘게오르기우스’로 하지만 중세 로망스어 사용 지역에서는 이미 g가 e, i 앞에서 구개음화되어 ‘제오르지아’, ‘제오르지우스’ 비슷하게 발음되고 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어의 ‘구르그’, ‘구르간’은 중세 페르시아어의 ‘브르칸(vrkān)’, ‘와루찬(waručān)’에서 왔는데 이들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유사한 이름으로 ‘늑대의 땅’이란 뜻의 중세 페르시아어의 ‘바르카나(varkâna)’에서 유래한 카스피해 동쪽 지명인 ‘고르간(Gorgan)’이 있다. 또 이웃 아르메니아어에서 조지아를 부르는 이름인 ‘비르크(Վիրք Virk)’도 같은 어원일 수 있다.

영어 이름 조지아

영어 이름 Georgia [ˈdʒɔ(r)dʒə]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조자’가 되어야지만 철자상의 -ia에 이끌려 전통적으로 ‘조지아’라고 표기하고 있다. 꽤 흔한 여자 이름이기도 하면서 미국 동남부의 주 이름이기도 하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에서는 나라 이름과 미국 주 이름이 같다. 한국어에서도 나라 이름을 ‘조지아’로 바꾼다면 비슷한 혼동의 여지가 있다.

대신 ‘조지아’는 잘못 표기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루지‘는 언론, 방송에서조차도 ‘그루지‘로 잘못 표기하는 일이 하도 많아서 제대로 쓰는 것을 보기가 오히려 드물 정도였다. ‘구르지아’, ‘구르지야’라는 표기도 꽤 검색된다(외래어의 ‘ㅜ르’는 ‘ㅡ루’로, ‘ㅡ루’는 ‘ㅜ르’로 잘못 적는 일이 흔하다).

조지아에서 그들이 쓰는 이름인 ‘사카르트벨로’ 대신 영어 이름인 ‘조지아’를 써달라고 요청하다니, 영어가 국제 공통어가 맞기는 맞나보다. 하지만 라틴어식으로 ‘게오르기아’라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저나 정말 표기를 ‘조지아’로 바꾸는 것이라면 홍보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2024. 5. 27. 추가 내용: Armenia ‘아르메니아’, Lithuania ‘리투아니아’ 등을 영어 발음에 따라 ‘아미니아’, ‘리슈에이니아’로 적지 않듯이 나라 이름 Georgia도 영어식 ‘조지아’ 대신 라틴어식 ‘게오르기아’로 적는 것이 순리인데 별 생각 없이 ‘조지아’로 정한 것이 두고 아쉽다. 그보다 ‘게오르기아’로 적자는 의견을 들을 수 없던 것이 의아하다. 다들 Georgia는 그냥 영어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것일까? ‘조지아’라는 표기가 문제가 있다는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적어도 본 블로그에서는 나라 이름을 ‘게오르기아’로 쓸 생각이다.

공유하기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