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프 과르디올라’와 카탈루냐어의 모음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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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고유명사의 한글 표기에 있어서 카탈루냐어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아무래도 카탈루냐가 독립국이 아니라 스페인(에스파냐)의 지방에 지나지 않아 언어로서의 인지도가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카탈루냐어는 스페인어의 방언이 아니라 독자적인 역사를 지닌 로망 어군 언어이며 중세 문어로서는 스페인어보다 오히려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어(오크어)에 더 가까웠다.

카탈루냐어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 산맥의 안도라(Andorra)의 공용어이기도 하지만 워낙 소국이라서 나라 자체가 잘 알려져있지 않다. 더구나 확인해보니 수도인 Andorra la Vella는 카탈루냐어 이름으로 카탈루냐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면 ‘안도라라벨랴’가 되어야 하지만 마치 스페인어 이름인 것처럼 적은 ‘안도라라베야’가 표준 표기로 정해져 있다. 이 도시의 스페인어 이름은 Andorra la Vieja이니 차라리 스페인어를 따라 한글 표기를 정하려면 ‘안도라라비에하’로 적어야 한다.

카탈루냐어 이름을 스페인어 이름인 것처럼 표기한 예는 꽤 있다. 스페인에서도 카탈루냐어 사용 지역은 공업이 발달하고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등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접하는 스페인 고유명사 가운데 카탈루냐어 이름이 많지만, 국내에서는 스페인에서 스페인어 외의 언어가 사용된다는 인식조차 별로 없기 때문이다(스페인에서는 카탈루냐어 외에도 바스크어와 포르투갈어의 방언인 갈리시아어 등이 사용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태생으로 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인 Juan Antonio Samaranch은 한국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실제 스페인에서 쓰는 발음과 국제 방송에서 쓰는 발음과 차이가 있다. Samaranch은 스페인어 이름이 아니라 [səməˈɾaŋ(k)]으로 발음되는 카탈루냐어 이름이기 때문이다. 카탈루냐어 발음에 따라 적으면 ‘사마랑’이라고 적어야 한다.

2024. 05. 27. 추가 내용: 에스파냐 공영 방송 RTVE 보도에서 에스파냐어로 Samaranch을 카탈루냐어 발음을 흉내내어 [samaˈɾaŋ] ‘사마랑’으로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마드리드의 방송국인 RTVM 보도에서 볼 수 있듯이 에스파냐에서도 이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 철자식으로 [samaˈɾanʧ] ‘사마란치’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역시 바르셀로나 태생의 화가 Joan Miró의 표준 표기는 ‘호안 미로’로 정해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한 외국 미술사 학생이 한국인 교수가 Joan을 스페인어인 것처럼 발음한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미술계에서는 Joan을 카탈루냐어식으로 [ʑuˈan], 즉 ‘주안’ 비슷하게 발음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지난 7월 29일 열린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제85차 회의에서 스페인 축구 선수이자 현 FC 바르셀로나 감독인 Josep Guardiola의 표기를 ‘주제프 과르디올라’로 정한 것은 뜻밖이었다. 예전 같으면 스페인어 표기 원칙을 억지 적용하여 ‘호세프 과르디올라’로 했을 텐데, 카탈루냐어 발음인 [ʑuˈzɛp ɡwəɾˈð̞jɔɫə]를 따라 한글 표기를 정한 것이다.

FC 바르셀로나 감독 주제프 과르디올라. (사진 출처)

주제프 과르디올라의 예 하나만으로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제부터는 외래어 표기 심의위에서도 카탈루냐어 이름을 본 발음에 따라 적기로 한 것이 아니냐는 기대감과 함께 의문도 하나 생겼다. 바로 카탈루냐어의 모음 약화 현상을 앞으로 한글 표기에 얼마나 반영할까 하는 것이다.

‘주제프 과르디올라’라는 표기를 보면 Josep의 o는 ‘우’로, Guardiola의 o는 ‘오’로 표기했다. 이는 카탈루냐어에서 o가 강세가 있는 음절에서는 [o] 또는 [ɔ]로 발음되지만 강세가 없는 음절에서는 약화되어 [u]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탈루냐어에서는 강세가 없는 음절의 모음이 약화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실제 양상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는 맥스 휠러(Max Wheeler)의 The Phonology of Catalan에 나오는 설명을 따르겠다.

서부 카탈루냐어에서 강세가 있는 음절에 나타나는 모음은 일곱 개가 있다.

i      u
e      o
ɛ      ɔ
a

강세가 없는 음절에서는 /ɛ/가 [e]로, /ɔ/가 [o]로 약화된다. 즉 강세 모음 일곱 개가 무강세 모음 다섯 개로 단순화되고 그 과정에서 /e/와 /ɛ/, /o/와 /ɔ/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모음의 높이 구분이 없어지면서 강세 모음 일곱 개가 무강세 모음 다섯 개로 단순화되는 모음 약화는 이탈리아어와 포르투갈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요르카 카탈루냐어의 모음 약화 현상을 살펴보자. 마요르카 카탈루냐어가 속하는 발레아레스 제도 카탈루냐어에서는 강세가 있는 음절에 나타날 수 있는 모음이 여덟 개이다.

i      u
e      o
ə
ɛ      ɔ
a

위의 서부 카탈루냐어의 7모음 체계에 /ə/가 추가된 셈이다. 발레아레스 제도 카탈루냐어에서 sec [sək] 같은 단어의 강세 음절에 나타나는 /ə/는 육지의 동부 카탈루냐어에서는 /e/, 서부 카탈루냐어에서는 /ɛ/에 해당한다.

서부 카탈루냐어에서처럼 마요르카 카탈루냐어에서도 무강세 음절에서 /ɔ/가 [o]로 약화된다. 그런데 서부 카탈루냐어와는 다르게 /e/, /ɛ/, /a/는 모두 [ə]로 약화된다. 즉 무강세 모음은 /i, ə, o, u/ 네 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경우에 따라 무강세 음절에서도 [e]가 발음되기도 한다.

마요르카를 제외한 동부 카탈루냐어에서는 모음 약화 현상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마요르카 카탈루냐어식의 모음 약화에 더하여 /o/도 [u]로 약화되니 무강세 음절에 올 수 있는 모음은 /i, ə, u/ 세 개 뿐이다. 다만 일부 경우, 이를 테면 [əə]나 [əa] 같은 조합을 피하기 위해서 무강세 음절에서도 [e], [o]가 발음될 수도 있다.

카탈루냐 최대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쓰이는 카탈루냐어에서 바로 이런 모음 약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니 Josep는 /o/가 [u]로 약화된 [ʑuˈzɛp]로 발음되는 것이다. 같은 이름이 서부 카탈루냐어가 쓰이는 발렌시아나 마요르카에서는 [ʑoˈzɛp], 즉 ‘조제프’로 발음될 것이다.

한글 표기에서는 [e]와 [ɛ]는 모두 ‘에’로 적고 [o]와 [ɔ]는 모두 ‘오’로 적으면 되지만 [ə]나 [u]로 약화되는 경우는 강세 모음과 무강세 모음의 한글 표기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조금 문제가 까다로워진다.

[ə]로 약화되는 모음의 표기

Guardiola [ɡwəɾˈð̞jɔɫə]를 ‘과르디올라’로 적은 것에서 보면 [ə]로 약화되는 /a/는 ‘아’로 적고 있다. 사실 카탈루냐어의 [ə]는 [ɐ]로 적는 일도 있을만큼 영어의 [ə]보다는 낮은 위치에서 발음되는 모음이므로 ‘아’로 적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포르투갈어의 /a/는 무강세 모음에서 [ɐ]로 발음되는데, 포르투갈에서 쓰는 발음에서는 거의 [ə]에 가까운 발음이 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모두 ‘아’로 통일해서 적는 것도 참고할만하다.

카탈루냐어의 /a/를 언제나 ‘아’로 적는 것으로 통일하면 스페인어에 따른 표기와도 호환이 더 잘되는 장점도 있다. 또 일부 /a/가 약화되기도 하고 약화되지 않기도 하는 경우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마요르카 출신의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의 성 Nadal은 [nəˈðal]로 발음하는 것이 우리가 본 규칙에 맞는다. 하지만 중앙 카탈루냐어에서 예외적으로 [naˈðal]이란 발음도 흔히 쓴다. /a/는 약화되더라도 ‘아’로 적기로 하면 [nəˈðal]과 [naˈðal] 가운데 어느 발음을 택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스페인어 발음에 따른 표기인 ‘나달’과도 같아지는 장점이 있다.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사진 출처)

그런데 /e/, /ɛ/도 [ə]로 약화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복잡해진다. 스페인어의 Carlos, 프랑스어의 Charles에 해당하는 카탈루냐어 이름은 Carles이다. 이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카탈루냐 출신의 축구 선수 Carles Puyol이 있는데 2006년 월드컵 당시 국립국어원에서 발표한 표준 표기로는 그의 이름을 ‘카를로스 푸욜’로 적도록 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더 친숙한 스페인어 이름 Carlos를 대신 쓴 것이다. Carles의 카탈루냐어 발음은 동부에서 [ˈkarləs]인데 [ə]를 ‘아’로 적는다면 ‘카를라스’가 되니 조금 이상하다.

또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어 이름과 스페인어 이름은 모두 Barcelona이다. 이를 스페인어 표기법에 따라 적은 것이 ‘바르셀로나’이다. 현지의 카탈루냐어 발음은 [bəɾsəˈlonə]이다. [ə]를 ‘아’로 통일하여 ‘바르살로나’라고 적어야 할까?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카탈루냐어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어느 음절에 강세가 오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강세는 마지막 세 음절 가운데 하나에 올 수 있으며 복합어에서는 강세가 오는 음절이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는데, 철자만 봐서는 어느 음절에 강세가 오는지 알 길이 없다. Carles라는 철자만 보면 두 음절 가운데 어느 것에 강세가 오는지 알 수 없으니 a와 e 가운데 어느 모음이 약화되는지도 알 길이 없다.

서부 카탈루냐어 발음을 따른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Carles는 ‘카를레스’, Barcelona는 ‘바르셀로나’로 적으면 그만이다. 거기에다 스페인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와도 같아진다.

또 같은 언어에서 지역에 따라 구별되어 발음되기도 하고 구별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 있으면 변별력을 높이는 쪽을 따라 표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 구상한 카탈루냐어의 한글 표기안에서 나는 동부 카탈루냐어의 모음 약화를 무시하고 a, e, i, o, u는 언제나 각각 ‘아, 에, 이, 오, 우’로 표기하는 것을 제안한 바가 있다.

그러면 Josep도 ‘조제프’로 표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비슷한 예로 또 다른 카탈루냐어 이름인 Jordi에서 o에 강세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쉽게 알 수가 없으니 ‘조르디’로 적을지 ‘주르디’로 적을지 헷갈릴 수가 있다(정답은 ‘조르디’이다).

‘주제 사라마구’에서 ‘조제 사라마구’로…

1998년 포르투갈의 José Saramago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외래어 심의위에서는 한글 표기를 ‘주제 사라마구’로 정하였다(제24차 회의). 포르투갈어 발음이 [ʒuˈzɛ sɐɾɐˈmaɡu]이기 때문에 정해진 표기이다.

포르투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조제 사라마구. (사진 출처)

하지만 2005년 외래어 표기법에 포르투갈어의 표기 규정이 추가되면서 나온 용례집에서는 José Saramago의 표기를 ‘조제 사라마구’로 바꿨다. 포르투갈어 표기법에서 어말이나 -os의 o는 ‘우’로 적고 나머지는 ‘오’로 적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어에서 무강세 음절의 o는 [u]로 약화되지만, 어느 음절에 강세가 오는지 따지고 적으려면 표기 규정이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에 어말이나 -os의 o만 ‘우’로 적는 것으로 규정을 단순화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 발음과는 달라지지만 더 단순한 규칙에 맞도록 ‘주제’를 ‘조제’로 바꾼 것이다.

대신 João은 ‘주앙’이란 표기가 굳어졌다고 여겨 새 규정에 따른 ‘조앙’ 대신 ‘주앙’으로 계속 쓰기로 했다.

만약 우리가 접하는 카탈루냐어 이름이 한정되어 있다면 일일이 발음을 조사해서 어느 모음이 약화되는지 따져 한글 표기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탈루냐어를 잘 몰라도 철자만 보고 한글 표기를 정할 수 있는 규칙을 정한다고 하면 서부 카탈루냐어의 발음을 따라 a, e, i, o, u는 언제나 각각 ‘아, 에, 이, 오, 우’로 표기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필요에 따라 Josep는 ‘조제프’ 대신 ‘주제프’, Joan은 ‘조안’ 대신 ‘주안’으로 쓰는 일부 예외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탈루냐어 발음에 따른 한글 표기 자체가 별로 흔치 않으니 이런 예외를 두어야 할만큼 이런 표기가 굳어질 것 같지는 않다.

2024. 5. 27. 추가 내용: 지금 생각은 예외를 두지 않고 카탈루냐어의 a, e, i, o, u는 언제나 ‘아, 에, 이, 오, 우’로 표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Josep는 ‘조제프’로 적는 것이 좋겠다. 한편 Josep Guardiola는 사실 별명인 Pep [ˈpɛp]를 써서 보통 Pep Guardiola로 불린다. 한국 언론에서는 흔히 ‘펩 과르디올라’로 쓰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어말 무성 폐쇄음에 ‘으’를 붙이는 것이 원칙이므로 ‘페프 과르디올라’로 쓰는 것이 규범에 따른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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