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아찌아어 한글 채택에 대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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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소수민족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

위 글은 훈민정음학회의 노력으로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었다는 보도를 처음 접하자마자 썼다.

찌아찌아족이 문자가 없다는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썼다. 문자가 없는 종족에 한글을 전한다고 사기치지 말라는 심한 표현까지 사용했다. 쓰고 난 후 여러분들의 덧글을 읽고 추가 보도 내용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잘못 짚고 넘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해명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밝히려면 글을 새로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찌아찌아어를 한글로 적는 것에 대해 더 깊이 분석도 하고 싶었다.

내가 왜 이렇게 섣불리 글을 썼는지 변명부터 하겠다.

전에 라후족에게 한글을 전파하려는 노력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라후어가 과연 한국어와 유사한지가 주제였지만 서울대 이현복 명예교수가 “음성언어만 있고 문자언어가 없는 라후族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라고 주장한 것이 당혹스러웠다. 라후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로마 문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혹시 이현복 교수가 한글 전파 노력을 하는 타이 북부에서는 아직 로마 문자가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추측하며 애써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 했다. 아무래도 이현복의 학자로서의 권위 때문에 그가 알고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라후족 한글 수출 TV쇼’의 이면〉이라는 기사 제보를 받고 솔직히 배신감을 느꼈다. 라후족에게 한글을 전파하는 노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이미 로마 문자로 라후어를 표기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로마자 표기와 한글 표기를 1대1로 대응시켜 가르쳤다는 폭로 내용이었다.

그래서 찌아찌아어에 대한 보도에서 이들이 문자가 없다는 주장을 듣고 과연 그런지 자료를 검색해보았고, 찌아찌아어를 문자로 적은 사실이 있다는 내용이 나오자 이번에도 사기극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쓴 것이다.

문자가 없는 종족이라는 명제

결론부터 말하면 언론에서 문자가 없는 종족이라고 보도한 것은 문제삼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글에서 말한 것처럼 찌아찌아어를 문자로 적은 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찌아찌아족이 그들의 언어로 문자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그러니 이들이 사실상 문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어도 세종대왕 이전에는 아예 적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찰로 적은 향가와 같은 예도 있지 않나. 하지만 백성들이 완전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한국어를 적을 문자는 없었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 예전에 찌아찌아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적이 있다고 해도, 영어나 말레이인도네시아어로 쓴 찌아찌아어에 관한 연구에서 언어학자들이 찌아찌아어를 로마 문자로 적은 적이 있다고 해도 정작 오늘날의 찌아찌아족이 그들의 언어로 문자 생활을 못한다면 그들은 문자 없는 종족으로 부르는 것이 틀리다고 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글로브(Jakarta Globe) 지》에서 보도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옛 말레이권에서 쓰인 아랍 문자의 한 형태로 글자 다섯 개가 추가되고 모음을 나타내는 기호가 없는 군둘 문자로 쓰인 고대 찌아찌아어 문학이 존재한다.
Ancient Cia-Cia literature exists in the Gundul script, a form of Arabic with five additional letters and no signs to denote vocals that was used in the old Malay world.

즉 찌아찌아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것은 옛날 얘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찌아찌아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적이 있다는 내용은 아직까지는 언론 보도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찌아찌아어와 계통은 같지만 다른 언어로 역시 부톤섬에서 쓰이는 월리오(Wolio)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문학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혹시 누군가 찌아찌아어와 월리오어를 혼동하여 이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부톤섬의 언어 상황은 언뜻 생각하기보다 복잡한 듯하다. 찌아찌아어와 월리오를 비롯하여 다섯 개 정도의 언어가 있는데 이들은 계통은 같지만 확실히 구별되는 언어인 듯하고 예전에 부톤섬의 술탄 치하에서는 월리오어가 궁중 언어였으나 지금은 찌아찌아어가 부톤섬 언어 가운데서 가장 많이 쓰인다는 것 같다.)

2024. 5. 26. 추가 내용: 그래도 ‘문자 없는 종족’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런 표현은 문자도 없는 종족에게 문명을 베푼다는 문화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서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했을 때 전통 이슬람 교육을 받은 현지인들이 아랍 문자로 토착 언어를 써온 것을 문자 생활로 인정하지 않고 로마자를 모르면 문맹인으로 취급했다.

한글은 찌아찌아어에 적합한가?

찌아찌아족이 과연 문자 없는 종족이냐고 따지는 것보다 사실은 이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설사 이미 아랍 문자나 로마 문자로 찌아찌아어를 표기하고 있다고 해도 이들에 비해 한글을 쓰는 것이 월등히 낫다면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찌아찌아어는 한글로 적기 수월할만큼 단순한 음운 체계를 가진 것 같다. 모음은 ‘아, 에, 이, 오, 우’ 다섯인 듯하다. 복잡한 자음군(영어 strike의 str, 스웨덴어 ostkustskt의 stskt 등)이 없고 대부분의 음절이 개음절이며 받침이 있다 해도 ㄴ, ㅁ, ㄹ 정도인 듯하다. 중국어나 베트남어의 골치아픈 성조도 없고 일본어처럼 모음의 장단을 구별할 필요도 없는 듯하다.

이처럼 음운 구조가 단순한 것은 찌아찌아어 뿐만이 아니라 찌아찌아어가 속한 남도 어족(오스트로네시아 어족)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 언어 대부분의 특징이다. 이 정도면 자리동님이 덧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어의 가나로도 충분히 적을 수 있다.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 여러 언어 맛보기(세계인권선언에서)

인도네시아어: Menimbang bahwa pengakuan atas martabat alamiah dan hak-hak yang sama dan mutlak dari semua anggota keluarga manusia adalah dasar kemerdekaan, keadilan dan perdamaian di dunia,
필리핀어: Sapagkat ang pagkilala sa katutubong karangalan at sa pantay at di-maikakait na mga karapatan ng lahat ng nabibilang sa angkan ng tao ay siyang saligan ng kalayaan, katarungan at kapayapaan sa daigdig.
마오리어: No te mea na te whakanoa a na te whakahawea ki nga mana o te tangata i tupu ai nga mahi whakarihariha i pouri ai te ngakau tangata, a ko te kohaetanga o tetahi ao hou e mahorahora ai te tangata ki te korero ki te whakapono, ki te noho noa i runga i te rangimarie a i te ora, kua panuitia hei taumata mo te koingotanga o te ngakau o te mano tini o te tangata.
하와이어: ‘Oiai, ‘o ka ho’omaopop ‘ana i ka hanohano, a me nā pono kīvila i kau like ma luna o nā pua apau loa o ka ‘ohana kanaka ke kumu kahua o ke kū’oko’a, ke kaulike, a me ka maluhia o ka honua, a

중세 한국어에도 어두 자음군이 있어서 ㅵ 같은 표기를 썼지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쓰지 않는다. 그래서 스웨덴어의 ostkustskt 같은 단어를 표기하려면 차선책으로 ‘으’를 삽입하여 ‘오스트쿠스트스크트’와 같이 쓸 수 있는데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고, 만약 ‘으’라는 모음이 따로 있다면 ‘으’를 모음 표시를 위해 썼는지 애매하다는 단점이 있다. 에티오피아 문자나 인도에서 쓰이는 몇몇 문자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Hama님께서 찌아찌아어 교재 사진을 보고 ‘노떼르띠뿌’, ‘이스따나’, ‘스리갈라’ 등에서 ‘르’와 ‘스’가 쓰인다고 제보해 주셨는데, 찌아찌아어에 드물게 등장하는 r 또는 s 계열 자음군을 표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는 드문 듯하니 ‘으’를 써서 자음군을 쓴다 해도 크게 번거로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찌아찌아어에는 r와 l의 구별이 있는 것 같다. 영어판 위키백과에 의하면 ‘둘’을 뜻하는 낱말은 rua이고 ‘다섯’을 뜻하는 낱말은 lima이다. 찌아찌아어 교재를 보니 어중에서 r는 ‘ㄹ’, l은 ‘ㄹㄹ’로 적는 듯한데, rua와 lima에서처럼 어두에 오는 r와 l의 구별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했다. 그런데 도마도님의 제보를 통해 lima는 ‘을리마’로 표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어두의 l은 ‘을ㄹ’로 적는 것이다. 또 제보해주신 사진을 보니 ‘은다무’ 같은 표기가 보여 어두의 l 뿐만이 아니라 어두의 nd, 즉 [ⁿd]와 같이 비음이 선행하는 폐쇄음에도 ‘으’를 붙여 적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찌아찌아어에는 많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 언어처럼 성문 폐쇄음이 있는 듯한데 한글로는 그냥 ‘ㅇ’으로 표기하는 듯하다. 아래는 노컷뉴스에서 보도한 사진에 나오는 내용에 영어판 위키백과의 로마 문자 표기를 추가한 것이다.

아디 세링 빨리 노논또 뗄레ᄫᅵ시. 아마노 노뽀옴바에 이아 나누몬또 뗄레ᄫᅵ시 꼴리에 노몰렝오.
adi sering pali nononto televisi. amano nopo’ombae ia nanumonto televisi kolie nomoleo.

여기서 nopo’ombae를 ‘노뽀옴바에’로 적고 있는데 ‘옴’의 첫소리는 성문 폐쇄음 [ʔ]이지만 ‘에’는 그냥 자음이 없는 음절이다. 성문 폐쇄음은 한국어에서는 의미가 없는 음으로 자음이 없는 것처럼 들리니 그냥 ‘ㅇ’으로 표기했겠지만 찌아찌아어에서는 성문 폐쇄음은 엄연한 자음으로 있는지 없는지의 구별이 중요하다. 옛 글자를 부활시켜 된이응 ‘ㆆ’으로 표기했으면 어땠을까?

보도 내용 중에 흥미를 끈 것 하나가 찌아찌아어 표기에 옛 글자인 순경음 비읍 ‘ᄫ’을 쓴다는 것이다. 위 예에서 보면 ‘ᄫ’은 유성 순치 마찰음 [v]를 나타내기 위해 쓰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찌아찌아어의 /w/을 나타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세 국어에서 ‘ᄫ’은 유성 양순 마찰음 [β]을 나타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월리오에서 /w/의 음가가 [β]이니 찌아찌아어에서도 비슷하게 발음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어판 위키백과에는 ‘여덟’을 뜻하는 walu를 누군가가 ‘왈루’라고 표기해 놓았는데 아마도 찌아찌아어 한글 표기법을 모르는 사람이 짐작해서 써 놓은 것 같고 아마 ‘ᄫ’을 사용한 ‘ᄫㅏㄹ루’가 맞는 표기일 것 같다. 교재 사진을 아무리 보아도 /w/를 ‘와’, ‘워’, ‘위’와 같이 표기한 예는 찾지 못했다.

한글은 맞춤옷, 로마 문자는 기성복이다

이 비유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글에 달린 hama님의 덧글에 나오는 비유인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데만 쓰였다. 로마 문자는 라틴어가 일상 언어로서는 사멸한지 오래이지만 영어, 에스파냐어, 폴란드어 등 유럽의 언어는 물론 터키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스와힐리어, 그린란드어 등 세계 각지의 수많은 언어를 표기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니 로마 문자는 어느 언어를 적는지, 어떤 맞춤법을 사용하는지 알아야지만 철자에서 발음 유추가 가능하다. 똑같이 pain이라고 써도 영어 단어라면 [pʰeɪn], 프랑스어 단어라면 [pɛ̃], 핀란드어 단어라면 [pɑin]으로 발음한다.

반면 우리는 한글로 적힌 것을 보면 그냥 한국어 발음대로 읽어버린다. 물론 된소리되기, 사잇소리 현상, ‘외’와 ‘위’를 단모음으로 발음하느냐 이중모음으로 발음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대체로 한글로 적힌 것이 있다면 그 발음은 정해져 있다.

찌아찌아어 한글 표기안을 마련한 이들은 아마도 한국어의 발음대로 소리내어 읽으면 찌아찌아어에 최대한 가깝게 들리도록 정한 듯하다. 그러니 한국어로 치면 된소리가 나는 자음은 겹자음 ‘ㄲ, ㄸ’ 등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찌아찌아어에 이런 소리가 자주 쓰인다면 사실 겹자음으로 적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아예 [ㄲ], [ㄸ] 소리가 빈도가 높으면 ‘ㄱ’, ‘ㄷ’으로 적고 [ㄱ], [ㄷ]에 가까운 소리를 ‘ㄲ’, ‘ㄸ’으로 적는 것이 경제적일 수가 있다. 하지만 로마 문자와 달리 한글 자모는 꼭 한 소리만 나타내야 한다는 관념을 극복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로마 문자를 쓰는 언어에서는 c, j, x 등의 발음이 언어마다 천차만별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한글이 더 많은 언어의 표기에 쓰이자면 같은 한글 자모도 언어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r와 l 구분의 어려움도 한글이 한국어에 최적화된 문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어에서 설측음 [l]은 ‘ㄹ’이 받침으로 쓰일 때와 어중에서 ‘ㄹㄹ’과 같이 ‘ㄹ’이 겹칠 때 나는 발음이지, 독립된 음소가 아니다. 그러니 따로 글자를 만들지 않고 어중의 탄설음을 나타내는 ‘ㄹ’을 써서 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찌아찌아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에서 r와 l은 독립된 음소이다. 겹리을(ᄙ)과 같은 옛 글자를 사용해서라도 이 r와 l의 구분을 확실히 나타내는 것이 찌아찌아어 음운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는 길일 것이다.

찌아찌아어에는 얼마나 해당이 되는 사항인지 모르지만 한글로 이중모음이나 반모음을 표기하는 문제도 꽤 까다롭다. 원래 ‘애’나 ‘에’ 같은 글자는 각각 ‘아이’, ‘어이’ 비슷한 이중모음을 나타냈겠지만 한국어의 발음이 바뀌면서 단모음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 한국어에서 반모음 [w]로 시작하는 음절은 ‘와’, ‘워’, ‘위’ 등으로, 반모음 [j]로 시작하는 음절은 ‘야’, ‘여’, ‘요’ 등으로 쓰고 있다. 반모음이 음절 구조상 자음 역할을 하는 언어를 표기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다’의 활용형이 ‘와’가 되는 한국어에서는 /wa/를 ‘와’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ga, na, da, wa, ya가 모두 ‘자음’+’ㅏ 모음’으로 분석되는 언어에서 다른 것은 ‘가, 나, 다’와 같이 적는데 wa, ya만 ‘와’, ‘야’처럼 적는 것은 일관성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옛한글 사용에 따른 전산화와 활자화의 문제

위에서 기왕 옛 글자 순경음 비읍 ‘ᄫ’을 쓴다면 찌아찌아어의 음운 체계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된이응 ‘ㆆ’이나 겹리을(ᄙ)도 쓰자는 말을 했는데 사실 옛한글을 사용하면 생기는 문제가 좀 까다롭다. 일단 현재로서는 컴퓨터로 입력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면에 표시하거나 종이에 인쇄하는데 필요한 글꼴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도에 나온 찌아찌아어 교재는 옛한글을 지원하는 몇 안되는 글꼴 가운데 하나인 ‘새굴림’으로 인쇄한 듯한데, ‘새굴림’은 디자인 측면에서 인쇄용 글꼴로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는 글자만 지원한다 해도 괜찮은 본문용 한글 글꼴 개발하는데 많은 인력과 몇 개월에 걸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찌아찌아어 표기에 ‘ᄫ’을 쓴다고 해서 앞으로 옛한글을 지원하는 전문 글꼴이 순식간에 쏟아져나올 것 같지는 않다.

자세한 내용은 〈찌아찌아족 과연 한글로 문자 생활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글을 참조하시라.

문화제국주의의 그림자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도 아니고 한국은 부톤섬을 식민지로 경영하는 지배자도 아니다. 그러나 한글은 현재 한국 문화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워낙 많은 언어에서 쓰기 때문에 특정 문화를 연상시키지 않는 로마 문자와는 다르다. 한류 열풍으로 인해 바우바우시의 시장이 한국 문화에 호의적이라 이번 사업이 성사되었다지만 만에 하나 한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다면 현지인들이 한글과 한국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한글 수출 시도가 실패한 원인으로도 한국에 대한 반감이 흔히 꼽힌다는 것도 생각해보라.

물론 찌아찌아어를 한글로 적는 것이 문화제국주의로 비쳐짐을 염려하는 것이 기우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염려를 불식시키고자 한다면 “유례없는 새로운 방식의 국제협력을 통해 해당 지역과 깊은 유대가 형성되고 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가 늘면서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연합뉴스 보도 중)와 같이 한국의 경제 이익을 좇는다는 인상을 풍기는 보도는 자제했으면 좋겠다. 이번 일을 가지고 한국의 저력이나 민족의 우수성을 논하며 호들갑을 떨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언어 블로그 Language Log에 달린 덧글 가운데는 이미 “언어제국주의 판에 새로운 선수가 등장한 듯하다(it seems we have a new player in the Linguistic Imperialism game)”라는 평도 있다. 이번 사업이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소수민족에게 문자를 보급한다는 순수한 의도라는 것을 설득시켜야 할 것이다.

종합 평가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r와 l 구분, 성문 폐쇄음 구분, 전산화와 활자화의 어려움)이 있기는 해도, 이번에 도입된 찌아찌아어 한글 표기법은 나름 성공적이며 찌아찌아족이 어려움 없이 문자 생활을 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찌아찌아족이 문자를 새로 도입한다면 굳이 로마 문자 대신 한글을 택할 필요가 있을까? 로마 문자는 한글처럼 과학적인 제자 원리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인도네시아의 공용어인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비롯하여 그 지역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언어를 표기할 때 쓰는 문자이다. 찌아찌아어의 음운 구조를 표현하는데 한글에 비해 부족하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찌아찌아어를 주변 언어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한글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한글이 로마 문자보다 실용적인 면은 뭐가 있을까?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글이 모아쓰기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아쓰기라는 특징 때문에 한글은 그리 배우기가 쉬운 문자는 아니다. 하지만 문자는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일단 배운 후 쓰고 읽기가 쉬운 것이 좋은 것이다. 특별히 근거를 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아쓰기 때문에 긴 글을 빨리 읽을 때 글이 눈에 빨리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즉 긴 글을 읽을 때 한글이 로마 문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로마 문자 대신 한글을 쓸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지는 의문이다. 모아쓰기는 읽을 때는 편리하지만 음가가 없는 ‘ㅇ’를 계속 적어야 하는 비경제성도 있고 자음군이나 이중모음 표현, 새로운 자모 추가를 어렵게 만드는 단점도 있다.

그래도 만약 찌아찌아어 표기에 한글이 성공적으로 도입된다면 한글이 곧 한국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은 좀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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