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과 ‘리니지’라는 표기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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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을 전후해서 이른바 ‘웰빙 열풍’이 불었을 때 이 ‘웰빙’이란 신조어를 매우 어색해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에서 온 외래어인 것 같기는 한데 원래 표현은 뭘까? 설마 well-being을 한글로 표기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분명히 ‘웰비잉’일 텐데?

꼭 표기 문제가 아니라도 좀 의아한 신조어였던 것은 분명하다. Well-being이라는 영어 표현은 말 그대로 ‘잘 있음’, 즉 ‘복지’를 뜻하는데 그렇다고 welfare처럼 고급스럽거나 전문용어 같은 느낌은 없이 평이하게 쓰인다. 예를 들면 ‘정신적인 건강’을 emotional well-being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건강한 생활 양식(특히 의식주)에 관련된 좁은 의미로 따와서 너도나도 ‘웰빙’을 찾는 모습은 좀 어색해 보였다. 거꾸로 미국에서 ‘jal isseum’ 열풍이 분다고 생각해보라.

상호에 ‘웰빙’이 들어간 이태원의 한 소매점. ‘웰빙’과 영어의 well-being의 발음이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 재미있는 영문 표기를 곁들었다. (사진 출처)

본론으로 돌아가서 well-being의 발음을 살펴보자. 국제 음성 기호로 나타내면 [ˌwɛl.ˈbiː.ɪŋ], 세 음절의 단어이다.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사전에서는 보통 생략하는 음절 구분 표시(.)도 넣었다. ‘웰비잉’이라고 적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에 맞다.

그렇다면 왜 ‘웰빙’이라고 적었을까?

평소에 사용하는 인터넷 영어사전에서 well-being의 발음을 찾아보라. 아마 [wélbíːiŋ]이라고 나와있을 것이다. 즉 being의 앞 음절의 모음을 [iː]로, 뒤 음절의 모음을 [i]로 나타낸 것이다(í에 붙은 악센트 부호는 음절에 강세가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를 보면 두 음절의 모음은 음가가 똑같고 길이만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면 [íːi]는 음절 구분 없이 하나의 장모음인 것으로 알기 쉬운데, 장모음은 따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에 따라 ‘이’ 한 음절로만 적어야 된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하지만 영어에서 see의 장모음 [iː]와 sit의 단모음 [ɪ]는 길이 뿐만이 아니라 음가도 확실히 다르다. 단모음 [ɪ]를 발음할 때 혀는 [i]를 발음할 때보다 조금 더 입 안쪽으로 온다. 한국어의 ‘이’는 [i]로 see의 장모음과 음가는 같지만 길이가 짧아서 구별된다. [ɪ]는 한국어에 없는 모음이다. 흉내내려면 ‘이’보다는 혀의 위치를 약간 ‘에’나 ‘으’를 발음할 때에 가깝게 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영어사전 대부분은 이 [ɪ] 모음을 그냥 [i]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영어에서 [i]는 장모음에만 오고 [ɪ]는 단모음에만 오니 기호 수를 줄이기 위해 각각 [iː], [i]로 쓰던 예전 습관을 아직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단순화된 표기 때문에 발음을 잘못 알기 쉽다고 하여 1977년 English Pronouncing Dictionary를 시작으로 [iː], [ɪ]와 같이 음가의 차이와 길이의 차이를 둘 다 나타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해리 포터》의 프랑스인 억양 흉내내기

러시아어권에서 온 외국인들이 한국어의 ‘오’와 ‘어’ 발음을 잘 구별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오’와 ‘어’의 구별이 매우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i]와 [ɪ]의 구별이 없는 언어를 하는 이들은 영어를 배울 때 이들을 혼동하거나 똑같이 발음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어에서는 의미 있는 구별이다.

《해리 포터와 불의 잔》 영화에 등장하는 프랑스 학생. 클레망스 포에지(Clémence Poésy) 분. (사진 출처)

마법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영국 작가 조앤 K. 롤링의 아동 소설 해리 포터(Harry Potter) 연작에서는 대화 내용을 쓸 때 방언이나 외국인들이 영어를 할 때의 억양을 흉내내어 적는 경우가 많다. 네번째 소설인 《해리 포터와 불의 잔(Harry Potter and the Goblet of Fire)》에서는 프랑스 마법 학교의 학생들이 영국의 마법 학교에 찾아오는 내용이 있는데, 프랑스인들의 대화 내용은 프랑스식 억양을 흉내내어 적었다. 프랑스인들은 영어의 h 발음을 생략한다든지 유성음 th를 z로 대체하는 것 외에도 영어의 단모음 [ɪ] 대신 장모음 [iː]를 쓰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Is it over?” 대신 “Eez eet over?”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프랑스어에서도 한국어에서처럼 [ɪ] 모음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이 영어를 하면 보통 [i]로 대체하여 발음하고, 이게 영국인들에게는 특이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영어를 하면서도 sit의 모음을 see의 모음과 비슷한 음가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성악을 할 때이다. 성악에서는 이탈리아어의 모음 [a e i o u]를 좋은 소리를 내는 모음으로 쳐주기 때문에 일부러 보통 말할 때와 다르게 sit의 모음을 [i] 비슷하게 발음할 때가 많다.

또 오스트레일리아 영어에서 쓰는 sit의 모음은 다른 영어권 나라 사람들이 듣기에는 see의 모음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래서 ‘시드니(Sydney)’를 농담 삼아 Seednee라고 표기하기도 한다(Sydney [ˈsɪd.ni]의 앞 음절은 sit의 모음, 뒤 음절은 see의 모음을 쓴다). 오스트레일리아 영어에서 sit 모음과 see 모음은 주로 길이로만 구별되는 것이다.

‘리니지’는 맞는 표기일까?

(도마도님의 지적에 따라 설명 일부 수정, 보강)

롤플레잉 게임 ‘리니지’는 동명 만화 《리니지(Lineage)》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lineage의 영어 발음은 [‘lɪn.i(ː).ɪdʒ]이다. 빨리 발음하면 두 음절인 [‘lɪn.iɪdʒ]가 되는데, 뒤의 두 모음이 [iɪ]라는 독특한 상승 이중모음으로 축약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축약 과정을 거친 [i]는 반모음 [j]로 실현되니 실제 발음은 [‘lɪn.jɪdʒ]이고, 영어에서 [jɪ]는 보통 이중모음이 아니라 반모음과 단모음의 결합으로 분석한다. [i]가 축약 과정을 통해 반모음 [j]로 변모하듯 [u]는 반모음 [w]가 된다. Influence는 원래 [‘ɪn.flu.əns] 세 음절이지만 축약되면 [‘ɪn.flwəns] 두 음절로 발음된다.

사실 lineage나 influence 같은 단어가 세 음절로 발음되느냐, 두 음절로 발음되느냐의 경계는 모호하다. 비슷한 예로 영어의 fire도 두 음절인 [faɪ.ə]로 발음될 수도 있고 삼중모음(!)을 써서 한 음절인 [faɪə]로 발음될 수도 있다. 영국식 발음에서는 특히 [faə]로 평탄화(smoothing)가 되는 일이 잦다. [‘lɪn.i(ː).ɪdʒ]라는 발음만 따지면 한글로는 ‘리니이지’라고 쓰는 것이 맞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모음 자체가 다르고, 음절도 구별되기 때문에 ‘리니이지’처럼 n과 g 사이의 모음을 나눠 쓰는 것이 맞다.

그런데 [‘lɪn.jɪdʒ]라는 발음은 ‘리니지’라고 적어도 된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분명히 [iɪ]는 단순한 장모음이 아니라 첫 부분과 끝 부분의 음가가 다른 이중모음이다. 하지만 이중모음인 이상 한 음절로 발음되고 [i]와 [ɪ] 모두 한글로는 ‘이’로 적게 되니 이중모음 전체를 ‘이’ 하나로 적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영어의 so 같은 단어에 나오는 이중모음 [oʊ]는 각 부분의 한글 표기는 ‘오’와 ‘우’로 다르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 ‘오’로만 적도록 하고 있지 않나? [ji]는 ‘이’로 적게 되어 있는데 앞의 [n]과는 어떻게 합치느냐에 따라 ‘리니지’가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lineage의 발음을 두 음절인 [‘lɪn.jɪdʒ]라고 봤을 때 ‘리니이지’와 ‘리니지’ 가운데 어느 것이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워낙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에 선례를 찾기도 힘들다. 세 음절인 [‘lɪn.i(ː).ɪdʒ]를 원 발음으로 쳐 ‘리니이지’로 적는 것이 맞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리니지’가 틀린 표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2024. 5. 26. 추가 내용: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d], [l], [n] 다음에 [jə]가 올 때 각각 ‘디어’, ‘리어’, ‘니어’로 적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Daniel [ˈdæn.jəl] 같은 경우 ‘대니얼’로 적는다. 원래 [ˈdæn.i.əl]에서 [i]가 반모음 [j]로 변하면서 축약된 것인데 이제는 두 음절로 축약된 발음만 쓰인다. 이처럼 축약으로 인해 나타난 반모음 [j]를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여전히 뒤따르는 모음과 갈라 적도록 했으니 lineage 같은 경우도 ‘리니이지’라고 적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면 well-being도 비슷한 이유로 ‘웰빙’이라고 적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실 수 있겠다. 하지만 well-being에서는 be 음절에 강세가 오기 때문에 being이 한 음절로 축약되지 않는다. 사실 partying [ˈpɑː.ti.ɪŋ]처럼 [i]가 든 음절에 강세가 오지 않는 경우에도 -ing이 앞 음절과 축약되지 않는데, 이건 -ing이라는 접미사의 발음 특성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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