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그닐이냐, 궁니르냐…에서 트랙백(깨진 링크).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오딘의 창 gungnir를 한글로 어떻게 표기하느냐는 문제가 계기가 되어 고대 노르드어의 한글 표기에 대한 글을 준비했다. 다룰 내용이 많아 글이 매우 길어진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게르만 신화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북유럽 신화
어렸을 적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책은 많이 봤는데 북유럽 신화는 거의 접하지 못했다. 그러다 대학교에서 중세 북유럽 문학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면서야 북유럽 신화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아동용 그림책으로 처음 접한 그리스 로마신화와는 달리 북유럽 신화는 처음부터 원전을 통해 접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것도 행운이었던 것 같다. 선입견 없이 각색되지 않은본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아는 북유럽 신화는 게르만 신화의 일부이다. 게르만족 가운데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의 북게르만인들은 기독교를 늦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신화는 다른 게르만 신화에 비해 잘 보존되었다. 8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야 북유럽의 게르만인들이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이른바 바이킹 시대에 해당한다.그 가운데에서도 대서양 북쪽에 고립되어 유럽의 변방에 있으면서도 기록 문화가 발달한 아이슬란드에서 그들의 신화와 전설이 많이 기록되었다. 아이슬란드는 서기 1000년을 기준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이후에도 13세기 스노리 스툴루손(Snorri Sturluson) 등이 기독교 전파 이전의 신화와 전설을 자세히 기록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북유럽 신화에 관한 자료는 대부분 아이슬란드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북유럽 신화의 이해에 특히 도움이 되는 것이 ‘에다(Edda)’라고 하는 두 작품으로 신들에 관한 시를 모은 작자 미상의 《고 에다》와 스노리가 쓴 《신 에다》가 있다. 각각 ‘운문 에다’, ‘산문 에다’라고도 한다.
스노리 스툴루손의 저작 《신 에다》의 18세기 아이슬란드 필사본 표지 (그림 출처)
북유럽 신화가 기록된 언어는 고대 노르드어이다. 고대 노르드어는 바이킹 시대 북게르만인들이 사용한 언어로 14세기 이후 오늘날의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등으로 분화하였다. 바이킹 시대에도 이미 동부와 서부 방언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 고대 노르드어에서 분화된 여러 언어, 즉 북게르만어군 언어는 크게 서부 북게르만어와 동부 북게르만어로 나뉜다. 이 가운데 아이슬란드어는 서부 북게르만어에 속한다. 중세 아이슬란드의 기록이 북유럽 신화와 전설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고대 노르드어는 보통 아이슬란드어에서 쓰인 서부 방언 형태, 즉 고대 아이슬란드어를 얘기한다.
이쯤에서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름이 참 많은 북유럽 신화의 신들
여기서 언급할만한 점은 북유럽 신화 가운데 게르만 신화에 공통된 이름들은 북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각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유럽 신화의 주신 가운데 한 명인 오딘은 고대 노르드어로 오딘(Óðinn)이지만 고대 고지독일어로는 워탄 또는 보탄(Wotan), 앵글로색슨어(고대 영어)로는 워덴(Wōden)이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북유럽 신화만 생각해보자.
북유럽 신화에 대한 자료는 고대 노르드어로 적힌 것에 거의 의존하고 있으니 고대 노르드어 이름에 따라 표기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같다. 하지만 고대 노르드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이고 ð, þ, æ 등 생소한 글자들까지 사용해서 그런지 북유럽 신화의 이름 표기를 고대 노르드어에 따라 규칙적으로 하는 모습은 잘 보지 못한 것 같다.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국내에 소개된 북유럽 신화 관련 서적 대부분은 고대 노르드어 원전을 직접 참고한 것이 아니라 영어 등 다른 매개 언어에 의존했을 듯하다. 그런데 영어에서도 북유럽 신화의 이름 표기 상황은 꽤 혼란스럽다. 학술적인 서적에서는 고대 노르드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일이 있지만 대부분 ð, þ, æ의 글자는 d, th, ae로 대체하는 식으로 표기를 단순화하거나 현대 스칸디나비아 언어(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에서 쓰는 표기를 따르는 등 여러 다른 방식이 쓰일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신 호드(또는 ‘호드르’)의 이름도 Hǫðr, Höðr, Hod, Hoder, Hodur, Hodr, Hödr, Höd, Hoth, Hödur, Hödhr, Höder, Hothr, Hodhr, Hodh, Hother, Höthr, Höth, Hödh 등 여러 표기가 가능하다.
로키에게 속아 친형제 발드르를 쏘려 하는 호드(Hǫðr). 1893년 스웨덴어판 《고 에다》에 실린 삽화. (그림 출처)
북유럽 신화 이름 비교
그래서 언어마다 쓰는 이름에 따라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이름들의 한글 표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했다. 북유럽 신화의 주요 신들을 고대 노르드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에서 뭐라고 부르며 그에 따라 한글로 표기하면 어떻게 될지를 표로 정리해놓았다. 고대 노르드어와 비교할 현대 언어로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분화된 아이슬란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를 선정했다. 현대 아이슬란드어는 고대 노르드어와 비교해서 철자는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발음이 상당히 변했다. 노르웨이어에는 서부 북게르만어로 분류할 수 있는 뉘노르스크(nynorsk)와 동부와 서부 북게르만어의 중간 정도라 할 수 있는 보크몰(bokmål)이라는 두 가지 표준이 있는데, 되도록이면 각각 쓰는 이름을 구별하려고 노력했다. 덴마크어와 스웨덴어는 동부 북게르만어이다.
언어마다 쓰는 신들의 이름은 각 언어판 위키백과를 비롯하여 《고 에다》와 《신 에다》 등 북유럽 신화에 대한 작품들이 각 언어로 번역된 자료를 참고했다. http://www.heimskringla.no/에서 아이슬란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는 물론 페로어 자료도 찾을 수 있다. 《고 에다》의 노르웨이어 보크몰 번역 등 일부 내용은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암호를 입력해야 볼 수 있다(《고 에다》의 노르웨이어 뉘노르스크 번역은 암호 입력 없이 볼 수 있다). http://www.snerpa.is/net/fornrit.htm에서는 《신 에다》의 일부인 〈귈바긴닝(Gylfaginning)〉이 아이슬란드어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다.
2024. 5. 25. 추가 내용: 원문에서는 Gylfaginning을 ‘귈바긴닝그’로 썼지만 지금은 어말 -ng의 g가 발음되더라도 받침 ‘ㅇ’으로 처리하여 ‘귈바긴닝’으로 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고대 노르드어의 철자도 사본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표준 표기를 정하고 있기 때문에 각 신마다 이름의 표준 철자가 정립되어 있다. 고대 아이슬란드어에서 쓴 형태를 기준으로 했다. 다만 고대 노르드어의 표기에서 [ɒ] 내지 [ɔ], 즉 ‘오’에 가까운 음가의 모음을 나타냈던 ǫ (꼬리달린 o)는 현대 아이슬란드어의 ö에 해당하며 [œ] 즉 ‘외’에 가까운 모음으로 발음되는데 기술적인 이유로 인해 고대 노르드어를 쓸 때에도 ǫ를 ö로 대체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고대 노르드어와 아이슬란드어의 발음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대 노르드어의 표기에는 ǫ를 쓰도록 한다. 초기에 쓰였던 ǫ의 장음인 ǫ́는 후에 á와 합쳐졌으므로 모두 á로 통일하도록 한다.
니오르드의 다양한 표기. 왼쪽부터 ǫ를 쓴 고대 노르드어 표기, 편의상 ǫ를 ö로 대체한 고대 노르드어 표기, 현대 아이슬란드어 표기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등에서는 바이킹 시대에 썼던 이름이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오기도 했지만 근대에 예전 신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기면서 아이슬란드어 이름이 다시 전해져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는 예를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튀(Týr) 신의 전통 스웨덴어식 이름은 Ti이며 그의 이름을 딴 화요일은 스웨덴어로 tisdag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슬란드어 이름 Týr를 딴 Tyr가 더 많이 쓰인다. 또 쌍둥이 신 프레위(Freyr)와 프레위야(Freyja)는 스웨덴어식으로 Frö, Fröja로 썼지만 역시 아이슬란드어 이름의 영향으로 지금은 Frej, Freja라는 형태가 더 많이 쓰인다. 각 언어마다 몇 가지 다른 표기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래의 표에서 가능한 표기 모두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어 게르드의 경우 노르웨이어의 뉘노르스크 자료에서는 Gjerd, 보크몰 자료에서는 Gerd라는 표기를 확인하는데 그쳤지만 뉘노르스크에서도 Gerd라는 철자를 쓰고 보크몰에서도 Gjerd라는 철자를 쓸 가능성이 높다.
북유럽 신화의 남성 신
고대 노르드어 | 아이슬란드어 | 노르웨이어 (뉘노르스크) | 노르웨이어 (보크몰) | 덴마크어 | 스웨덴어 |
Baldr 발드르 | Baldur 발뒤르 | Balder 발데르 | Balder 발데르 | Balder 발데르 | Balder 발데르 |
Bragi 브라기 | Bragi 브라이이 | Brage 브라게 | Brage 브라게 | Brage 브라게 | Brage 브라게 |
Forseti 포르세티 | Forseti 포르세티 | Forsete 포르세테 | Forsete 포르세테 | Forsete 포르세테 | Forsete 포르세테 |
Freyr 프레위 | Freyr 프레이르 | Frøy 프뢰위 | Frøy 프뢰위 | Frej 프라이 | Frej/Frö 프레이/프뢰 |
Heimdallr 헤임달 | Heimdallur 헤임다들뤼르 | Heimdall 헤임달 | Heimdall 헤임달 | Hejmdal 하임달 | Heimdall 헤임달 |
Hǫðr 호드 | Höður 회뒤르 | Hod 호드 | Hod 호드 | Høder 회데르 | Höder 회데르 |
Hǿnir 회니 | Hænir 하이니르 | Høne 회네 | Høne/Høner 회네/회네르 | Høner 회네르 | Höner 회네르 |
Loki 로키 | Loki 로키 | Loke 로케 | Loke 로케 | Loke 로케 | Loke 로케 |
Njǫrðr 니오르드 | Njörður 니외르뒤르 | Njord 니오르 | Njord 니오르 | Njord 니오르 | Njord 니오르드 |
Óðinn 오딘 | Óðinn 오딘 | Odin 오딘 | Odin 오딘 | Odin 오딘 | Oden 오덴 |
Þórr 소르(토르) | Þór 소르 | Tor 토르 | Tor 토르 | Thor 토르 | Tor 토르 |
Týr 튀 | Týr 티르 | Ty 튀 | Tyr 튀 | Tyr 튀르 | Tyr/Ti 튀르/티 |
Ullr 울 | Ullur 위들뤼르 | Ull 울 | Ull 울 | Ull 울 | Ull 울 |
Váli 왈리(발리) | Váli 바울리 | Våle/Vale 볼레/발레 | Våle/Vale 볼레/발레 | Vale 발레 | Vale 발레 |
Vé 웨(베) | Vé 비에 | Ve 베 | Ve 베 | Ve 베 | Ve 베 |
Víðarr/Viðarr 위다르(비다르) | Víðar/Viðar 비다르 | Vidar 비다르 | Vidar 비다르 | Vidar 비다르 | Vidar 비다르 |
Vili 윌리(빌리) | Vili 빌리 | Vilje 빌리에 | Vilje/Vile 빌리에/빌레 | Vile 빌레 | Vile 빌레 |
북유럽 신화의 여성 신
고대 노르드어 | 아이슬란드어 | 노르웨이어 (뉘노르스크) | 노르웨이어 (보크몰) | 덴마크어 | 스웨덴어 |
Freyja 프레위야 | Freyja 프레이야 | Frøya 프뢰위아 | Frøya 프뢰위아 | Freja 프라야 | Freja/Fröja/Fröa 프레야/프뢰야/프뢰아 |
Frigg 프리그 | Frigg 프리그 | Frigg 프리그 | Frigg 프리그 | Frigg 프리그 | Frigg 프리그 |
Fulla 풀라 | Fulla 퓌들라 | Fulla 풀라 | Fulla 풀라 | Fulla 풀라 | Fulla 풀라 |
Gefjon/Gefjun/Gefion 게비온/게비운/게비온 | Gefjun 게비윈 | Gjevjon 예비온 | Gjevjon 예비온 | Gefion 게피온 | Gefjon 예피온 |
Gerðr 게르드 | Gerður 게르뒤르 | Gjerd 예르드 | Gerd 게르드 | Gerd 게르드 | Gerd 예르드 |
Gná 그나 | Gná 그나우 | Gnå 그노 | Gnå 그노 | Gna 그나 | Gna/Gnå 그나/그노 |
Hlín 흘린 | Hlín 흘린 | Lin 린 | Lin/Hlin 린/린 | Hlin 린 | Lin 린 |
Iðunn 이둔 | Iðunn 이뒨 | Idunn 이둔 | Idunn 이둔 | Idun/Ydun 이둔/위둔 | Idun 이둔 |
Jǫrð 요르드 | Jörð 예르드 | Jord 요르 | Jord 요르 | Jord 요르 | Jord 요르드 |
Nanna 난나 | Nanna 난나 | Nanna 난나 | Nanna 난나 | Nanna 나나 | Nanna 난나 |
Rán 란 | Rán 라운 | Rån 론 | Rån/Ran 론/란 | Ran 란 | Ran 란 |
Rindr 린드 | Rindur 린뒤르 | Rind 린 | Rind 린 | Rind 린 | Rind 린드 |
Sága 사가 | Sága 사우가 | Såga/Saga 소가/사가 | Såga/Saga 소가/사가 | Saaga/Saga 소가/사가 | Saga 사가 |
Sif 시브 | Sif 시브 | Siv 시브 | Siv 시브 | Sif 시프 | Siv/Sif 시브/시프 |
Sigyn 시귄 | Sigyn 시인 | Sigyn 시귄 | Sigyn 시귄 | Sigyn 시귄 | Sigyn/Sigryn 시귄/시그륀 |
Sjǫfn 쇼븐 | Sjöfn 셰븐 | Sjavn/Sjovn/Sjøfn 샤븐/쇼븐/셰픈 | Sjavn/Sjovn 샤븐/쇼븐 | Sjøvn/Sjåfn/Sjöfn 셰운/쇼픈/셰픈 | Sjöfn 셰픈 |
Skaði 스카디 | Skaði 스카디 | Skade 스카에 | Skade 스카에 | Skade 스카데 | Skade 스카데 |
Sól 솔 | Sól 솔 | Sol 솔 | Sol 솔 | Sol 솔 | Sol 솔 |
Þrúðr 스루드(트루드) | Þrúður 스루뒤르 | Trud 트루드 | Trud 트루드 | Trud 트루드 | Trud 트루드 |
Vár 와르(바르) | Vár 바우르 | Vår 보르 | Vår 보르 | Vår 보르 | Var/Vår 바르/보르 |
Vǫr 워르(보르) | Vör 뵈르 | Vør 뵈르 | Vør 뵈르 | Var 바르 | Vör 뵈르 |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 스웨덴어 이름의 한글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따랐다. 규정은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의 표기에서 g가 e 또는 y 앞에 오지만 [j]가 아니라 [g]로 발음되는 경우는 ‘ㄱ’으로 적었는데, 이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외래어 표기 용례에서 암묵적으로 따르는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Loke의 k는 [k]로 발음되므로 ‘ㅋ’으로 적었다. 이들 발음에 관한 토론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아이슬란드어의 표기는 예전에도 언급했던 내 나름의 표기 원칙을 적용했다. 대신 이 작업을 하면서 표기 방식을 일부 수정했다. sj의 ‘시’는 뒤의 모음과 합쳐 적기로 했고 자음 뒤에 오는 jö는 ‘ㅣ에’가 아니라 ‘ㅣ외’로 적기로 했다. sj는 노르웨이어나 스웨덴어에서와 달리 보통 한 음운으로 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자음+반모음 j 조합과 같이 ‘시’와 뒤따르는 모음을 따로 적기로 했었지만 아이슬란드어 발음 음성 파일을 확인한 결과 [sj]는 ‘샤’, ‘쇼’와 같이 뒤의 모음과 합쳐 적는 것이 원 발음에 가깝게 들린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바꿨다. 자음 뒤에 오는 jö를 당초에 ‘ㅣ에’로 적었던 것은 외래어 표기법의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 규정을 따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는 원칙이기도 하고(Björn, Bjørn은 ‘비에른’으로 적어야 하나 ‘비외른’으로 적는 일이 더 많다) 국립국어원 공개 자료실에 올려진 2008년 북경 올림픽 선수명의 한글 표기 자료에서 아이슬란드 인명 Björgvin을 ‘비외르그빈’이라고 적은 것도 고려하여 ‘ㅣ외’로 적는 것으로 바꿨다.
그럼 고대 노르드어 이름들은 한글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
고대 노르드어의 음운 체계
고대 노르드어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언어이므로 그 발음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발음되었는지 재구성할만한 단서는 충분히 남아 있어서 고대 노르드어의 발음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한다.
다음은 얀 테리에 폴룬(Jan Terje Faarlund)의 《고대 노르드어 통사론(The Syntax of Old Norse)》에 나오는 고대 노르드어 발음의 설명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다음 글자가 표기에 사용된다.
a b d ð e f g h i j k l m n o p r s t þ u v x y z æ ø œ ö ǫ
이들은 대체로 유럽 언어와 국제 음성 기호에서 쓰는 음가를 가진다.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다.ð – 영어 that의 [ð] f – 어두에서와 겹쳐 적었을 때, 무성음 환경에서 [f], 나머지 경우는 [v] g – 어두에서와 겹쳐 적었을 때, n을 따를 때는 [g], 나머지 경우는 마찰음 [ɣ] j – 독일어에서와 같은 반모음 [j] þ – 영어 thing의 [θ] v – 반모음 [w] x – ks를 나타내는 철자
y – 독일어 ü와 같은 전설 원순 고모음 [y] z – ts를 나타내는 철자
æ – 영어 bad의 모음과 유사한 [æː] ø – 독일어 ö와 같은 전설 원순 중모음 [ø] œ – ø에 해당하는 장모음
ǫ – 후설 원순 저모음 [ɔ]장모음은 ‘á, é, í, ó, ú, ý’와 같이 부호를 붙여서 나타낸다. æ와 œ는 언제나 장모음이고 ø와 ǫ는 언제나 단모음이므로 이들은 따로 부호를 붙이지 않는다. ǫ에 해당하는 장모음은 13세기 초에 장모음 á와 합쳐졌고 æ에 해당하는 단모음 역시 초기에 단모음 e와 합쳐졌기 때문에 æ와 ǫ는 각각 장모음과 단모음으로서만 존재한다. 고대 노르드어의 이중 모음은 /ei/, /au/, /øy/ 세 개가 있다.
개별 음소들의 정확한 음가와 변이음(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각 음소의 실제 발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고대 노르드어의 발음은 위의 기본적인 골격을 따랐다는 것이 정설이다. 위에서 말한 이중 모음 /ei/, /au/, /øy/는 각각 ei, au, ey라는 표기에 해당된다.
고대 노르드어의 발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헨리 스위트(Henry Sweet)의 1895년 저서 《아이슬란드어 입문(An Icelandic Primer)》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현대 아이슬란드어가 아니라 고대 아이슬란드어를 다룬 것으로 저작권 보호 기간이 지나 전문이 공개되어 있다(전문 PDF 문서로 보기). 여기서는 당시 사본의 철자와 더 가까운 표기 방식을 쓰고 있고 æ에 해당하는 단모음을 e와 구별해서 ę로 표기하고 있다. 또 이중 모음 ei와 ey는 사실 ęi와 ęy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위트는 hjarta와 같은 단어에서 반모음 j 앞의 h는 영어 hue ‘휴’에서처럼 발음되었을 것이라고 하며 hl, hn, hr, hv는 l, n, r, v의 무성음을 나타냈을 것이라고 한다. hv는 영어의 wh와 같이 발음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무성음 s, t 앞의 g는 k와 같이 발음되었던 것 같다고 하며 pt에서 p는 [f]로 발음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스위트에 따르면 ng에서 n과 g는 영어의 singer (싱어)가 아니라 single (싱글)에서처럼 각각 발음되었으며 kk와 같이 적는 겹자음은 그렇게 적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겹자음으로 발음되었다. 전설 모음과 j 앞의 g, k는 각각 [ɟ], [c]로 구개음화되어 발음되었다. 변이음이라서 보통 인식은 못하지만 한국어의 ‘ㄱ’, ‘ㅋ’도 ‘게’, ‘캬’ 등 전설 모음이나 j 앞에서 구개음화되어 ‘가’, ‘카’에서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난다(2009. 3. 26. 추가 내용).
고대 노르드어에 대한 영어판 위키백과 문서에서는 ǫ를 [ɔ] 대신 [ɒ]로 적고 있고 이중 모음 ei, au, ey의 발음은 각각 [æi], [ɒu], [øy]로 적고 있다. 단모음 e는 [e]로도 발음되고 [æ]로도 발음된다고 적고 있는데 e와 ę의 구별을 고려한 표기인 듯하다. 무성음 s, t 앞의 g와 k는 변이음 [x]로, ng의 n은 변이음 [ŋ]으로 실현된다고 적고 있다.
고대 노르드어 한글로 표기하기
위에서 제시된 기본 음가를 따르면 각 음소에 대응하는 한글 자모는 쉽게 찾을 수 있다. a는 ‘아’, b는 ‘ㅂ’으로 적는 식이다. 또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를 참조하면 ð는 ‘ㄷ’, y는 ‘위’, ø와 œ는 ‘외’로 적는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ǫ의 표기
ǫ의 음가인 [ɔ] 또는 [ɒ]는 ‘오’라고 표기해야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편의상 ö로 쓰는 것에 이끌려 ‘외’로 적는 일을 간혹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Ragnarǫk 또는 Ragnarök를 ‘라그나뢰크’라고 적는 것이다. 현대 아이슬란드어 발음을 따르면 ‘라그나뢰크’이겠지만 고대 노르드어 발음에 따라 ‘라그나로크’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참고로 노르웨이어에서는 Ragnarok ‘랑나로크’, 덴마크어에서는 Ragnarok ‘라그나로크’, 스웨덴어에서는 Ragnarök ‘랑나뢰크’라고 한다.
e와 æ의 표기
단모음 e는 [e]로도 발음되고 [æ]로도 발음되는데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에 따르면 각각 ‘에’, ‘애’로 구분하여 적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표준 고대 노르드어 표기에서는 e와 ę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에’로 적어야 할지, 언제 ‘애’로 적어야 할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e는 물론 æ도 모두 ‘에’로 표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럼 표준 철자만 보고도 표기를 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외래어 표기법의 스웨덴어와 노르웨이어 규정에서도 비슷한 문제에 똑같은 해결책을 쓰고 있다. 노르웨이어의 철자 e는 [e] 또는 [ɛ]로 발음되기도 하고 [æ]로 발음되기도 한다. 철자 æ도 [æ] 또는 [ɛ]로 발음된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모두 ‘에’로 적는 것으로 통일했다. 또 한국어의 현실 발음에서 ‘애’와 ‘에’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애’와 ‘에’를 구별하는 표기법은 틀리기 쉽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i, au, ey의 표기
e를 ‘에’로 통일해서 적는다는 결정에 따라 ei는 ‘에이’로 적는 것이 타당하다. au는 ‘아우’로 적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ey인데 대체로 [øy̯]라고 발음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노르웨이어에는 이중모음 øy가 흔한데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외위’로 적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고대 노르드어의 ey도 ‘외위’로 적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ey도 ei처럼 ‘에이’라고 적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의 영향이겠지만 ey라는 철자는 ‘에이’로 옮기는 경향이 있어 북유럽 신화의 주신 중 하나인 Freyr의 경우 ‘프레이’, ‘프레이르’로 적는 일은 있어도 ‘프뢰위르’라고 적는 일은 없다. 또 적어도 대한민국 젊은 층에서는 ‘외’와 ‘위’를 단순모음(홑홀소리)으로 발음하지 않고 각각 이중모음으로 발음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외위’라고 적으면 [weɥi]와 같이 발음하여 원 이중모음의 발음과는 전혀 딴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ey도 ‘에이’로 적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위의 표에서 ey가 들어간 이름은 ‘외위’로 일단 적고 ‘에이’로 적은 표기도 괄호 안에 같이 나타내었다.
2024. 5. 25. 추가 내용: 지금 생각은 ey는 철자 그대로 [e]에서 [y]로 향하는 이중모음으로 취급하여 ‘에위’로 표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원 발음을 확실히 알 수 없는 옛 언어의 경우 무리하여 재구되는 원 음가를 따르려 하기보다는 되도록이면 철자에 의지하는 것이 좋다. [ey̯]에서 뒷부분의 영향으로 앞부분의 음가도 원순모음화하여 [øy̯]가 된 것으로 흔히 재구하는 음가를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본문과 위의 표에 쓴 표기도 수정하였다.
g의 표기
g가 [g] 뿐만이 아니라 위치에 따라 마찰음 [ɣ]으로 발음된다면 후자의 경우 ‘ㄱ’이 아닌 다른 자모(‘ㅎ’?)로 써야 할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예전에 아이슬란드어의 한글 표기에 관한 글에서 썼던 내용이다.
아이슬란드어에서 모음 사이의 g는 [ɣ]로 발음되는데 한국어에서 모음 사이의 ‘ㄱ’도 수의적으로 약화되어 [ɣ]로 발음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g를 ‘ㄱ’으로 적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한국어 ‘ㄱ’의 변이음 [ɣ]는 아무래도 접근음을 말한 것이고 아이슬란드어 g의 변이음 [ɣ]는 마찰음을 말한 것으로 같은 기호를 쓰기는 했지만 다른 음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아이슬란드어 g의 변이음 [ɣ]을 ‘ㄱ’으로 적는 것이 발음만 따지면 꼭 최상의 방법은 아닐 것이며 오히려 네덜란드어의 g처럼 ‘ㅎ’으로 적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마찰음 [ɣ]는 [g]의 변이음인 경우 ‘ㄱ’이 아닌 다른 자모를 써야 할만큼 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고대 노르드어는 더이상 쓰이지 않으니 현대 아이슬란드어처럼 되도록이면 실제 발음에 가깝게 표기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질 필요는 없고 대신 어느정도 표기상의 편리를 위해 발음에 대한 해석을 단순화시킬 여지가 있다.
2024. 5. 25. 추가 내용: 지금 생각은 마찰음이라도 [ɣ]의 기본 표기는 ‘ㄱ’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어 발음의 표기에서 통상적으로 [ɣ]으로 적는 철자 g의 음은 사실 보통 무성음 [x]라서 한국어 화자들은 ‘ㅎ’과 가까운 음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실제로 유성음인 [ɣ]는 발음이 조금 달라서 ‘ㄱ’과 자음이 없는 ‘ㅇ’ 사이의 음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f의 표기
f 역시 [f]로 발음되기도 하고 [v]로 발음되기도 한다. 나는 g의 표기를 발음에 관계 없이 ‘ㄱ’으로 통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f의 표기도 ‘ㅍ’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고대 노르드어 이름에서는 f로 적히지만 한글로는 ‘ㅂ’으로 표기되는 예를 종종 본 적이 있고, 특히 이번에 위 표를 만드는 과정에서 f가 [v]로 발음되는 경우는 ‘ㅂ’으로 적어야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180도 바뀌었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v]로 발음된 f가 현대 스칸디나비아 언어에 와서 발음에 따라 v로 표기되어 그 발음대로 알려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것까지도 한글 표기상의 편의 때문에 ‘ㅍ’으로 적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특히 시브(Sif) 여신을 ‘시프’라고 적는 것은 개인적으로 못 보겠다… 여담이지만 언어학자이자 작가인 J. R. R. 톨킨이 elf에 관련된 어휘로 영어에서 보통 쓰는 elfin, elfish 대신 elven, elvish라는 형태를 사용한 것도 원래 [v]로 발음되던 f를 후에 철자에 따라 [f]로 발음하게 된 것이 못마땅해서인지도 모른다. 영어의 elf에 해당하는 고대 노르드어 단어는 알브르(álfr)로 여기서 f는 [v]로 발음되었고 이에 해당하는 아이슬란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단어도 모두 [v] 발음을 쓰고 있다.
어쨌든 f는 어두에서와 ff와 같이 겹쳐 적을 때, 무성음 앞 또는 뒤에서 [f]로 발음된다고 보아 ‘ㅍ’으로 적고 나머지 경우에는 ‘ㅂ’으로 적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gefa, gaf는 각각 ‘게바’, ‘가브’로 적고 lyfta는 ‘뤼프타’로 적는다.
v와 hv의 표기
v가 [w]로 발음되었다면 원칙상 뒤따르는 모음과 합쳐 ‘우’ 계열 이중모음인 ‘와’, ‘웨’ 등으로 적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hv는 [w]의 무성음인 [ʍ] 내지는 [hw]로 발음되었으니 뒤따르는 모음과 합쳐 ‘화’, ‘훼’ 등으로 적으면 된다. 이렇게 적을 경우 gv, kv 등은 ‘과’, ‘콰’와 같이 적을지, ‘그와’, ‘크와’와 같이 적을지 해결해야 한다. 나는 ‘과’, ‘콰’와 같은 표기가 나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대 노르드어 표기 관습에서 v는 보통 ‘ㅂ’으로 적는다. 이건 v가 [w]로 발음된다고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위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아이슬란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페로어 등 고대 노르드어에서 나온 모든 언어에서는 v가 [w]가 아니라 [v]로 발음된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Víðarr를 현대 북게르만 언어에서 모두 ‘비다르’라고 하는데 고대 노르드어의 발음을 따른다고 ‘위다르’라고 적는 것보다는 ‘비다르’로 적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라틴어의 한글 표기에서도 원래 고전 라틴어 발음에서 [w]로 발음되었던 v를 ‘ㅂ’으로 적는다는 것도 참고할만하다. 아직 어느 쪽이 좋을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위의 표에서는 v를 [w]인 것처럼 쓴 표기를 먼저 제시하고 괄호 안에 v를 ‘ㅂ’으로 적은 표기를 덧붙였다.
v를 ‘ㅂ’으로 적는다면 hv는 어떻게 하나?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에서 hv라는 철자에서 h는 발음되지 않는 묵음이고, 아이슬란드어에서 hv의 h는 [kʰ]로 발음된다. 스웨덴어도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와 비슷한 음의 변화를 겪었는데 고대 노르드어의 hv에 해당하는 음은 아예 v로 적는다. 노르웨이어의 뉘노르스크에서는 같은 음을 kv로 적고 그렇게 발음한다. 어차피 v를 ‘ㅂ’으로 적기 시작하면서 고대 노르드어의 발음과는 멀어졌다고 볼 수 있고, [hv]란 발음은 불안정하여 [h]가 탈락하거나 변화할 수 밖에 없었으니 마치 [h]와 [v]가 모두 발음되는 것처럼 적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v를 ‘ㅂ’으로 적는다면 hv도 ‘ㅂ’으로 적는 것이 좋겠다.
hl, hn, hr의 표기
아이슬란드어에서 철자 hl, hn으로 나타나는 어두의 무성 비음 [l̥], [n̥]는 ‘흘ㄹ’, ‘흐ㄴ’와 같이 적자고 주장했는데, 이처럼 고대 노르드어의 hl, hn, hr도 h를 밝혀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음이 무성화한다는 것이 생소하게 들린다면 그냥 [hl], [hn], [hr]로 이해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실제 고대 노르드어의 hl, hn, hr가 l, n, r의 무성음으로 발음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h의 요소가 결합된 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을 테니. 다만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 가운데 자음 앞이나 어말의 h는 표기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걸린다는 것이 흠이다. 위의 표에는 hl, hn, hr이 들어간 이름은 Hlín 뿐인데 이를 ‘흘린’으로 적을 것인지 ‘린’으로 적을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þ의 표기
외래어 표기법과 한글 대조표에 따르면 þ는[θ]로 발음되므로 ‘ㅅ’으로 적어야 한다. 하지만 영어의 표기에서도 [θ]를 ‘ㅅ’으로 적는 원칙은 가장 잘 안 지켜지는 것가운데 하나이다. ‘ㅆ’ 또는 ‘ㄷ’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지금까지 고대 노르드어 이름의 표기에서 þ를 ‘ㅅ’으로적은 예가 있는지 의문이 간다. 북유럽 신화의 주신 가운데 Þórr는 ‘토르’라고 하지, ‘소르’라고 적은 예를 본 적이 없다.
þ는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에서는 t와 합쳐졌다. 그러니 v의 경우처럼 þ도 현대 발음에서는 [t]에 해당한다고 보고 ‘ㅌ’으로 적을만도 하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어에서는 þ가 보존되었으며 아직도 [θ]로 발음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위의 표에서는 þ를 ‘ㅅ’으로 적은 표기를 먼저 제시하고 ‘ㅌ’으로 적은 표기를 괄호 안에 덧붙였다.
ng의 표기
[ŋg]로 발음된다고 보고 언제나 g의 발음을 밝혀 ‘ㅇㄱ’으로 적는 것이 좋겠다. 예전에는 Jǫrmungandr처럼 n으로 끝나는 앞의 요소와 g로 시작하는 뒤의 요소가 만난 합성어의 경우는 ng를 ‘ㄴㄱ’으로 적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반인이 고대 노르드어의 합성어를 구별하기도 어렵고 꼭 그런 식으로 발음 구별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이제는 ng는 ‘ㅇㄱ’으로 적는 것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이다. 예를 들면 Jǫrmungandr도 ‘요르뭉간드’로 적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자음 앞의 ng에서도 g가 발음된다는 것이다. 트랙백한 글에서도 오딘의 창 gungnir에서 둘째 g가 발음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고대 노르드어에서는 ng의 g는 무조건 발음되는 것으로 봐서 gungnir는 ‘궁그니’와 같이 적는 것이 좋겠다.2024. 5. 25. 추가 내용: 지금은 합성어의 경우에는 n과 g의 경계를 생각해서 Jǫrmungandr는 ‘요르문간드’로 적는 것이 낫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말의 ng는 ‘ㅇ’으로 적자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으니 gungnir의 경우에도 ‘ㄱ’을 생략할지 궁금히 여길 수 있겠지만 ng 뒤에 모음이나 유음, 비음이 따르는 경우는 ‘ㄱ’을 여전히 표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뒤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격조사 -r는 생략하여 원문의 ‘궁그니르’는 ‘궁그니’로 수정하였다.
헨리 퓨즐리(Henry Fuseli)의 1788년작 “Thor battering the Midgard Serpent” (그림 출처)
격조사 r의 표기. Baldr, Heimdallr, Hǫðr, Þrymr 등 고대 노르드어 이름 상당수에는 격조사 r가 붙어있다. 자음 뒤에 붙은 격조사 r는 발음이 어려워 현대 아이슬란드어에서는 ur로 변했고 문법이 많이 단순화된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에서는 아예 격의 구분과 격조사가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서 영어 등 다른 언어에서는 Heimdall, Hod, Thrym과 같이 격조사 r를 생략한 형태를 많이 쓴다. 그런가하면 Baldr처럼 r가 보존되어 Balder, Baldur의 형태로만 알려진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형태에서 격조사 r가 보존되는지, 생략되는지 규칙은 없는 듯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일수록 격조사 r를 생략해도 될지의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예전에는 필요에 따라 격조사 r를 생략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고대 노르드어 이름 여러 개를 한글로 표기하려니 일관된 원칙을 세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Ilmr와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여신의 경우도 기계적으로 r을 생략하고 표기할 것인가? 그래서 위의 표에서는 일단 격조사 r를 생략하지 않은 완전한 형태를 바탕으로 한글 표기를 정하였다. 자음 뒤에 오는 격조사 r는 모두 ‘르’로 적는 것으로 통일하였다.
2024. 5. 25. 추가 내용: 지금 생각은 고대 노르드어 격조사 r는 한글 표기에서 생략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Baldr는 속격형이 Baldrs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r가 어간의 일부이니 한글 표기에 포함하여 ‘발드르’로 쓴다. 반면 Heimdallr는 속격형이 Heimdallar, 대격형·여격형이 Heimdall이니 r가 어간의 일부가 아니므로 ‘헤임달’로 쓴다. 이에 따라 위의 표에 쓴 표기도 수정하였다.
자음 뒤의 반모음 j의 표기. 고대 노르드어에서 bj, fj, gj 등 자음 뒤에 j가 오는 경우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외래어 표기법에서 자음 뒤의 반모음 [j]를 표기하는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언어의 특징에 따라 다르게 처리한다. 그나마 참고할만한 것은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인데 거기에서는 반모음 [j]의 음가를 가진 j는 뒤의 모음과 합쳐 ‘야’, ‘예’ 등으로 적고 앞의 자음과도 합쳐 적는다고 하고 있다(예: Cetinje 체티녜). 그런가 하면 같은 반모음 [j]의 음가를 가지고 있더라도 i나 y로 적힌 음은 처리 방식이 다르다. i는 뒤의 모음과 합치지 않고 ‘이’로 적고, y는 자음과 모음 사이에 있을 때 앞의 자음과만 합쳐 적으라고 하고 있다(예: Konya 코니아). 그러니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을 따른다면 고대 노르드어의 j는 자음과 모음 사이에 올 때 앞뒤의 음과 합쳐 적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고대 노르드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의 표기 규정에서는 [j]의 음가를 가진 j는 자음과 모음 사이에 있을 때 앞의 자음과만 합쳐 적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Njǫrðr에 해당하는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 스웨덴어 공통 이름인 Njord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식으로는 ‘니오르’, 스웨덴어식으로는 ‘니오르드’가 된다. 고대 노르드어의 Njǫrðr도 ‘뇨르드’라고 적는 것보다 ‘니오르드’라고 적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여러 모로 자음 뒤의 j는 뒤의 모음과 합치지 않고 ‘니오르드’와 같이 적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일단 j를 뒤의 모음과 합쳐 적으려 하면 잘 안 쓰는 한글 음절을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뒤의 모음과 합쳐 적는 방식으로 Fjalarr는 ‘퍌라르’가 될 텐데 ‘퍌’이란 음절은 지원하지 않는 글꼴도 있을만큼 한국어에서 쓰이는 일이 없는 음절이다. ‘피알라르’라고 쓰면 이런 문제는 없다. 또 발음 상의 문제도 있다. 그나마 고대 노르드어에는 je, jæ와 같이 ‘예’로 적을 조합을 안 쓰는 것이 다행이지만 만약 ‘볘’, ‘톄’와 같은 표기를 할 필요가 있었더라면 이는 [베], [테] 등으로 발음되어 반모음 [j] 발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에서 j를 뒤의 모음과 합쳐 적으라고 한 것은 많은 언어에서 일부 자음이 j와 합쳐 한 음으로 발음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의 표기 규정을 보면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는 kj, sj, skj, tj를, 덴마크어는 sj를 뒤 모음과 합쳐 ‘샤’, ‘셰’ 등으로 적도록 되어 있다. 이들 음이 사실 ‘자음+반모음’이 아니라 [ʃ], [ç] 등 한 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뒤의 모음과 합쳐 적는 것이 원 발음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어 Reykjavík의 kj도 사실 [kj]라기보다는 구개음화된 [c]로 발음되기 때문에 kja를 ‘키아’로 나누어 쓰는 것보다 ‘캬’로 쓰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깝다. 반모음 [j]에 해당하는 음소가 있는 언어마다 ‘자음+반모음’이 아니라 한 음으로 발음되는 ‘자음+j’ 조합이 한두 개는 되지만 어떤 조합이 그렇게 발음되는지 따지기보다는 모두 뒤의 모음과 합쳐 적는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은 동유럽 언어(1992년)과 북유럽 언어(1995년)에 대한 표기 규정조차 제정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표기 규정이 고시되면서 이들 언어에서 자음 뒤의 j는 뒤의 모음과 합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시기상 먼저 제정된 동유럽 언어 표기 규정 중 세르보크로아트어 규정을 보면 한 음으로 발음되는 lj, nj 외에도 다른 자음 뒤에 j가 붙는 조합을 뒤의 모음과 합쳐 적도록 하고 있다. 다만 ‘ㅅ’ 이외의 자음 뒤에 ‘예’가 결합하는 경우는 ‘예’ 대신 ‘에’를 쓰고 있다(예: bjedro 베드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을 최대한 따르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제정된 북유럽 언어 표기 규정에서는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에서 벗어나 j를 뒤의 모음과 분리해서 적는 방식을 체택한 것이다.
스웨덴 욀란드 섬에서 발견된 미올니르(Mjǫllnir) 모양 펜던트의 그림 (그림 출처)
지금까지의 고대 노르드어 표기는 j를 뒤의 모음과 합쳐 적는 방식이 더 많이 쓰였을 수도 있다. 토르의 망치인 Mjǫllnir의 경우 ‘미올니르’보다 ‘묠니르’로 많이 쓰는 것 같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영어 등 j가 반모음 [j]를 나타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언어에서는 고대 노르드어 이름의 j를 i로 바꾸곤 한다. Njǫrðr를 Niord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이에 따라 ‘니오르드’와 같이 표기하는 경우를 감안하면 ‘니오르드르’와 같이 적는 것이 오히려 익숙한 표기에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고대 노르드어에서 한 음으로 처리할만한 ‘자음+j’ 조합이 있을까? 나는 sj, hj는 뒤의 모음과 합쳐 각각 ‘샤’, ‘햐’ 등으로 적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고대 노르드어의 발음을 직접 확인할 길은 없지만 여러 언어를 비교해볼 때 이들 조합이 한 음으로 발음되기 쉬운 조합 같고 특히 sj는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에서 모두 한 음으로 발음되는 음이다. 위의 표에서 자음 뒤의 j는 모두 뒤따르는 모음과 분리해서 적되 sj, hj는 합쳐 적었다. 또 gj, kj도 ‘갸’, ‘캬’ 등으로 적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스위트의 설명처럼 이들이 각각 g, k가 구개음화된 [ɟ], [c]로 발음된다면 그렇게 적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까울 것이다. 아이슬란드어에서 gj와 kj가 각각 [c], [cʰ]로 발음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랬을 듯하다.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에서는 gj, kj라는 철자가 아예 [j], [ɕ] 음을 나타내게 되었고 덴마크어에서는 전설 모음 앞의 gj, kj가 g, k로 단순화된 것도 고대 노르드어 때부터 gj, kj가 한 음으로 발음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2009. 3. 26. 추가 내용).
2024. 5. 25. 추가 내용: Njǫrðr는 게르만 조어 *Nerþuz에서 왔고 Mjǫllnir는 게르만 조어 *meldunjaz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노르드어에서는 게르만 조어의 e, ē가 ja, já, jǫ로 변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고대 노르드어 및 북게르만어의 j는 모음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sj, hj처럼 자음 뒤에 j가 붙는 경우와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결론과 앞으로의 과제
이번 연구를 통해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이름은 고대 노르드어 표준 표기에 따라 한글 표기를 정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영어에서 상황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은 알았지만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의 경우 여러 표기가 혼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방법은 없다. 원전의 고대 노르드어 표준 표기에 맞추어 한글 표기도 통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다. ‘영어에서 쓰는 표기’나 ‘노르웨이어에서 쓰는 표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이들 언어에서도 단일 표준이 없으니 적용할 수 없고, 예를 들어 북유럽 신화에 관한 특정 영어 서적에서 쓰는 영어 표기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도 그 책에 나오지 않는 이름에는 적용할 수 없다.
그럼 고대 노르드어를 한글로 표기하기 위해 뚜렷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그런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생각해볼 문제들을 몇가지 제시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외래어 표기법 전통과 고대 노르드어의 발음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지금까지 북유럽 신화의 이름들이 어떻게 한글로 표기되었는지 조사를 하지 못했고 고대 노르드어를 한글로 표기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도 알아볼 기회가 없었다.
또 생각해볼 문제는 고대 노르드어를 기준으로 하는 표기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하느냐는 것이다. 북유럽 공통의 신화와 전설에서 역사 시대로 넘어가면 어느 시점에서 고대 노르드어가 아니라 아이슬란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를 기준으로 표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점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아이슬란드의 사가 문학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은 고대 노르드어를 기준으로 적을 것인가, 아이슬란드어를 기준으로 적을 것인가? 스노리 스툴루손(Snorri Sturluson)도 현대 아이슬란드어 발음대로 적으면 ‘스노리 스튀르들뤼손’이다.
2024. 5. 25. 추가 내용: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스노리 스툴루손(Snorri Sturluson)’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고대 노르드어를 기준으로 한 표기는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나을 것이다.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 표기 규정에서 모음 사이의 rl을 ‘ㄹㄹ’로 적게 한 것은 대부분의 방언에서 rl이 한 음으로 합쳐 [ɭ]로 실현되는 것을 반영한 것인데 고대 노르드어의 표기에는 적용할 근거가 없다.
북유럽 신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많다는 것을 느끼는데 아직까지 이름 표기의 표준화와 같은 기본적인 작업이 덜 되어있는 것 같아 아쉬운데 지금부터라도 고대 노르드어 표준 표기에 맞추어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이름의 한글 표기를 통일해나가보자는 생각에 좀 장황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