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오픈 결승에 진출한 한국계 테니스 선수 제시카 퍼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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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대회에서 단식 8강 이상의 성적을 낸 적이 없던 미국 테니스 선수 제시카 퍼굴라(Jessica Pegula [ˈʤɛsɪkə pəˈɡuːlə])가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결승에 진출했다. 한국 언론에서는 보통 그의 성을 ‘페굴라’로 표기하면서 그가 한국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 미국 언론에서는 그의 부모가 억만장자 석유 재벌인 테리 퍼굴라(Terry Pegula)와 킴 퍼굴라(Kim Pegula) 부부로 테리는 NHL 아이스하키 팀 버펄로 세이버스(Buffalo Sabres)의 구단주이고 퍼굴라 부부는 NFL 미식축구 팀 버펄로 빌스(Buffalo Bills)의 공동 구단주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편이다. 킴 퍼굴라는 NFL 최초의 여성 구단주라는 기록도 세웠다.

2022년에 심장 정지를 겪는 등 최근 건강 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킴 퍼굴라는 혼인 전 성이 커(Kerr)였다. 그는 한국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생년월일만 알려져 있고 본명이나 친부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본인 기억도 없다. 다섯 살 때 길거리에 버려졌다고 하며 미국에 보내져 커(Kerr)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DNA 검사에 따르면 친부모 중 한 명이 일본인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덤불진 늪을 이르는 중세 영어 단어에서 나온 Kerr는 잉글랜드와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성씨로 쓰이는데 원래의 스코틀랜드식 발음은 [ˈkɛə̯ɹ] ‘케어’이지만 요즘은 [ˈkɜːɹ] ‘커’로 많이 발음하며 [ˈkɑːɹ] ‘카’로 발음하기도 한다.

중세 영어의 /ɛr/는 자음 앞이나 어말에서 오늘날의 START 모음 [ɑːɹ]로 변한 것이 많다. 다른 언어에서는 보통 ‘에르’로 발음하는 자모 R를 영어로 [ˈɑːɹ] ‘아/알’로 발음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중세 영어에서 ferre 또는 fer로 쓰던 far [ˈfɑːɹ] ‘파’, 중세 영어에서 sterre로 쓰던 star [ˈstɑːɹ] ‘스타’와 같이 철자도 발음에 따라 ar로 쓰게 된 경우도 많지만 sergeant [ˈsɑːɹʤənt] ‘사전트’처럼 철자는 여전히 er인데 [ɑːɹ]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다.

clerk, derby 같은 일부 단어는 영국 영어에서 보통 [ˈklɑːɹk] ‘클라크’, [ˈdɑːɹbi] ‘다비’로 발음하지만 미국 영어에서는 보통 철자식으로 [ˈklɜːɹk] ‘클러크’, [ˈdɜːɹbi] ‘더비’로 발음한다. 고유 명사에서도 이처럼 발음이 갈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영국 철학자 George Berkeley는 적어도 영국 영어에서 [ˈʤɔːɹʤ ˈbɑːɹkli] ‘조지 바클리’로 발음하지만 그의 이름을 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대학교는 미국 영어에서 [ˈbɜːɹkli] ‘버클리’라고 발음한다.

이런 단어의 경우 영국에서는 er를 [ɑːɹ]로 발음하지만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는 철자식으로 [ɜːɹ] 발음하는 일이 많은 듯하다. Derby도 오스트레일리아 지명으로서는 ‘더비’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영국 인명이나 지명으로 쓰이는 Berkeley, Derby도 영국 발음과는 다르게 ‘버클리’, ‘더비’로 제시하고 있다. 비슷한 논리를 따랐는지 영국 배우 데버라 카(Deborah Kerr [ˈdɛbəɹə ˈkɑːɹ])도 2007년 11월 28일 제78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커, 데버러’로 표기를 심의했다가 2019년 6월 19일 제14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커, 데버라’로 Deborah의 표기를 수정했다.

아무래도 영미 발음 차이를 무시하고 규칙적인 한 쪽으로 표기를 통일하겠다는 취지인 것 같다.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John Kerr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커’로 쓰고 있지만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 [ˈʤɒn ˈkɛə̯ɹ] ‘존 케어’로 부르는 것이 어울린다. 그런데 《메리엄·웹스터 인명 사전》에서는 스코틀랜드 가문 Kerr의 발음을 \ˈke(ə)r, ˈkər, ˈkär\ 즉 [ˈkɛə̯ɹ, ˈkɜːɹ, ˈkɑːɹ] ‘케어, 커, 카’로 제시하고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도 물리학 용어 Kerr effect 등에서 쓰이는 Kerr의 영국식 발음을 /kəː, kɛː, kɑː/ 즉 [ˈkɜːɹ, ˈkɛə̯ɹ, ˈkɑːɹ] ‘커, 케어, 카’로 제시하고 있다. 즉 이런 과거 인명에서는 어느 발음을 기준으로 표기할지 애매할 수가 있다.

하지만 발음을 확인하기가 더 쉬운 오늘날의 인명은 그냥 현지 발음, 되도록이면 본인 발음대로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자 축구에는 현재 Sam Kerr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선수 두 명이 활약하고 있는데 한 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Sam Kerr [ˈsæm ˈkɜːɹ] ‘샘 커’이고 다른 한 명은 스코틀랜드의 Sam Kerr [ˈsæm ˈkɛə̯ɹ] ‘샘 케어’이다. 이들의 본인 발음은 각각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 다 ‘샘 커’로 적기보다는 본인 발음에 따라 ‘샘 커’, ‘샘 케어’로 나눠 적는 것이 나을 것이다.

Kim Kerr의 성을 본인이 발음한 것은 찾지 못했지만 그의 성씨를 미국 매체에서는 한결같이 ‘커’로 발음한다.

Pegula라는 성의 기원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고 검색해보면 크로아티아어나 폴란드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볼 수 있다. 폴란드어 성씨 Pigula ‘피굴라’와 Piguła ‘피구와’, 우크라이나어 성씨 Пигуля(Pyhulia) ‘피훌랴’, 러시아어 성씨 Пекула(Pekula) ‘페쿨라’ 등 몇몇 슬라브어에서 이와 유사한 것을 몇 개 찾을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은 확인하기 어렵다.

어쨌든 Pegula 집안에서는 그들의 성씨를 [pəˈɡuːlə] ‘퍼굴라’로 발음한다. 다음 동영상에서 아버지 테리 퍼굴라의 발음을 들을 수 있다.

제시카 퍼굴라 본인의 발음은 WTA(여자 테니스 협회)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모음 약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철자 e가 약화된 모음 [ə] ‘어’로 발음되기도 하고 DRESS 모음 [ɛ] ‘에’로 발음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Angelina, Jerome, Joel, Melissa, Noel 같은 이름은 보통 [ˌænʤəˈliːnə] ‘앤절리나’, [ʤəˈɹoʊ̯m] ‘저롬’, [ˈʤoʊ̯əl] ‘조얼’, [məˈlɪsə] ‘멀리사’, [ˈnoʊ̯əl] ‘노얼’ 등으로 발음되지만 모음이 약화되지 않은 [ˌænʤɛˈliːnə] ‘앤젤리나’, [ʤɛˈɹoʊ̯m] ‘제롬’, [ˈʤoʊ̯ɛl] ‘조엘’, Melissa [mɛˈlɪsə] ‘멜리사’, Noel [ˈnoʊ̯ɛl] ‘노엘’로 발음하는 것도 가능하다. 표기 용례를 보면 ‘앤젤리나’, ‘제롬’, ‘조엘’, ‘노엘’은 약화되지 않은 음가에 따라 표기했지만 ‘멀리사’는 약화된 음가로 표기했다. 되도록이면 약화되지 않은 원 발음을 기준으로 하는 원칙에 따르면 Melissa도 ‘멜리사’로 적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면 Pegula도 혹시 [*pɛˈɡuːlə] ‘*페굴라’로 발음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실 그런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확인해본 여러 동영상에서는 [pəˈɡuːlə]라는 발음만 관찰되고 드문 성씨라서 발음에 대한 다른 자료를 찾기도 어려우니 그냥 관찰되는 발음을 기준으로 ‘퍼굴라’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영어권 고유 명사를 표기할 때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얼마 전에 끝난 파리 올림픽 여자 4 × 200m 자유형 계영에서 은메달을 딴 미국 팀의 일원인 Anna Peplowski는 본인이 성을 [pəˈplaʊ̯ski] ‘퍼플라우스키’라고 발음한다.

하지만 다른 동영상에서는 현지 방송에서 [pɛˈplaʊ̯ski] ‘페플라우스키’로 발음하는 것도 관찰된다.

이 이름을 Pep-lowski로 분절하면 Pep-에서 모음을 약화시키지 않고 DRESS 모음 [ɛ] ‘에’를 쓰는 것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고민 끝에 이 이름에서는 [ə] ‘어’와 [ɛ] ‘에’ 둘 다 가능한 것으로 보고 2024 파리 올림픽 입상 선수 한글 표기 문서에서는 ‘페플라우스키’로 표기하기로 했다.

Pegula의 한글 표기는 심의된 적이 없고 영어에서도 드문 성이니 한국 매체에서 그냥 철자대로 ‘페굴라’로 표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원칙적으로 ‘퍼굴라’라고 써야 하겠다. 물론 스포츠, 영화, 음악 등에서 접하는 수많은 외국어 인명은 원 발음을 완전히 잘못 파악하고 쓰는 경우도 수두룩하니 약화된 [ə] ‘어’로 발음되는 철자 e를 ‘에’로 쓴 ‘페굴라’ 정도를 가지고 괜히 문제삼을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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