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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올림픽에서 근거 없는 성별 논란에 휩싸인 알제리 복싱 선수는 이름을 로마자로 Imane Khelif로 표기한다. 한국 매체에서는 ‘이마네 칼리프’로 흔히 표기하고 있지만 알제리식 발음에 따른 표기는 ‘이만 흘리프’가 적절하다.
한국 매체에서는 그가 마치 남성 염색체인 XY염색체를 가진 것처럼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증거는 제시된 적이 없다. 올림픽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에서 퇴출된 국제 복싱 협회(IBA) 회장이 주장했을 뿐이다. 비슷한 논란에 휩싸인 대만 복싱 선수 린위팅(林郁婷[Lín Yùtíng])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를 확인 없이 기정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는 태세가 안타깝다.
흘리프와 린위팅은 여자로 태어났고 여자로 자라났으며 여자 선수로 복싱에 입문하였다. 3년 전에 이들은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여 흘리프는 8강에서, 린위팅은 16강에서 탈락했다. 그동안 그들의 성별을 문제삼은 이는 없었다.
한편 아마추어 복싱에 관심이 있지 않다면 잘 모르겠지만 IBA는 최근에 위상이 추락하여 국제 스포츠계에서 신뢰도가 떨어진 기구이다. IBA는 원래 IOC에서 복싱을 관장하는 기구로 인정했으나 편파 판정, 부패로 물의를 일으켜 왔다. 그러다가 2018년 조직 범죄와 헤로인 밀거래에 연루된 의혹이 있는 우즈베키스탄인 고푸르 라히모프(Gʻofur Rahimov)를 회장으로 선출한 이후 비난이 거세지면서 2019년 IBA의 승인이 중지되었으며 2023년에 공식적으로 IOC에서 퇴출되었다. 도쿄 올림픽부터 올림픽 복싱은 IOC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
승인이 취소된 이후 IBA는 2020년 러시아인 우마르 크렘료프(Умар Кремлёв/Umar Kremlyov)가 회장으로 취임하고 조직 대부분을 러시아로 옮겼으며 우크라이나 선수들을 퇴출시키고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Gazprom)을 유일 스폰서로 세우는 등 사실상 러시아가 운영하는 기구가 되었다. 하지만 알제리, 대만 등은 아직 IBA 소속이어서 흘리프와 린위팅은 2023년 IBA가 주관하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IBA는 이 대회에서 두 선수를 실격 처리했다. 그들이 성별 확인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검사를 치렀으며 정확히 어떤 성별 확인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는지의 내용은 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흘리프는 하필 그 대회에서 그때까지 패배가 없던 신예 러시아 선수 아잘리야 아미네바(Азалия Аминева/Azaliya Amineva)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었다. IBA는 그를 실격 처리함으로써 러시아 선수의 무패 기록을 보존시켰다.
IOC는 IBA의 두 선수 실격 처리가 갑작스럽고 임의적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취해졌다며 이들의 올림픽 출전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린위팅은 그 후 성별 검사를 문제 없이 통과해서 2023년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크렘료프는 두 선수가 X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XY염색체를 가졌다고 보도하고 있는 한국 매체들은 올림픽에서 제명된 기구 회장의 주장만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에서 흘리프가 이탈리아의 안젤라 카리니(Angela Carini) 선수를 상대로 46초만에 승리를 거둔 이후 이런 루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사실 확인이 없는 선정적인 언론 보도와 함께 성별 문제에 대한 히스테리아도 한몫했을 것이다. 최근에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을 수 있는 성전환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 스포츠 참가에 대한 논란도 진행 중이다. 물론 흘리프와 린위팅은 남자도 아니고 트랜스젠더도 아니며 평생 여성 정체성을 가진 여자로 살아온 이들이다.
하필 IOC 위원장 토마스 바흐도 흘리프와 린위팅의 올림픽 참가를 허락한 것을 변호하는 발언에서 트랜스젠더와 성적 발달의 차이(DSD, differences in sexual development)를 혼동해서 IOC에서 정정 발표를 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성적 발달의 차이는 염색체나 생식샘, 생식기의 발달에서 이상을 일으켜 일반적인 성별 분화와 차이가 나는 경우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만약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가졌지만 보통 남성에만 있는 X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면 성적 발달의 차이의 한 예이다. 그러나 크렘료프의 주장 외에는 흘리프나 린위팅이 성적 발달의 차이가 있다는 증거가 없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남녀 두 성만 인정하는 이분법식 성별에만 익숙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훨씬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인은 뭐가 뭔지 혼동하기 쉽다. 여자로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가 마치 진정한 여자가 아닌 것처럼 보도하면 일반인은 불공정한 경쟁이라고 여기기 쉽다. IBA는 이 논란을 이용하여 IOC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성하면서 올림픽을 원색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분명한 점은 현재로서는 흘리프와 린위팅 두 선수가 일반 여자 선수와 다른 생물학적 특징이 있다는 증거는 없고 IBA와 IOC의 정치적인 공방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만 흘리프의 이름은 아랍 문자로 إيمان خليف라고 쓰며 문어체 아랍어로는 ʾĪmān Khalīf ‘이만 할리프’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마련했으나 고시하지 않은 아랍어 표기 시안에서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 [x] 내지 무성 구개수 마찰음 [χ]로 발음되는 خ kh를 ‘ㅋ’으로 적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독일어, 에스파냐어, 중국어, 폴란드어, 체코어, 세르보크로아트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등의 표기에서 [x~χ]를 꾸준히 ‘ㅎ’으로 적어왔다. 아랍어의 표기에서 예외를 둘 이유는 없다. 문어체 아랍어 Khalīf는 ‘칼리프’ 대신 ‘할리프’로 적는 것이 낫다.
그런데 알제리 고유 명사는 보통 문어체 아랍어 발음과 다른 구어체 아랍어 발음에 따라 로마자로 표기한다. 특히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며 Imane Khelif는 프랑스어식 로마자 표기에 따른 철자이다. 이웃한 모로코, 튀니지에서도 현지 고유 명사는 보통 프랑스어식으로 로마자로 표기한다.
Imane의 e는 음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Iman으로만 쓰면 프랑스어로 마치 *[imɑ̃] ‘*이망’으로 발음되는 것으로 오해할까봐 덧붙인 것이다. 그러니 ‘*이마네’로 쓰는 것은 틀린 표기이다. 비슷한 예로 문어체 아랍어 مروان Marwān ‘마르완’에 해당하는 이름을 프랑스어식 철자로 Marouane [maʁwan]으로 쓴 것을 ‘*마루아네’로 잘못 적는 것도 볼 수 있다.
알제리 구어체 아랍어는 보통 문어체 아랍어 الدارجة ad-dārijah ‘다리자’에 해당하는 이름인 다르자(darja)로 불린다. 알제리 공영 방송에 보도된 다음 동영상에서 흘리프가 알제리 구어체 아랍어로 본인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본인 발음은 [iman χəlif] 정도이다. 북아프리카 구어체 아랍어는 모음 약화가 심하기 때문에 거의 [iman χlif] 정도의 발음도 관찰된다. 북아프리카 아랍어에서는 아랍어 kh의 발음이 주로 연구개음 [x]보다는 구개수음 [χ]이다.
같은 동영상에서 프랑스어로 말하면서 이 이름은 아랍어식으로 [iman χəlif]로 발음하는 것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알제리 방송이니 아랍어도 구사하는 알제리인이 발음한 것이다. [χ]를 ‘ㅎ’로 표기한다는 전제 하에 프랑스어의 [ə]는 ‘으’로 표기하므로 프랑스어식 로마자 표기의 [ə]도 ‘으’로 적으면 [iman χəlif]이든 [iman χlif]이든 현지 발음에 가장 가까운 표기는 ‘이만 흘리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로마자로 표기한 구어체 아랍어에서 e는 발음이 모호할 때가 많다. 프랑스어 철자에서 e는 [ə] ‘으’일 수도 있고 [e] ‘에’나 [ɛ] ‘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 구어체 아랍어에서는 조금 덜하지만 특히 튀니지에서는 문어체 아랍어의 ā ‘아’에 해당하는 모음이 [ɛ]로 발음되는 일이 많아 로마자의 e를 ‘에’로 적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태생의 모로코 축구 선수 이름인 Ziyech는 [zijɛʃ] ‘지예시’라는 발음을 나타내는 프랑스어식 로마자 표기이다.
프랑스에서는 Khelif의 kh를 [χ] 내지 프랑스어의 r와 같은 [ʁ]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어 주류 발음에서 r는 보통 유성 구개수 마찰음 [ʁ]로 발음되고 그 변이음으로 무성 구개수 마찰음 [χ]도 흔히 나타나기 때문에 외국어의 [χ]는 프랑스어의 r인 것처럼 [ʁ]로 흉내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Imane Khelif는 프랑스어로 [iman χelif] ‘이만 헬리프’ 내지 [iman ʁelif] ‘이만 렐리프’로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동영상 1, 동영상 2)
물론 철자 kh를 아예 [k]로 읽어서 [iman kelif] ‘이만 켈리프’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다(동영상 1, 동영상 2).
물론 철자가 *Khélif였다면 é가 [e]로 발음된다는 것이 확실했을 테지만 e로 썼으니 [ə]나 [e]일 수 있는데 외국어의 e는 보통 [e]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알제리식 발음에 따른 표기는 ‘이만 흘리프’, 프랑스식 발음에 따른 표기는 ‘이만 헬리프’ 또는 ‘이만 켈리프’이다.
처음 Imane Khelif의 표기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프랑스식 발음에 따라 ‘이만 헬리프’로 적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제리 고유 명사를 전반적으로 보면 어두 개음절의 e는 현지 발음에 따라 [ə]로 간주하고 표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에서는 ‘흘리프’로 표기했다.
프랑스에서 북아프리카 고유 명사의 어중 개음절 e를 [e]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으니 한글 표기도 ‘에’로 통일하는 것을 고려했던 것이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도 알제리 지명 Relizane은 보통 [ʁəlizan] ‘를리잔’으로 발음하여 첫 e를 [ə]로 실현한다. 이 이름은 문어체 아랍어 غلیزان Ghulayzān ‘굴라이잔’, 베르베르어 Ɣilizan ‘길리잔’에 해당하는데 아랍어 غ gh [ʁ], 베르베르어 ɣ [ʁ]를 로마자 r에 대응시킨 것이 흥미롭다. 같은 유성 구개수 마찰음이라도 아랍어 gh, 베르베르어 ɣ는 유성 구개수 폐쇄음 [ɢ]에 해당하는 마찰음으로 보고 ‘ㄱ’으로 적는 것이 좋지만 프랑스어의 r [ʁ]는 유음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ㄹ’로 적는다.
그러니 프랑스식 발음보다는 알제리 현지 발음을 존중하여 Khelif는 ‘흘리프’로 적는 것이 좋을 듯하다. 준비 중인 2024 파리 올림픽 입상 선수 한글 표기 문서에서도 현재로서는 ‘흘리프’로 표기할 생각이다.
다만 아직 의견이 바뀔 여지는 있다. 문어체 아랍어 بني Banī ‘바니’에 해당하는 말은 북아프리카 고유 명사에 가끔 등장하는 요소인데 현지 발음은 [bəni] ‘브니’에 가깝지만 프랑스에서는 [beni] ‘베니’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알제리 지명 Béni Abbès, Béni Saf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아예 철자 Béni로 쓰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어 발음은 각각 [beni abɛs] ‘베니아베스’, [beni saf] ‘베니사프’이다. 그러니 가장 널리 쓰이는 철자를 확인하여 é가 아닌 e는 개음절에 있어서 프랑스식 발음에서도 [ə]로 발음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 ‘으’로 적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북아프리카 고유 명사에서 e의 처리는 이처럼 복잡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