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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전륜왕(轉輪王)으로 의역되는 산스크리트어 용어를 चक्रवर्ती cakravartī ‘차크라바르티’로 제시했더니 이것은 힌디어 형태이고 산스크리트어 형태는 चक्रवर्तिन् cakravartin ‘차크라바르틴’이 아니냐는 댓글이 달렸다. 그래서 cakravartī가 산스크리트어 주격형이라고 답했지만 과연 이것을 대표형으로 삼는 것이 합당한지 찝찝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결국 cakravartin으로 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데 이 어족에 속하는 언어는 오래된 형태일수록 명사와 대명사, 형용사에서 성(姓, gender)·수(數, number)·격(格, case)에 따라 복잡한 어형 변화를 보인다. 이를 곡용(曲用, declension) 또는 격 변화라고 부른다. 격의 수는 산스크리트어가 여덟 개, 고대 페르시아어는 일곱 개, 라틴어는 여섯 개, 고대 그리스어는 다섯 개로 산스크리트어가 고대 인도·유럽어 가운데서도 격이 많은 편이다. 이들의 공통 조어인 인도·유럽 조어에서는 격이 여덟 개 또는 아홉 개가 있었던 것으로 재구된다.
남성 단수형으로 한정하여 cakravartin의 격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격(主格, nominative): चक्रवर्ती cakravartī
호격(呼格, vocative): चक्रवर्तिन् cakravartin
대격(對格, accusative): चक्रवर्तिनम् cakravartinam
조격(造格, instrumental): चक्रवर्तिना cakravartinā
여격(與格, dative): चक्रवर्तिने cakravartine
탈격(奪格, ablative): चक्रवर्तिनः cakravartinaḥ
속격(屬格, genitive): चक्रवर्तिनः cakravartinaḥ
처격(處格, locative): चक्रवर्तिनि cakravartini
산스크리트어 사전에서는 통상적으로 어간, 즉 곡용 어미를 떼어낸 부분을 표제어로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격형을 무시하고 다른 곡용형에서 모두 cakravartin-이 변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어간으로 간주하고 표제어로 제시한다(모든 어형에서 어간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판단이 개입된다).
이처럼 산스크리트어 명사의 어간을 기본형으로 삼는 것은 적어도 고대 문법학자 파니니(पाणिनि Pāṇini)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간과 각종 어미가 결합할 때 적용되는 여러 규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에 대해서는 예전 글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래서 사전에는 산스크리트어 표제어로 cakravartin이 실려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마치 호격형을 표제어로 삼은 듯하지만 표제어로 삼는 어간이 언제나 호격형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반면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인도 어파에 속하는 현대 힌디어에서는 기존 격이 합쳐지면서 격 체계가 많이 단순화되어 명사의 경우 직격(直格, direct)과 사격(斜格, oblique)이라고 불리는 격만 구별되며 일부 방언에서는 호격도 남아있다. 그런데 위 산스크리트어 용어를 차용한 단어는 남성 단수형이 직격·사격·호격에서 모두 चक्रवर्ती cakravartī ‘차크라바르티’이니 이 단어는 남성 단수형이 단 하나밖에 없다. 당연히 사전에는 힌디어 표제어로 cakravartī가 실려 있다.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 명사는 한글로 표기할 때 주격형을 기본 어형으로 삼는다. 속격형 Augusti, 여격형 Augusto, 대격형 Augustum 등 대신 주격형 Augustus를 기준으로 ‘아우구스투스’라고 쓰고 속격형 Ἀρχιμήδους(Archimḗdous), 여격형 Ἀρχιμήδει(Archimḗdei), 대격형 Ἀρχιμήδη(Archimḗdē) 등 대신 주격형 Ἀρχιμήδης(Archimḗdēs)를 기준으로 ‘아르키메데스’라고 쓰는 식이다.
그런데 산스크리트어 명사는 조금 다르다. 힌두교의 세 주신 이름의 격 변화를 살펴보자. 먼저 창조의 신 브라흐마(ब्रह्मा Brahmā)는 남성 단수형으로서 다음과 같은 격 변화를 보이며 산스크리트어 사전에는 어간 ब्रह्मन् Brahman이 표제어로 실려있다.
주격(主格, nominative): ब्रह्मा Brahmā
호격(呼格, vocative): ब्रह्मन् Brahman
대격(對格, accusative): ब्रह्माणम् Brahmāṇam
조격(造格, instrumental): ब्रह्मणा Brahmaṇā
여격(與格, dative): ब्रह्मणे Brahmaṇe
탈격(奪格, ablative): ब्रह्मणः Brahmaṇaḥ
속격(屬格, genitive): ब्रह्मणः Brahmaṇaḥ
처격(處格, locative): ब्रह्मणि Brahmaṇi
이것만 보면 한글 표기 ‘브라흐마’는 주격형 Brahmā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유지의 신 비슈누(विष्णु Viṣṇu)의 단성 단수형 격 변화는 다음과 같다.
주격(主格, nominative): विष्णुः Viṣṇuḥ
호격(呼格, vocative): विष्णो Viṣṇo
대격(對格, accusative): विष्णुम् Viṣṇum
조격(造格, instrumental): विष्णुना Viṣṇunā
여격(與格, dative): विष्णवे Viṣṇave
탈격(奪格, ablative): विष्णोः Viṣṇoḥ
속격(屬格, genitive): विष्णोः Viṣṇoḥ
처격(處格, locative): विष्णौ Viṣṇau
여기서는 호격형 Viṣṇo와 표제어로 쓰이는 어간 Viṣṇu가 차이가 난다. 한글 표기 ‘비슈누’는 주격형 Viṣṇuḥ가 아니라 어간 Viṣṇu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파괴의 신 시바(शिव Śiva)의 남성 단수형 격 변화가 다음과 같다.
주격(主格, nominative): शिवः Śivaḥ
호격(呼格, vocative): शिव Śiva
대격(對格, accusative): शिवम् Śivam
조격(造格, instrumental): शिवेन Śivena
여격(與格, dative): शिवाय Śivāya
탈격(奪格, ablative): शिवात् Śivāt
속격(屬格, genitive): शिवस्य Śivasya
처격(處格, locative): शिवे Śive
여기서도 주격형 Śivaḥ 대신 어간 Śiva가 한글 표기 ‘시바’의 원형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들을 ‘브라흐마(Brāhma)’, ‘비슈누(Viṣṇu)’, ‘시바(Śiva)’로 쓴다. 그런데 ब्राह्म Brāhma는 ‘브라흐마의’를 뜻하는 형용사형이니 명사형은 Brāhma가 아니라 어간 Brahman 또는 주격형 Brahmā를 쓰는 것이 맞다.
자음 앞이나 어말의 h를 묵음으로 처리하는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 따르면 Brāhma는 ‘브라마’로 써야 하겠지만 ‘브라흐마’와 승려 계급을 말하는 ‘브라흐마나(Brāhmana)’, 고대 인도 문자의 하나인 ‘브라흐미^문자(Brāhmi文字)’에서는 예외적으로 h를 ‘흐’로 적는다(원어 표기는 ब्राह्मण Brāhmaṇa, ब्राह्मी Brāhmī로 적는 것이 더 정확하다).
대신 ‘브라흐마의 아들’을 뜻하는 인도 동부와 방글라데시의 강 이름인 ब्रह्मपुत्र Brahmaputra는 ‘브라마푸트라-강(Brahmaputra江)’이라고 쓰며 그 준말에서 나온 닭 품종 이름인 Brahma는 ‘브라마-종(Brahma種)’이라고 부른다.
일단 비슈누와 시바의 경우는 주격형 Viṣṇuḥ, Śivaḥ 대신 어간 Viṣṇu, Śiva를 기준으로 하여 한글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어간이 각각 -u, -a로 끝난다고 하여 u어간 명사, a어간 명사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 명사 중에는 a어간 명사가 많다. u어간 명사와 곡용 방식이 비슷한 i어간 명사 즉 어간이 -i로 끝나는 명사도 적지 않다.
이들 외에도 a어간 명사인 बुद्ध Buddha ‘*붓다’, राम Rāma ‘라마’, योग yoga ‘요가’, i어간 명사인 पाणिनि Pāṇini ‘파니니’, शक्ति Śákti ‘샥티’, u어간 명사인 गुरु guru ‘구루’, मनु Manu ‘마누’ 등은 어간을 기본형으로 삼고 한글로 표기한다. 주격형인 Buddhaḥ, Rāmaḥ 등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ḥ는 [h]를 나타내는 것이니 어말이나 자음 앞의 h를 적지 않는다는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 따라 한글 표기에서 묵음으로 처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영어나 다른 언어에서도 Buddha, Rama 등 어간에서 비롯된 형태를 기본형으로 쓴다.
한편 Brahman처럼 -an으로 끝나는 어간을 쓰는 명사는 an어간 명사라고 하고 cakravartin처럼 -in으로 끝나는 어간을 쓰는 명사는 in어간 명사라고 한다. 이들의 한글 표기도 a어간, i어간, u어간 명사처럼 어간 Brahman, cakravartin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아니면 주격형 Brahmā, cakravartī를 기준으로 해야 할까?
《표준국어대사전》에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이르는 인도 철학의 용어는 ‘아트만(ātman)’으로 나온다. आत्मन् ātman도 an어간 명사로 주격형은 आत्मा ātmā이다.
7~8세기 산스크리트어 작가는 ‘단딘(Danin)’으로 나오는데 원어 표기는 Daṇḍin의 잘못으로 보인다. दण्डिन् Daṇḍin은 in어간 명사로 주격형은 दण्डि Daṇḍi이다.
많은 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an어간, in어간 명사도 a어간, i어간, u어간 명사처럼 주격형이 아닌 어간을 기준으로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जयवर्मन् Jayavarman ‘자야바르만’, महेन्द्रवर्मन् Mahendravarman ‘마헨드라바르만’ 등 인명에서 흔히 나타나는 요소인 an어간 명사 वर्मन् varman도 영어에서는 보통 주격형 वर्मा varmā 대신 어간 varman을 기준으로 쓴다.
그러면 왜 ‘브라흐마’는 어간을 기준으로 표기하지 않았을까? 영어 외에 독일어, 프랑스어 등에서도 Brahma, Brahmā, Brahmâ 등으로 적는 것을 보면 ‘브라흐마’는 설마 형용사형 Brāhma를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어에서도 ブラフマー[Burafumā] ‘부라후마’라고 부르니 Brāhma가 아닌 Brahmā를 나타낸 형태이다.
이것은 힌두교에서 우주의 근본적 실재를 말하는 개념인 Brahman ‘브라(흐)만’과 구별하기 위해 힌두교 신 이름은 Brahmā로 불렀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스크리트어의 악센트까지 표시하면 힌두교 철학 개념으로서의 Brahman은 첫 음절에 악센트가 오는 Bráhman이며 중성 명사이고 주격형은 ब्रह्म Bráhma이다. 남성 명사로 쓰일 때는 둘째 음절에 악센트가 오는 Brahmán이며 주격형은 Brahmā́이고 이 개념을 인격화한 신 이름으로 쓰인다. 즉 원래 같은 단어인데 중성 명사로 쓰일 때는 추상적인 의미를, 남성 명사로 쓰일 때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고대 인도의 베다(वेद Veda) 경전에서는 brahmán이 사제의 뜻으로도 쓰인다.
같은 어근 बृह् bṛh-에서 나온 ब्राह्मण Brāhmaṇa는 베다 경전에 나오는 제사에 대해 설명하는 주석서를 이르며 같은 말이 카스트 제도의 승려 계급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힌디어에서는 어말 a의 규칙적인 탈락으로 인해 ब्राह्मण Brāhmaṇ ‘브라만’이라고 부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브라흐마나(Brāhmana)’를 승려 계급의 의미와 베다 경전의 주석서의 의미로 쓰며 승려 계급의 의미로는 ‘브라만(Brahman)’을 동의어로 제시한다. 하지만 원어는 Brāhmana, Brahman이 아니라 Brāhmaṇa, Brāhmaṇ으로 쓰는 것이 맞다.
베다의 신앙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인도의 종교를 이르는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 ‘브라만-교(Brahman敎)’도 승려 계급을 뜻하는 Brāhmaṇ에서 나온 말이다. 브라만교는 ‘바라문-교(婆羅門敎)’라고도 부르는데 ‘바라문(婆羅門)’은 Brāhmaṇ(a)의 음역어이다.
승려 계급을 의미하는 Brāhmaṇa는 16세기 무렵 포르투갈어 bramine을 거친 프랑스어 bramine [bʁamin] ‘브라민’을 통해 영어에서 Brahmin [ˈbɹɑːm.ᵻn] ‘브라민’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였다. 오늘날에는 힌디어 Brāhmaṇ을 따른 Brahman으로 적기도 하지만 Brahmin이 여전히 널리 쓰인다. 아무래도 Brahman이라고 하면 철학 개념 Brahman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비슷한 용어가 여럿 있기 때문에 최대한 구별하기 위해서 철학 개념은 Brahman으로 쓰고 신 이름은 Brahma, 승려 계급은 Brahmin으로 쓰는 듯하다. 대신 브라만교는 영어에서도 Brahmanism으로 쓴다. 독일어, 프랑스어 등 다른 언어에서도 신 이름은 예외적으로 주격형 Brahmā를 따른다.
그러니 한국어에서도 신 이름으로서는 주격형 ‘브라흐마(Brahmā)’를 기준으로 ‘브라흐마’로 부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철학 개념으로서의 Brahman에 해당하는 말은 표제어로 실려있지 않은 듯하다. 한국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이것을 ‘브라흐만’이라고 써서 승려 계급 ‘브라만’과 구별한다.
한편 산스크리트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어간이 아닌 주격형을 표제어로 쓰기 때문에 남성 주격형 ब्रह्मा Brahmā를 신 이름으로, 중성 주격형 ब्रह्म Brahma를 철학 개념으로 쓴다.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되는 위키백과가 있다는 것이 뜻밖일 수 있지만 이 언어를 배우는 이들이 많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라틴어파 위키백과, 고대 그리스어판 위키백과, 한문판 위키백과, 고대 영어판 위키백과 등도 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자음 앞에 h가 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어근 bṛh-에서 나온 Brahman, Brāhmaṇa 등에서만 보인다.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서는 자음 앞이나 어말의 h를 묵음으로 처리하지만 ‘브라흐마’와 같은 기존 표기를 고려하여 산스크리트어의 자음 앞이나 어말 h/ḥ는 ‘흐’로 적고 대신 힌디어 등 현대 언어에서는 원칙대로 h를 묵음으로 처리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렇다면 신 이름 Brahmā ‘브라흐마’, 문자 이름 Brāhmī ‘브라흐미’, 승려 계급 및 베다 주석서 Brāhmaṇa ‘브라흐마나’는 산스크리트어의 표기로 볼 수 있다. 반면 승려 계급을 이르는 Brāhmaṇ ‘브라만’과 강 이름 Brahmaputra ‘브라마푸트라’는 힌디어로 볼 수 있고 닭 품종 이름인 Brahma는 이 준말로 취급하든지 영어 [ˈbɹeɪ̯m.ə] ‘브레이마’, [ˈbɹɑːm.ə] ‘브라마’, [ˈbɹæm.ə] ‘브래마’ 가운데 둘째 발음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으니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쓰는 표기가 모두 규칙적으로 설명된다. 아울러 한국어판 위키백과에서 철학 개념을 산스크리트어식 Brahman ‘브라흐만’으로 쓰는 것도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