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 나타나는 일본어 중역식 외래어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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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관인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하여 사실상 대한민국 어문 규정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내용 상당수가 일본에서 나온 사전을 직간접적으로 베낀 것이라는 사실은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쓰이는 일본어 외의 외래어 표기 방식이다. 드물지만 일부 표제어에서는 원어와 한글 표기에 일본어를 거쳐 들어온 흔적이 남아 있다. 표제어로는 수록되지 않고 뜻풀이에서만 나오는 용어의 경우 더욱더 심해서 일본어에서 가타카나로 적은 것에서 원어를 짐작하여 한글로 표기했다는 표가 나는 경우가 많다.

‘트리아데(Triade)’의 뜻풀이에서 이집트 신 ‘호루스(Horus)’를 ‘호르스(Hors)’로 잘못 적은 것과 같은 사례는 예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사례를 몇 개 더 소개하겠다.

벰보(Bembo, Pietro)
「명사」 『인명』 이탈리아의 인문학자(1470~1547). 최초의 이탈리아어 문법서를 썼으며, 논문집에 《아조로의 사람들》, 《속어 산문집》 따위가 있다.

벰보가 쓴 논문집은 Gli Asolani, 즉 《아솔로(Asolo)의 사람들》이다. 이탈리아 동북부의 지명인 Asolo는 이탈리아어로 [ˈaːzolo]로 발음되는데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아솔로’로 적는다. 이탈리아어에서 [s]와 [z]는 모음 사이에서만 구별되는데 오늘날의 발음에서는 대체로 형태소 경계가 있을 때는 [s], 없을 때는 [z]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식 디저트의 하나인 tiramisù [tiramiˈsu] ‘티라미수’는 tira + mi + su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s]로 발음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 없이는 모음 사이의 s 앞에 형태소 경계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또 이탈리아 쌀 요리 risotto 같은 경우는 오늘날 흔히 [riˈzɔtto]로 발음하지만 전통 표준 발음은 [riˈsɔtto]이다. riso + -otto로 분석할 수 있는데 riso의 s는 전통적으로 [s]로 발음했지만 단일 형태소 내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 [z]로 흔히 발음한다.

또 이탈리아의 탄산 백포도주 이름인 prosecco [proˈsekko] ‘프로세코’에는 형태소 경계가 없지만 언제나 [s]로 발음한다. 이 포도주는 이탈리아 동북부의 Prosecco에서 나온 것인데 슬로베니아어 Prosek ‘프로세크’에서 나온 지명이기 때문에 [s] 발음을 쓴다. 이곳은 아직도 슬로베니아계 주민이 많다.

이탈리아어 화자 가운데는 모음 사이에서도 [s]와 [z]를 구별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이탈리아 남부식 발음에서는 모조리 [s]로 통일한다. 이들은 Asolo도 [ˈaːsolo]로 발음한다. 그러니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굳이 [s]와 [z]를 구별하지 않고 철자 s는 ‘ㅅ’으로 토일하여 적는다.

그러니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risotto는 ‘리소토’로 적어야 하지만 ‘리조토’, ‘리조또’로 흔히 쓰는데 ‘리조토’는 영국식 영어 risotto [ɹɪ.ˈzɒt.oʊ̯]나 프랑스어 risotto [ʁizɔto]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겠다. 참고로 미국식 영어에서는 risotto를 [ɹɪ.ˈsoʊ̯t.oʊ̯] ‘리소토’로 흔히 발음하고 [ɹɪ.ˈzoʊ̯t.oʊ̯] ‘리조토’도 쓰는데 [s] 발음을 쓰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온 이민을 많이 받아들여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Asolo를 [z] 발음을 살려 アーゾロ[Āzoro] ‘아조로’라고 쓴다. ‘벰보’의 뜻풀이에서는 원어를 확인하지 않고 Asolo를 일본어식 발음에 따라 ‘아조로’로 쓴 것이다. 일본어는 이탈리아어의 [r], [l]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한국어에서는 모음 사이의 [r]는 ‘ㄹ’로, 모음 사이의 [l]은 ‘ㄹㄹ’로 적어서 구별한다.

인도의 엘로라(Ellora) 석굴이 《표준국어대사전》에 ‘엘롤라^석굴(Ellōla石窟)’로 수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것도 비슷한 예일 가능성이 높다.

마르슈너(Marschner, Heinrich August)
「명사」 『인명』 독일의 작곡가(1795~1861). 베버와 함께 19세기 전반의 중요한 낭만파 오페라 작곡가이다. 작품에 오페라 〈성당 기사와 유대 여인〉, 〈한스 하이링〉 따위가 있다.

여기서도 ‘한스 하이링’은 ‘한스 하일링(Hans Heiling [ˈhans ˈhaɪ̯lɪŋ])’의 잘못이다.

마르티농(Martinon, Jean)
「명사」 『인명』 프랑스의 작곡가·지휘자(1910~1976). 오페라 〈헤크바〉를 비롯하여 오라토리오, 콘체르토 따위를 작곡하였다. (후략)

마르티농이 작곡한 오페라의 프랑스어 원제는 Hécube [ekyb] ‘에퀴브’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아의 왕비 Ἑκάβη(Hekábē) ‘헤카베’의 라틴어명인 Hecuba ‘헤쿠바’에 해당한다. 라틴어 Hecuba를 일본어에서 ヘクバ[Hekuba] ‘헤쿠바’로 적은 것이 이 뜻풀이에서는 ‘헤크바’로 둔갑했다.
일본어는 자음군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원어의 자음 사이에 모음을 삽입한다. 이 삽입 모음은 보통 u [ɯ]이다. 그래서 프랑스어 hectare [ɛktaːʁ] ‘엑타르’에서 온 차용어는 ヘクタール[hekutāru] ‘헤쿠타루’이다.

한국어는 ‘헥타르’의 경우에서처럼 자음군의 첫 자음을 받침으로 적을 수도 있으며 모음을 삽입할 경우에는 보통 ‘으’를 쓴다. 그러니 ‘우’로 적는 모음과 혼동할 위험이 없다. 그런데 이 뜻풀이에서는 일본어 ヘクバ[Hekuba]가 ヘクタール[hekutāru]에서처럼 어중 자음군을 나타낸 표기라고 오해하고 ‘헤크바’로 적은 것이다. 정말 자음군이었다면 b 앞의 k를 받침 ‘ㄱ’으로 적을지, ‘크’로 적을지의 문제도 있었을 텐데 일단 논외로 한다.

브루크(Brug)
「명사」 『역사』 중세 유럽에서, 요새와 방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이르던 이름. 중앙에 시장, 교회, 시 청사 따위가 있다. 이 이름이 붙은 지명은 오늘날까지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일본어를 통한 외래어 표기 오류는 보통 뜻풀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아예 표제어와 원어까지 잘못 썼다. 네덜란드어와 아프리칸스어로 ‘다리(교량)’를 뜻하는 brug ‘브뤼흐’라는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이 표제어와는 관련이 없다. 요새와 방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뜻하는 말은 독일어 Burg [bʊʁk] ‘부르크’이다.

일본어로는 ブルク[buruku] ‘부루쿠’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원어의 모음을 나타내고 어느 것이 삽입 모음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만 보면 원어가 Burg인지 *Brug인지 알 길이 없다.

사실 굳이 일본어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오스트리아 지명 Innsbruck [ˈɪnsbʁʊk] ‘인스브루크’를 ‘*인스부르크’로 잘못 부르는 것과 같은 실수가 나타나기는 한다. 하지만 여기서와 같이 사전의 표제어까지 잘못 수록된 것은 일본어 사전을 베낀 것으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아트레우스(Atreus)
「명사」 『문학』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아가멤논의 아버지로, 동생인 트에스테스(Thyestes)가 자기 아내와 간통한 일에 분노하여 미케네의 왕이 되자 동생의 아들들을 죽여 그 고기를 동생에게 먹였다.

Θυέστης(Thyéstēs)는 고대 그리스어 표기 원칙에 따르면 ‘티에스테스’로 적어야 한다. 그리스어 자모 입실론 즉 υ(y)는 ‘이’로 적는다.

그런데 이 자모는 초기 그리스어에서 음가가 [u]였다가 [ʉ~y]를 거쳐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i]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방언에 따라 음가가 다양했지만 오늘날 주로 배우는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ʉ~y] ‘위’,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y] ‘위’로 재구되기 때문에 이를 ‘위’로 적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나온다. 하지만 라틴어에서는 이 자모를 받아들인 y는 후에 [i]로 발음이 수렴되었기 때문에 한글 표기에서는 ‘이’로 적는다. 좋든 싫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들의 한글 표기는 웬만해서는 차이를 두지 않는다.

그런데 독일어권에서는 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가 재구한 고대 그리스어 발음 연구의 영향으로 그리스어 자모 입실론 및 여기에서 나온 라틴어 y를 독일어 ü처럼 [yː, ʏ] ‘위’로 발음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어 γυμνάσιον(gymnásion) ‘김나시온’, 라틴어 gymnasium ‘김나시움’에서 유래한 독일어 Gymnasium도 실은 [ɡʏmˈnaːzi̯ʊm] ‘귐나지움’으로 발음한다. 하지만 표준 표기는 ‘김나지움’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독일어에서 철자 y로 적는 것은 발음에 상관없이 ‘이’로 통일하고 있다.

일본어에서 독일어의 Gymnasium은 ギムナジウム[gimunaziumu] ‘기무나지우무’로 적지만 독일어의 영향으로 고대 그리스어의 입실론은 yu [jɯ] ‘유’로 흉내내는 경우가 많다. 일본어에는 [y] 음이 없기 때문에 이 음으로 대신한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혼의 여신 Ψυχή(Psukhḗ) ‘프시케’는 일본어로 プシューケー[Pushūkē] ‘푸슈케’라고 부른다.

그래서 Thyéstēs도 일본어로는 テュエステス[Tyuesutesu] 혹은 テュエステース[Tyuesutēsu] ‘듀에스테스’로 쓴다. 일본어 고유 어휘에는 나타나지 않는 조합인 テュ[tyu]는 テ[te]에 ユ[yu]를 작게 쓴 형태인 ュ를 붙여서 나타낸다.

만약 이를 ‘튜에스테스’로 적었다면 틀림없이 일본어에서 옮겼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트에스테스’라고 썼으니 일본어를 중역한 결과라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어 등 다른 언어에서 옮긴 것이라고 해도 ‘트에스테스’라는 표기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도 일본어 중역에 따른 혼란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외에도 《표준국어대사전》에 나타나는 오류 가운데 일본어에서 옮긴 결과인지 그냥 한국어에서 발생한 것인지 애매한 경우도 있다.

프란츠(Franz, Robert)
「명사」 『인명』 독일의 작곡가(1815~1892). 슈베르트와 슈만에 이어 리드(reed) 작곡가로 유명하였으며, 청순하면서 소박한 인간미가 흐르는 가곡 350여 곡을 남겼다.

영어 reed [ˈɹiːd] ‘리드’에서 온 리드(reed)는 ‘관악기의 발음원이 되는 얇은 진동판’을 뜻하니 ‘리드 작곡가’가 무엇인지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다. 이는 독일의 가곡을 이르는 말인 ‘리트(Lied)’의 잘못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독일어 Lied [ˈliːt]의 어말 무성음화를 반영하여 ‘리트’라고 쓰며 일본어에서도 보통 リード[rīto] ‘리토’로 쓰는데 이를 リート[rīdo] ‘리도’로 쓴 예가 있었거나 잘못 읽은 결과일 수 있겠다. 하지만 Lied를 ‘리드’로 잘못 적은 것을 나중에 영어 reed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한국어도 어두에서는 r와 l을 구별하지 못하고 ‘ㄹ’로 적기 때문에 이런 실수는 일본어를 거치지 않고도 한국어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요즘은 다른 여러 언어권에 대한 정보를 주로 영어를 통해 접하는 것처럼 예전에는 일본어를 통해 접하는 일이 많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1999년에 초판이 나왔지만 그 전에 나왔던 사전을 많이 베꼈기 때문에 그 역사가 담겨있다. 물론 영어를 통한 중역으로 나타나는 오류도 많다.

경건-주의(敬虔主義)
「명사」 『기독교』 17세기 말 독일의 개신교가 교의(敎儀)와 형식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난 신앙 운동. 스페너(Spener, P. J.)가 창시한 운동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개인의 영적 생활의 체험과 실천을 중요시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파이어티즘.

여기서 Spener는 사실 오늘날 프랑스령인 알자스 출신의 독일 신학자 Philipp Jakob Spener [ˈfiːlɪp ˈjaːkɔp ˈʃpeːnɐ]를 가리키며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가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이다. 심지어 ‘슈페너(Spener, Philipp Jakob)’도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실려있다. 일본어에서도 シュペーナー[Shupēnā] ‘슈페나’로 쓰기 때문에 이를 ‘스페너’로 잘못 쓴 것을 일본어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아마도 Spener를 원어를 확인하지 않고 영어식으로 읽은 표기로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현실적으로 대안은 찾기 어렵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학계에서 선호하는 권위 있는 사전이지만 외국어 고유 명사는 《표준국어대사전》만큼 수록하지 않는다. 그러니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외국어 고유 명사의 한글 표기는 참고로 하되 맹신하지는 않고 되도록이면 원어를 확인해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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