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高山지대의 라후族에게 한글을 보급하다(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 2004)에서 트랙백(깨진 링크).
라후족은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의 미얀마(버마), 태국(타이), 라오스, 베트남에 사는 소수 민족이다. 그런데 이들의 풍습이나 언어가 한국과 유사하다며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 아닐까 추측하는 이들이 있다. 궁금하시면 위의 글을 읽어보시길.
라후족의 모습 (사진 출처)
나도 중학생 때 태국 치앙라이의 라후족 마을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이런 주장을 듣고 갔기 때문에 한국인들과 비슷한 점이 있는지 유심히 관찰해봤지만 특별히 그런 느낌은 받지 못한 기억이 난다. 물론 며칠 관찰한 것으로는 제대로된 결론을 내리기 힘들겠지만.
이들이 정말 한민족과 관련이 있을까? 고구려 유민이 중국 윈난성(운남성)에 정착하고, 그 후 인도차이나반도 북부까지 퍼졌다는 가설은 얼마나 개연성이 있을까? 내게 이에 대해 논할만한 지식은 없다. 또 글에서 언급하는 머리 형태, 민속 음악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국인 등 몇몇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HLA-B59라는 혈청형이 라후족에게서 발견되었다는 얘기는 찾아보니 별 것 아닌 것 같다. HLA-B59는 한국과 일본, 중국 북부, 몽골의 인구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기는 하지만 에스파냐 바스크인, 모로코와 알제리 인구를 비롯, 라후족과 비슷한 언어를 쓰는 중국 윈난성(운남성)의 나히족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라후족의 언어인 라후어가 한국어와 놀랄만큼 유사하다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밖에 없다. 위의 글을 쓴 서울대 명예교수 이현복은 언어학자로 《한국어 표준발음사전》의 저자인데 정말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언어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쓴 글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우선 라후어는 한국어와 전혀 다른 계통으로 분류된다. 이는 이현복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언어학적으로 라후語는 「사이노-티베트(Sino-Tibetan)」라는 거대한 語族에 속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 語族의 한 분파인 「티베트-버마계」로 이어지며 그 하위 분파인 「롤로-버마계」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국어는 알타이 語族에 속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語族的으로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라후語가 어찌하여 한국어와 유사성을 지니는지 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어족은 계통상 관계가 있는 언어들의 가장 상위 분류이다. 다른 어족에 속한다는 것은 언어학자들이 밝힌 바로는 계통적 관계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계통이 다른 언어들도 접촉을 통해 서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휘를 주고받기도 하고 음성 체계나 통사 구조가 비슷해지는 예도 있다. 그러면 그런 접촉을 증명할만한, 라후어가 특별히 한국어와 비슷하다는 증거가 있을까? 이현복이 내세운 주장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주: 이현복이 말하는 ‘사이노-티베트’는 ‘중국·티베트 어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표준이다. ‘한장 어족’이라 하기도 한다. ‘롤로(Lolo)’는 경멸의 뜻이 담겼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쓰지 않고 ‘이족(彝族)’이라고 한다. ‘버마’는 ‘미얀마’의 다른 이름으로 어느 이름을 사용하느냐는 정치적으로 미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단 한국에서 현재 쓰는 표준 이름인 ‘미얀마’로 통일하기로 한다. ‘티베트-버마계’는 ‘티베트·미얀마 어군’, ‘롤로-버마계’는 ‘이·미얀마 어군’으로 쓰기로 한다.
어순이 같으면 연관이 있다는 증거?
「너레 까울리로 까이베요」는 「너는 한국으로 간다」라는 뜻이다. 우선 이 문장을 이루는 낱말의 배열 순서가 「주어+보어+술어」로 한국어와 일치한다. 그리고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술부의 동사가 문장의 끝에 온다. 영어라면 「You go to Korea」이니 술어가 바로 주어 다음에 오게 된다. 독일어나 중국어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주어+보어+술어’, 즉 SOV 어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한국어와 연관이 있다는 증거일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외국어 가운데 일본어 외에 대부분은 ‘주어+술어+보어’, 즉 SVO 어순을 가지고 있으니 SOV 어순을 가진 언어는 무척 희귀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라후어를 한국어와 연관시키려는 이들은 타이어(태국어)도 SVO 어순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라후족을 접하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타이의 라후족을 접하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오히려 SOV 어순을 가진 언어가 가장 많다. 전 세계 언어의 약 40%가 SOV 어순을 가졌다고 한다. 아래 지도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 언어들의 어순에 따른 분포를 보여준다. 이 지도를 보고도 라후어가 한국어와 어순이 같은 것이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 언어의 주어·보어·술어의 순서에 따른 분포를 나타낸 지도. (지도 출처)
음성체계가 유사하다?
라후語는 음성체계도 한국어와 유사한 면이 많다. 음성체계가 유사하다는 것은 발음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우선 자음에서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三重대립을 나타낸다. 가령, ㅂ/ㅍ/ㅃ 같은 파열음이 三重으로 대립하여 한국어에서 비/피/삐 같은 낱말을 이루어 내듯이, 라후말도 이같은 三重대립을 보인다.
영어 등의 서양 언어가 b/p 의 두 가지밖에 구별을 안 해 bay/pay 같은 二重대립밖에 없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라후語는 우리말에 없는 소리가 네댓 개 더 있다. 가령, 목젖으로 나는 소리는 한글로 표기할 수 없다.
자음의 3중 대립이 정말 특별한 것일까? 당장 타이어(태국어)도 ‘유성음·무성무기음·무성유기음(예: [b, p, pʰ])’으로 이루어진 파열음의 3중 대립이 있으며 베트남어도 일부 파열음의 3중 대립(하노이 방언에서는 [ɗ, t, tʰ])이 있다. 이것이 외래어 표기법에서 이들 언어에서 된소리 표기를 허용하는 이유이다.
라후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들은 어떨까? 라후어가 속하는 이·미얀마 어군의 주요 언어로는 미얀마어(버마어)와 나히어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미얀마어도 [b, p, pʰ]와 같은 파열음의 3중 대립이 있으며 나히어는 [b, p, pʰ]에 [mb]과 같이 앞에 비음이 붙는 파열음까지 추가된 4중 대립이 있다.
라후語의 모음 역시 한국어와 유사하다. 우리와 같이 이/에/애/아/오/우/어/으 같은 모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소리 값 역시 아주 유사하다. 특히 다른 외국어에서 찾아보기 힘든 「으」나 「어」를 한국어와 라후語가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데 라후語에는 제주도 말에 지금도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15세기 국어의 「아래 아」 모음이 하나 더 존재한다. 이 소리는 표준말의 「오」보다 입을 더 벌리고 혀를 내려서 내는 열린 모음이다.
라후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언어학자 제임스 매티소프(James Matisoff)의 English-Lahu Lexicon에 따르면 라후어의 모음은 [i, e, ɛ, a, o, ɔ, u, ə, ɨ] 등 아홉 개가 있다. 위에서 말한 ‘아래 아’ 모음이란 [ɔ]를 이르는 듯하다.
외래어 표기법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으’와 비슷한 모음([ɯ], [ɨ] 등)과 ‘어’와 비슷한 모음([ʌ], [ə], [ɵ], [ɤ] 등)은 타이어와 베트남어에도 있다(대신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타이어에서 ‘어’와 ‘으’의 중간 쯤 되는 เ-อะ, เ-อ를 ‘으’로 적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에 타이어 모음 중 ‘어’로 적는 모음은 없다). 여러 중국어 방언에도 ‘으’와 ‘어’와 비슷한 모음이 있다. 미얀마어에는 ‘어’와 비슷한 [ə] 발음이 있고 나히어의 리장(丽江) 방언에서는 ‘으’와 비슷한 [ɨ]와 ‘어’와 비슷한 [ə]가 있다. 라후어에 ‘으’와 ‘어’와 비슷한 모음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더구나 고구려 유민설에 따르면 라후어는 약 천 년 전의 고구려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모음 체계가 현대 한국어와 비슷하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언어의 변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잘 알겠지만 언어의 음운 체계에서 가장 잘 변하는 것은 모음 체계이다.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 중세 프랑스어와 현대 프랑스어, 고대 노르드어와 현대 아이슬란드어의 모음 체계가 불과 수백 년 사이에 엄청나게 변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위에서 말한 한국어의 ‘에’, ‘애’와 같은 모음은 적어도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이중모음으로 발음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확한 음가는 알 수 없지만 ‘어이’, ‘아이’를 빨리 발음한 것과 같은 이중모음이었는데 후에 이게 단모음(홑홀소리)으로 발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어에 설사 ‘에’, ‘애’와 같은 모음이 있었더라도 현대 한국어의 ‘에’와 ‘애’와는 관계가 없으며, 이게 라후어에 전해져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나 될지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라후語는 한국어보다도 자음과 모음의 수가 더 많다. 그러나 라후語는 聲調(성조·목소리의 높낮이)가 7개나 있어서 우리말에 비해 복잡한 면도 있다.
파열음의 3중 대립이 있고 한국어와 비슷한 모음이 있는데 한국어보다 자음과 모음의 수가 많고 성조가 7개나 있다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어와 음운 체계가 특별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쪽 지역 언어로는 매우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어에 없는 [f], [v], [z], [ɣ], [q] 같은 자음 소리를 보면 이현복처럼 “음성 체계가 거의 유사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어와 음성 체계가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어휘와 문법이 유사하다고?
「너레」의 「너」는 우리말의 「너」라는 대명사와 형태가 아주 유사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격조사 「레」이다. 이는 북한(과거 고구려) 사투리에서 「내레, 너레」 할 때의 주격 조사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현복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라후어에 대한 글을 찾아보면 ‘너’ 뿐만이 아니라 라후어의 ‘나’도 한국어와 같다고 한다. 이게 정말 놀랄만한 사실일까? 라후어에 대해 검색하다가 매티소프가 쓴 The Dictionary of Lahu 가운데 라후어 낱말의 어원 관련 내용을 간추린 PDF 문서를 찾았다. 라후어가 속하는 이ㆍ미얀마어군 언어의 공통 조상인 이·미얀마 조어(Proto-Lolo-Burmese 또는 PLB)와 이ㆍ미얀마어군 언어가 속하는 상위 어군인 티베트·미얀마 어군 언어의 공통 조상인 티베트·미얀마 조어(Proto-Tibeto-Burman 또는 PTB)의 어휘를 거기서 분화된 같은 계통의 언어들을 비교하여 재구성한 내용을 토대로 라후어 낱말의 어원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나’, ‘너’와 같다는 라후어의 인칭 대명사는 ŋà, nɔ̀를 말하는 것 같다(ŋà의 첫소리는 받침 ‘ㅇ’ 소리로 ‘나’의 ‘ㄴ’과는 발음이 사실 좀 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ŋà는 PLB의 *ŋa1, PTB의 *ŋa에서 왔으며 nɔ̀는 PLB의 *naŋ1, PTB의 *naŋ에서 왔다고 재구성하고 있다. 혹시나 해서 미얀마어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나’라는 뜻으로 ŋà를 쓰고 있었다. ‘너’에 해당하는 말로 nì̃도 찾을 수 있었는데, 이게 라후어와 같은 어원인지는 모르겠다. 아쉽게도 주격 조사라는 ‘레’에 대한 내용은 찾지 못했다.
동작의 방향을 나타내는 「로」는 현대 국어에서도 「서울-로」, 「김포-로」에서와 같이 일상 쓰이는 조사로서 형태와 기능이 일치한다.
처소격 조사 lo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매티소프는 lo가 PLB의 *lam에서 왔으며 PTB의 *lam과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간다」는 뜻의 라후말 「까이」도 한국어의 「가다」와 비슷하다.
위 PDF 문서에서 ‘까이’에 대한 내용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영어의 go에 해당하는 고대 영어의 gan, 고대 노르드어의 gá, 게르만 조어의 *gǣ-, gai-가 한국어의 ‘가다’와 비슷하다고 해서 게르만어와 한국어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상대를 부를 때 쓰는 호격도 우리말과 유사하다. 가령 한국어에서 인순이를 부를 때 「인순아!」 하듯이 라후 사람들도 「나시」라는 이름을 부를 때 「나시아!」라고 한다. 부르는 상대의 이름 다음에 「아」라는 어미를 더하는 것은 틀림없는 한국식이다.
상당히 흥미있는 내용이지만 이것 역시 라후어가 한국어와 연관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다.
명사에 붙는 라후語의 소유격 「베」 역시 한국어의 「의」처럼 쓰인다. 「너베 예」는 「너의 집」이다. 분류사를 쓰는 방법도 같다. 우리말의 「소 두 마리」에서 「마리」를 분류사로 볼 수 있는데, 라후語에서는 「마리」에 해당하는 분류사 「케」가 「둘」을 뜻하는 수사 「니」 다음에 연결되어 「누 니 케」로 대응된다. 라후말 「누 니 케」와 우리말 「소 두 마리」는 그 구성이 똑같다.
매티소프는 라후어의 소유격 조사 ve가 PLB *way3, PTB *way에서 왔다고 하고 있다. 또 한국어의 ‘마리’와 같은 수분류사를 쓰는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 아니다.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미얀마어, 타이어, 먀오어, 벵골어, 문다어 등 아시아 여러 언어에서 수분류사를 쓰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매티소프(Matisoff) 교수는 『라후말의 구절 구조는 일본어와 한국어에 대단히 유사하다』고 했다.
매티소프가 썼다는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티소프는 아마 유형적인 유사성에 대한 얘기로 일본어와 한국어를 언급했을 것이다. 아시아 지역의 주요 언어 가운데 라후어와 비슷한 구절 구조를 가진 예로 이 두 언어가 생각난 것이지, 이들이 계통적인 관계가 있다고 시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언어유형학에서는 언어의 계통적인 관계와는 상관없이 몇 가지 특징을 기준으로 언어를 분류한다. 중국어와 영어는 어순이 같은 SVO 언어이고,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를 쓸 때 방향은 접사를 통해 나타낸다 해서 같은 satellite-framing 언어로 분류된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형론적으로 언어를 분류하다 보면 두 개의 언어 사이에는 어떤 방식으로는 같은 분류에 속하게 되고, 다른 방식으로는 다른 분류에 속하게 마련이다. 라후어는 구절 구조를 보면 한국어와 비슷할지 몰라도 형태론으로 보면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여러 언어처럼 고립어로 분류되어 교착어인 한국어와는 매우 다르다. 유형론적인 결과를 가지고 계통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매티소프는 라후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을 비롯하여 타이와 중국에서 티베트·미얀마 어군 언어를 오랫동안 연구하였고 이들 언어의 계통 분류를 정립한 장본인이다. 매티소프는 English-Lahu Lexicon에서 라후어를 이·미얀마 어군 가운데 롤로 어군(Loloish languages)에 분류하고 있다. 이·미얀마 어군에 대한 영어판 위키피디어 문서를 보니 그 지역 언어들 가운데 퓨어(Pyu language), 므루어(Mru language) 등 아직 계통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혹시 그 어군에 속하지 않을까 추측만 하는 것들도 있다. 라후어가 이와 같이 계통이 잘 밝혀지지 않은 언어였더라면 한국어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후어는 그런 주변 언어들과 달리 비교 연구를 통해 계통이 분명하게 밝혀진 경우이다.
왜 라후어를 한국어와 연관시키려 하는가?
결국 라후어가 한국어와 유사한 점이라고 내세운 것들은 대부분 그 주변에서 쓰는 다른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한국어와 비슷한 어휘로 소개한 것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다른 언어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그 어원이 밝혀진 것들이다.
필자는 1994년 태국 북부 치앙마이市 인근의 산중에서 라후, 아카, 리수 등의 山族 마을에 처음 들어가 보고 놀라움과 함께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필자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국가와 일본 등 문명사회의 언어와 문화에관심을 가져왔다.
이현복은 언어학자이지만 라후족을 접하기 전에는 통 유럽 쪽 언어에만 관심을 가졌었나 보다. 그러니 유럽 언어에서는 드물지만 아시아 언어에서는 흔한 파열음의 3중 대립, SOV 어순, 수분류사 등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 언어와도 비교해서 그런 것들이 정말 라후어의 독특한 특징인지, 주변 언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인지 확인할 생각을 진정 못했는지 궁금하다.
라후족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가설을 누가 처음 주장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라후어를 연구하면 한국어와 비슷한 점만 보이게 마련인가 보다. 세계 어느 언어나 다른 언어와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점이 있게 마련이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옛날에 서점에서 영어 단어와 비슷한 소리와 뜻을 가진 한국어 단어를 나열하며 결국 영어는 한국어에서 왔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는 책을 보기도 했다. 전화를 받으며 “네, 네”라고 대답하는 그리스 사람을 보거나 아버지를 “아바”라고 부르는 이스라엘 친구를 보며 한국어와 비슷한 말을 쓰는 것을 신기해한 적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어와 그리스어나 히브리어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일부 유사성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언어 사이의 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
문자가 없는 라후족에게 한글을 전수하다?
그런데 이현복은 라후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한글을 보급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한글과 라후語는 놀랄 만큼 닮았다. 그래선지 음성언어만 있고 문자언어가 없는 라후族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한국어를 ‘한글’이라고 부르는 잘못을 새삼 지적할 마음은 없지만 언어학자도 이런 잘못을 저지르다니… 그리고 라후족이 문자언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라후어는 로마 문자로 적는다. 이것은 이현복도 뻔히 아는 사실이다.
일부 기독교로 개종한 라후의 젊은이들은 선교사들이 만든 로마자 표기를 이용해 라후말을 적기도 한다.
알면서 왜 라후족을 “無文字 고산족”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정확히 말하면 라후어에는 매티소프가 음운 분석을 통해 개발한 맞춤법과 개신교 선교사들, 가톨릭 선교사들, 중국의 언어학자들이 각자 개발, 보급한 맞춤법 등 적어도 네 가지 로마 문자 표기 방식이 있다.
네 개의 라후어 맞춤법 비교. (English-Lahu Lexicon에서)
물론 로마 문자는 이들 고유의 문자가 아니다. 하지만 어디 로마 문자를 빌어 적는 언어가 한둘인가? 아니면 유럽인들이 로마 문자를 쓰는 것은 괜찮은데 아시아인들이 로마 문자를 쓰는 것은 문자로 치지 않는다는 소리인가? 로마 문자를 쓰는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문자가 없다고 할 것인가?
라후어를 로마 문자로 적는 방식이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이현복의 말대로 일부만 이를 사용한다면 대다수는 문자 없이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에스놀로그에 의하면 라후어 사용자들의 모국어 문자 해독률은 62.5%이며 초등학교에서 글을 가르치고 라후어 신문도 있다고 한다. 물론 소수 언어에 대한 보호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중국 쪽 얘기이고 타이 등 다른 나라의 라후족은 문자 해독률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현복이 만난 라후족들은 낙후된 지역에 있어서 라후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후족이 문자언어가 없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필자는 그 과정에서 고유의 글자가 없는 라후族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어 그들이 자유롭게 글자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후語의 음성체계를 볼 때 라후語를 표기하는 데 한글 이상으로 적합한 글자가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두 언어의 음성체계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라후語에는 우리말과 일치하는 모음이 8개나 되고, 자음에서는 18개가 대응되니 몇 개만 더 보완하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후語가 한국어보다 모음과 자음의 수가 많은 것이 문제이다. 우리말은 모음 8개, 자음 19개를 적을 수 있으면 되나 라후語는 모음이 9개, 자음이 23개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행 한글 자모만으로는 라후語를 완벽하게 적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오래 전에 필자가 고안해 발표한 「국제한글음성문자」 중에서 라후語에 필요한 기호를 택해 추가하는 방법으로 라후語의 한글 표기 체계를 완성하였다. 국제한글음성문자는 한글을 바탕으로 개발한 발음기호로 이를 이용하면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정확하게 적을 수 있다. 가령, 현행 한글 자모로는 서양어의 f, v, th, sh 같은 소리를 적을 수 없으나 국제한글음성문자로는 이런 소리를 모두 적어 낼 수 있다. 라후語에는 목젖 소리나 우리말의 「오」보다 입을 더 열고 내는 모음이 있는데, 이들을 현행 한글로는 적을 수 없으니 이에 해당하는 한글 음성기호를 골라 활용하게 된다.
현대 한국어에서 쓰는 자모만으로는 라후어를 완벽하게 적을 수 없어 몇 개 기호를 추가하는 방법으로 라후어를 적는 방법을 개발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이다. 라후어의 7개 성조는 표기하는지, 표기한다면 어떻게 표기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과연 이게 ‘미문자 종족’에게 한글을 보급하여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잘하는 일일까? 이미 학교에서 로마 문자로 라후어를 적는 방법을 배우고 로마 문자로 된 라후어 신문을 읽는 다른 라후족과 문자 생활이 단절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지 않아도 라후족들은 몇 가지 다른 맞춤법을 사용하여 혼란이 상당한데 완전히 다른 문자까지 소개해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이현복이 개발한 ‘국제한글음성문자’ 기호까지 추가한 라후어용 한글은 유니코드에서도 지원하지 않을 텐데 컴퓨터로 어떻게 입력하라는 것일까?
한글 수출의 실상
라후족에게 한글을 보급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매체를 통해 긍정적으로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앞뒤 내용을 잘 모르고 문자가 없는 종족에게 한글을 전파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62.5%가 이미 모국어를 로마 문자로 읽고 쓰는 종족 일부에게 현대 한글에는 없는 자모까지 추가하여 컴퓨터 입력이 어려운 확장 한글로 글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내막을 듣지 못한다.
한글이 우수하다고 해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에게, 그것도 이미 문자가 있는 이들에게 보급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왠지 1920년대 소련에서 고려인들을 위해 한국어를 로마 문자로 적는 방법을 마련하려던 계획을 세웠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 소련에서는 로마 문자가 배우기 쉽고 키릴 문자보다는 국제적이라고 생각해 고유 문자가 있는 소수 민족들에게도 로마 문자를 보급하는데 힘을 썼다. ‘라티니자치야(Латинизация)’라고 하는 이 로마 문자 보급 운동에 앞장선 이들도 오늘날 한글을 문자가 없는 종족에게 전수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처럼 신념과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미 과반수가 로마 문자를 통한 문자 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에게 문자가 없는 종족이라며 한글을 전하는 것은 억지로 비쳐진다. 이현복도 이런 반론을 의식해 라후어가 한국어와 유사하고 라후족이 고구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후族이 진정 고구려의 유민이라면 우리는 1300년의 긴 단절 끝에 우리의 동포를 다시 만난 셈이다. 글자를 모르는 이들은 한글을 학습할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한글을 전수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한글은 그들의 글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현복이 라후어가 한국어와 유사하다고 주장한 것은 결국 이들에게 한글을 전수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하지만 지금까지 분석한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한 근거는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
다른 이·미얀마 어군 언어를 비롯한 주변 언어에서 찾을 수 없는데 라후어에서만 볼 수 있는, 1,300년 전 고구려어의 영향으로 설명할만한 특징이 있다면 모를까 이현복의 글에 있는 내용으로만 봐서는 라후어와 한국어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볼 근거가 조금도 없다.
내용 추가: ㅇㅌㅎㅌ님의 제보로 2001년 MBC 한글날 특집 다큐멘터리 〈한글, 라후마을로 가다〉의 실상을 밝힌 기사 〈‘라후족 한글 수출 TV쇼’의 이면〉을 소개한다. 언어학과 대학원생 신분으로 방송에 참여했던 유리나씨가 당시 상황을 밝혔다. 다음은 기사 내용 일부:
고구려 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라후어에 대한 보고서 자체가 상당부분 거짓이라는 것은 언어조사를 하루만 해 봐도 알 수 있지요. 심지어 제 교수님이 저에게 주신 문자목록이 라후어에 맞지 않아 제가 문자목록을 수정해야 했지요.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압니다. 인문 다큐 제작경험이 풍부한 담당 피디는 라후족 샤먼의 제사도구가 운남성 지역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더군요. 제작진 모두 고구려 기원설이 넌센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우리는 버마에서 전쟁을 피해서 30년 전에 이곳에 와 정착했다”는 마을 족장 할아버지의 말에 “우리는 눈 내리는 곳에서 왔다”는 거짓 더빙을 입히면서까지 제작을 강행했습니다.
(중략)
라후어도, 대개의 소수 언어가 그렇듯이, 로마자 표기법이 있습니다. 라후족은 크리스트교 선교의 역사가 깊어 로마자 표기법이 안정적으로 정착돼 있고 로마자로 표기된 라후어 성서, 찬송가책, 사전, 라후어 교과서까지 상당 수준 보급돼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갔던 마을도 기독교가 전파되어 상당수의 사람들이 로마자 표기를 알고 있었구요. (중략) 또한, 제가 가르친 학생들은 모두들 교회에 다녀 로마자 표기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현지 사정상 이렇게 로마자 표기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로마자 표기와 한글 표기를 1대1로 대응시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자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