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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팝, 켈트 음악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음악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Hayley Westenra라는 1987년생 뉴질랜드 소프라노 가수가 있다. 한국어권에서는 보통 ‘헤일리 웨스튼라/웨스텐라/웨스턴라’ 등으로 표기한다. 영어권에서도 보통 [ˈheɪ̯li ˈwɛstənɹə] ‘헤일리 웨스턴라’로 불러주는데 정작 본인의 발음은 [ˈheɪ̯li ˈwɛst(ə)nəɹ] ‘헤일리 웨스트너’로 관찰된다. 어떻게 된 일일까?
헤일리 웨스턴라 본인이 성을 [ˈwɛst(ə)nəɹ] ‘웨스트너’로 발음하는 여러 동영상. 첫째 동영상에서는 7초 후에 listener도 발음한다.
다른 이들이 성을 [ˈwɛstənɹə~ˈwɛstənɹɑː] ‘웨스턴라’로 발음하는 동영상.
웨스턴라(Westenra)는 잉글랜드에서 찰스 2세가 재위하던 17세기 후반에 당시 잉글랜드의 종속국이었던 아일랜드에 정착한 네덜란드 상인 두 명으로부터 비롯된 성씨이다. 이들은 네덜란드 귀족 가문인 반바세나르(Van Wassenaer [vɑn ˈʋɑsənaːr], 현행 표기 규정에 따르면 ‘판바세나르’)가 출신이었다. 네덜란드어로 wassenaar [ˈʋɑsənaːr] ‘바세나르’는 ‘초승달’을 뜻한다. 옛 철자에서는 오늘날 네덜란드어에서 aa로 쓰는 [aː]를 ae로 썼다.
《BBC 영국 이름 발음 사전》에 따르면 Westenra는 [ˈwɛstənɹə] ‘웨스턴라’로 발음된다.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ˈbɹæm ˈstoʊ̯kəɹ], 1847~1912)가 지은 괴기 소설 《드라큘라》에도 루시 웨스턴라(Lucy Westenra [ˈluːsi ˈwɛstənɹə])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영어의 [ə]를 ‘어’로 적는 것이 원칙이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이른바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에서는 영어에서 어말의 -a [ə]를 ‘아’로 적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Westenra [ˈwɛstənɹə]는 ‘*웨스턴러’ 대신 ‘웨스턴라’로 적는다. 그런데 일부 영국 화자들은 Westenra의 마지막 모음을 [ə]로 약화시키지 않고 거의 PALM 모음 [ɑː] ‘아’를 쓴 [ˈwɛstənɹɑː] ‘웨스턴라’ 비슷한 발음을 쓰는 것마저 관찰된다.
헤일리 웨스턴라 본인의 발음으로 관찰되는 [ˈwɛst(ə)nəɹ] ‘웨스트너’는 /-ənɹə/에서 마지막 두 음의 순서를 뒤바꿔서 /-ənəɹ/가 된 음운 도치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음위 전환이라고도 부르는 음운 도치는 언어를 막론하고 매우 흔한 현상인데 영어에서도 역사적으로 r음과 관련된 음위 전환이 많이 일어났다. 두 자음 사이에 r음과 모음이 있으면 그 순서가 뒤바뀌어서 고대 영어의 bridd [ˈbridd] ‘브리드’, þritig [ˈθriːtij] ‘스리티’가 현대 영어에서 각각 bird [ˈbɜːɹd] ‘버드’, thirty [ˈθɜːɹti] ‘서티’가 되는가 하면 고대 영어의 beorht [ˈbe͜orxt] ‘베오르흐트’ 또는 byrht [ˈbyrxt] ‘뷔르흐트’ 및 þurh [ˈθurx] ‘수르흐’는 현대 영어에서 각각 bright [ˈbɹaɪ̯t] ‘브라이트’, through [ˈθɹuː] ‘스루’가 되었다.
애초에 네덜란드어 Wassenaer [ˈʋɑsənaːr] ‘바세나르’가 영어에서 Westenra로 둔갑한 것도 도중에 어디에선가 음운 도치가 일어난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헤일리 웨스턴라 본인의 발음에서는 음운 도치가 이전의 음운 도치를 상쇄하여 우연히도 원래의 네덜란드어 형태에 약간 더 가깝게 r음이 어말에 오는 형태가 된 것이 재미있다.
오늘날에도 특히 미국에서는 방언에 따라 children [ˈʧɪldɹən] ‘칠드런’을 [ˈʧɪldəɹn] ‘칠던’으로 발음하거나 prescription [pɹᵻˈskɹɪpʃ(ə)n] ‘프리스크립션’을 [pəɹˈskɹɪpʃ(ə)n] ‘퍼스크립션’으로 발음하는 예를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ᵻ]는 [ə]나 [ɪ]로 발음될 수 있는 약화된 모음을 나타내는 약식 기호인데 미국식 발음에서는 [ə]가 선호되어 [pɹəˈskɹɪpʃ(ə)n] ‘프러스크립션’이 되고 여기서 [ɹ]과 [ə]의 위치가 뒤바뀌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Westenra [ˈwɛstənɹə] ‘웨스턴라’에서는 [ɹə] 뒤에 자음이 오지 않으므로 [ˈwɛst(ə)nəɹ] ‘웨스트너’로 바뀌는 것은 조금 다른 현상이다. cobra [ˈkoʊ̯bɹə] ‘코브라’, Sandra [ˈsændɹə] ‘샌드라’ 등 일반 자음 뒤의 어말 [ɹə]는 음운 도치를 보이는 일이 없다. 대신 프랑스어 genre [ʒɑ̃ʁ] ‘장르’에서 온 genre는 보통 [ˈʒɒnɹə] ‘존러~잔러’로 발음되는데 영어판 위키낱말사전에 따르면 비표준 발음 [ˈd͡ʒɑnɚ] 곧 [ˈʤɑːnəɹ] ‘자너’도 존재한다고 한다(다른 대부분의 사전에서는 이런 발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유독 비음인 [n] 뒤에서는 어말 [ɹə]의 음운 도치가 가능한 것일 수도 있는데 어말 [nɹə]는 워낙 드문 조합이라서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현대 영어에서 r음과 관련된 음운 도치는 자음 앞이나 어말 r음을 발음하는 이른바 rhotic 방언(미국 표준 발음 등)에서 관찰된다. 이런 rhotic 방언에서 자음 앞이나 어말의 [əɹ]는 음성학적으로 따지면 성절 자음 [ɹ̩]로 볼 수 있으며 흔히 [ɚ]라는 기호로 나타낸다. 그러니 prescription에서 음운 도치가 일어나 [pɹəˈskɹɪpʃ(ə)n]으로 발음되는 경우 pre-는 [pɹ̩] 또는 [pɚ]로 실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음 앞이나 어말 r음을 발음하지 않는 이른바 non-rhotic 방언(영국 표준 발음 등)에서 자음 앞의 [ɹə]가 [əɹ]로 바뀌면 r음이 발음되지 않아 그냥 [ə]가 되므로 음운 도치가 아니라 음운 탈락이 일어나는 셈이니 이런 방언에서는 r음과 관련된 음운 도치를 좀처럼 볼 수 없다. 영국식 발음에서 library를 [ˈlaɪ̯bɹəɹi] ‘라이브러리’ 대신 [ˈlaɪ̯bɹi] ‘라이브리’로 흔히 발음하는 것처럼 [ɹəɹ]를 [ɹ]로 단순화하는 음운 탈락을 볼 수는 있어도 음운 도치와는 차이가 있다.
대개 미국이나 캐나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주류 방언은 rhotic, 잉글랜드나 웨일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주류 방언은 non-rhotic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자음 앞이나 어말 r음의 발음 양상은 복잡해서 예를 들어 미국에서도 non-rhotic 방언을 찾아볼 수 있고 잉글랜드에서도 rhotic 방언을 찾아볼 수 있다.
뉴질랜드도 마오리어나 스코틀랜드 억양의 영향으로 rhotic 발음을 쓰는 이들이 있지만 전통적으로는 non-rhotic 방언 지역으로 구분된다. 인터뷰 동영상을 보면 헤일리 웨스턴라의 평소 발음도 대체로 non-rhotic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본인 이름에서만은 [ˈwɛst(ə)nəɹ]의 r음을 발음한다. 본인 이름을 발음하는 인터뷰 가운데 하나에서는 얼마 후 listener [ˈlɪs(ə)nəɹ] ‘리스너’의 r음도 발음한 것이 관찰된다. 뒤따르는 말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on이므로 한 어구에서는 non-rhotic 방언에서도 listener on은 [ˈlɪs(ə)nə ɹ‿ɒn] ‘리스너 론’과 같이 r음을 발음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listener 뒤에 끊었다가 on을 발음할 때 성문 폐쇄음 [ʔ]를 발음하므로 실제로는 [ˈlɪs(ə)nəɹ / ʔɒn] ‘리스너(ㄹ) 온’과 같은 rhotic 발음이 관찰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journey는 r음을 생략한 [ˈʤɜːni] ‘저니’로 발음하는 것을 보면 listener가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이 확실하다.
짐작하건데 헤일리 웨스턴라의 영어 발음은 기본적으로 non-rhotic이지만 추상적인 음운 형태가 실제 발음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일부 제한적인 경우에 어말이나 자음 앞 r음을 발음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listener on에서는 원래 뒤따르는 모음 때문에 r음을 미리 발음했는데 잠시 멈추는 바람에 rhotic 발음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또 그의 성씨에 나오는 음운 조합은 추상적인 음운 형태가 /nɹə/로 저장되어 non-rhotic 방언에 적용되는 어말 r음 탈락이 일어나지 않지만 실제 발음에서는 이 조합이 [nɹ̩] 또는 [nɚ]로 발음되어 마치 rhotic 방언 화자가 /nəɹ/를 발음하는 것과 동일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겠다. 다른 화자의 발음에서는 관찰되지 않으니 웨스턴라의 개인 방언(idiolect) 특징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본인의 발음이 [ˈwɛst(ə)nəɹ]로 관찰되더라도 기본 형태는 [ˈwɛstənɹə]로 파악하여 ‘웨스턴라’로 표기하는 것이 좋겠다.
Westenra의 둘째 e는 약화된 모음 [ə]로 발음되거나 탈락하여 뒤따르는 n을 성절 자음 [n̩]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 음운 환경에 따라 실현 빈도가 다른데 [ˈwɛstənɹə]가 [ˈwɛstn̩ɹə]보다 확률이 높은 것으로 보고 [ˈwɛstənɹə]로 적었지만 음운 도치가 된 형태에서는 [ˈwɛstənəɹ]보다 [ˈwɛstn̩əɹ]가 더 확률이 높은 것으로 보고 괄호를 써서 [ˈwɛst(ə)nəɹ]로 적었다. 나아가 [n̩]이 성절 자음이 아닌 일반 [n]으로 변해서 세 음절 [ˈwɛstn̩əɹ] 대신 두 음절 [ˈwɛstnəɹ]로 축약될 수도 있다.
이는 위에서 본 listener [ˈlɪs(ə)nəɹ] ‘리스너’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며 happening [ˈhæp(ə)nɪŋ] ‘해프닝’, opening [ˈoʊ̯p(ə)nɪŋ] ‘오프닝’, Tottenham [ˈtɒt(ə)nəm] ‘토트넘’ 같은 기존 표기 용례에서도 어중 [ən] 뒤에 모음이 따르는 경우에는 [ə]가 탈락되는 것으로 처리하여 ‘으’로 적었다. 그래서 [ˈwɛst(ə)nəɹ]는 ‘웨스터너’ 대신 ‘웨스트너’로 표기했다.
대신 [ˈwɛstənɹə]처럼 [ən] 뒤에 자음이 따르는 경우는 표기 용례에서도 처리 방식이 통일되지 않아 한글 표기를 정하기가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일단 [ə]가 발음되는 것으로 처리하여 ‘웨스턴라’로 적었다. 기존 표기 용례 가운데에서 영어의 자음 앞 sten [stən]은 예외 없이 ‘스턴’으로 적고 있다.
Christenson [ˈkɹɪstənsən] ‘크리스턴슨’
consistency [kənˈsɪstənsi] ‘컨시스턴시’
Wolstenholme [ˈwʊlstənhoʊ̯m] ‘울스턴홈’
지금으로서는 ‘웨스턴라’가 현행 표기 방식에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러나 성절 자음을 쓴 발음도 가능하므로 민간에서 흔히 쓰는 ‘웨스튼라’도 아예 근거가 없는 표기는 아니다.
영어에서 [ən]과 [n̩]이 혼용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표기할지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앞으로 재정비가 필요한 부분인데 좀 더 현실적인 표기 규정을 마련하려면 규범에 벗어나서 언중이 일상적으로 쓰는 표기 방식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영어에서 단어에 따라 sten은 [stən] 외에 [stɪn]으로도 발음이 가능한 경우, 즉 [stᵻn]인 경우도 있다. 성씨 Austen [ˈɒˑstᵻn] ‘오스틴’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ɒˑ]는 영국식으로는 [ɒ], 미국식으로는 [ɔː]로 발음되는 CLOTH 모음의 약식 표기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나온 사전을 찾아보면 Austen의 발음은 보통 그냥 [ˈɔːstən]으로만 제시된다([ə] 또는 [ɪ]로 실현이 가능한 약화된 모음 [ᵻ]는 미국식 발음에서 [ə]가 선호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Austen도 미국 사전만 참고하면 ‘오스턴’으로 적기 쉽다.
기존 표기 용례에서는 영어 여자 이름 Kristen도 ‘크리스틴’으로 적었는데 실제 발음을 찾아보면 미국은 물론 영국에서 나온 사전에서도 [ˈkɹɪstən] ‘크리스턴’으로 제시한다. 아무래도 ‘크리스턴’이라는 표기가 너무 어색해서 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Austen처럼 [ˈkɹɪstᵻn]으로도 발음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해서 ‘크리스틴’으로 표기를 정한 것이다. 반면 위에서 본 것처럼 비슷한 이름인 Christenson [ˈkɹɪstənsən]은 ‘크리스턴슨’으로 표기를 정했다.
이런 예를 볼 때 [ə]는 무조건 ‘어’로 적는다는 원칙에 얽매이기보다는 차라리 철자를 고려하여 Austen ‘오스텐’, Kristen ‘크리스텐’과 같이 통일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Christenson은 ‘크리스텐슨’으로, consistency는 ‘컨시스텐시’로, Wolstenholme은 ‘울스텐홈’으로 적으며 Westenra는 ‘웨스텐라’로 적게 된다. 어말 a [ə]를 ‘어’ 대신 ‘아’로 적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이미 기존 표기 용례를 보면 Carpenter [ˈkɑːɹpə⟮ᵻ⟯ntəɹ] ‘카펜터’, Clifden [ˈklɪftən] ‘클리프덴’, Mortensen [ˈmɔːɹt(ə)nsən] ‘모텐슨’, perpendicular [ˌpɜːɹpənˈdɪkjə⟮ʊ⟯ləɹ] ‘퍼펜디큘러’, tungsten [ˈtʌŋstən] ‘텅스텐’처럼 en [ən]을 ‘언’ 대신 ‘엔’으로 적은 예가 수두룩하다. 대신 기존 표기 용례 Attenborough [ˈæt(ə)nbəɹə] ‘애튼버러’처럼 성절 자음 발음에 따라 적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우도 있으므로 적용 기준을 적당하게 정해야 하겠다.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Mortensen도 ‘모텐슨’보다는 ‘모튼슨’으로 적는 것이 나을 수 있겠다.
대신 agent [ˈeɪ̯ʤənt] ‘에이전트’, legend [ˈlɛʤə⟮ᵻ⟯nd] ‘레전드’, resident [ˈɹɛzᵻdə⟮ɛ⟯nt] ‘레지던트’처럼 en [ən]을 ‘언’으로 쓴 표기가 이미 익숙한 예도 많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특히 resident는 미국 영어에서 [ˈɹɛzᵻdɛnt] ‘레지덴트’라는 발음도 가능한데 표준 표기는 ‘레지던트’로 정해졌다.
어쨌든 Westenra는 현행 표기 방식으로는 ‘웨스턴라’가 어울리고 앞으로 표기 방식을 재정비한다면 ‘웨스텐라’도 고려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