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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흑인 주장이 이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크리켓 대표팀이 잉글랜드에서 열린 2025 ICC 월드 테스트 챔피언십(ICC World Test Championship, WTC) 결승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남아공은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국제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다가 1992년에 국제 무대에 복귀한 이후 실력에 비해 주요 대회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고는 했는데 코사(Xhosa)계 흑인 주장 템바 바부마(코사어: Temba Bavuma)는 백인과 흑인, 혼혈, 인도계 등 다양한 민족과 언어 배경으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새 역사를 쓰는 데 성공했다.
WTC는 2023년부터 2025년까지 2년 간 국제 크리켓 이사회(International Cricket Council, ICC) 회원국 사이에 한 경기가 최대 5일에 걸쳐 진행되는 국가 대항전인 테스트 크리켓(test cricket) 리그를 치른 후 그 가운데 상위 두 팀이 결승전을 치러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다.
양 팀이 흰색 유니폼을 입고 나오는 테스트 크리켓은 크리켓의 가장 전통적인 경기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경기를 치르는 데 며칠이 걸리니 크리켓 골수 팬이 많지 않으면 관중 동원이 어렵고 재정적인 부담이 많다. 21세기에 들어서 크리켓의 3대 강국, 이른바 빅 스리(Big Three)로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 잉글랜드가 압도적인 재정 수준을 바탕으로 나머지 나라와의 격차를 벌리면서 그 장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빅 스리는 아예 테스트 크리켓을 2부로 나누자고 주장하고 있어 빅 스리가 독식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빅 스리에 속하지 않는 남아공이 이번 WTC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남아프리카 연방(1961년 이후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백인 소수 정권 시절에 펼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스포츠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협회, 구단 등은 인종에 따라 철저히 분리되었고 백인 선수만이 국가 대표팀에 뽑힐 수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독립 이후 국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남아공의 1964년 하계 올림픽 참가가 무산되는 등 국제 스포츠계의 보이콧이 시작되었지만 크리켓에서는 한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잉글랜드, 뉴질랜드 등이 크리켓 강국이었던 남아공의 백인 대표팀과 계속해서 경기를 치렀다. 그러다가 남아공의 인종 차별 문제가 크게 터진 이른바 돌리베라 사건이 일어났다.
남아공 비백인 크리켓 대표팀 주장을 지냈던 인도계·포르투갈계 혼혈 선수 배질 돌리베라(Basil D’Oliveira 영어: [ˈbæz(ə)⟮ᵻ⟯l ˌdɒlᵻˈvɛə̯ɹə], 1931~2011, 포르투갈어 발음에 따른 성의 표기는 ‘돌리베이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국가 대표로 뽑히지 못하는 등 선수 생활에 큰 제약을 받게 되자 영국에 귀화하여 1966년에 잉글랜드 대표로 뽑혔다. 잉글랜드는 1968~1969년에 남아공과 원정 테스트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돌리베라의 출전 여부가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했고 결국 원정은 취소되었다. 그 후 1970년부터 1991년까지 남아공은 ICC의 제제로 국제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도 잉글랜드, 스리랑카, 서인도 제도,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선수들은 남아공 크리켓 협회의 금전적인 보상에 이끌려 ICC와 본국 협회의 보이콧 방침을 어기고 비공식 대표팀을 꾸려 남아공에 가서 남아공 대표팀과 경기를 치러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금지된 남아공 원정을 레블 투어(rebel tour, 반역자 순회)라고 부른다. 특히 당시 크리켓 최강국이었던 서인도 제도(크리켓에서는 자메이카, 트리니다드 토바고, 바베이도스, 가이아나 등 카리브해 지역 여러 나라·영토가 단일 국가 대표팀을 구성한다)의 흑인 선수들이 남아공 레블 투어에 참가한 사실은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남아공으로 소리없이 떠나려 했으나 발각되었고 서인도 제도 대표 자격을 영구 상실했다. 다른 나라의 레블 투어 참가 선수들도 출전 정지 등 각종 징계를 받았다.
1991년에 국제 무대에 복귀한 남아공 대표팀은 여전히 백인 선수 위주였지만 컬러드(Coloured, 남아공에서 혼혈인을 가리키는 용어) 출신인 오마 헨리(Omar Henry 영어: [ˈoʊ̯mɑːɹ ˈhɛnɹi], 1952년생)가 포함되어 최초의 비백인 대표 선수가 되었다. 1995년에는 코사(Xhosa)인 마카야 은티니(코사어: Makhaya Ntini)가 최초의 흑인 남아공 대표 크리켓 선수로 뽑혔다.
역시 코사인인 템바 바부마는 2021년에 남아공 대표팀의 최초 흑인 주장이 되었다. 패스트볼로 이름난 볼러(bowler, 투수)로서 스타 선수인 카히소 라바다(츠와나어: Kagiso Rabada)는 아버지가 벤다(Venda)인, 어머니가 츠와나(Tswana)인이다. 츠와나어 철자에서 g는 무성 구개수 마찰음 [χ]로 발음되므로 Kagiso는 ‘카히소’에 가깝다. 여담으로 역시 츠와나어가 쓰이는 이웃 보츠와나의 수도인 가보로네(Gaborone)도 츠와나어 발음은 ‘하보로네’에 가깝다.
그 외에도 룽기 응기디(줄루어: Lungi Ngidi)는 줄루(Zulu)계 흑인이고 토니 드조지(Tony de Zorzi 영어: [ˈtoʊ̯ni də-ˈzɔːɹzi])는 흑인과 백인 혼혈, 케샤브 마하라지(Keshav Maharaj)와 세누란 무투사미(Senuran Muthusamy)는 인도계이다. 마하라지는 조상이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 출신으로 힌디어 이름은 केशव महाराज Keśava Mahārāja ‘케샤브 마하라지’이고(어말 a는 힌디어 발음에서 묵음이 된다) 무투사미는 조상이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출신으로 타밀어 이름은 செனூரன் முத்துசாமி Ceṉūraṉ Muttucāmi ‘세누란 무투사미’이다.
백인 선수로는 영국계인 에이든 마크럼(Aiden Markram 영어: [ˈeɪ̯d(ə)n ˈmɑːɹkɹəm])과 데이비드 베딩엄(David Bedingham 영어: [ˈdeɪ̯vᵻd ˈbɛdɪŋəm]), 아프리칸스어로 보이는 성씨를 가진 카일 버레인(Kyle Verreyne 영어: [ˈkaɪ̯l vəˈɹeɪ̯n]) 등을 꼽을 수 있다. 성씨의 원래 아프리칸스어 발음은 [fəˈrəi̯nə] ‘페레이네~퍼레이너’에 가깝겠지만 영어식 발음으로 통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