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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19세 여자 테니스 선수 알렉산드라 이알라(Alexandra Eala)가 와일드카드로 출전한 마이애미 오픈 8강전에서 세계 2위인 폴란드의 이가 시비옹테크(Iga Świątek)를 꺾고 4강에 진출하며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2017년 프랑스 오픈 우승자인 라트비아의 옐레나 오스타펜코(Jeļena Ostapenko)와 올해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우승자인 미국의 매디슨 키스(Madison Keys)에 이어 메이저 대회 5관왕인 시비옹테크에게마저 승리를 거둔 것이다. 현재 단식 세계 140위로 필리핀 선수로서 역대 최고 랭킹을 기록한 그는 이미 다음 발표될 랭킹에서 세계 100위 이내 진입을 예약했다.

링크에서 관찰할 수 있는 Eala의 본인 영어 발음은 [iˈɑːlə]이기 때문에 ‘이알라’로 적었다.

Alexandra는 영어로 [ˌælᵻɡˈzæˑndɹə], 즉 영국식은 [ˌælɪɡˈzɑːndɹə], 미국식은 [ˌæləɡˈzændɹə]로 발음된다(여기서 [æˑ]는 영국식으로 [ɑː], 미국식으로 [æ]로 발음되는 이른바 BATH 모음을 나타내는 약식 기호로 썼다). 그러니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이론적으로는 ‘앨리그잰드라’, 좀 융통성을 발휘하면 ‘앨릭잰드라’로 적어야 하겠지만 Alexander [ˌælᵻɡˈzæˑndəɹ]를 ‘앨리그잰더/앨릭잰더’ 대신 ‘알렉산더’로 적는 관습 표기와 마찬가지로 Alexandra도 ‘알렉산드라’로 적는 것을 관습 표기로 인정한다.

그런데 본인의 영어 발음은 차라리 ‘알렉산드라’에 가깝게 관찰된다. 사실 어원인 고대 그리스어 Ἀλεξάνδρα(Alexándra)를 비롯하여 라틴어 Alexandra와 독일어·네덜란드어·스웨덴어·루마니아어 등에서 쓰이는 Alexandra도 ‘알렉산드라’로 표기되니 영어가 발음이 특이해서 ‘앨릭잰드라’ 정도인 것이고 필리핀인이 쓰는 발음이 이른바 표준 영어 발음보다는 좀 더 국제적인 발음에 가깝게 관찰되는 것이 흥미롭다.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답게 수많은 언어가 쓰이는 필리핀은 오늘날 영어와 타갈로그어(공식적으로는 ‘필리핀어’)가 공용어로 쓰이는데 영어는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특수성 때문에 필리핀 인명은 단순히 영어 발음대로 적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다.

필리핀 성씨는 오히려 에스파냐어에서 왔거나 에스파냐어식 철자로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에스파냐의 식민지 시절인 1849년에 나르시소 클라베리아 이 살두아(Narciso Clavería y Zaldúa, 1795~1844) 필리핀 총독은 인구 조사를 쉽게 만들기 위해 필리핀 주민은 모두 에스파냐어 성씨를 채택해야 한다는 법령을 선포했다. 그 시행을 돕기 위해 주로 에스파냐어 성씨를 수록한 《알파벳순 성씨 목록(Catálogo alfabético de apellidos)》이 배포되어 거기서 성씨를 고르도록 했다. 이미 성씨가 있던 현지 귀족의 후손 등은 여기서 제외되었고 《알파벳순 성씨 목록》에는 현지어 성씨도 일부 포함되었지만 이로 인해 오늘날에도 필리핀인은 혈통에 관계 없이 Baustista ‘바우티스타’, Cruz ‘크루스’, Santos ‘산토스’ 같은 에스파냐어 성씨를 쓰는 이들이 많다.

또 현지 언어에서 온 성씨도 에스파냐어식 철자로 정착되었다. 예를 들어 Bulalayao ‘불랄라야오’는 루손섬 서북부에서 쓰이는 일로카노(Ilocano)어로 ‘무지개’를 뜻하는 성씨인데 오늘날 일로카노어 철자로는 bulalayaw라고 쓰지만 성씨의 철자는 일로카노어의 현대 철자법이 확립되기 전에 굳어졌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계속된 필리핀 혁명으로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다시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98년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에스파냐가 1898년의 파리 조약으로 미국에 필리핀을 양도하기로 한 것이다. 필리핀 제1공화국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미국과 전쟁을 치렀으나 패하였고 1946년에 독립할 때까지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삼백 년이 넘게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호세 리살(José Rizal, 1861~1896)을 비롯한 필리핀 혁명 당시 지도자들은 에스파냐어를 썼고 필리핀 제1공화국도 에스파냐어를 공용어로 썼지만 미국 강점기인 1935년에 공용어로 추가된 영어에 밀려났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대에는 일제에 의한 점령도 거치면서 에스파냐어의 사용은 급격히 감소했다. 1973년에는 수도 마닐라를 비롯한 루손섬 남부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인 타갈로그어가 필리핀어라는 이름으로 국어(national language)이자 공용어로 추가되었고 1987년 헌법으로 에스파냐어는 마침내 공용어 지위를 상실했다. 오늘날 에스파냐어 화자 수는 필리핀 전체 인구의 0.5%에도 미치지 않는다.

이런 사연 때문에 필리핀에서 쓰는 에스파냐어 성씨는 원 모습에서 조금 변형된 경우도 많다. 특히 에녜(ñ)를 제외한 특수 문자는 대개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어 이름 García ‘가르시아’는 필리핀에서 보통 í를 i로 대체하여 Garcia ‘가르시아’로 쓴다. 성씨가 아닌 이름의 경우는 더 자유분방한 변형이 흔하다. 원래의 María Consuelo ‘마리아 콘수엘로’라는 에스파냐어 이름을 Maricon ‘마리콘’으로 줄이는 식이다. Ricardo ‘리카르도’는 첫 음절을 생략하고 지소 접미사 -ing을 붙인 Karding ‘카르딩’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게다가 타갈로그어, 세부어, 일로카노어 등 현지 언어에서 온 이름이나 영어식 이름도 흔하기 때문에 필리핀 인명의 한글 표기를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0세기 초까지는 보통 에스파냐어 이름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필리핀 독립 후 인명은 언어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에 현지 발음을 확인해야 한다.

에스파냐어식 이름 가운데 구식 철자를 쓰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첫 대통령을 지낸 마누엘 로하스(Manuel Roxas, 1892~1948)의 이름을 딴 도시 Roxas는 외래어 표기 용례에 ‘록사스’로 실려있지만 타갈로그어 발음 [ˈɾohas]에 따라 적으면 ‘로하스’가 맞다. Roxas는 현대 에스파냐어 철자로는 Rojas [ˈroxas] ‘로하스’로 적는 성씨의 구식 철자이다.

또 에스파냐어식 이름이라고 언제나 에스파냐어 이름으로 취급하여 표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 출신으로 주한 교황청 대사를 지냈던 Osvaldo Padilla는 2008년 11월 3일 제81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오스발도 파딜랴’로 한글 표기를 결정했다. 에스파냐어 성씨 Padilla /paˈdiʎa/는 에스파냐어권 대부분에서 ll /ʎ/와 y /ʝ/가 합쳐져 [paˈð̞iʝa]로 발음되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파디야’로 적지만 필리핀식 에스파냐어에서는 [ʎ]가 유지되고 타갈로그어 등 현지어 발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음인 [lj]로 대체되어 [paˈdilja]로 발음되기 때문에 ‘파딜랴’로 적게 한 것이다.

에스파냐어식 철자를 쓴 이름의 z도 영어의 영향으로 [z]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것도 확인해야 한다. 외교관 Domingo Siazon은 1998년 8월 26일의 제23차 외래어 심의회와 2001년 2월 28일의 제38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도밍고 시아존’으로 표기가 심의되었다. Siazon의 z가 [z]로 발음된다고 본 것이다. 실제 발음도 그렇게 관찰된다.

그런데 Siazon은 원래 중국 어파에 속하는 호키엔어(주류 민남어) 謝孫[Siā-sun] ‘샤순’에서 온 필리핀 화교 성씨 Siason의 이철자이므로 어원을 따진다면 [ˈʃason~siˈason] ‘샤손/시아손’으로 발음되어야 한다. 이것이 철자의 영향으로 [siˈazon] ‘시아존’ 비슷하게 발음되는 것이다.

그래도 영어 이름이 아닌 경우는 에스파냐어식이든 현지 언어식이든 대체로 모음 표기를 라틴어식으로 i ‘이’, e ‘에’, a ‘아’, o ‘오’, u ‘우’로 표기할 수 있다. 그런데 Eala는 철자에 따라 ‘에알라’로 적으면 본인 발음과 너무 달라진다. 이 성씨는 어디서 나왔을까? 기타 에스파냐어권에서는 찾을 수 없고 주로 필리핀 인명으로 검색되니 아마 필리핀 현지 언어에서 비롯되었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찾지 못했다. 일단 《알파벳순 성씨 목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어에서 유래한 성씨가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니 영어 발음인 [iˈɑːlə]를 기준으로 ‘이알라’로 적는 것이 약간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지만 철자만 보고 ‘에알라’로 적는 것보다는 본인 발음을 존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젊은 선수를 ‘알렉산드라 이알라’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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