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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권 문제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극작가 애슬 퓨가드(Athol Fugard)가 3월 8일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에서는 ‘아돌/아톨/아솔/애솔 후가드/푸가드’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하고 있지만 동영상에서 관찰되는 본인 영어 발음은 [ˈæθ(ə)l ˈfjuːɡɑːɹd] ‘애슬 퓨가드’이다.
퓨가드는 1932년에 당시 남아프리카 연방의 미델뷔르흐(Middelburg)에서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아프리카너, 즉 17세기부터 주로 네덜란드로부터 남아프리카에 이주한 정착민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자라나던 시기 남아프리카의 백인 정부는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과 인종 격리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칸스어로 ‘분리’를 뜻하는 말에서 나온 이른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탄생이었다.
이에 맞서 1958년에 퓨가드는 다인종 극단을 조직하여 극작가이자 연출가, 배우로 활동했다. 1961년에는 자신의 희곡 《피의 매듭(The Blood Knot)》을 요하네스버그에서 초연했다. 등장 인물은 같은 흑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 둘인데 그 가운데 모리스(Morris [ˈmɒˑɹᵻs])는 백인 행세를 할만큼 피부색이 희고 재커라이아(Zachariah [ˌzækəˈɹaɪ̯ə])는 피부색이 검다. 퓨가드 자신이 모리스 역을 맡았고 후에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게 되는 흑인 배우 제이크스 모카에(Zakes Mokae, 1934~2009)가 재커라이아 역을 맡았다.
《피의 매듭》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남아공(1961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 정부는 연극 출연진이나 관객에서 인종이 섞기는 것을 금지했다. 퓨가드가 백인 전용 극장에서 공연하기를 거부하고 이들에 대한 보이콧 운동을 지지하자 비밀 경찰의 감시는 심해졌다. 그 결과였는지 그는 작품이 국외에서 출판되고 상연되도록 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피의 매듭》이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에서 상연되면서 미국 관객에게 그가 소개되었다.
1973년에는 퓨가드가 주연 배우 존 카니(John Kani, 1942~)와 윈스턴 은초나(Winston Ntshona, 1941~2018)와 공동으로 쓴 희곡 《섬(The Island)》이 안을 볼 수 없도록 커튼을 드리운 케이프타운의 한 작은 극장에서 여러 인종이 섞인 관객 앞에서 초연되었다. 한 섬에 있는 감옥의 죄수 두 명이 옥중에서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Σοφοκλῆς/Sophoklês, BC497?~BC406?)의 비극 《안티고네》를 상연하는 줄거리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가 27년 간 수감되었던 악명 높은 로벤(Robben)섬 감옥에서 동료 죄수들과 함께 연극을 상연했던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물론 로벤 섬을 조금이라도 연상시키는 작품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 허용될 리가 없으니 초연 때는 검열을 피해 《호도셰 작업조(Die Hodoshe Span)》라는 아프리칸스어 제목을 붙였다(호도셰는 연극에 등장하지 않지만 계속 언급되는 간수의 별명으로 코사어로 ‘쉬파리’를 뜻한다).
《섬》과 《시즈웨 반지는 죽었다(Sizwe Banzi is Dead)》(이것도 퓨가드가 카니와 은초나와 공동 작업한 희곡이다)를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에서 상연하게 되었을 때 카니와 은초나는 출국을 허용받기 위해 퓨가드의 운전사와 정원사인 것처럼 행세해야 했다. 웨스트엔드에서 상연을 마친 뒤에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에디슨 극장(Edison Theatre)에 진출했다. 《섬》과 《시즈웨 반지는 죽었다》는 1975년 토니상에서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카니와 은초나는 남우 주연상을 이례적으로 공동 수상했다. 배우 둘은 후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활약했는데 카니는 2018년의 《블랙 팬서(Black Panther)》에서 트차카 왕 역을 맡았다.
여담으로 연극 배우로 활동을 계속하던 퓨가드 본인도 영화에 출연한 적이 몇 번 있다. 1969년에 초연되었던 본인 희곡 《부스만과 레나(Boesman and Lena)》를 남아공에서 영화화한 동명의 1973년작에서 원래의 연극에서와 같이 부스만 역을 맡았다. 《부스만과 레나》는 2000년에 미국에서도 영화화되어 대니 글러버(Danny Glover [ˈdæni ˈɡlʌvəɹ], 1946~)와 앤절라 배싯(Angela Bassett [ˈænʤə⟮ᵻ⟯lə ˈbæsᵻt], 1958~)이 주연을 맡게 된다.
또 퓨가드는 마하트마 간디의 일대기를 그린 1982년 영화 《간디(Gandhi)》에서 남아공의 군인·정치가 얀 스뮈츠(Jan Smuts, 1870~1950)의 역을 맡았고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이 자행한 대학살을 소재로 한 1984년 영화 《킬링 필드(The Killing Fields)》에도 등장하는 등 영미권 영화에도 배우로 출연했다. 한편 그가 집필한 유일한 소설인 《초치(Tsotsi)》는 1980년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2005년에 남아공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2006년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다.
백인 청소년과 흑인 종 두 명의 관계를 그린 《해럴드 주인님(Master Harold)》은 남아공에서 상연이 금지되어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예일 레퍼토리 극장(Yale Repertory Theatre)에서 1982년에 초연되었다.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인데 해럴드는 실제로 퓨가드 본인이 어려서 썼던 이름이다. 그의 본명은 Harold Athol Lannigan Fugard [ˈhæɹəld ˈæθ(ə)l ˈlænᵻɡən ˈfjuːɡɑːɹd] ‘해럴드 애슬 래니건 퓨가드’이다.
아일랜드계인 퓨가드의 아버지는 아프리칸스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퓨가드의 어머니와 주로 영어로 대화했는데 퓨가드 본인은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를 둘 다 구사하며 자라났다. 하지만 아프리칸스어로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없다고 해서 모든 작품은 영어로 썼다. 대신 아프리칸스어나 코사어를 비롯한 남아프리카의 여러 언어에서 나온 단어나 구절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해외에서 출판된 그의 작품집에서는 이들을 해설한 용어집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영어에서 아프리칸스어식 구문을 따르는 일도 흔하다. 《부스만과 레나》에는 아프리칸스어 노래까지 등장한다.
아프리칸스어는 중세 네덜란드어에서 갈라져 나온 언어로 백인 아프리카너 외에 이른바 컬러드(Coloured)라고 하는 흑인·말레이인·코이산인 등 다양한 혼혈 배경을 가진 집단이 주로 쓰며 소수의 흑인 주민들도 아프리칸스어를 모어로 쓴다. 《부스만과 레나》의 등장 인물도 컬러드 집단에 속한다. 하지만 1994년에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만이 남아공의 공용어였고(현재는 줄루어, 코사어 등 열두 개 언어가 남아공의 공용어 지위를 누리고 있다) 아프리칸스어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앞장선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압제자의 언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아프리카너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비판적이었던 퓨가드는 대외적으로 마치 아프리칸스어가 아니라 영어를 모어로 쓰는 백인으로 흔히 간주되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그는 아프리칸스어에 대한 정치적인 인식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독특한 언어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흔히 피력했다. 《부스만과 레나》 같은 몇몇 작품은 아예 아프리칸스어로 쓰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어권에서 드물게 남자 이름으로 쓰이는 Athol은 스코틀랜드 지명인 Atholl [ˈæθ(ə)l] ‘애슬’의 이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지명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전통적으로는 고대 아일랜드어 ath-Fhótla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현대 아일랜드어로는 ath-Fhódhla [ahˈoːl̪ˠə] ‘아홀라’). 스코틀랜드의 고지대에서 전통적으로 쓰인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고대 아일랜드어에서 유래했다. Fódhla [ˈfˠoːl̪ˠə] ‘폴라’는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아일랜드 수호 여신이고 ath-는 ‘다음’을 뜻하니 ‘새 아일랜드’를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ath- 뒤에서는 자음 변이가 일어나 f가 묵음이 되는데 이를 철자 fh로 나타낸다. 스코틀랜드 Atholl은 공작 가문 이름이 되었는데 여기서 남자 이름이 나왔을 수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Douglas [ˈdʌɡləs] ‘더글러스’, Gordon [ˈɡɔːɹd(ə)n] ‘고든’, Stewart [ˈstjuːəɹt] ‘스튜어트’ 등 원래 성씨로 쓰던 것이 남자 이름으로 변한 경우가 많다.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지명으로 Athol ‘애솔’이 나오는데 이 경우에는 실제 [ˈæθɒl] ‘애솔’로 발음되기 때문에 그렇게 적는 것이고 [ˈæθ(ə)l]로 발음되는 이름은 ‘애슬’ 또는 ‘애설’로 적어야 하겠다. 용례집에는 나오지 않지만 미국 아이다호주 지명 Athol도 [ˈæθ(ə)l] ‘애슬/애설’로 발음된다.
영어에서 [əl] 또는 성절 자음 [l̩]로 발음될 수 있는 /əl/는 언제 ‘얼’로 적고 언제 ‘을’로 적을지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기존 표기 용례만 봐도 recital [ɹᵻˈsaɪ̯t(ə)l]은 ‘리사이틀’, vital [ˈvaɪ̯t(ə)l]은 ‘바이털’로 적는 등 표기가 통일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도 보통은 기존 용례 가운데 앞에 붙는 자음과 철자가 비슷한 것을 찾아서 표기를 참고하는 것이 좋은데 공교롭게도 철자 -thol로 쓰는 /θəl/은 매우 드문 조합이라서 기존 표기 용례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미국 지명 Bethel [ˈbɛθ(ə)l] ‘베설’, 미국 인명 Goethals [ˈɡoʊ̯θ(ə)lz] ‘고설스’ 등의 기존 용례에서는 /θəl/을 ‘설’로 썼으니 Athol도 ‘애설’로 적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강세 모음 뒤의 /θəl/은 성절 모음을 쓴 [θl̩]로 발음하는 것이 보통이고 마찬가지로 철자 -ol을 쓰는 영국 지명 Bristol [ˈbɹɪst(ə)l] ‘브리스틀’ 같은 표기 용례를 고려하면 ‘애슬’이 약간 더 나을지 않을까 싶어서 이 글에서는 ‘애슬’로 통일했다. 물론 나중에 영어의 성절 자음 표기 방식을 체계적으로 재정비하게 된다면 표기를 바꿀 여지가 있다.
Fugard는 아일랜드에서 유래한 성으로 짐작되지만 매우 드문 성이라 정보를 찾기 어렵다. 아버지는 프랑스 위그노인 혈통도 있다고 하지만 프랑스어 성씨로는 검색되지 않고 아일랜드를 비롯한 영어권에서 주로 나타난다.